〈 119화 〉 108.어둠속에서 눈을 마주치다(3)
* * *
[깨어났느냐?]
“여긴...어디...”
어지럽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안보이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변을 비춰 보았다. 앞을 비춰보니, 에스컬레이터와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공간이 보였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인가.
[같은 층에 있는 움직이는 계단 이느니라. 에, 에, 에...]
에스컬레이터요?
[바로 그것이니라!]
그래서 제가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유라는요?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았지만, 유라는 보이지 않았다. 유라는 어디에 있는 걸까. 설마...
[그 아이가 죽지 않도록 손을 썼으니 걱정 하지 마려무나. 적어도 네가 살아있는 한 그 아이의 시간은 멈춰 있을 것이니라.]
무엇인지 몰라도, 여신님이 손을 쓴 모양이다. 2주 정도 같이 지내본 바에 의하면 그렇게 심성이 나쁜 여신님은 아니니까, 잘 치료해주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저는 왜 이곳에 있는 건가요?
[이 아래에 이 비극의 원인이 숨어 있노라.]
지하 2층?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지하 주차장이 두 층에 걸쳐서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화점이 통째로 무너졌는데 저 아래쪽이 멀쩡할까...? 내려갔다가 지하1층마저 무너지면 나는 매몰될 수밖에 없는 건가.
아마 여신님이 이곳에서 나를 깨운 건 내려가라는 의도였겠지만, 망설임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인걸. 딱히 용감하지도, 정의감에 넘쳐있지도 않다. 그냥 좀 오지랖이 넒을 뿐인, 평범한 듀라한이다.
“...유진아.”
“...왜?”
“저 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귀를 귀울여봐...”
세연이의 말에 나는 상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그저 한에 맺힌 울부짖음 같기도 한 소리는 아래층을 울리고 울려 내 앞까지 도달한 것처럼 들렸다.
[아해야. 조심하거라. 저건 인간이 아니다. 저 괴물 놈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도대체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내려가 봐야 하나?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나는 오른 발을 바닥에서 떼었다가 다시 발을 붙였다. 여기서 얌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게 맞지 않을까?
[내려가고 말고는 그대의 선택이니라. 나는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이해하느니라.]
여신님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듯이 나에게 속삭였다.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 내려가지 않아도 결국엔 나나 유라는 구조될 수 있었다. 나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니까, 그저 구석에서 벌벌 떨며 구조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누가 뭐라고 하겠어. 나는 영웅도 아니고, 누군가를 구할 의무가 있는 소방관도 아니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시민에 불과한 걸. 누구도 나를 욕할 자격은 없다. 고통 받는 영혼들을 성불시킨 걸로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해.
나도 피해자 중 하나에 불과한 걸.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른 원흉이 저 밑에 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가 뭐냐고 멱살을 붙잡고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내려갈 생각이 없다면, 이곳에서 물러나는 것을 추천하느니라.]
아뇨, 내려갈게요.
[...그러지 않아도 되느니라.]
여신님이 여기서 저를 깨웠다는 건, 결국 내려가길 원한단 뜻이잖아요. 맞죠?
[...그렇도다. 나는 그대가 내려가길 원하느니라. 하지만 그대의 의견을 존중할 따름이니]
결국 이 붕괴의 원인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거잖아요.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있는 만큼 결국 내가 구조되기 전에 괴물들이 먼저 올라올 확률도 높고. 사실상 나에겐 선택지가 없는 거죠? 결국 제가 살려면 저 밑의 괴물들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구조되기 전에 죽는 거 아니에요?
[...미안 하느니라. 이런 일이 생길 줄 예상하지 못했던 내 불찰이구나. 나를 원망해도 되느니라.]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죠. 대신에 최대한 도와주세요,
[알겠느니라. 우선, 저 침략자들에 대해 설명 해주겠느니라. 저들은 이 세계를 침략하기 위해 틈새를 넘어온 첨병이니라.]
첨병? 이세계? 영문 모를 단어들이 여신님의 입에서 쏟아졌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들이 쏟아지다니,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려는 걸까. 내가 곤혹스러워 하건 말건 여신님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저들의 목적은 아마 이 건물 지하에 틈새에 왕래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려는 목적일 것이니라. 첨병들이 통로를 만들게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통로...그게 뭔데요?
[그대의 지식을 조금이나마 빌리면, 게이트라는 것과 비슷하느니라.]
조금만 있으면 각성자고 헌터고 던전이고 다 튀어 나오겠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얼마나 좆같아 지려고 하는 거야? 진짜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틈새고 뭐고, 그냥 다 집어던져 버리고 싶다. 세상이 내가 잘 먹고 사는 걸 아니꼽게 보고 시련을 던져주는 느낌이었다. 그냥 편하게 좀 살게 해줘! 내가 전생에 나라를 말아 먹었나 진짜. 나라를 말아먹어도 이렇게 주옥같은 사건에 연이어 휘말리지는 않을 거다. 하나만 해 하나만!
시발.
[조심하거라. 저들은 살기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니라.]
그래서 저 첨병들이 무슨 괴물인데요? 알기 쉽게 설명해줄 수 없어요?
[이 땅의 언어로 이야기 하자면, 개인간이라 부르는 게 가장 비슷 하느니라.]
개인간이 도대체 뭔 능력이 있어서 백화점을 붕괴시키고 지하에 무슨 차원을 넘나드는 게이트를 만드는 건데? 개인간은 순수 육체파 아니었냐고! 물론 실제로 본적은 없으니까 단언할 수 없지만. 내가 개인간을 상대로 싸울 순 있는 거야?
[걱정 말거라. 그대는]
“....a@u$y@y!t$u! *@Tu$!@H(*#*(!”
무슨 언어...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가 내 귓구멍에 쑤셔 박혔다. 귀청 떨어지겠네. 아래층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모양이었다. 거친 목소리인 것을 보니, 남자인 것 같네.
[빨리 게이트를 설치해라! 본대가 올 수 있도록! 이라고 했느니라.]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렇느니라. 듣자하니 아직 게이트 설치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도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느니라...]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요. 근데 제가 그걸 어떻게 막아요? 저는 싸우는 법도 모르는 데요? 호환이랑 싸워서 이긴 것도 운이 좋았을 뿐이고..
[걱정 말거라. 저들은 제 힘을 낼 수 없느니라. 그들에게 이 세상은 바다 속이나 다름없느니라.]
그래도 제가 일반인인건 달라지지 않는데요? 전 검 같은 거 배워 본적도 없어요.
[그런 것 치고는 호환을 상대할 때 잘 하지 않았느냐?]
그건 나도 모르게...본능? 같은 게 몸을 움직였다고 해야 하나?
[육체는 기억하지 못해도, 영혼은 기억하고 있느니라. 자, 내려가거라. 시간이 없느니라.]
뭔가 찝찝한데. 일단 지금은 여신님의 말에 따라 내려가 보아야 할 것 같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안 내려가 볼 수도 없는 거라면, 그냥 어떻게든 해결하고 다시 올라오는 게 답이다.
“유진아? 괜찮아? 계속 가만히 서 있는데...”
“세연아,”
“왜 그래?”
“울어라, 지옥참마도.”
“자, 잠...구웨엑!”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지옥참마도를 주워 초록빛 점액질을 털어냈다. 계속 꺼내둘걸.
[여러 주술이 걸려 있는 검이도다. 그대가 검을 다루기 어렵다면, 그대가 가장 자신 있는 무기를 떠올리면 되느니라.]
그런 기능이 있었다고? 근데 왜 그 저승사자는 말도 안해준거야?
[아마 잊어버렸거나 깜빡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무슨 무기가 다루기 쉽지? 창? 방망이? 도끼? 총도 가능한가? 근데 나 사격 10발 이상을 맞춰본 기억이 없는데. 그래서 맨날 총은 장식이냐며 갈굼 당했다고. 포병이 총 쏠일이 어디있다고 시발...애초에 총알이 만들어 지기는 할지가 의문이다. 그럼 그나마 많이 만져본 연장 같은 쪽으로 생각해보자.
...아, 그게 있었지.
나는 지옥참마도를 꼭 쥐고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 떠오른 도구의 형태를 떠올렸다.
변해라...변해라...
손에 진동이 느껴진다. 눈을 떠보니 마치 슬라임처럼 지옥참마도가 긴 막대가 되었다가 다시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긴 막대와 끝이 휘어지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점점 형태를 갖춰간다.
안녕 고든?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야.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도구지 않느냐?]
몇 번 허공에 휘둘러보니 소리가 심상치 않다. 왠지 개인간이고 뭐고 다 조져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두갈래로 살짝 갈라진 끝부분이 위협적이다.
“이게 바로 최강의 무기에요. 여신님.”
“유진아, 그거 쇠지랫,,,”
“이건 그냥 쇠지렛대가 아니야.”
크로우바(crowbar)다!
마음속에 자신감이 흘러넘친다.
당신은 의지로 충만해졌다!
나는 휴대폰의 불빛에 의지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