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07.어둠 속에서 눈을 마주치다(2)
* * *
나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당연하게도 플래시 라이트 대용이었다. 그리고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통화권 이탈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만 반복될 뿐이었다.
시발, 서울 한복판에서 통화권 이탈이라니 말이 돼? 진짜 좆같네. 누가 EMP라도 터트렸나 진짜. 짜증이 치솟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상황에 처해야 돼?
나는 주변을 수색하며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 해 보기로 했다.
여긴 OO백화점이고, 나는 한솔이랑 유라랑 같이 백화점에 와서 옷을 사고 지하1층의 식품매장에서 식재료를 사려고 내려왔다. 그리고 한솔이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다시 옷을 교환받으러 올라갔고, 그리고...
도대체 왜 무너진 거야?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말 무너질 정도로 위태위태한 건물이었다면, 이미 백화점 측에서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무려 2021년이다. 안전 불감증이니 뭐니 말은 해도, 이런 초대형 건물이 붕괴할 낌새가 보였다면 진작 백화점 측에서 해결하려고 했겠지.
게다가, 세연이나 여신님이 불온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지 않았나. 어쩌면 누군가의 고의로 붕괴된 것일 수도 있단 소리다.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범죄 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큰데.
웬만한 범죄자가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로 능력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고. 이런 대형건물이 폭삭 주저앉으려면 그만큼 큰 충격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폭탄이나 지진 같은 큰 충격. 지진도 어지간한 걸로는 끄떡도 없을 테니 정말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야 했다. 저기 옆나라 일본에서나 일어날 법 한 대형지진정도는 되어야 이렇게 될 테니, 지진도 아니겠지.
일단 지진은 아니다. 지진이라기엔 아무런 진동도 울리지 않았으니까. 부실공사도 아닌 것 같고. 내가 아무리 트러블에 자주 휘말린대도 이건 아니었다. 차라리 무언가의 개입으로 붕괴되었다고 보는 게 낫다.
...내 멘탈적인 면에서도.
여신님, 여신님.
[...무어냐?]
뭔가 아는게 있으신가요?
[상황을 파악중이니라. 확실한 것은, 그대 생각대로 이게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니라.]
자연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건, 누가 고의로 이런 미친 짓을 했다고? 왜? 어째서? 도대체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한건데? 머릿속에 의문만 쌓여가니 미칠 지경이었다. 피 냄새는 평소에도 내 피냄새를 질리도록 맡은 탓에 어떻게든 견딘다고 해도, 이런 극한상황에서 정신적으로 버티기엔 너무 힘겨웠다.
그냥 주저앉아서 구조를 기다리고 싶어. 내가 굳이 생존자들을 찾아 다닐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뭐라도 하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유라를 데려왔어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데려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식품 매장 내부는 어느정도 공간의 여유가 있어서, 돌아다니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10층이 넘는 백화점이 붕괴됐는데, 지하 1층에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있다고?
본래라면 나나 유라도 잔해에 파묻히지 않은 게 이상할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건물 하나가 통째로 붕괴되었는데 지하1층이라고 남아날 리가 없었으니까.
...유라를 데려왔어야 했나?
[느낌이 좋지 않느니라. 지옥참마도를 꺼내거라.]
“세연아? 지옥참마도 좀...”
“구웨엑”
[볼때마다 기괴하도다.]
칼을 입에서 뱉어내는 게 좀 그렇긴 하죠. 나는 초록 점액질이 묻은 지옥참마도를 몇 번 휘둘러 털어내곤, 오른손에 쥐곤 조심스럽게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식품매장 보존식품 코너에 진입했다.
그나마 쉽게 먹을 수 있는 보존식품 코너가 살아있다는 거에 감사해야 하나. 얼마나 이 붕괴현장에서 버텨야 할지 모르니, 나는 통조림을 몇 개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주머니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카트나 비닐봉지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카트는 대부분 붕괴에 휘말려 망가지거나 묻힌 모양이었다. 애초에 바닥에 이렇게 잔해들이 많으니 제대로 굴릴 수도 없었겠지만.
“...살...”
“...!”
사람 목소리야!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거칠게 숨을 쉴때마다 피비린내와 먼지, 온갖 것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꽤 가까운 곳이었다. 저렇게 작은 목소리가 들리려면 거리가 꽤 가까워야 할 테니까.
“...아...”
“...살려줘...”
나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허공에 떠서 살려달라 외치는 남성의 영혼을 올려다보았다. 죽었다. 아마 잔해에 파묻혔겠지. 갑작스러운 재앙에 자신이 죽은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살...”
“...싶지 않아...”
영혼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잔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영혼들을 망연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생존자는...없는 건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나는 지옥참마도를 꽉 쥐었다.
“진짜, 시발, 좆같네...”
[...고생했느니라.]
잔해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묻혀있었는지, 눈에 영혼을 전부 성불시키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게 불쾌하다.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아 숨을 고르며, 다시 어둠속을 응시했다.
[다시 네가 돌보던 아이를 보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
“유진아, 돌아가자...일단 좀 쉬어.”
그래야지.
괴롭다.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계속 내 귓가를 맴둘았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비틀대며 일어나 통조림들을 품에 껴안고 유라가 있던 장소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
“...유라야?”
대답이 없었다.
안 돼. 제발. 나는 통조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유라가 있던 장소로 달렸다. 중간중간 잔해에 피부 긁혀 상처가 낫지만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유라야!”
“...언...니?”
다리 한쪽이 잔해에 짓눌린 채, 쓰러져 있는 유라가 내 눈에 보였다. 유라의 옷은 피로 푹 젖어 있었다.
데리고 갔어야 했어.
“언니...아파요...”
“기다려봐, 어떻게든...”
나는 팔에 힘을 주고 내 몸 만한 돌덩이를 치우려고 했지만, 내 힘으로 그게 될 리가 없었다. 이대로 유라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거야?
여신님! 무슨 방법 없어요?! 여신님이니까 무슨 방법이 있을 것 아니에요?!
[...잠시 몸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
빌려주기만 하면 살릴 수 있는 거죠?
[...장담할 수는 없느니라.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느니라.]
알았어요. 어떻게 하면 되는 데요?
[마음속으로 생각하거라. 나에게 몸을 넘기고 싶다고.]
알았어요.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여신님에게 몸을 넘겨주기를. 강하게 바랄수록, 내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다.
제...대...로...된...거...겠...지?
“...오랜만의 육체로구나.”
여신, 모리안은 손을 쥐었다 폈다하며 오랜만에 움직이는 육체를 잠시 점검했다. 이정도면 가능하겠도다. 여신은 유라를 깔아뭉갠 잔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쉽겠지만...밑에 깔린 아해는 물론 이 몸까지 위험하겠지.
모리안은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팔을 잔해 밑에 집어넣어 잔해를 조금씩 부셔 틈을 만들었다. 그녀가 가진 권능인 파괴를 활용한 방법이었다. 필요한 부분만 조금 부셔서 유라가 빠져나갈 만한 공간을 만든 그녀는 유라의 상반신을 잡고 조심스럽게 잔해 사이에서 끄집어냈다.
유라의 상태는 심각했다. 왼쪽 종아리가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하게 다쳐 있었다. 출혈도 심각해서, 이대로라면 죽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모리안은 자신을 쳐다보는 유라에게 자애롭게 웃어주며 안심시켰다.
“...언니...?”
“난 네 언니가 아니니라. 잠시 몸을 빌렸을 뿐. 네 생명이 경각에 달했으니 잠시 잠들어 잇으려무나.”
“...네...”
여신의 인도에 따라, 유라는 잠에 들었다. 일반적인 수면이 아닌, 여신의 힘으로 잠든 것이었다. 모리안은 유라의 볼을 쓸어 넘겼다가, 머리카락을 길게 늘려 유라의 몸을 돌돌 말아 고치를 만들었다. 그리곤 손날로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고치와 머리를 분리시켰다.
여신이 일을 마치고 머리를 한번 흔들자, 머리카락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운이 좋았도다.”
인간의 육체를 베이스로 한 것 치고는, 꽤 많은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어림잡아 3할. 무리하면 4할 정도. 이 정도면 지상에서 그녀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이 세계의 생명체라면. 모리안은 유라가 들어간 고치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고,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여신의 눈에는, 그들이 보였다.
“밖으로 나와 보니 확실히 알겠느니라...틈새 너머에서 첨병이 왔도다.”
이 아이가 다치면 안 되겠지. 모리안은 일부러 그 자리에서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아마 중간에 몸을 넘겨야 하겠지만, 그래도 깨어나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어느 정도는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이 몸이 수 천년 전에 예언했듯이, 전쟁이 일어나리라...”
그리고, 어느 한 쪽은 종말을 맞이하리라.
이것은 전쟁이기도, 생존 경쟁이기도 하느니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