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06.어둠속에서 눈을 마주치다(1)
* * *
“유라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어, 언니. 위험해요...”
내 소매를 붙잡은 손을 통해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유라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고 무릎위에 얹어놓았다. 혼자 남을 유라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유라를 데려가는게 더 안전할 지도 모르지만, 이 공간 가득 퍼진 피비린내가 그리 긍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했다. 아마 대부분은 시체가 되어버린 사람일 것이다. 나야 어떻게든 넘긴다고 쳐도, 유라는 충격을 받을 테니까.
이럴 땐 에포나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긴 백화점이라 데려오지 못한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나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스마트폰 플래시에 의존하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기는 지하 1층. 얼마나 심하게 무너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남아있을까? 그리고 바깥으로 이어지는 출구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나 혼자 엮인 일이라면 몸을 좀 험하게 굴려서라도 해결하면 되는데, 유라랑 한솔이가 엮여 버렸으니 나 혼자 고생한다고 해결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나도 유라도 다치지는 않았지만, 잠깐 윗 층에 들른다던 한솔이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죽진...않았겠지? 끔찍한 피비린내로 가득한, 식품매장이었던 곳을 둘러본 나는, 탐색을 위해 걷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이 있다면 찾아봐야지. 나와 유라는 운 좋게도 이 붕괴 속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니까.
나는 어둠 속을 헤매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언니! 백화점가요!”
“왜?”
비빔냉면을 절찬리에 흡입하고 있던 나에게 돌연 유라가 꺼낸 말이었다. 한솔이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이거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계획된 거야?
“유진씨 옷가지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옷은 계속 갈아입으시는 거 같은데 복장이 매번 비슷하기도 하시고...옷이 몇 벌 없으신데 사야하지 않을까요?”
내가 옷가지가 적긴 하지. 외출용 복장을 제외한다면 집에서 입을 복장은 일주일동안 돌려 입을 정도의 분량밖에 없고, 그나마도 여름옷들이 대부분이라 이제 슬슬 가을 옷을 장만해야 할 때가 되기는 했다. 가을 여성복이라니. 뭔가 배덕감이 느껴지는데.
“마침 오늘 휴일이니까 밥 먹고 바로 갈까?”
“주인님! 나는? 나도 백화점 가고 싶어!”
“백화점은 놀이터가 아니야. 거긴 동물 데리고 못 가니까, 오늘은 집지키고 있어. 대신에 오늘 당근 하나 더 줄게.”
“부...알았어.”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오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갔다 온 다음에 챙겨주자.
“그럼 난 준비 좀 하고 올게.”
오늘 날씨가 좀 선선한 편이니까 민소매 티에 가디건이라도 걸칠까. 머리는 대충 묶으면 될 것 같고. 나는 오랜만에 외출복을 입으며 거울 앞에서 옷차림을 체크했다. 거꾸로 입었다거나 흘러내린다거나 하면 대참사라고.
안 그래도 얼굴 때문에 신경 쓰이는데 옷차림까지 후줄근하면 좀 그렇기도 하고. 아무리 전직 남자라지만 직장 생활을 해왔던 만큼 어느 정도 복장에 대한 기준 정도는 있었다.
노출은 팔다리 정도로만, 어쨌든 단정하게. 이럴 땐 가슴이 한솔이처럼 F컵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니까. 나도 작다고 하기 뭐한 크기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그럭저럭 있을법한 흔한 거유 정도의 크기니까...
“언니! 빨리 가요!”
“알았어!”
한솔이와 유라의 복장이 어째 외출복 같다 싶더라니, 작정하고 준비를 미리 해온 것 같았다. 이거, 설마 옷입히기 인형 플래그?
아, 갑자기 배에서 복통이...는 통할 리가 없지. 내 몸이 쓸데없이 튼튼한걸 한솔이랑 유라가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얌전하게 당해주자. 나도 슬슬 옷 좀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렇게 나는 정말 오랜만에 백화점에 오게 된 것이다. 그것도 여자들이랑! 와! 남자였으면 양손의 꽃인데! 여자라서! 양손에 백합...아니 그냥 여사친들끼리 놀러온 느낌이잖아! 이제 나는 뭘 당하는 거지?
메차쿠차 옷 입히기 인형노릇이나 하게 되는 건가? 내 머리에서 가열차게 망상회로가 돌아가고 있을 무렵, 유라가 내 손을 잡고 캐주얼한 옷가지들이 늘어서 있는 코너로 끌고 갔다. 저어, 직원언니? 그렇게 훈훈한 눈빛으로 보면 제가 쑥스럽거든요? 한솔아? 너도 마치 화기애애 한 동생들 보고 미소 짓는 큰언니처럼 웃지 말아줄래?
큰언니는 따지고 보면 나거든?
[옷 갈아있는 것뿐인데 그리 호들갑 떨 필요가 있느냐?]
여신님, 제가 원래 남자여서 이런 건 좀 부끄럽거든요?
[이 몸이 직접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건만, 어찌 부끄러워하는 것이냐? 한 치의 결점조차 없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거늘. 그대는 그 어떤 옷을 입더라도 그대는 소화할 수 있느니라....]
...부연설명 참 감사합니다 여신님.
“언니! 이 옷 어때?”
“어...괜찮네!”
근데 배 노출이 좀 그렇지 않니?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으로서 배를 까는 패션은 좋지 않다고 배웠단다. 아무튼 그래. 내가 결코 남에게 배를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한번 입어봐 언니! 점원언니! 혹시 입어 봐도 될까요?”
“물론 입어보셔도 됩니다 손님.”
거기선 그냥 거절해주면 안될까?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나는 유라의 손길에 떠밀려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으, 노출도 심한 옷은 아직 좀 거부감이 드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착실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입어보니 예상대로 배 부분과 어깨가 살짝 노출되는 부분이 많이 휑했다. 이런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는 건데? 근데 백화점에 왜 이런 옷이 있는 거야? 백화점은 뭔가 좀 단정한 옷을 파는 이미지 이었건만. 나는 한숨을 쉬며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와! 정말 어울리세요!”
“역시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 저기 있는 옷들 중에서 언니한테 어울리는 옷을 찾아보면서 고민 또 고민 한 끝에 찾아낸 옷이야! 아직 몇 벌 더 있으니까 이것도...”
으아아 스톱! 나를 수치사 시킬 생각이더냐! 유라야 너 내 신체 사이즈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수치사 멈춰!
[불경하다! 그건 내 아이덴티티니라!]
그런 건 모르겠고 옷 입히기 인형은 싫다! 차라리 코스프...아 이것도 에반데! 이런 젠장! 내가 옷 입히기 인형이라니! 인형이라니!
나는 또 다시 다른 옷가지들을 품에 안은 채 탈의실로 들어갔다.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유라가 또 한 번 투 머치 토킹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유라의 끝도 없는 수다와 점원의 적절한 대응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걸 보니 점원 눈나도 한 프로페셔널 하는 것 같았다.
[뭐하느냐? 어서 갈아입지 않고?]
후...나는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엔 나름 평범한 축에 속하는 티셔츠였다. 근데 좀 짦네. 유라야 너 혹시 내 배꼽에 집착하니? 아니 뭐 노출할 곳이 배나 어깨 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좀...평범한 옷은 안 돼?
그래도 하의는 평범한 청바지라서 다행이다. 좀 몸에 딱 달라붙긴 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옷이 백화점에 있는 건데! 좀 고오급스러운 이미지의 옷들만 있는 거 아니였냐고! 노출은 에바야!
[부끄러움이 많도다. 이왕 아름다운 몸을 가졋으니 즐기면 될 것이 아니더냐?]
“언니~?”
“후우...나갈게!”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당연하게도, 이번에도 호평일색이었다. 이제는 점원도 옷을 가져오는 걸 보니 이 옷 갈아입기 지옥은 이제 시작인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갈래!
“힘들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요?”
한솔아. 그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을 보니까 왠지 화가 치솟는구나. 1시간 동안 옷이 갈아입혀진 내 심정을 아니? 아 너넨 타격이 없겠구나. 이런 젠장. 피를 토할 뻔 한 걸 몇 번이나 참았는지. 피는 화장실에서 재빠르게 처리했다.
“이제 옷은 살만큼 산 것 같고, 지하 식품 코너에 들렀다가 돌아가요.”
“그래...”
나는 한솔이와 유라의 손길에 끌려 지하 1층 식품 코너로 내려왔다. 시식 각인가? 시식 각이야? 원래 이런 데서는 한 바퀴 돌면서 시식 하는 게 나름의 재미인데. 사기전에 맛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위층의 옷가게가 유라와 한솔이의 무대였다면, 식품 코너는 내 무대였다. 우리 층의 요리 담당은 나고, 애내들은 요리 1도 못한다고! 그나마 유라가 나한테 요리를 배우곤 있지만, 야채 신선도 확인하는 법 같은 건 아직 잘 모르니까...이 참에 가르쳐 줘야지.
“아, 깜빡했다. 유진씨, 저는 잠시 올라갔다 올게요. 옷 사이즈 때문에 교환받을게 있어서...”
“아 그래. 다녀와.”
나는 쇼핑백들을 건네받고 유라와 함께 카트를 끌고 여기저기 쏘다니기 시작했다. 떡갈비 같은 것 좀 살까. 최근에 TV프로에서 정말 맛깔나게 만들던데. 제육볶음도 땡기니까 뒷다리살 좀 사고...
“유진아.”
“...왜?”
이런 곳에서 말 걸면 곤란한데. 세연이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뭔가 좀 불길해.”
[확실히, 무언가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느니라.]
“...뭐가?”
그때였다.
“꺄악!”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엄청난 진동에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유라를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균열,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유라를 아예 안아들고 아직 균열이 일어나지 않은 쪽으로 뛰어다니며 피하려 했지만, 한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는데 내가 피할 수 있을 리가.
내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돌덩이가 내 머리위로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나는 전력으로 굴러 피해 냈지만, 붕괴된 건물 안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완전히 붕괴되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유라와 함께 매몰된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