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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109화 (109/352)

〈 109화 〉 99.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4)

* * *

“익숙한 천장이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여기로 온 건가. 익숙한 병실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온 몸이 나른했다.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 옆구리에 무언가 닿는 감촉이 있어 쳐다보니 에포나가 내 옆구리에 딱 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

간병은 아니고, 그냥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다 잠든 건가? 주변에 누가 있었으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세연이는 어디 갔지?

[그 아이라면 잠시 상황을 살피러 나갔느니라.]

깜짝이야. 그러고 보니 이 정체불명의 목소리도 있었지? 환청 같은 건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난 꼼짝없이 고스트 퇴마왕이라도 찍는 줄 알았지. 아니 이미 찍은 건가?

그래서 당신은 누구야?

[원래 네 육체에 강신할 예정이었던 여신, 모리안이니라...]

모리안? 그러고 보니 마리아가 모리안이란 이름을 꺼냈었지. 켈트신화의 삼여신 중 하나...삼여신을 통틀어 모리안이라 부르기도 하고.

아니, 그전에 잠깐, 빙의라고? 그러니까 지금 나 내 몸을 뺏으려 했던 상대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뜻?

[원래 목적대로 사용하고 나서 돌려 줄 생각이었느니라...]

돌려준다는 말 하는 놈 치고 정말 돌려주는 놈 못 본거 같은데. 그래도 이번엔 도움 받은 게 있으니 고맙다고 이야기는 해야겠지?

[...고마워할 필요는 없느니라. 그저 필요에 의해서 널 도왔을 뿐이니.]

쑥스러워 하는 듯 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목소리가 똑같아서 그런지 느낌이 이상하네. 마치 복화술이라도 쓰는 것 같잖아. 정말 묘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온갖 일을 겪어봐서 그러려니 하는 거지. 처음부터 목소리가 들렸다면 진지하게 정신병원에 가는 것을 고려해봤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났다고 해야 하나.

[처음부터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느니라. 그동안 말을 걸지 않았던 건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 이느니라.]

지금?

[그대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았더냐? 그대가 죽으면 모든 게 망가져 버리니라.]

내가 무슨 용사도 아니고, 내 목숨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듀라한이래봐야 요즘 시대에 뭐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무슨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 그런 느낌의 전개이기도 했고.

[아주 틀리다고는 못하느니라. 내가 그대를 선택했노니, 그리하여 그대는 이 세상을 구할 용사가 되었도다]

네? 제가요? 머리를 탈부착 시키는 용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보통 괴력이라거나 염동력이나 불을 다룬다거나 좀 더 주인공 같은 능력도 있는데 왜 난 듀라한인데? 듀라한은 따지고 보면 히어로라기 보단 빌런에 가깝잖아!

[내가 용사로 그대를 선택했으니 그대는 나의 자랑스러운 용사니라. 자부심을 가져도 좋느니라.]

음...발할라! 라도 외치면 되나?

[그건 옆 동네 야만인들 이니라.]

솔직히 발할라! 외치는 거 멋있어 보였는데.

켈트 쪽은 잘 몰라서...솔직히 켈트 신화는 워낙 인지도가 없어서 아는 사람이 드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서왕 전설정도 빼면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신화 에피소드가 없잖아. 그 아서왕은 21세기 들어서 TS당하고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기사왕님이 되셧지만...

[어째서 그 시커먼 남정네를 고작 여자로 만들었다고 인기를 얻은 것이냐! 이 몸은 코빼기도 나오지 않거늘! 이 몸이 훨씬 아름답지 않더냐!]

침울해 하지 마시죠 여신님. 여신님이 아름다우신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제가 알던 여신님 이미지랑은 너무 다른데요...원래 통수의 여신 아니셧나요?

[누굴 배신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더냐! 나는 전쟁과 복수의 여신, 모리안이니라! 배신을 한 적은 없느니라!]

으아아! 머리가 울린다! 두개골이 울려! 코스...누군가는 코슴이라고 부르겠지이가 아니라! 내 머리가 무슨 진동모드 킨 휴대폰인줄 알아? 진동시키지 마!

[불경한 말을 한 죄인에게 주는 벌이니라!]

알겠으니까 좀! 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분이 지난 후에야 진동모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좀만 더 있으면 내 머리가 스마트폰이 되겠구만.

[이정도로 봐주겠노라. 다음부터는 그런 불경한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넵.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갑자기 질문 타임? 물어보고 싶은 게 많기는 한데...그 이후에 어떻게 됐나요?

[그 요괴는 죽었느니라. 그리고 기밀관리본부 녀석들이 너를 이곳까지 데려왔느니라.]

역시 죽은 건가. 당연한 일이긴 했다. 칼이 뇌를 뚫고 두개골 위로 튀어 나왔는데 살 수 있을 리가. 검은 세연이가 알아서 회수 했을 테고. 동물원 난동은 어떻게든 끝을 맺은 모양이다. 기밀관리본부가 도착했다면 그쪽에서 전부 수습했을 테니까.

호환...선을 넘었지만, 그의 울부짖음은 누구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혼자 남았다 생각했는데, 아직 동족들이 살아있었고, 기뻐서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된 신세라니. 이성을 잃어버릴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아직 시작에 불과하느니라.]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난 다는 뜻인가요, 여신님?

[그렇느니라.]

에반데. 나는 그냥 평범하게 건물주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세상이 아주 개판이 되려는 모양이다. 진짜 싫은데. 그냥 평범하게 일상물 찍으면 안 돼?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니라.]

흐름이 뭔데! 그게 뭔데! 나도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좀 풀어서 이야기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대가 할 일이 아주 많다는 소리로다.]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요즘 트렌드는 뭐든지 날로 먹는 먼치킨물 아닌가요? 우리 이렇게 쓸데없이 땀내 나는 배틀물을 찍을 필요가 있어요? 내가 전투광도 아닌데? 나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라고요!

[원래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법이느니라. 그래도 걱정말거라. 이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갈채하라!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런 종류인가요.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

[또 불경한 소리를 하는구나.]

진동 멈춰!

[허나 거절하겠도다. 이 모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멈춰를 외치는 자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느니라.]

으아아아! 뇌가 떨린드아아아아아!

[나를 사이비 여신 취급하다니, 그대의 행동이 무례하여 준 벌이니라.]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 닷씨는, 닷씨는 안하겠소!

[이대로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만 두겠노라.]

어우 머리야. 진동의 여파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시팔. 내 인생에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뇌내 친구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인생이 아주 판타지를 찍다 못해 호러물의 영역으로 슬금슬금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요새 다시 부활각을 재는 X드스페이스급 막장 인생은 아니니까 위안을 가져야...하는 건가?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끔찍한 것처럼 들리느니라. 걱정 말거라. 이 내가 있는데 그대를 비탄에 빠지게 하지는 않으리라. 쿠훌린처럼 말이니라.]

예시가 너무 암울한데요. 개 맨날 죽잖아.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사람이 맨날 죽을 수 있더냐?]

아! X이트 모르는시는 구나! 계속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알아서 좋을 거 없어요!

[흠...거슬리지만,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겠도다. 아니, 나중에 해야겠도다.]

네?

“유진양, 깨어났나.”

어머, 이 스윗한 목소리는...

머리를 붙잡고 문 쪽으로 돌리니, 차트를 들고 있는 곰 닥터가 보였다. 여전히 거대하시군. 그래도 전처럼 그렇게 무섭지는....않다. 호환이 솔직히 너무 크고 무서웠어.

“깨어나서 다행일세. 몸은 어떤가?”

“음...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아픈 곳도 없고.”

“경이로운 회복력일세. 기상 및 완치까지 3일...”

그러고 보니까, 팔이 멀쩡하네? 깁스도 안 돼 있고. 이런데서 까지 탈인간이 될 필요는 없는데. 이건 좀 티나게 이상하잖아. 그래도 좋긴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해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방송을 빡세게 달려도 된다는 소리잖아?

역시 하루에 방송 10시간씩 땡기고도 멀쩡한 이유가 있었어...단세포 생물마냥 회복하는데 체력 고갈이 일어날 리가 없지!

“유라랑 김한솔양이 많이 걱정했네. 유라가 곁을 안 떠나려고 하기에, 말리느라 진땀 좀 뺏다네.”

유라한테는 본의 아니게 마음고생을 시켜버렸네.

곰 닥터는 내 앞의 의자에 앉아 진지한 눈빛으로 내 몸을 훎었다. 흔히 말하는 노골적인 시선 같은 게 아니라, 철저하게 직업정신에 입각한 시선이라는게 느껴졌다. 여자가 되니까 남의 시선에 좀 민감해져서 구분이 잘 되더라.

“몸은 어떤가? 겉으로 보이는 부상은 전부 사라진 것을 보니 멀쩡해 보이기는 하다만...”

“멀쩡하던데요? 손도 멀쩡하고...”

생각해보니까 생채기 하나 안 났네?

[이 몸이 힘 좀 썼노라.]

여신님의 축복 뭐 이런 겁니까.

[내 충실한 용사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느니라.]

전 밀레시안이 아닌데요?

[밀레시안은 무엇이더냐?]

어...음...모리안님 나오는 게임에서 용사들을 그렇게 부르던데요?

[금시초문이도다...]

“앞으로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번 주 내에는 퇴원할 수 있을 걸세.”

그건 다행이네. 너무 오래 방송 안하면 방손실 온다고...유진이는 관심이 필요해요! 존나 많은 관심! 그리고 존나 많은 도네! 도네 최고!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동안 회사원 한 달 월급 만큼의 돈이 허공으로 증발했을지도 몰라!

[윽...이게 내가 고른 용사라니, 어쩌면 사람을 잘못 본 걸지도 모르겠도다...]

내가 쪽팔려? 쪽팔리냐고!

[자괴감이 들것 같으니. 멈추거라...이 이상은 피곤하니 나는 좀 더 잠을 청하겠느니라...]

‘이러려고 여신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상태에 빠진 여신님은 더 이상 말 할 기력도 없는지 조용해졌다. 뭔가 머릿속이 상쾌하네.

“조금 뒤에 라쿤 박사가 올 걸세. 마음 단단히...먹게.”

곰 닥터가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로 내게 불길한 말을 던졌다.

에반데. 환자한테 설교는 진짜 에반데.

“나를! 불렀는가!”

“깜짝이야!”

언제 왔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라쿤 박사는 그 작은 몸집으로 의자를 끌어와 그 위에 기어 올라와 앉고선, 평소처럼 뭔가 세상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사고란 걸! 좀! 치지! 않을! 수는! 없나!”

“아니 그게...”

제가 변명을 하려고 하면 할게 많은데요... 정말 많은데요...말해도 되나? 이거 설명하려면 저승부터 해서 여신님까지 전부 설명해야 되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곳을! 찾아! 간 겐가!”

“직감으로요?”

“제대로! 대답하게! 덕분에! 3일째 요원들이!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있네!”

“그, 저승사자한테 부탁받아서 간 건데요.”

“지금! 나를! 놀리는! 겐가!”

진짠데요.

“듀라한도 있고 수인도 있고 흡혈귀도 있는데 저승사자는 안 믿으세요?”

“...일리가! 있군!”

나도 따지고 보면 저승사자잖아. 그래도 바로 납득해줘서 다행이네.

“그래서! 왜! 자네에게! 부탁을! 한 건가!”

“저 밖에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까?”

“다음부턴! 처음부터! 이야기! 해주게! 그래야! 우리도!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넵.”

“아직 환자니! 여기서! 끝내겠네! 내가! 유라에게! 연락은! 해! 놓을 테니! 안심! 하게!”

“그럼 푹 쉬고 있게. 배고플 테니 식사는 금방 보내주겠네.”

라쿤박사와 곰 닥터가 나가자, 나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에포나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혼란하다 혼란해. 내 인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혼란스러웠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여신님이 불길한 예고까지 때려버렸으니, 앞으로도 인생이 가시밭길 인 것은 확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시발. 이젠 살다 살다 배틀물을 찍어야 한다니. 나도 뭐 검술 수련 같은 거 따로 해야되는 거야?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요즘 대세는 그냥 시작부터 먼치킨 되고 보는 먼치킨 메타 아니었냐고! 대세를 따르게 해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따라가지 말고!

“유진아? 일어났구나!”

등 뒤에서 살포시 안기는 감촉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붙지 마 덥...지는 않네. 오히려 귀신이라 서늘한 느낌이다.

“몸은 괜찮아?”

“어.”

“다행이다...”

세연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도 내 걱정을 많이 했나 보네. 여러모로 많이 걱정시키긴 했다.

“유진 언니!”

“유진씨!”

아니 너네까지 한번에 와? 이거 다 짜고 치는 거지? 그렇지?

...내 주변은 한동안 소란스러울 모양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안심할 수 있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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