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95.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지옥참마도에 찔리기 전까지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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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진짜 이걸 말해야 돼? 말아야 해? 괜히 구라치다 걸리면 내 몸뚱이가 듀라한 될 거 같아서 좀 무섭거든? 내 머리통보다 커다란 앞발에 맞으면 당장 내장파티가 되버릴 거라고! 나는 장기자랑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온갖 변명을 떠올린다. 저기 왜놈들이 했어요! 사실 멸종은 안했고 동물원에 있어요! 느그 종족 멸망했다며? 아 마지막은 그냥 인성질인데. 마지막 건 말하면 정말 저승사자랑 어색한 데이트를 하겠네.
“...동족들은 다 죽었나 보군.”
“...네.”
아마 그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긴 다시 깨어난 지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스스로 어느 정도 알아볼 순 있었겠지. 사실 아주 멸종된 건 아닌데. 동물원에는 확실히 살고 있으니까...한국 호랑이는 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죽었지만.
“내가 살던 시대도 우리 호족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네. 200년이 지난 지금은 동족들이 인간에게 패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네. 그저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것 아니겠나.”
그는 의외로 인간들에게 큰 악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인간에게 봉인 당했으니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감정을 속에서 삭혀두고 있는 거겠지.
“아, 네...”
분위기가 이젠 심해 밑바닥 까지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00여년 만에 깨어났는데 자기 동족들이 다 죽어있다면, 자기가 이 땅의 유일한 호랑이라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슬픔은 아니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단일개체 종족이긴 하지만, 나야 처음부터 듀라한도 아니었고, 나를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나 혼자 듀라한이라는 사실이 슬프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 주변이 너무 시끌시끌해서 외로움을 느낄 시간도 없다. 내 침대는 이미 에포나가 같이 누워 자고 있다고...킹사이즈로 침대 새로 살까.
아니, 그냥 이사를 가는게...그건 안되겠네. 유라도 돌봐야 하니까...아니 그냥 통째로 이사하면 되는 거 아냐? 1억 원 받으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던지 해서 이사하면 되잖아? 나중에 한번 자세하게 알아봐야겠다.
“허어...”
호환은 생각에 잠긴 듯 앞발로 입을 가린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잠깐 자리를 비켜줄까.
우리는 슬쩍 뒤로 빠져 멍하니 서있는 호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커다란 몸이 축 쳐져있는게 정말 처량해 보였다.
“주인님, 왜 저러는 거야?”
에포나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에포나의 순수한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에포나, 세상에 너 말고 다른 말이 없다면 어떡할래?”
“상관없어! 난 주인님만 있으면 돼!”
설명을 잘못했네. 이 녀석은 뭐든 나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녀석이었다. 이런 해바라기 같은 녀석. 싫진 않은데 분위기 정도는 읽어주렴.
“음.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자고 일어났는데 나나 유라가 없다면?”
“주인님 나 주거!”
...그래, 내가 너한테 정상적인 반응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누군지 몰라도 이 녀석 교육한 놈 면상에 스트레이트를 박아 줄 테다.
“유진아, 슬슬 진정되신 것 같아. 다시 가보자.”
“알았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호환에게로 다가갔다. 이젠 착잡한 마음을 어찌어찌 수습한 건지,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낯빛이었다.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네...미안하네.”
“아뇨, 괜찮아요. 저 같아도 그런 상황이면 그랬을 테니까...”
감히 그 심정을 짐작할 순 없지만, 지금도 애써 수습했을 뿐이지 속으로 통곡하고 있지 않을까. 일개 호랑이도 아닌 호랑이들의 우두머리로서 자기가 다스리던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아예 정신줄을 놓지 않았을까? 내 스스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 없는 인간이었으면 내 주위에 온갖 이매망량들이 몰려들지는 않았을 걸?
내가 하는 말이 꼬우면 gyeonggido로 오십시오 korean heroes. durahan 주먹 spicy 하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합세. 그 검둥이들이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줄 수 있는가?”
“세상이 지금 너무 혼란스러우니 부디 조용히 지내달라고 전해 달랬어요. 이게 굳이 저를 보내기까지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검둥이 놈들은 현세에 간섭하는 것을 법으로 엄하게 금하고 있어서 말일세.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전령을 보내곤 했지. 귀찮은 놈들이라네...”
역시 오래 살았다보니, 이런 쪽 지식이 해박한 것 같았다. 어, 그럼 내가 모르는 걸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이었다. 나는 저승과, 호환과, 그리고 수상쩍은 세력, 변이자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어쩌면 호환은, 이 사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게 있지 않을까?
“혹시,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보게. 내 아는 선에서 다 말해줌세.”
“혹시 저승사자들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으신가요?”
“아마 걱정 때문일 테지.”
“걱정이요?”
“그렇네.”
호환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턱을 앞발로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승 놈들은 죽은자를 인도해서 재판하고 환생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기도 하지만, 세상의 경계를 관리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네. 예전에는 현세에서도 경계를 관리하는 인간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기가 약해진 세상에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네. 내 동족들처럼 모두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무당 같은 거 말하는 건가? 무당 자체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긴 한데...난 무당 못 믿는다. 무당들은 태반이 사기꾼들이라고. 예전에 무당만나서 크게 데인 뒤로 나는 절대 무당은 못 믿어. 차라리 개독교를 믿고 말지!
“아마 그런 인간들은 거의 다 사라졌을 거에요. 시대가 바뀌면서 요괴나, 신이나 뭐 그런 존재들이 아예 사라져버려서요...최근에 다시 생기고 있긴 하지만...”
변이자들도 관계있는 건가? 과거에 호환처럼 괴력난신들이 존재하는 시대였다면, 인간이 아닌 수인이나 엘프 같은 존재가 없었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런 존재들이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나고 있는 걸까.
그것도 변이라는 방법으로. 왜 인간이 다른 종족으로 변하는 걸까? 이게 누군가의 의도라면, 대처할 수는 있는 건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나?
“아마 세상이 혼란스러워 졌다는 것은 내가 깨어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걸세. 본래라면 나를 잠들게 한 봉인은 이렇게 깨질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일세...”
뭔가 세상에 문제가 생겨서 봉인도 깨졌다고 해석하면 되는 걸까. 그래서 저승사자들이 나를 여기로 보낸 건가? 일단 봉인되었을 만큼 위험한 존재라서?
확실히, 위험해 보이긴 했다. 저건 고양이들이 장난삼아 툭툭 치듯 앞발로 사람 몇 번만 툭툭 쳐도 사경을 헤맬만한 사이즈잖아. 저런 크기의 호랑이가 풀려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웬만한 인간들보다 똑똑한 것 같기도 하고.
이걸 나보고 해결하라고 의뢰를 넣은 의도가 미심쩍었지만, 애초에 말로 설득이 가능한 존재라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근데 칼빵은 왜 말한 거야. 뭐 만약에 미쳐 날뛰거나 그러면 배때기에 칼빵 꽂으라고? 그전에 내 배때기에 송곳니가 꽂히겠다!
“이왕 깨어났으니, 세상을 한번 주유하고 싶었네만...검둥이들이 눈치 빠르게 막아서는군. 나도 내가 찾아야할 동족이 없다면 나갈 이유는 없다네...”
그가 입으로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지독한 슬픔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200년 만에 깨어나니 동족들이 전부 사라진 탓에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닐까.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그 에포나 마저도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가게. 나는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걸세...”
“네. 저는 그럼 가볼게요...건강히 지내시구요.”
나는 조용히 산기슭을 타고 내려갔다. 내 등 뒤로 구슬픈 울음소리가 산을 울려 퍼졌다. 우리는 듣지 못한 척 조용히 산을 빠져나왔다.
뭔가 찝찝해.
불완전연소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뭔가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기는커녕,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알려줄 만한 사실은 다 알려줬고, 호환도 납득하지 않았었나? 그래서 지금 호환과 만난지 2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고.
왜 기분이 찝찝하지? 내가 뭘 빼먹은 거지? 2시간 전의 대화를 돌이켜 보지만, 짐작가는 부분이 없다.
“세연아. 내가 뭔가 까먹었나?”
“어...아닐걸?”
역시 아닌가? 내가 뭔가를 까먹었으면 세연이가 진작에 이야기를 했겠지. 애는 꼼꼼한 성격이라 그런거 하나하나를 잊어먹지 않고 나한테 이야기 해 주니까.
나는 자동차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는 에포나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찝찝함의 원인을 찾기위한 사색에 잠겼다.
결국 집에 갈 때까지 나는 찝찝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긴급속보로 거대한 호랑이가 동물원을 습격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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