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94.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지옥참마도에 찔리기 전까지는(3)
* * *
“...아무도 없나?”
분명 분위기만 보면 뭔가 괴물 같은 게 살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동굴 안으로 메아리가 휘몰아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정말 여기가 아닌가? 내가 잘못 찾아온거야?
“에포나, 여기 맞아?”
“맞아 주인님!”
에포나가 잘 못 알아본 건 아닌 것 같고. 뭐 어디 마실이라도 나간걸까. 동굴에 무작정 들어가 볼까 했지만, 손전등으로 비춰본 동굴 안은 너무 어두워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두운 걸 무서워 하지는 않지만, 이런 동굴 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여기서 기다리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세연이도 나랑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시 동굴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안에 집주인이 있다면 인기척을 느끼고 우릴 부르던지 나오던지 할 거고, 밖에 잠시 외출을 한 거라면 돌아오는 길에 우리를 보고 마주치겠지.
우리는 동굴 입구 옆에 툭 튀어나온 바위 위에 앉아 가져온 샌드위치를 먹어치웠다. 마요네즈에, 계란에, 오이에, 닭가슴살과 양배추를 섞은 속은 적당히 맛있었다. 역시 샌드위치야. 적당히 남은 재료들로 버무려서 만들어도 맛있다니까.
그렇게 도시락을 다 먹어치우니 30분이 지나 있었다. 집주인은 언제 오는 거야?
“한번 동굴로 들어가 볼”
“이곳엔 무슨 일이더냐?”
경계와 호기심이 담긴 걸걸한 목소리가 산에 메아리 쳤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다...”
3미터? 커다란 호랑이가 두발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니 그림자에 내 몸이 완전히 묻힐 지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 이족보행 호랑이와 눈을 마주쳤다. 황갈색 눈동자는 고양이처럼 죽 찢어져 있어서, 손을 대면 베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른 눈 위에 난 흉터는 싸움의 흔적일까. 눈은 멀쩡해 보였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아, 저희는 저승사자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그 검둥이 놈들이 언제부터 현세의 일에 간섭했지? 세상이 말세로군!”
그 목소리 좀 줄여주시면 안됩니까. 지리산 전체에 울려 퍼지겠어요 아주. 이족보행 호랑이의 목소리는 사람이 악을 쓰고 샤우팅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바로 앞에 있는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 뒤에 있는 에포나도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내 등 뒤에 딱붙어 떨고 있었다.
“검둥이들의 전령이라면 돌아가게! 나는 검둥이 놈들과 상대할 시간이 없다네!”
이족보행 호랑이의 목소리는 단호해서,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일단 돌아가야...하나? 근데 여길 또 오긴 싫은데. 어쨌든 오늘 담판을 짓고 돌아가는 게 나에겐 편했다. 오늘 돌아가면 또 기회가 있을지도 알 수가 없고.
근데 이렇게 큰 호통소리면 저기 산 밑에 까지 들리는거 아니야?
“그러지 마시고 한번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저승사자가 뭐라고 말했더라? 대충 요즘 세상의 경계가 불안정해서, 원래 잠들어 있어야 할 것들이 깨어났고, 그렇게 깨어난 놈들 중에는 사고방식이 아주 위험한 것들이 섞여 있어서, 솎아내야 한다고 말했었다.
“갈! 돌아가거라! 아니면 호되게 경을 칠 터이니!”
시끄러! 호통치지마! 좀 평범하게 말해! 왜 말하는 동물들은 하나같이 샤우팅을 하는거야! 곰아저씨처럼 스윗하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냐! 네가 천마야? 나한텐 말이야, 1억 원이 걸려있다고! 이대로 돌아가면 1억 원은 물 건너간다고! 내가 다른 건 참아도 그건 못 참아!
“혹, 산군님은 깨어난 지 얼마나 되셧습니까!”
호랑이를 높여 부르면 산군이니, 이정도면 화내지는 않을만한 호칭이겠지? 옜날 사람은 호칭을 되게 중요시 여겼다고 들었단 말이야.
“말을 듣지 않는 아해로군. 어디서 인간이...”
나는 머리를 들어올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땐 충격요법이지! 햣하! 머리 분리 쇼다! 아무리 집채만한 호랑이도 내 머리가 분리된 것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당황하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쳐다보았다.
“...인간이 아니로군...요괴인가?”
“굳이 따지자면 저승사자 같은 건데요...서역에서 왔습니다.”
진실 2스푼에 구라 0.1 밀리그램을 섞어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서양에서 온 거 맞잖아. 듀라한이니까.
“흠...서역의 검둥이들이 본좌에게 무슨 일이더냐?”
“혹시 깨어난 지 얼마나 되셧어요?”
“내게 그것을 물어보는 저의는 내가 알 수 없으나...보름 남짓 된 것 같구나.”
보름이라,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셨네. 저승사자가 뭐라고 했더라? 인간 세상에 내려오지 못하게 설득을 하던지, 지옥참마도를 꽂아서 무력화 시키던지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시발 제가 저걸 어떻게 무력화 시켜요? 저승사자 일 제대로 안 해?
“혹시 인간 세상에 내려가 보셨나요?”
“내려가 보았지! 하지만 세상이 너무 달라져 있더구나! 아해야, 병인년(???)으로부터 얼마나 지났느냐?”
병인년? 병자년 임진년 같은 거지? 그렇게 말하면 난 모르겠는데...병인년이 도대체 몇 년 도야?
스마트폰을 꺼내 병인년을 검색해 보니, 가장 가까운 년도가 1986년. 당연히 이때는 아닐거고, 1926년, 1866년, 1806년...까마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네.
“그건 무엇이더냐?”
이족보행 호랑이는 내 스마트폰에 호기심이 생긴 듯 앞발가락으로 내 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 이게 최신문물이라는 거다 이거야.
“요즘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물이죠. 이거 하나면 세상의 온갖 소문을 다 들을 수 있다니까요?”
“신기한 물건이로다.”
아 이거 안줘. 내꺼라고. 설마 니껀 내꺼 내껀 내꺼 외치는 건 아니지? 나는 호랑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년도를 알아내기 위한 질문을 재빨리 하기로 했다.
“혹시 그때 조선의 왕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나요?”
“흠, 분명 이산이라는 아해가 왕노릇을 하고 있었지.”
이산이면 정조 맞지? 예전에 사극을 본적이 있어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음...200년 넘게 지났네요.”
“200년이라...산천이 변하는데 10년이거늘, 20번이 넘게 변해버렸도다...”
이족보행 호랑이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우수에 젖은 눈빛에, 나는 잠시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약간의 배려였다. 잠든 사이 200년이 지났으니 혼란스러웠겠지. 누구라도 감상에 젖을 수밖에 없는 기나긴 시간인 것이다. 인간으로선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그렇군...200년이라...”
한 10분정도 지났을까,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이족보행 호랑이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손님을 두고 나 혼자 사색을 하다니. 미안허이.”
오, 이젠 손님 취급 해주네. 다행히도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진 호랑이는 나와 좀 대화할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군. 나는 호환(虎?)이라네. 한때 한반도를 주름잡던 범들의 우두머리였다네. 지나가던 선비가 나를 이 동굴에 봉인했네...”
“그, 그렇군요.”
지나가던 선비는 무슨 수로 이런 호랑이를 봉인 한거야. 혹시 당신이 이 나라의 친절한 이웃이었습니까?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가?”
“그, 저승사자가 ‘세상의 경계가 혼탁해지고 있으니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인간 세상에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그 검둥이들은 여전히 건방지군.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히 본인이 직접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아 으르렁 대지 마세요. 무섭단 말이야. 내가 먹잇감이 된 것 같잖아. 이빨이 내 팔뚝 만하네. 저거에 물리면 뼈도 못 추리겠다. 내 연약한 몸뚱이는 저 커다란 입에 물리면 수수깡처럼 부러질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났으니, 호족들의 장으로서 동족들을 만나러 가는 게 내 할 일이거늘! 자네, 혹시 내 동족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어...일단 내가 아는 바로는, 한국 호랑이들은 이미 진작 멸종한 걸로 아는데요.
“어...그게...”
그래도 이 호랑이가 살아있는 걸 보면 다른 요괴호랑이들도 살아있는 게 아닐까? 근데 살아있다고 말해도 다른 산을 뒤지러 다닐 테니 사람들 눈에 띌 거고, 그럼 난리가 나지 않을까? 반대로 멸종했다고 말하면 그건 그것대로 빡칠거 같은데.
여태까지 이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지성체라는 게 언제나 이성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자기 동족들이 자기 빼고 다 죽었다고 하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지 않을까? 이런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난리를 친다면 엄청난 소란이 될 테니, 저승사자는 이걸 나보고 막으라는 거였을까.
다음에 만나면 지옥참마도로 그 녀석 팔다리를 잘라서 구더기군으로 만들어버리겠어! 시발! 선택지가 시발 쓰레기게임이잖아! 죽기VS 죽기는 쓰레기겜도 이정도 선택지는 안 넣어 놓겠다!
“오호라, 자네는 뭔가 알고 있는 게로군! 말해주게, 내 동족들은 어디에 있는가!”
호랑이가 화색을 띄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잔뜩 흥분한 모양새였다. 내 몸통만한 커다란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오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단어를 골라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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