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87.들었지?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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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 많다고!
3일 동안 모인 신청서를 모은 폴더를 클릭할때마다 렉이 걸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몇 명이 신청한 걸까. 200? 300? 대충 그 사이쯤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기껏해야 100명 안팎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게 다 지상파운드좌 때문이야! 저것들 분명 채용은 둘째 치고 내 얼굴 보고 싶어서 신청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쓸데없이 패기만 넘쳐 보이는 이력서가 무더기로 올 리가 없지!
“와...이 사람 이력서 경력 란에 편의점 알바 1년 써놨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적은거야. 이게 아르바이트 면접도 아니고! 이력서를 처음 써보는 건지, 아니면 반 장난으로 보낸 건지 포트폴리오 하나 없이 이력서만 쓰잘데기 없는 TMI만 적어서 보낸 사람이 수두룩했다. 이런 사람들만 덜어내도 인원수가 대충 반 토막 날 것 같은데.
그래도 군데군데 꽤 실력 있어 보이는 편집자가 있어 다행히도 소외 말하는 좆밥대전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내 입장에선 비극 그 자체라고. 실력도 뭣도 없는 편집자를 비싼 돈 주고 고용해야 한단 소리잖아.
“주인님! 뭐해?”
“일하고 있으니까 저기 가서 유라랑 놀고 있어.”
유라가 동물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최소한 돌봐줄 사람이라도 있잖아. 에포나 돌봐주느라 고생하니 나중에 고기라도 사먹여야겠다. 마침 이번 주말에 마트에서 삼겹살을 세일한다고 했으니까, 그때 장보러 가면 되겠군.
“주인님이랑 놀고 싶어!”
“내가 지금 엄~청 바쁘니까 일 끝나고 놀아줄게.”
에포나의 투정에 나는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게으름 피웠다간 대회 일정에 맞추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이러니까 개인 단위 대회를 여는 사람들이 대단한 거다. 그나마 오프라인 대회가 아니라 장소 대관 같은걸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지, 장소 대관 같은 것 까지 해야 했다면 지금쯤 좀비가 돼서 기어 다니지 않았을까.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걸러내는 작업은 완전히 쌩 노가다 그 자체인데다, 이걸 또 일일이 메일로 통보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이거 완전 좆소 시절 뺑뺑이랑 똑같잖아.
최부장 그 꼰대새끼가 쓸데없이 비효율적인 뺑뺑이 시키는 거 정말 좋아했는데 요즘은 밥은 먹고 다니나 모르겠다. 그 인간이 사고를 하도 쳐서 회사 망하는데 일조했으니 지금쯤 소문이 다 나서 회사를 다닐 수는 있을까.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젠 아주 자그마한 인연도 끊겨서 평생 볼일 없는 타인. 나가 뒈졌던지 어디서 잘 살고 있던지 볼 일도 없다. 후, 다른 동기들은 좀 보고 싶기는 하지만, 이 모양 이 꼴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복 작업을 하니까 잡생각이 많이 드네.
정말 이력서 보고, 포트폴리오 보고, 거를 사람은 최대한 걸러내는 작업을 벌서 다섯 시간째 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래도 걸러내는 작업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장난 식으로 보낸 이력서도 많고, 이력서 자체가 그냥 엉망진창인 사람도 있고, 포트폴리오 작품에 지역비하나 혐오발언이나 특정 사이트 밈을 쓰거나 하는 사람들은 바로 거르면 되니까.
첫 한 시간 만에 백 명 가까이 걸러졌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취준생 때 보낸 이력서가 이런 식으로 걸러졌단 소리니까. 수십 군데 보내고, 대부분은 이렇게 버려졌겠지. 경력 있는 신입 참 좋아한단 말이야.
애초에 경력이 있으면 신입이 아니잖아!
“후, 끝났다.”
“그럼 같이 산책가자!”
에포나가 내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으며 문질러댔다. 이 망아지 녀석, 사고는 많이 쳐도 그걸 애교로 무마하려는 타입이다. 자기가 작고 귀엽게 생겼다고 수작부리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봐.”
더워 죽겠다. 이 찌는 날씨에 털로 뒤덮인 사족보행 포유류 짐승이 나한테 꼭 붙어야겠니? 나 땀 흘리는 거 안보여? 나는 에포나를 밀어내고,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넣어둔 개목걸이를 꺼냈다.
나는 며칠 전에 주문한 개목걸이를 에포나의 목에 걸었다. 탈것으로 변하는 게 편하긴 한데, 이 녀석 달리기 시작하면 너무 흥분해서...그냥 개목걸이 걸고 강아지 산책하듯이 하는 게 나았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그냥 애완용 망아지라고 둘러대면 될 뿐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미니어쳐 홀스라는 몸길이가 채 1미터도 안 되는 정말 작은 소형 말도 있으니까. 이 망아지가 말만 안하면 된다. 애완용 망아지는 납득할 수 있어도 말하는 망아지는 아무도 납득 못한다고!
마음 같아선 입마개도 채우고 싶었지만, 그건 좀 너무한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저 촉촉한 눈망울을 보니까 입마개까지 하기에는 죄책감이...
안 드네?
나는 에포나가 일으킨 무수한 트러블을 떠올렸다.
나는 에포나가 낌새를 눈치 채고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 입마개를 씌웠다. 입마개 딱 대!
너한텐 입마개가 딱이야!
“와, 오늘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대회입니다!”
대회 이름이...뭐요?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ㅅㅂㅋㅋㅋㅋㅋ
네이밍 센스 무쳤냐고 ㅋㅋㅋㅋ
대회 이름 어떻게 짓던 내 마음이지. 내가 고르고 고른 시공...아니 편집자 후보가 64명. 245명인가 하는 신청자에 비하면 거의 4분의 1수준 이었다. 그만큼 걸러야할 사람이 많았다 이거야.
이번 대회도 역시 입소문을 탔는지, 평소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방송에 들어오고 있었다. 3000...4000...4200...아주 좋아. 돈이 굴러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네! 더 많은 시청자! 더 많은 후원!
“본 대회는 순전히 제 주관으로 열리고, 스폰서는 없어요. 우승하면 제 편집자로 취업하게 됩니다. 3070TI 때려박은 최신형 컴퓨터는 덤이 구요.”
무려 3070ti를 때려 박은 컴퓨터다. 어딜 가서 성능 딸린다는 소리는 못 듣지.
취업도 취업인데 컴퓨터도 ㄷㄷ
돈 얼마나 많이 벌었으면 백만 원 넘는 그래픽카드를 박은 컴퓨터를 같이 줌 ㅋㅋㅋㅋㅋ
“에이, 나도 출혈 좀 감수하면서 뽑는 거지. 다른 참가자들도 소정의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순수하게 이번에 든 예산만 500만원은 된다. 원래 이런 대회할땐 돈 아끼려 들면 안 돼. 괜찮다 싶은 선까지는 팍팍 써야 그 만큼 홍보도 되고 나중에 비슷한 컨텐츠를 할 때 참가자랑 시청자가 더 늘어나는 법이다.
모 1세대 머기업은 당장 컴퓨터 사기 쳤다가 한방에 훅간 케이스도 있었으니까 더 그래야지. 시청자들한테 사기 치면...얄짤 없이 생매장이야.
“이번 대회는 고르고 고른 64명의 편집자들이 제게 보내준 편집영상끼리 랜덤으로 붙여서 시청자들의 투표수가 많은 쪽이 올라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토너먼트 식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죽이고 죽여서 올라가는 배틀로얄이에요.”
와! 배틀로얄!
이젠 취업도 배틀로얄로 해야 하는 시대...
끔찍하다...
아 우린 취업할일 없으니 코런갑다 하라고 ㅋㅋㅋ
[GROUNDPOUND님이 10000원 후원하셧습니다!]
두근두근
“그럼 64강 첫 번째 경기, 닉네임이...버디언님이랑 무코코님이시네요. 두 분 다 방송에 계신가요?”
네
넹
“그럼 이제부터 순서대로 영상을 보고, 투표합시다. 우선 버디언님 영상부터 봅시다.”
[슉 슈슉 슉 슈슉 슉. 슈슉...]
시작부터 하르방이냐! 심지어 움짤까지 만들어놨어! 내 오너캐릭터가 쌍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시청자들 반응도 좋은 편이었다. 그거 말고는 나름 딱 듀라한 스트리머들 썰 풀 때 스타일로 잘 편집한 영상이었다. 적당히 SD일러스트 잘 활용해서 표정 잘 표현하고, 분위기 잡고. 적당한 효과음으로 재미있게 만들고.
“그러면 이번에는 무코코님 영상입니다~”
[아기 상어 뚜루루뚜루~]
인트로를 왜 그걸로 했어! 그/아/아/악! 충격과 공포의 수치스러운 인트로가 지나가고, 나온 영상의 내용은 저번 ASMR 하이라이트를 스피디하게 모아놓은 영상이었다. 영상미는 평범한데, 요약을 잘하네. 액기스만 쭉쭉 뽑아서 만들었구나. 이쪽도 만만치 않은데.
“두 분 다 잘...만드셧네요.”
아 ㅋㅋㅋㅋㅋ 배틀로얄 당한 것은 본인이었고
이가는 거 봐라 ㅋㅋㅋㅋ
아 흑역사 대방출인데 킹쩔수 없지 ㅋㅋㅋ
“그럼 투표 시작합니다. 투표시간은 5분이고, 5분후에 집계 후에 발표합니다.”
5분동안 다음 경기 세팅을 하며, 적당히 노가리를 까다가 투표현황을 확인하니 버디언님이 100표차로 앞서 있었다. 확실히 편집 실력은 전체적으로 임팩트있게 잘 만든 버디언님 쪽이 더 좋아 보이기는 했다.
다른 것보단 하르방...움짤이...너무 임팩트가 강했어...저건 진짜 강적이다.
“첫번째 경기는 버디언님이 이기셧습니다! 열심히 영상을 만들어주신 두 분께 박수!”
짝짝짝. 이제 다음 경기는 누구더라?
나는 대진표를 확인하며 다음 경기 편집자들을 확인했다.
GROUNDPOUND...내 방송 최고 물주 중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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