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77.주인님 그거하자 낑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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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단언컨대 남자의 로망이다. 경차 말고 멋들어진 승용차 있잖아.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는 멋들어진 고급 승용차. 그리고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은 한때 내 로망에 한층 더 불을 지폈던 때가 있었다.
제목이 뭐였더라? 아, X니셜D!
하여튼 그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드리프트는 가히 환상적이었고, OST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요즘도 가끔씩 레이싱 게임을 하거나, 신나는 노래가 듣고 싶을 때 찾아 듣곤 했지. 언제 들어도 신나는 유로비트 VIVA!
그 노래가, 지금 내 머릿속에서 장렬하게 울부짖었다.
이것이 바로 드리프트의 세계라고,
그리고 난 이제 좆 됐다고.
“전동휠로 어떻게 드리프트를 하는 거야!”
일부러 속도 느린 물건으로 골랐는데! 전동휠을 믿었는데에에에에! 나는 전력으로 머리카락을 조종해 목을 조였다. 목에 자국이 남겠지만 그건 지금 신경쓸데가 아니었다. 당장 머리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목숨이 중요하냐! 어차피 여기서 머리가 떨어지나 몸이 떨어지나 죽는 것은 똑같아!
“주인님이랑 달리니까 너무 좋아!”
“당장 멈춰어어어어어!”
미친 망아지년아아아아아아아아!
길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지, 사람이 조금만 더 돌아다녔어도 사람 벌써 쳤겠다! 도대체 시속 30km도 나올까 말까한 전동휠을 타고 못해도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갈 수 있는 이유가 뭔데! 체감상 이미 시속 70km를 넘었어! 넘었다고! 살려줘!
사람들이 잘 피해줘서 망정이지 이거 사람이랑 부딪히면 내 인생 go to the 감방이야! 이렇게 인생 마감하기 싫다고! 난 아직 건물주도 되지 못했단 말이야! 적어도 건물 하나정도는 사고 감방에 가게 해줘!
“멈춰! 멈추라고! 안 멈추면 집에서 쫒아낼 줄 알아!”
“하지만 난 멈추는 법 모르는데?”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지금 멈추는 법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이 속도로 죽을 때까지 나 홀로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는 말이야?
“그럼 천천히 속도를 줄여! 이러다 사람 하나 친다고!”
“사람들은 알아서 비켜 줄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주인님!”
“내가 안 괜찮아 이 망할 망아지야!”
이거 멈추면 그날이 내가 생애 처음으로 말고기를 씹는 날이다...요 근래 이렇게 빡쳤던 적이 없었다. 애가 고집 부리는 거? 그래 그건 봐줄 수 있어. 원래 애새끼들이 고집하나는 알아주잖아. 실수를 해도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다. 원래 애들은 모르는 게 많아서 실수를 많이 하는 법이니까.
근데 말을 듣지도 않고, 사람을 사지로 몰아세워? 나는 말 안 듣는 꼬맹이를 정말 싫어했다. 내 컬렉션을 조져놓은 사촌동생 같은 년 말이야. 근데 이건 한 술 더 떠서 내 목숨을 대놓고 위협하네?
용서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따끔하게, 그리고 다시는 이러지 않게 혼을 내야할 문제였다.
“지금 당장 안 멈추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니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낮아졌다. 그제 서야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를 챘는지 전동휠의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인적이 드문 건물 사이에서 멈춘 에포나는 내가 내리자 다시 망아지로 변신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야. 넌 저기 지나가는 사람 안보여?”
아무리 사람이 뜸한 시간대라도 번화가엔 사람이 몰리는 법이다. 여기가 베드타운이라 사람이 서울만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부딪히지 않은 게 기적에 가까울 정도의 사람들은 있었다. 정말 운이 좋은 거지.
정말로 부딪히기라도 했다면 그날로 나나 그 사람이나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길바닥이 피로 물들었겠지.
“보, 보여요.”
“부딪히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 그게...”
“사람 말이 우스워 보여? 네가 운전을 하는데 혼자 신나서 달리면, 탄 사람은 어떻게 될지 생각 안 해봤어?”
괜히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만이 운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운전은 크고 작은 것에 상관없이 사람 목숨을 언제든 앗아갈 수 있는 건데, 이 망아지는 그런 개념이 전혀 잡혀있질 않은 것 같았다.
“오늘 하는 행동을 보고 고민 좀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오늘부터 내가 말할 때까지 달리는 거 금지야. 그리고 집에 가서 벌 받을 줄 알아.”
“그, 그치만...”
최후의 변명이라도 하려는지 망아지가 입을 열었지만, 난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변명은 한번 시작되면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법이니까.
“대답.”
“알았어...요.”
“일단 여기까지 하자. 밖이니까 사람들 시선도 신경 써야 하니까...”
다행히도 꽤 깊숙한 곳에 들어왔기에, 망아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세연이는 내가 혼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망을 봐주고 있었으니 사람이 온다면 이야기 해줬겠지. 에포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후. 에포나. 다시 전동휠로 변해봐. 이대로는 못 데려가니까.”
나만하겠냐마는, 어쨌든 애도 사람들에게 보여선 안 되는 처지다. 이미 아까 잔뜩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 같으니, 전동휠 상태로 데리고 다녀야했다. 에포나는 내 말에 다시 전동휠로 변해 느릿느릿하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전동휠의 손잡이를 잡고 다시 길거리로 끌고 나왔다. 방향은 제대로 라서 다행이야. 반대 방향으로 달렸으면 이 더운 날씨에 짜증이 제대로 치솟았을 테니까.
나는 길 건너편에 있는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진아, 걸어서 갈 수 있겠어?”
“어떻게든 가능 할 것 같은데.”
30분 정도 걸어야 하긴 하지만, 갈 수는 있었다. 전동휠을 계속 끌고다녀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안 그래도 내 몸뚱이만한 봉투를 두개나 들고 있는 상태에서 전동휠을 탈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자전거로 변하라고 할 걸 그랬나? 이제 와서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할인에 눈이 돌아가서 원래 사려고 했던 양보다 더 많이 사버렸으니 자업자득이다.
“우...”
“불쌍한 척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애초에 전동휠이라 이 상태론 타지도 못한다. 무게중심을 잡을 수가 없잖아. 나는 에포나 위에 봉투 하나를 얹어놓았다. 이게 더 자연스러워 보일 테고, 데리고 온 이상 뭐 하나는 시켜야지.
“...너무 많이 산거 아닐까?”
이제 와서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 처녀귀신아. 너도 나랑 같이 폭탄세일을 보고 눈이 돌아가서 이것저것 골라댔잖아.
“이제 입이 셋이나 되니까 얼추 맞겠지. 뭐하면 한솔이도 불러서 처리하면 되고.”
자취경력 2년차인 한솔이는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 내가 부르면 한달음에 달려와 잉여식량을 처리해줄 거다. 안 그래도 이미 우리 집에 와서 하루에 한 끼는 얻어먹는 것 같은데. 개도 미안해서 그런지 나한테 식비라며 꽤 많은 돈을 쥐어 주기는 했다. 최근에는 금액이 좀 늘었다. 내 피까지 계산해서 쳐주는 건가.
나야 돈 더 받으면 좋으니 상관없지만.
“어서 돌아가서 샤워나 하고 싶다...”
“나도 샤워 하고 싶어라...”
샤워를 못한지 4년이 지난 처녀귀신 세연이가 한탄했다. 귀신은 땀을 흘린다는 개념이 없으니 샤워할 필요는 없겠지만, 처녀귀신도 여잔데 씻고 싶겠지.
귀에 이어폰을 끼워 넣고, 세연이와 수다를 떨며 집에 돌아간다. 이어폰을 끼워둔건 내가 노래를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세연이랑 대화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테니 전화하면서 걷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위장이었다.
에포나는 돌아올 때까지 낑낑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집에 가서 혼나는 게 무서워서 그런가. 어쩌면 버림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지만...아무래도 어린애를 버리는 건 아무리 막돼먹은 애라도 마음에 걸린다.
“세연아 비밀번호 좀.”
내 말에 세연이는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초능력이라도 쓴 것처럼 보이려나. 문이 열리고 집안에 들어선 나는 먼저 냉장고에 사온 식재료들을 집어넣었다. 못해도 일주일은 먹을 거 같은데.
나는 망아지로 돌아와 쭈뼛쭈뼛 대며 내 뒤에 서있는 에포나를 불러 앉혔다.
이제 진짜 혼낼 시간이다.
“에포나,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그...빨리 달린 거랑...멈추라고 했는데 안 멈춘 거요...?”
“잘 아네.”
잘 모르겠다고 하거나 대답 못했으면 더 크게 혼낼 생각이었는데,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걸 보니 그나마 낫네. 일단 잘못했어요! 하면서 손바닥 비볐으면 기껏 가라앉은 화가 다시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너도 말이니 만큼 마음껏 달리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를 태우고 달리고 싶다면 그러면 안 돼. 내가 너를 탄 이상 내 목숨도 너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야. 만약에 네가 사람과 부딪혔다면 절대 가벼운 부상정도로 끝나지 않아. 나나 부딪힌 사람이나 크게 다칠 거야. 그런데 네가 네 흥을 주체 못하고 달려버리면, 나는 너를 탈 수 없어.”
내가 아무리 대가리 튼튼한 듀라한이라고 해도 그건 머리 한정이다. 몸뚱이는 조금 튼튼한 사람과 다를 바 없어서, 맞으면 아프고 넘어지면 피부가 까진다. 교통사고 수준의 충격을 받는다면 당연히 크게 다치겠지? 그러니까 나는 이 망아지가 제대로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 탈 수 없다.
공짜로 생긴 자가용을 쓰지 못 한다는 게 아쉽지만 별 수 있나. 탈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이해했어?”
“이해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봐.”
“멈추라고 할 때 멈추고...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면 안돼요!”
“옳지. 앞으론 절대 그러면 안 돼. 알았지!”
“네!”
에포나는 침울한 표정을 지우고 해맑은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리와.”
나는 내 무릎 위를 두드리며 가리켰다. 에포나는 내 말에 곧바로 내 무릎위에 올라탔다. 나는 손으로 에포나를 붙잡고 자세를 바꿨다. 흔히 말하는 엉덩이를 때리기 좋은 자세였다.
“어? 어?”
“벌은 받아야지?”
나는 에포나의 엉덩이를 적당한 세기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아프기는 하되, 자국이 남지는 않을 정도로. 어차피 망아지라 털이 쿠션역할을 해 줘서 어지간히 세게 때리지 않으면 자국도 안 나겠지만.
“아야! 아파요! 응기잇!”
방금 뭐라고...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다시 한 번 엉덩이를 세게 두들겼다.
“응기잇!”
나와 세연이는 귓가에 들려온 끔찍한 비명소리에 썩어버린 얼굴로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 응기잇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동휠
유진이가 변하게한 전동휠은 바로 이것. 작가가 애용하는 물건입니다...고장나서 이제 못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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