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IF:평범한 세상의 듀라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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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외전은 변이자가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의 주인공을 다룬 외전입니다.
“자네! 방송! 하지! 않겠는가!”
“혹시 약 드셨어요?”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소리야. 진짜 약먹었나? 나는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박사님이 핢아마실 수 있도록 그릇에 옮겨담으며, 아침부터 헛소리 하는 라쿤 박사를 흘겨보았다. 하긴 이 라쿤이 이상한 소리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아닐세! 이번에! 기획한! 프로젝트에! 자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말일세!”
“프로젝트?”
또 무슨 해괴한 짓거리하려고. 저번에도 이상한 프로젝트 하다가 높으신분들한테 까이고 반려당하지 않았었나? 아무래도 저번의 실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 한 모양이었다. 매번 괴상한 프로젝트를 들고 와서 츄라이 츄라이를 당하는 4년차 공무원의 심정을 니들이 알아?
공시생 생활 반년 만에 합격한 건 좋은데! 듀라한이라는 이유로 일 힘들기로 유명한 변이자대책관리부에 발령될지는 몰랐지! 시발! 그때로 돌아가면 공무원 시험이 아니고 차라리 대기업 면접을 보러 다녀야지! 망할 라쿤박사! 망할 지옥불반도! 당장 나가도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닌다 진짜!
제발 프로젝트를! 뜬금없이! 일개 직원한테! ‘한번 해 보쉴?’ 식으로 진행하려 하지 말라고! 마음 같아서는 머리채 붙잡고 풀스윙이라도 갈겨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라쿤 ‘이었던 것’이 되어버릴게 뻔했으므로, 나는 마음속에 참을 인자를 새기며 힘줄이 불거진 손을 뒤로 숨겼다.
아무리 상사가 좆같더라도 그걸 티를 내면 안 되니까.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처세술이니까 다 기억해둬라. 위에서 이미 티냈다고 말하는 놈은 눈깔 교체하고 와.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그런적 없다. 그저 라쿤 박사님이 오늘은 평소에 먹던 약을 드시지 않았는지 걱정돼서 물어보았을 뿐이다.
정말 약을 먹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는 바로! 인터넷 방송일세!”
거 봐, 또 이상한 프로젝트 들고 왔잖아. 라쿤 박사가 쓸데없는 프로젝트를 발족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게 반려당하거나 실패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변이자대책관리부 직원들은 라쿤 박사가 프로젝트를 기획하면 ‘저 라쿤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거지?’하는 눈으로 라쿤 박사를 보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자리를 유지하는 거지? 뭐 알기는 알았다. 일머리가 모자라서 그렇지 이쪽분야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니까, 초기에 만든 변이 대응 시스템은 지금은 전 세계에서 채택한 물건이 아닌가.
문제는 여기가 대학교가 아닌 공무기관이라는 거고, 태생이 학자인 라쿤 박사하고는 그렇게 상성이 좋지 않았다는 거다. 하지만 이 자리가 허구한 날 사고가 터지니 실적쌓아서 출세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독이든 성배에 가깝기도 하고,
사실상 이름 모를 시골에 발령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한직에 가까워 그렇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서도 본부장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거다.
그래도 그나마 다른 공무원 자리에 비해 비교적 T/O도 많고(퇴사가 잦아서), 임금도 비교적 높고(10%남짓),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곳이라 공무원 특유의 딱딱한 조직문화가 별로 없는 곳이라는 점은 꽤 공무원 연금만을 보고 공무원들이 된 내 또래들에게는 꽤 매력적인 직장이긴 했다.
솔직히 요즘 시대에 사명감 같은 거 가지고 공무원된 사람은 거의 없잖아. 연금타서 노후라도 좀 편하게 보내려고 하는 거지. 이제는 100세시대가 열린다니까 평생 직장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다.
젊은이가 패기가 없다느니 도전정신이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요즘 젊은이가 패기가 있어 봐야 패기롭게 망할 뿐이라고. 괜히 너도 나도 공시생돼서 노량진에 모여서 그 지랄하는게 아닌데.
나도 거기에 혹해서 발령 받았을 땐 좋아했는데, 왜 퇴사자가 많은지 단번에 알겠더라. 설마 이런 골때리는 3D업종이었을 줄이야. 맨날 사고 치는 변이자 잡으러 다니고, 새롭게 변이한 변이자들 올 때마다 검사하고, 날뛰는 변이자들 제압하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민원들 처리해야 되고. 그런데 이미지는 안 좋아서 욕은 욕대로 먹고.
얌전한 사람들은 얌전한데, 날뛰는 사람들은 또 날뛰니까 그거 제압해야 하고. 근데 변이자중에선 유독 힘센 부류들이 있어서 그거 막다가 다치기도 딱 좋고. 진짜 심한 경우엔 평생 가는 후유증이 생길정도로 다쳐서 평생 병원 신세를 진 사람도 있고,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변이자대책관리부에서 커버쳐주긴 하지만 개인입장에서 고소만큼 지랄맞은 것도 없으니까.
기껏 있는 메리트마저 조져지고 남는 건 공무원의 애매모호한 초봉뿐이니까 스트레스로 이직하거나 지방에라도 발령받아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괜히 우스갯소리로 변관부가 지방 발령 대기장소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내가 이 부서 고참급에 속하겠냐. 고작 4년차인 공무원이!
“한번 이번엔 무슨 이유로 그런 개ㅅ...아니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건지 들어나 보죠.”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넘어가지!”
하긴 그러셔야죠. 나 말고 님 계획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내가 거의 비서 취급이니까. 라쿤 박사도 그걸 알고 있기에 나한테 별말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와 공무원이 되기 전부터 몇 년 동안 알고 지냈다보니 잔소리를 좀 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이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요즘! 인터넷 방송이! 잘나간다고! 들었네!”
그야 잘나가긴 하죠. 성공하기는 이쪽도 더럽게 어렵긴 하지만, 잘 버는 사람은 억 단위로도 번다고 들었으니까. 웬만큼 큰 사고를 쳐도 복귀하기도 나름 쉬운 편에 속하고. 물론 수익은 떨어지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가!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지! 그래서! 이미지 개선!의 일환으로! 인터넷 방송을! 할! 생각이네!”
“라쿤 박사님 방송멘트 치실 수는 있죠? 작년에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서 웃음거리 된 거 기억 안나요?”
작년에 X침마당에 나가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걸 떠올렸는지, 라쿤 박사님이 몸서리를 쳤다. 그때 한동안 인터넷에서 조리 돌림 제대로 당했던 것 같은데. 와! 라쿤맨! 와! 어쩌다 보니 흔히 아는 너굴맨 포즈해버린 탓에 한동안 인터넷에서 필수요소 취급받아 인터넷에서 줄기차게 인터뷰 내용이 x튜버들의 연금이 되어버렸던 건 아직도 직원들 사이에서 화자되고는 했다.
사람 말하는 라쿤이 맞춤 제작된 검은색 정장입고 말하는 게 정말 컬트적인 인기를 얻을 만 하긴 했다. 보통은 수인형 변이자라도 변이 비율이 30%를 못넘어가는 데, 라쿤 박사는 거의 80%에 가까우니까.
사실상 사람말 하는 동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런지 동물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묘하게 인기가 있긴 하더라. 그래 봐야 애완동물 비슷한 느낌의 인기지만. 라쿤 박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건 정말 위험분자가 아닐까. 그건 수간이야 수간! 서로 마음은 닝겐이니까 괜찮은 거 아니냐고 묻지마라. 속은 어떻든 겉은 라쿤이라고! 이거 동물 학대야!
“내가 아니라! 자네일세!”
“네?”
“자!네!일!세!”
“네? 제가요?”
“그렇네!”
“혹시 미치셧어요?”
왜 그런 눈으로 절...쳐다보시는 건가요? 진짜 미친 거 아니죠? 아무리 생각해도 미치신거 같은데? 내가 방송을 왜 해? 나만 존나 뺑이치다 쿠사리 먹고 접을게 뻔한데!
“자네라면! 할 수 있네!”
“여기서 쓸데없이 희망찬 말 좀 하지 마세요! 그거 예산은 나오기나 해요?”
이번년에 예산 삭감돼서 지금 빠듯한 거 모두가 다 아는데! 덕분에 지금 복지도 미묘해져서 직원들이 불만 가지고 있는 거 모르시나?
분명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혼란스러운 내 마음과는 별개로, 라쿤 박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나는 라쿤 박사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쨌든 상사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생각이었다.
“내가! 천만정도는 땡길 수! 있네!”
“아니 뭐 그렇다 쳐요. 근데 그걸 왜 제가?”
“자네가! 듀라한이기 때문일세! 그리고 미녀이기 때문일세!”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임팩트가! 있지 않나!”
어...있기야 하지. 신입들이 내가 머리 분리 쇼라도 하면 다 놀라서 자지러지니까. 아무리 기묘한 외형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 세상이라고 해도 듀라한이라는 독보적으로 개성 있는 외형을 가지고 있으니까. 심지어 나 말고 다른 듀라한 변이 사례가 없어서 변이 초기에는 연구원들이 내 샘플 얻으려고 달려들지 않았던가.
근데 생각해 보니까 차라리 공무원보다 방송이 나았을지도. 연예인들도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외모에 듀라한인데 방송해서 캠만 켜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알아서 머기업이 돼지 않았을까.
물론 운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냥 스트리머나 할걸 그랬나?
어딘가 나사 빠진 계획만 세우는 라쿤 박사님에게 그런 걸 생각할 머리가 있을 줄이야. 솔직히 결재서류 도장만 잘 찍어주는 일머리 없는 라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근데 공무원은 겸직 금지 아니에요?”
“그거야! 허락을 받으면! 상관없지 않나! 게다가! 이건! 정식! 업무일세!”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업무를 하나 더 추가해버린다고? 안 그래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인데 여기서 일감이 더 늘어나는 것은 사양이었다. 공적인 업무로 하는 방송이라면 내가 도네 받는다고 내 돈되지는 않을 거 아니야. 결국 그 고생을 추가로 하고 받는 월급은 똑같다는 건데...
어차피 월급쟁이인데 인터넷 방송으로 얼굴 팔리는 게 메리트가 있을까? 안 그래도 너무 눈에 띄는 외모인데 방송이라니, 길거리에서 헌팅 당하는 것도 좆같은데, 이젠 아주 연예인 마냥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겠군.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네!”
“예예, 그러시겠죠. 저는 나가 봐도 되죠?”
“수익의! 10%는, 자네 계좌에 꽃아주겠네!”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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