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63.너는 너무 말이 많아(4)
* * *
“세연아. 뭔가 익숙하지 않니?”
“...어...모르겠어...”
눈 돌리지 마라. 너도 두 번이나 했잖아. 한솔이도 한번 했고. 이제 꼬맹이까지 했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탈주하는게 아닌가 고민할 지경이란 말이야. 혹시 한국에 닌자 마을이 있나? 거기서 교육받은 애들이 탈주하는 거지? 그렇게 탈주가 좋아? 뭐만하면 도망치는데 이유가 뭐야?
도망치지마! 맞서 싸워!
나는 여러분의 친절하고 귀여운 이웃이라 폭력따윈 휘두르지 않는 평화주의자 듀라한이야! 무슨 내가 호러게임에 나오는 귀신도 아니고 왜 다들 도망가는데?
내가 마주치면 뭐 갈고리에 걸어놓기를 해?
내가 얼굴이 연쇄살인마 마냥 험악하기를 해?
내가 그렇다고 아무데나 킬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친절한 이웃 본적 있어? 물건너 빨간 스판 쫄쫄이 히어로도 내 이마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줄 정도로 친절하다고!
요즘 어떤 이웃이 옆집 이웃 밥을 사주고 식객한테 꼬박꼬박 밥도 주고 친척도 아닌 어린애를 맡아서 밥도 주고 잘 곳도 주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이 세상에 드물 거다. 근데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계모같잖아...
도대체 왜 다 탈주하냐고...내가 무슨 납치범도 아니고. 죄다 못 도망쳐서 난리야. 이젠 새로운 사람과 만날 때마다 진지하게 탈주각을 재고 있지 않나 고민해야 될 지경이다. 그냥 탈주하지 말고 차라리 나한테 화를 내면 안될까? 그게 더 마음 편할거 같아...
“라쿤 박사님한테...말해야 하나?”
꼬마니까 어디 멀리가지는 않았을것 같은데. 사실 이번에 또 이 건으로 전화하면 라쿤 박사의 호통에, 직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또 받게 될까 두렵다. 삼진아웃제도가 있다면 난 이제 투아웃 9회말쯤 되는 상황이라고.
그러니까 왠만해선 도움을 받지않고 해결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이 근처는 애들이 갈만한 곳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주변을 뒤져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짦은 다리로 멀리 갔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일단 한번 쭉 둘러보고, 정말 못찾겠다 싶으면 이야기 하기로 했다. 지금 10시 반인데 연락 제대로 받을 것 같지도 않고.
사회생활 좀 해본 사람이면 이 시간에 업무 관련 연락을 한다는게 얼마나 주옥같은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거다. 어? 최 부장 망할새끼야! 시발 넌 뭔데 밤 12시에 업무관련 메시지 보내는데? 그때 내가 얼마나 기분이 주옥같았는지 알아?
시발 급한일이면 말을 안해요, 맨날 심각한것처럼 이야기해놓고 보면 딱히 급한일도 아니야! 평일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출근하는 심정을 알아? 진짜 길에서 마주치면 으슥한데 끌고가서 뚝배기를 부셔주마!
“...유진아, 하늘위에 올라가서 찾아볼까?”
“오, 그게 좋겠다.”
나야 어쨌든 세연이는 귀신이니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 세연이를 하늘로 올려보내고, 나는 집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시국이 시국이라 이 시간에는 왠만한 곳은 전부 닫혀 있는데다 사람도 적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원래 이런데서 무서움을 느끼는건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라서 그런건데, 나한테 귀신은 그저 만만한 호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뭐 놀래키면 어쩔건데. 지옥참마도 맛좀 볼 래? 너도 후드리 챱챱 썰려보면 신세계를 보게 될거야! 지옥말이야!
세연이 말고는 귀신 못본지 꽤 됐지만. 밖에 잘 안나가는 것도 있는데, 내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는지 평소에는 보이던 귀신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도 나만 보면 도망치기 바쁘고.
아니 이러니까 내가 나쁜년 같잖아. 나는 그냥 사람들한테 해코지하는 귀신만 친절하게 저승으로 배달해주는 착한 듀라한일 뿐인데...
솔직히 저승에서도 나에게 명예 저승사자 자리를 줘야 하는거 아닐까? 내가 왠만한 저승사자보다 일 많이 했을거 같은데? 세상에 이렇게 귀신들이 많은데 다 안잡아가고 뭐하냐...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밤만 되면 발에 채이는게 귀신인데.
...됐다. 우리 꼬맹이나 찾자.
“저기요, 혹시 여기서 쪼끄만 여자애 하나 못보셧나요?”
“어...못본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가끔씩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물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쪽으로 간것도 아닌가...애가 어디로 갔을까. 좀 스마트한 방법으로 찾아봐야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냥 전화해보면 되는거 아닐까?
당연하다면 당연한건데 왜 지금까지 안했을까. 요즘 방송하면서 머리(카락)를 많이 썼더니 능지가 처참해진 모양이었다.
역시 받지는 않네. 당연한 일이다. 세상 천지에 어떤 애가 가출했는데 전화를 받겠어? 나도 어릴 적에 가출해봐서 잘 안다. 평소라면 재깍 받았을 전화도 경계하면서 전화기를 아예 꺼놓든 아니면 무음 상태로 돌려놓고 씹으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순간 나를 아는 사람이 길거리에 나를 보고 부모님한테 이야기해서 꼼짝없이 잡혀오는 엔딩 말이야...
그때 정말 아빠한테 종아리 뒤지게 맞았던거 같은데. 사실 돌이켜보면 맞을만 했다. 반찬투정하다가 가출한 거였거든. 요즘은 없어서 못먹는데 말이야...나중에 고향집 좀 내려갔다 올까.
“어디로 가야되나...”
진짜 어디로 간걸까. 가출 청소년들이 자주 가는 PC방...이라기엔 이미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는 시간이고, 주옥같은 코로나 덕에 10시만 되면 왠만한 가게는 전부 닫으니까 갈 수 있는 곳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 외부 시설이 아닐까. 공원이라던가 놀이터 같은 곳 말이야.
놀이터라도 뒤져볼까. 놀이터면 아파트 단지로 가야 되나? 마침 지어진지 2년 남짓 지났다는 아파트 단지 입구를 지나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공원은 여기서 15분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으니 일단 여기 놀이터를 다 뒤져보고, 그 다음에 공원으로 가보자.
경비실을 스윽 훎어보니 경비아저씨가 보였다. 잘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폰으로 영상이라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이거 마음대로 들어가도 되나.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은 경비아저씨들이 빡세게 감시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다행히도 경비아저씨는 폰으로 X튜브를 보느라 바빠서 바깥을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입구를 넘어 눈 앞에 멀찍이 보이는 놀이터를 쳐다보았다. 근처에 가로등이 있어서 놀이터 내부가 잘 보였다. 고무로 이루어진 바닥과, 최근에 지어진 시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처음 보는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를 쳐다보았다.
역시 요즘은 모래바닥으로 잘 안까나? 라떼는 말이야, 놀이터는 죄다 모래바닥이었다 이 말이야. 혹시 가까이 가면 도망갈까봐 멀리서 놀이터를 살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아닌가?
그럼 다른 곳을 가볼까. 그렇게 다른 놀이터로 가기위해 발걸음을 옮기자, 내 코에 희미하게 불쾌한 향기가 흘러들어왔다.
이거 담배 냄새인데.
근처에 흡연실이 있는 건지, 아니면 구석에서 담배라도 피고 있는 건지, 불쾌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냄새가 아주 진동하는 구만. 빨리 자나가야지. 나는 불쾌한 냄새를 더 맡을 생각이 없었다.
“야...”
희미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 귀에 들려온다. 화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앳된걸 보니, 일진들이라도 되나?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담배 냄새와 함께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가 일진 말고 더 있나. 그냥 불량 학생일 수도 있겠지만, 이 근처에 학군이 형성되어 있으니까 일진이 숨어서 담배를 핀다해도 이상할건 없었다. 그 강남에도 일진들이 있다는데 이런 곳에 일진이 없을 리가 없지...
괜히 시비가 걸리기 싫으니까 피해갈 생각이었다. 내가 일진들이 담배피면서 시시덕 거리는데 끼어들정도로 오지랖이 넒은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위협적으로 생기지도 않았고. 흔한 동네 찐따 듀라한일 뿐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해. 가서 쳐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야, 오랜만에 만났으면 인사를 해야할거 아냐?”
“그, 그게...”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조용한 밤이었던 탓에 조금 멀리 있어도 목소리가 잘 들렸다. 근데 목소리가 어째 익숙한데. 설마, 아니지? 나는 이렇게 클리셰적인 상황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냥 어디 구석에 멀쩡히 박혀있기를 바랬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한번 슬쩍 보고 아니라면 그냥 가고, 맞으면...
“이 년 또 질질짜네.”
“야, 야, 장유라, 니가 잘못해놓고 눈물이 나와? 내가 불렀으면 오라고 말했잖아 썅년아. 내말이 말같이 안들리냐?”
아파트 단지 구석,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그곳에, 3명 정도 되는 여자애들이 누군가를 둘러 싸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며칠 동안 같이 생활했으니까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도 나는 유라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에 빨갛게 부어오른 뺨이 내 시선에 잡혔다.
“야, 니들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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