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62화 (62/352)

〈 62화 〉 60.너는 너무 말이 많아(1)

* * *

“자네! 때문에! 내가! 야근을! 해야겠나!”

“죄송합니다!”

야근은 정말 내가 미안해! 나 하나 때문에 수많은 공무원들이 야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음부턴 사고 치지 말자...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어째 듀라한이 되고 나서 별의별 사고에 다 휘말리는 느낌이다.

이게 주인공 체질인가. 별로 갖고 싶지 않은 체질인데. 이왕이면 트러블보단 행운이 굴러들어오는 체질이었으면 좋겠다. 길가다가 1등 복권을 줍는다거나. 가챠를 단차로 돌려도 픽업을 한번에 뽑는다거나.

나도 비틱질을 해 보고 싶다고. 맨날 천장 찍는 게 얼마나 서러운데. 이벤트로 주는 재화를 꾸역꾸역 끌어모아서 원기옥을 만들어도 맨날 천장찍고 다 털려나가는 인생이란...나도 수천만원씩 가챠게임에 질러도 문제 없는 부자가 되고 싶다!

“죄송한걸 알면! 제발 사고 치지! 말게!”

“넵.”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그저 죄송할 따름이었다. 골목길도 그렇고, 이번건도 그렇고, 세연이 탈주 사건도 그렇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번 일은 기밀관리본부 직원들이 야근까지 해가며 틀어막은 덕에 겨우겨우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라쿤 박사의 호출에 순순히 응해서 벌써 두시간째 잔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라쿤 박사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2시간 동안 끊임없이 나를 갈군 탓에 목이 말랐는지 접시를 아슬아슬하게 가득채운 물을 핢아먹었다. 여우와 두루미가 생각나네. 확실히 입 구조가 저래서야 컵을 써서 물을 마시는 건 무리일 법 했다.

라쿤 박사는 그 짦은 앞다리로 깔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나를 노려보았다. 사실 노려봐도 1미터도 안 되는 작은 동물이 노려보는 거라 무섭지는 않긴 한데...잔소리는 무서웠다.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겠네!”

“네!”

“다음에 또 걸리면! 잔소리만으로! 끝나지! 않을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 애 볼줄! 아나!”

“뭘 봐요?”

“어린애! 말일세!”

“보는 거야 가능하죠.”

근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실까. 설마 나한테 애라도 맡기겠다는 건가. 갑작스러운 라쿤 박사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거 나한테 라쿤 박사님 자식이라도 맡기시겠다는 건가?

근데 라쿤 박사 애면 같은 라쿤인가? 아니면 인간? 아니 애초에 라쿤이랑 인간 사이에서 자식이 생길 수는 있나? 그전에 섹...스할 수 있는 건가?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1미터 남짓한 라쿤박사와 수...아니 섹스하는 인간이라니. 혹시 결혼상대가 같은 라쿤인가.

어...그건 그것대로 윤리적으로 괜찮은 건가? 라쿤박사는 어쨌든 전 인간이고, 동물이랑 교미하면 그건 동물학대가 아닌...가? 라쿤 박사가 라쿤이랑 하면 그건 수간인가? 일단 알맹이는 인간이니까 수간이 맞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섹스! 섹스! 섹스! 젠장! 궁금해서 미치겠네! 근데 까놓고 물어보진 못하겠어! 난 잔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아!

“애는 라쿤이에요? 아니면 인간이에요?”

아, 내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필터없이 말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내! 자식이! 아닐세! 난! 솔로란! 말일세!”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질문했지만, 돌아온 것은 어쩐지 서글픈 외침 뿐이었다. 아니, 하긴 저런 외형인데 결혼을 할 수 있을 리가...

“자네! 말 많던! 꼬마를! 기억하나!”

“꼬마요?”

누굴말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최근에 내가 꼬마를 만난적이 있었던가? 머릿속의 기억을 하나하나 뒤져보아도 생각이 나질 않아서,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모르겠는데. 요즘 하도 사고가 많이 터져서 다른 기억이 흐릿할 지경이라...

“장유라양이랑! 친하다던데! 기억 못하나!”

장유라? 누구였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장유라’라는 이름을 키워드 삼아 기억을 더듬어 본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장유라...유라...율러...아니지...최근에 들었던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면 기억날 것 같았다.

“말이! 아주! 많은! 꼬마! 말일세!”

“아~!”

아, 그런 이름이었지? 말이 아주 많긴 했어...뭔가 억지로 밝은 척 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긴 했는데,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서 지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개를 왜 나한테 돌보라고 하는 거지? 세연이처럼 고아출신도 아니고. 복잡한 가정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저번에 보였던 대화를 떠올리면, 확실히 가정이 화목해 보이지는 않았다. 말 많던 애가 부모랑 이야기하면 말 수가 적어지기도 했고. 변이가 문제였을까. 개는 키만 작아진 거에 가까워서 큰 트러블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 뭐 하면 깔창이라도 깔고 키높이 신발이라도 신으면 그만이니까.

학교는 전학을 가면 될 테고. 근데 개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혹시 지금 기밀관리본부에 있는 건가?

“자네 한테! 그애를! 맡기고! 싶네! 자네가! 적임이라서! 말이야!”

“네? 제가요?”

제가 언제부터 그런 사람이 된겁니까? 나는 어린애의 어자만 들어도 공포를 느끼는 전형적인 애 어려워하는 어른 인뎁쇼. 아,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어. 명절에 내 게임기에 음료수 쏟아서 망가트린 망할 사촌꼬마...변상도 못 받았다고!

“기밀관리본부는! 기밀이 많아서! 어린애를! 데리고! 있기! 힘드네!”

“아 예 그렇겠죠.”

여기 나야 잊을 만하면 오게 되는 곳이라 잊고 있지만, 일단 정부비밀기관이니까 당연히 기밀도 많겠지. 따지고 보면 나도 최고 기밀쯤 되는 모양이고. 그리고 시설도 별의별 기계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함부로 건들면 위험할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왜 나일까. 이게 업보입니까...어쨌든 나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대형사고를 벌써 두 번이상 쳤는데 여기서 거부하면 내가 쓰레기지. 나는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가 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분리수거 하는 날인데.

“그러니! 자네랑! 김한솔양! 사이에! 빈집이! 있지! 않나! 그 집을! 계약해! 놨으니! 거기서! 살게! 하고! 자주! 찾아가서! 돌봐주게!”

“제 방송 시간 10시간인 거 알고 하시는 말이죠?”

“그 방송! 아주 못하게! 하는! 수가! 있네!”

말 안 들으면 방송 멈춰!를 시전해버리시겠다 이겁니까? 남의! 밥줄을! 끊다니! 이건! 쪼큼! 너무! 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나는 을의 입장이었다. 그것도 사고를 잔뜩 친. 나한테 반론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내 양심상 여기서는 닥치고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고 내 전두엽이 속삭이고 있었다.

근데 전두엽아, 너는 내 편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 애 좀! 돌봐주게!”

“설마! 애가! 너무! 말이! 많아서! 저한테! 떠넘기는 건! 아니죠?”

“아!닐!세! 그리고! 따라 하지! 말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배웠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그 방 계약해 봐야 안에 가구같은 게 있나? 맨 집에 덩그라니 개만 데려놓아도 아동학대 아닌가? 아동학대로 잡혀가는 라쿤이라니, 뉴스 1면에 무조건 실리겠군.

“꼬맹이! 명의로! 돈을 넣어놨으니! 그걸로! 가구를 채워! 넣게! 빼돌리면! 자네는! 지옥을! 보게 될걸세!”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옥을 보게 되는지 물어도 돼요?”

“실험체로! 써버릴! 걸세!”

“절대 안 빼돌리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게! 그 애는! 밖에 있네!”

라쿤 박사에게서 축객령이 떨어졌다. 나는 말이 바뀌기 전에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왠지 더 있으면 설교당할 것 같아. 요즘 세상에 두시간 짜리 설교를 하는 아저씨라니 정말 보기 드물다고! 설교로 개과천선 하는 건 이미 유행이 한참전에 지났어! 그리고 그건 고등학생의 특권이야!

근데 분명밖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있다는 거지? 다시 들어가서 물어볼까? 잠시 고민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밀관리본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여기서 맨날 용건만 해결하고 돌아가곤 했었기에, 내부를 자세히 살펴본적이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아, 요원 누님?”

“...이은하입니다. 은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여전히 엄격 근엄 진지하신 분위기시네.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피곤해 보여? 혹시 그날이야? 생각해 보니까 난 그날이 안 오네? 이런데서 인외체감이라니 진귀한 경험이다. 나야 편해서 좋지만.

어차피 마법의 날 같은 건 TS암컷타락 소설에서나 수요가 있다고! 나 같은 친구 없고 연애경험 없는 모솔 남자가 마법의 날이 생겨봐야 생리통약 먹는 거 말곤 지분도 없단 말이야! 나는 그런 거 싫소!

“라쿤 박사님과 이야기는 끝나신 겁니까?”

“끝나서 나왔어. 혹시 유라...였나? 개 어딨는 줄 알아?”

“장유라양 말입니까. 아마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전에 기밀관리본부 구경해 보고 싶은데, 나중에 가도 될까?”

“안됩니다.”

“왜?”

“...무슨 사고를 칠까 두렵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요원 누나의 눈길이 어쩐지 ‘허튼짓하면 진짜 조져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어서 나는 고개를 요원 누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안하면 저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접어버릴 것 같다고...

아무래도 요원 누나도 내 덕에 야근을 신나게 조진 것 같았다. 나는 요원 누나를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