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8.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패티 두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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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먹지?
햄버거는 싫은데. 뭔가 든든하게 먹고 싶었다. 중국집은 싫고, 돈까스도 며칠전에 시켜먹었으니 별로 땡기질 않는다. 냉면? 그냥 면류는 별로 안땡기네. 그럼 속이 든든해지는...국밥? 국밥이 무난하게 좋겠다. 국밥집은 왠만하면 없는 곳이 없어서 적당한 가격에 배를 채우기는 좋았다. 이사오고 나서 한 번도 국밥을 먹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 그런지 더 구미가 당겼다.
무난하게 순대국밥? 아니면 속이 맑아지는 콩나물 국밥? 있을지 모르지만 담백한 맛이 속을 든든하게 덥혀주는 돼지국밥집이나 차돌국밥집도 괜찮다. 국밥은 어지간히 못 만드는게 아니라면 보통 평타는 친다. 저렴하기도 하고.
근데 이 근처에 국밥집이 있던가? 일단 좀 돌아다녀보자. 이 빌라에서 10분정도 걸어나가면 시내가 나온다. 서울에 비하면 많이 한적한 곳이라 서울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한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웬만한건 다 있었다. 음식점들도 가게 하나 걸러 하나가 나오는 꼴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혹시 몰라 후드와 캡모자를 고쳐쓰기를 두어번, 나는 골목길을 지나 시내로 나와 가게들을 훎어보았다. 편의점과 돈가쓰 가게, 어디에나 있는 커피 프렌차이즈들이 눈에 띈다. 이런 좁은 사거리에 카페가 몇 개나 있는 거야. 프렌차이즈만 3개씩 뭉쳐있는 꼴을 보니 장사가 되나 싶다.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음식점들을 살핀다.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외벽이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돈까쓰 가게, 베트남 요리 전문점, 피잣집, 중국집, 치킨집, 패스트푸드 프렌차이즈...수많은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나름대로 장관이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꽤 많이 들어차 있었다.
콩나물 국밥...은 없고. 돼지 국밥도 이쪽엔 없는 모양이다. 나는 길 건너편에 있는 프렌차이즈 순대국밥집과 바로 앞에 있는 동네 순대국밥집 사이에서 갈등하다 동네 순대국밥집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유, 어서와요...?”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시던 아주머니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얼굴은 순도 100%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니 아주머니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보통 국밥집은 외국 손님이 잘 오지 않는 음식점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여기 순대국밥 1인분이요. 다대기도 많이 주시구요.”
“한국말이 정말 유창하네, 어느 나라 사람이야?”
“토종 한국인인데요.”
“아유, 농담도 잘하네~”
굳이 정정해줄 생각은 없었다. 귀찮아. 어차피 자주 올 곳도 아니고 한끼 해결하러 온 국밥집인데 쓸데없이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국밥집은 원래 조용히 들어와서 조용히 한그릇 후루룩짭짭 먹어치우고 든든하게 배 채워서 조용히 나가는 곳이라고.
혼자서, 조용히, 풍요롭게 즐기는 혼밥...그게 국밥의 참 맛이지. 괜히 국밥충이 생기는게 아니야.
후드를 벗고 모자를 옆에 벗어두니 주변이 좀 어수선해졌다. 당연하게도 나 때문이었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하와와 은발금안 미소녀가 국밥집에 나타나면 다들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아마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안줏거리로 올라온 모양이다. 거슬리기는 했지만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나도 그랬을 거고, 선넘는 발언을 대놓고 하지 않는다면야,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의향이 있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아주머니가 반찬 그릇들을 트레이에 실어 가지고 와 내 앞에 주르륵 늘어놓았다. 풋고추, 양파, 쌈장, 김치, 마늘, 깍두기, 시원한 물이 담긴 물통. 어디서나 볼법한 국밥집 표준 반찬이다.
입가심부터 해야지. 첫 시작은 풋고추 부터다. 맛있는 풋고추는 입가심으로 아주 훌륭하지. 별로 맵지도 않으니 국밥을 먹기 전 입맛을 돋우는 데는 충분했다.
풋고추 하나를 손으로 집어들어 쌈장에 푹 찍어 입에 반즈음 집어넣고 이빨로 잘라낸다. 풋고추 특유의 알싸한 맛과 그 사이에서 존재감을 어필하는 매운맛, 쌈장의 새콤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 집 풋고추 맛있네.
풋고추 하나를 먹어치운뒤 그 다음은 양파다. 양파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쌈짱에 찍어 입안에 집어넣는다. 상큼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생각보다 양파가 괜찮네. 꽤 좋은 양파를 쓰는 걸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인데 존나 잘먹네. 실화냐?”
“...근데 존나 예쁘지 않냐? 저게 사람 외모임?”
...다 들린다. 이 고삐리들아. 아닌가, 한 명 얼굴이 팍 삭았으니 대학생인가? 교복 안입고 있으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게 한국 청년들이라 나이를 가늠하지를 못하겠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린다. 아다야?
내가 앞서 내놓은 풋고추와 양파를 다 먹었을 즈음에 드디어 대망의 메인메뉴, 순대국밥이 내 앞에 대령했다. 뽀얀국물에 취향껏 섞어먹으라고 따로 놓은 다대기 그릇에서 소소한 배려가 느껴진다. 다대기를 국밥위에 올려놓은 채로 내놓는 집은 사도다. 국밥은 내 취향껏 다대기와 깍두기 국물을 넣고 그 위에 들깨가루를 얹어서 먹는게 국룰이라고!
다대기를 한 숟갈 퍼서 국에 집어넣고, 깍두기 국물을 대략 두 숟갈 정도 국에 부으니 하얀 국물이 살짝 밝은 느낌의 붉은 색으로 변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들깨가루를 뿌리면 순대국밥의 완성이다.
같이 나온 공깃밥 뚜껑을 열고 밥을 한숟갈 떠서 국물에 담가 먹으니 국밥 특유의 감칠맛이 입안을 거칠게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먹은 국밥이라 정말 맛있네. 이 집을 고른건 다행스럽게도 정답인 모양이었다.
국밥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순대를 먹고, 밥을 국에 집어넣고 잘 말아서 깍두기를 얹어 한 숟갈 입에 집어놓고, 입에 기름이 너무 꼈다 싶으면 리필한 풋고추와 양파를 씹으며 기름진 입을 새콤한 맛으로 씻어내고. 한그릇을 비우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물을 반정도 따라 마시며 입안을 헹군다. 만족스러운 점심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나중에 또 와요. 내가 서비스도 팍팍 얹어줄 테니까.”
“아, 네.”
알아보면 부담스러운데. 20대 남자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사장님이 알아보면 그 가게 다시 안간다는 종특이 있다고. 이제 여자니까 상관없나. 후드와 캡모자로 정성스레 머리를 가리고 음식점을 나서니 뜨거운 햇빛이 온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존나 덥네. 빨리 사서 들어가자.
X도날드는 여기서 5분정도만 더 걸으면 되는 거리에 있었다. 별로 먼거리는 아니었지만, 이런 날씨에 후드티를 입고 5분이나 걸어야 하는 것 자체가 고문에 가까웠다. 집에가면 샤워나 해야겠네. X도날드 안은 시원하겠지?
“어, 언니! 안녕하세요! 일주일 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셧나요? 저는 잘 지냈어요! 그런데 어디가는 중이세요!”
변함없이 활기차다 못해 에너지가 과도하게 넘치는 꼬마다. 꼬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걸이를 더 빠르게 했다. 꼬마는 안간힘을 쓰며 나를 따라오며 계속해서 조잘댔다.
“하나씩만 이야기 해. 지금은 X도날드 가는 중이야.”
“와! 저도 X도날드 가려고 나왔는데! 같이 가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꼬맹이가 내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몸집을 가진 꼬마가 나를 끌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조금 어울려 주기로 했다. 결코 주변 사람들 시선이 미묘해져서 그런게 아니다. 내가 꼬마의 손을 잡고 걷자 나를 지켜보던 행인들의 시선이 훈훈한 빛을 띄었다. 동생 챙기는 언니처럼 보이나?
“근데 언니도 햄버거 먹으러 가는 거에요?”
“아니, 심부름...이라고 해야 하나. X도날드 햄버거가 먹고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X도날드면 역시 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패티 두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 X맥 사러 가는거죠?”
아니, 도대체 저걸 다 외우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혹시 이거 개꿀잼 몰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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