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5.미안해요 카메라맨(4)
* * *
괜히 하자고 했어. 내가 하자고만 안했어도...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김한솔은 생각했다. 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돈을 빌미로 옆집 이웃을 끌어들인 것도, 그 이웃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치다 완전히 갇혀버린 것도. 그나마 스스로에게 변명을 할 여지는 있었다. 겁이 많은 편인 그녀에게 이 뒷골목은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정도로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이었다.
어둠속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시선도, 그녀의 어깨를 잡았던 차가운 손길도 모두 그녀의 마음속을 공포로 가득 채웠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뒷골목을 하염없이 달리다 멈춰섰다. 이유진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도망칠 수 없어. 이제 끊어지기 직전인 끈을 붙들고 있는 이성이 외쳤다. 유진씨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수는 없어. 그녀의 양심이 소리질렀다.
유일하다시피한 친구였다. 2년전에 변해버린 뒤로,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과거의 교우관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친척, 누군가의 학생, 누군가의 지인. 김한솔은 죽은 사람이 되었고, 동시에 새로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스스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인정했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과거의 기록은 이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소녀에게는 ‘변이’는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동시에 평범한 소녀에게 주어질 수 있는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었다. 평범한 소녀였던 김한솔은 스트리머 포르피린이 되었고, 나름대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인생궤도에 올라탔다. 이제 김한솔은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흡혈귀. 대기업 커트라인에 들어선 스트리머. 이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여자. 외톨이.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여기는 현세가 아니었고, 원귀들이 희생자를 찾아다니는 먹이터니까. 아직은 모두가 호시탐탐 자신들의 친구로 만들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귀신들이 또 다른 침입자에게 시선이 쏠려있어 그녀에게 달려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녀에게 눈독을 들일 것이다.
잡을 수 없는 사냥감보다, 잡을 수 있는 사냥감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스윽스윽
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 소름끼치는 소리에 김한솔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윽스윽
어둠속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시체같은 것을 끌고 다가오는 실루엣이 희미하게 나마 보인다. 도망쳐야 해! 김한솔은 남은 기력을 짜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달리기에 맞춰 더 커진 발소리와 거칠게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에 달한 김한솔의 이성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흡혈귀가 된 뒤로 꽤 훌륭한 신체능력을 가지게 되었기에 달리는 속도는 육상선수 뺨칠 정도로 빨랐다.
얼마나 더 뛰었을까, 김한솔은 숨을 거칠게 쉬며 가로등에 몸을 기대었다. 분명 미친 듯이 달렸건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사실은 같은 곳을 빙빙 돈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김한솔의 머리에 떠올랐지만 곧바로 부정했다.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곧게 직진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한번도 코너에 들어서지 않았으니까. 본능이 샛길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쉴새없이 경종을 울어댔기 때문에 그녀는 단 한번도 샛길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스윽스윽
“...멈춰...”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 희미해서 누구의 목소리인지 판단할 수 가 없었다. 귀신 중에선 남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귀신도 있다고 했지. 김한솔은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대답했다간 정말로 붙잡힐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퍼질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앞으로 걷는다. 따라잡힐수는 없었다. 공포가 연료가 되어 다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장난치는 맹수처럼,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정체불명의 실루엣은 느릿느릿하게 걸어왔다.
이제는 다리의 통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김한솔은 필사의 도주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쫒아갈 필요가 없어진 걸까? 기왕이면 전자엿으면 좋겠다고 김한솔은 생각했다. 더 이상 달리기엔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어 버렸으니까.
발소리가 아주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김한솔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며 온 몸에 산소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심장의 통증이 그녀의 머리에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
더 이상은 못 달려.
체력은 이미 한계를 넘어 바닥에 있던 체력까지 박박 긁어서 사용한 상태였다. 이미 몸은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이제는 달리기는 커녕 서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김한솔은 자리에서 비틀대며 일어나 벽을 짚고 걷기 시작했다.
“...힘들어.”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고작 열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운동장을 한바퀴 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이 불쾌하다. 비오듯 흐르는 땀이 바닥에 떨어져 스며든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생존본능이 그녀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김한솔은 모래주머니라도 찬 것 마냥 무거운 다리를 힘겹게 떼어 걸음을 옮기길 반복했다.
그런 김한솔의 눈 앞에 샛길이 나타났다. 사람 두명이 나란히 서면 꽉찰 것 같은 넒이의 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과 정신이 멀쩡했다면 무시하고 지나쳤겠지만, 이미 양쪽 다 너덜너덜해진 김한솔은 샛길 앞에서 멈추어 선채로 샛길 안쪽을 쳐다보았다.
들어가야 안돼. 들어가도 될까? 들어가야만 해.
누군가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미 한계의 달한 두뇌는 경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기야...”
유진씨? 김한솔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천천히 샛길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주 희미하게, 익숙한 등이 보였다. 목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한솔의 걸음이 위태롭게나마 빨라지기 시작했다.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 지고 있었다. 김한솔은 이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의 팔을 잡았다. 차가웠다. 뒷골목이 전체적으로 쌀쌀했다지만 차가워도 너무 차가운 손이었다. 마치 산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의 손 같았다.
“유진...씨?”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존재가 김한솔의 존재를 알아채고 뒤돌아 선다. 김한솔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유진씨가, 아니야?
이유진이라 생각했던 실루엣은 창백한 피부를 가진 무언가였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창백하고, 귀신이라고 하기엔 존재감이 선명한. 그녀가 처음으로 목격한 귀신은 목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목이 없는 시점에서 이상함을 느꼈을 것을, 이유진이 듀라한이었기에 그녀는 샛길 속 사람의 정체가 목 없는 귀신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못했다.
“아...안돼...”
목 없는 귀신은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김한솔 쪽으로 돌렸다. 머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할 수 있는것은 주저앉아 조금씩 뒤로 물러날뿐. 끔찍한 상황에 김한솔은 눈을 감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면 좋겠어...!
그녀가 거의 체념한 순간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무언가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오던 귀신과 부딪혔다. 그녀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무언가를 그녀는 본능적으로 집어들었다. 익숙한 머리였다.
“아니 왜 도망치는거야? 잡느라 한참 걸렸잖아.”
“무서웠어요...”
눈물콧물 다 흘리며 우는 김한솔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이유진은 아직 샛길 밖에 있는 몸을 움직여 이제 반즈음 써버린 페트병 속의 소금을 귀신에게 집어던졌다. 맛소금 세례에 화들짝 놀란 귀신이 샛길 안쪽으로 사라졌다.
은발의 듀라한은 한손으로는 이제는 체념했는지 힘없이 끌려오는 귀신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남은 한손으로는 금발 흡혈귀의 손을 잡고 샛길을 빠져나왔다. 이왕이면 머리도 돌려받고 싶었지만 한솔이가 이유진의 머리를 꼭 껴안고 주질 않았기에 불편하게 나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차례였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이라고 이유진은 생각했다.
이를테면...
Nice boat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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