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31.설문조사는 전부 보통으로 찍는 타입입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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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하나에 천만원이라는 극적인 거래 성사 후, 나는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정작 상담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는게 문제였지만.
직장 문제? 직업이 방구석 하꼬 스트리머인데요...
생활에 불편한 점? 머리카락이 너무 편리해서 괜찮습니다.
돈 문제? 방금 천만원 일시불로 입금 받았으니 괜찮아!
“원하는게 있나!”
“목 고정할만한 초커나 장신구 같은거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아마 힘들걸세! 자네 머리의 무게는 약 5KG! 목을 감싸는 수준이 아니면 힘들다네! 악세서리처럼 만드려면! 목을 아예 조여야 할걸세!”
안그래도 연결부위가 간질간질해서 불쾌한데 목을 아예 감싸야 하면 차라리 안나가고 말지. 어차피 대부분의 활동을 집에서 하는 프로 방구석 폐인인 나는 밖을 싸돌아다닐 일이 없었다. 친구 만나러 안나가냐고?
친구가 있는지 먼저 물어보는게 예의 아니냐 이 나쁜놈들아!
“다른 건 없나!”
“없습니다!”
“나가게! 나는 다음 손님을 받아야 하니! 돌아갈 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게! 들키면 골치아프다네!”
나는 진찰실 문을 열고 휴게실로 나왔다. 검사를 받은 사람은 문 옆에 뒷짐지고 서있던 김창섭씨가 나를 보고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예의 고양이 소년이었다. 고양이 소년이 나를 지나쳐 진찰실로 들어갔다. 고양이 소년과 라쿤맨의 만남이라니, 그거 참 즈큥도큥한 만남이었다.
“나가는 길은 똑같나요?”
“그렇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휴게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폰을 만진다. 아직 밀린 웹소설들이 남아있었다. 오늘 루스는 귀엽구나! 밀린 소설을 다읽고 폰으로 햄버거집을 검색해보니 광화문 쪽에 있는 수제버거 집이 그렇게 싸고 맛있단다. 싸다는 말에 혹하는 건 절약정신을 잊지못한 내 빈곤함이 문제인가...1년치 적금을 한번에 얻었으니 돈을 아껴야지...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가는 법이니 오히려 더 경계해야 했다.
일단 나가기나 하자...
엘리베이터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들어가 닫기 버튼을 눌렀다.
한국인 특:엘리베이터 들어가면 닫기 버튼 난타함.
이 부분은 이런 비밀 엘리베이터도 똑같은지, ‘엘리베이터가 닫힙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반즈음 닫혔을 때, 발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틈 사이로 다리가 내밀어지며 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열린 문 너머에는 예의 소인족 소녀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먼저 진찰을 받아놓고 휴게실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지?
“앗. 안녕하세요!”
“아...안녕하세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까 살갑게 말을 걸긴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방구석 여포라 방 바깥에선 찐따의 피가 흐르는 흐지믈르그 일족이라 인사성 밝은 꼬마한테는 약하다. 어차피 6층만 올라가면 헤어질 거니까 조금만 참아야지.
하지만 이 꼬마는 나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은 곧이어 이어질 질문세례를 위한 추진력을 모으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이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꼬맹이의 질문폭격을 맞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 사세요? 언니 피부 정말 고와보이는데 혹시 어떻게 관리하세요? 아! 혹시 어느쪽으로 가세요? 중간까지 같이 가지 않을래요? 혹시 사진 같이 찍어도 되나요? 아! 당연히 머리는 목에 올린 채로요!”
투 머치 토커!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에 휩쓸려버린 난 정신을 도저히 차릴 수가 없었다.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무시하는 쪽이 더 피곤해지리란 것을 잠깐 마주친 반짝 빛나는 눈빛을 보며 깨달아버린 탓이다. 어떻게든 적당히, 적당히 들어줘서 넘어가면...
...뭐라고 했더라? 너무 말이 많아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겠는데?
“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 정도야...”
엘리베이터를 나와 시청건물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꼬마와 사진을 찍는다. 찰칵. 눈 앞이 번쩍인가. 꼬마가 내민 폰에는 어색하게 웃은 나와 꼬마 소녀의 얼굴이 노을을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새삼 얼굴이 이쁘다는게 체감이 되긴 하네...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황금빛 눈. 어색하게 웃은 입가마저 매력포인트가 될 것 같은 얼굴이랄까. 포샵질은 커녕 그냥 찍은건데도 이정도면 이쁘다고 소문난 연예인도 얼굴로는 비빌생각조차 하지 못할거다.
“고마워요 언니!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그렇게 기쁜가? 방방뛰며 좋아하는 소녀를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몸집이 작아서 그런가 귀엽네. 입이 짦은건지 몸은 좀 마르긴 했는데. 그래도 여자는 살이 찐것보단 마른게 더 보기 좋으니 좋은건가?
시청건물을 나와 시청역 부근을 향해 걷는다. 역 근처에 수제버거집이 있다고 했으니 그쪽에 들러 햄버거를 살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집까지 가는데 2시간 정도 걸리니까 여기서 사봐야 다 식어버릴텐데. 그냥 가져가서 전자레인지에 데피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햄버거는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으면 맛이 별로 없더라.
뭐든 갓 나온 상태에서 먹는게 제일 맛있는 법이다. 수제버거는 힘들어도 집 근처 햄버거 집에서 비싼 햄버거 세트라도 사가도록 하자. 그러면 바로 역으로 넘어가야지. 옆에서 폰을 두들기는 꼬마를 흘끗 쳐다보며 나는 저녁 노을을 잡아먹는 검은 하늘을 보며 길을 걸었다.
이곳저곳에서 시선이 느껴지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해서 뭐하게. 귀찮게 시리. 인터넷 방송인들이 관종이라는건 유명한 사실이지만,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시선을 즐길정도의 관종은 아니다. 과가 다르다고 과가. 나는 아싸계의 관종, 이런데서 시선을 즐기는 쪽은 인싸계의 관종!
서울시청역 입구로 내려가자, 꼬마도 따라온다. 꼬마도 지하철을 타는 모양이다. 꼬마는 옆에서 뭔가 조잘거리다 전화가 왔는지 스마트폰을 귀에 대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남의 전화를 엿듣는 것은 매너가 아니니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애초에 일행이 아니니 이런 배려를 할 정도는 아닌데. 애초에 이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번잡한 곳에서 전화를 엿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좋지도 않다. 시력은 좀 좋아진 것 같기는 하지만.
“...알았어. 금방 들어간다니까? 딴데로 안새요... 응.”
...목소리가 생각보다 큰데. 전화상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꽤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근데 애는 아직도 왜 내옆에 있냐? 나 분명 개찰구 넘어서 안전문 앞에 섰는데? 가는 방향이 같나? 옆을 흘끔 쳐다보자 꼬마가 조금 침울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었다.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니 나는 신경 꺼야지.
“집 가기 싫다...”
사춘기냐. 나도 어렸을땐 그런 생각을...했었던가? 애초에 시골에서 살았던지라 할 것도 없어서 곧장 집에서 아버지일 도운 것 밖에 기억이 안나는데. 인터넷도 느려터져서 내가 대학생 될 때 즈음에야 좀 초당 1메가바이트를 겨우 넘어선게 우리집 인터넷 망이다. X튜브 영상 하나 보려다 암걸려 죽을거 같은데 놀거리도 없고 애들도 적고 할게 정말 없는 나머지 공부를 하는 곳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논밭과 거름냄새밖에 없는 시골을 탈출했지! 내 인생 최대 업적을 뽑으라면 당연히 시골탈출을 뽑을 거다. 영화관 하나 없어서 영화보려면 저 멀리 나가야 하는 문화빈곤층 생활은 에바였지.
[이번역은 서울 시청역입니다. 다음 역은...]
지하철이 곧 도착할 모양인가 보다. 나는 폰을 집어넣고 후드를 고쳐썼다. 시선이 느껴지니까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인다. 설마 목이 분리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래저래 아슬아슬한건 사실이니까. 인파에 휩쓸려 머리가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카락을 좀더 늘려 목을 탄탄하게 조인다. 이거 집에 돌아가면 목 밑부분에 자국 생기겠네.
얼마 가지 않아 지하철 특유의 소리와 함께 지하철 문이 열리고, 곧이어 나와 꼬마는 지하철 안으로 낑겨 들어갔다.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라 어쩌다 보니 나와 꼬마는 찰싹 붙어있는 처지가 되었다. 정확히는 꼬마가 내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혔다. 미안하지만 굴곡이 얌전한 몸이라 숨을 못쉰다거나 하지는 않수다...
별 느낌은 없다. 애초에 여자애고, 키가 너무 작아서 어린애처럼 보이니 부끄러워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이상성욕자가 아니면 없습니다 휴먼. 꼬마한테 발정하는 놈들은 사람새끼가 아니에요.
“죄, 죄송합니다.”
표정이 왜이렇게 어두워. 아까 수다스럽던 애는 어디가고 우울한 애만 남았냐. 묘하게 눈치를 보는 얼굴이다. 뭔가 느낌이 쎄한데.
“...어쩔 수 없지. 손잡이 잡기 힘들테니까 내 허리나 붙잡고 있어.”
그렇다고 엄마한테 들러붙는 어린애마냥 붙지는 말고. 아임 낫 유어 마더. 오케이? 문에 기댄채로 폰을 만지며 나갔다 들어갔다를 여러번, 버스로 갈아탈 역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가는 곳이 겹친 듯 꼬마도 나와 같이 내렸다.
올라가서 5분이면 버스 정류장이고, 버스타고 스무 정거장 즈음 지나면 집 근처에서 내리고, 햄버거 가게에 가서 햄버거를 사면 오늘 하루도 끝이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또 지긋지긋한 하루가 시작된다.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어.
“언니는 어디 살아요?”
“XX시에서 사는데...”
“와! 저랑 같은 시에서 사시네요?!”
어...그건 또 애랑 같이 버스를 타야한단 소리? 싫다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아는 아싸라서 그런거 부담스럽다. 다행히도 본인도 말할 거리가 줄어들었는지, 버스를 타고 집을 가는 도중에도 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끔 나를 힐끔 쳐다보기만 할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하긴 사람이 콩나물 시루마냥 꽉 들어차 있었으니 수다를 떨기엔 좀 그렇겠지.
결국 같은 역에 내린 꼬마는 길에서 만나면 아는척 해달라고 말하고는 길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정말, 정말 피곤한 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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