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0.설문조사는 전부 보통으로 찍는 타입입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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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간 방안은 전형적인 진찰실에 가까웠다. 곳곳에 비치된 비싸보이는 의료기기들과, 환자를 위해 마련된 등받이 없는 의자에 노트북이 놓여져 있는 책상,
그리고 너구...리?
“...너굴맨?”
“난 라쿤이야 병신아!”
이 너굴...아니 이 라쿤은 또 뭐야. 의사가운을 입고 있는 좀 커다란 라쿤이 의자위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물원에서 본 라쿤보다는 좀 커보이는데. 생긴건 전체적으로 라쿤 같지만 어느정도는 인간의 특징도 가지고 있는지, 의자위에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이족보행 라쿤 실화냐. 당장이라도 ‘의사는 너굴맨이 처리했다구’라고 외칠 것 같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나에게 욕을 날린거냐.
살다살다 이족보행하는 동물한테 욕을 먹어보네. 하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임? 내 앞에 말하는 라쿤이 있다고! 당장 잡아가!
“욕한건 미안하네! 사람들이 하도 나만 보면 너굴맨이라 불러서 짜증이 날 지경이라서 말이야! 너굴맨은 도대체 누구인가! 빨리 자리에 앉아! 바쁘다고! 왜 이렇게 말하는지 묻지 말게! 라쿤의 작은 성대로! 인간의 말을 하는게! 정말 어렵거든!”
너...아니 라쿤맨의 말에 따라 라쿤맨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보통 라쿤보다 몸집이 좀 크긴해도 라쿤은 라쿤이라, 책상위로 보이는건 라쿤의 머리 뿐이었다. 이젠 살다살다 동물한테 진료를 받는거야?
세상은 꽤 오래전부터 미쳐돌아가고 있었어! 이족보행 라쿤의사라니! 휴게실의 수인들은 그래도 생김새는 인간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이쪽은 아예 이족보행하는 동물이잖아? 동물 쪽 함유율이 높은 걸 보니 설마 동물에서 변이한 거야?
혹시 이곳이 이세카이 입니까? 혹시 저 문은 이세계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문이 아닐까? 혹시 여기 X토피아임?
“음! 어디보자! 이유진, 28세! 성별은 남성이었으나 지금은 여성! 변이 형태는 듀라한! 맞나!”
거참 특이한 말투일세. 라쿤맨은 책상위에 올려진 프린트된 내 등록신청 서류를 훎어보며 나에게 물었다. 너...아니 라쿤맨 눈이 똘망똘망한게 머리한번 쓰다듬어보고 싶게 생겼다. 분명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은데 라쿤의 성대가 문제인지, 목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
“네. 거기 쓰여 있는대로에요.”
“머리! 한번! 보여주게!”
뭐, 그 정도야. 나는 머리를 뽑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라쿤맨은 책상위에 조심그럽게 올라와서 내 머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곧 다시 자리에 앉아 옆에 놓인 노트북의 타자를 치며 뭔가를 적어넣기 시작했다.
“아주 흥미로워! 숨은 어떻게 쉬고 있나!”
숨? 별로 의식해본적은 없는데 코로 숨쉬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니 숨은 어떻게 쉬고 있었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의문이 들이밀어지니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머리르 살짝 팔안으로 끌어당기며, 코밑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숨을 들이켰다.
습하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폐에 차오르는 공기의 느낌이 내가 숨을 쉬고 있음을 확신하게끔 했다. 아닐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인간을 벗어났다고는 믿고 싶지 않은데. 탈인간은 머리가 분리된것만으로 족하다. 생각해보니까 머리가 분리되는데 숨을 쉬던 안쉬던 인간을 벗어난건 마찬가지니까 별로 중요한건 아닌거 같다.
“식사는 어떤가!”
“그냥 문제없이 먹을 수 있던데요.”
식사도 못했으면 여기도 오기전에 이미 굶어죽었을 거다. 타다다다다타탁! 경쾌한 타자소리가 이어지고, 라쿤맨은 노트북에 또 무언가를 타이핑했다. 슬쩍 보니 손이 작은데다 사람처럼 손가락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라쿤... 아니 독수리타법으로 치고 있다. 고양이가 타자를 두들기는 짤방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느낌이네.
판사님 이 글은 라쿤이 쳤습니다. 저는 정말로 치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을 조종할 수 있다고 적었는데! 한번 이 컵을 들어보겠나!”
라쿤맨이 노트북 옆 책장에서 새하얀 머그컵 하나를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자라나라 머리머리...나는 오른쪽 옆머리를 살짝 늘려 머그컵을 머리카락으로 감싸서 들어올렸다. 이 정도는 식은죽 먹기지. 이제는 머리카락으로 이족보행도 할 수 있을정도로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정말 판타스틱한! 생물이군! 근육이 있을 리가 없는 머리카락을 팔마냥 움직이고! 머리가 떨어졌는데도 식사와 호흡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아! 변이자에 대한 연구를 10년동안 해왔지만 이런 케이스는 처음일세! 아예 생물의 기본 구조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어!”
“말하는 라쿤도 충분히 판타스틱하지 않나요.”
현실이 아니라 저기 지구4로 가서 우주에서 노셔야 할거 같은데. 저기 은하수호대라고 좋은 직장 있으니 그 쪽으로 넘어가시면 저보다 더 판타스틱한 라쿤맨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로켓하나 어깨에 매고 다니시면 인기 많을 듯.
“물론! 나도 충분히 판타스틱 하지만! 자네도 엄청나게 판타스틱하다네!”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는 라쿤맨은 사람이었으면 꼴사나운 모습이었겠지만, 외형은 완전히 이족보행 라쿤이라 라쿤이 앞발을 들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애들한테 인기 많으시겠군. 언젠가 변이자가 세상에 당당하게 발을 내딛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한 인기 하지 않을까.
도와줘요 라쿤맨! 내가! 왔다네!
조금 커다란 라쿤이 이족보행으로 단상위에 서서 마이크로 연설하면 볼만하겠는데.
“나는 자네가 아주! 흥미로워! 혹시 샘플을 조금 채취해도 되겠나!”
“이상한 연구에 쓰는거 아니죠?”
보통 이런데서 샘플 채취해가면 이상한 연구에 쓰는게 클리셰던데. 영화나 만화보면 갑자기 내 클론이 나와서 내가 진짜가 되겠다며 달려드는 B급 시나리오라던지, 갑자기 언니라 부르며 자매관계를 자칭한다던지 그런거 만드는거 아냐? 나는 그런거 싫은데.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아니 근데 이런거 소설에선 샘플 연구하다 사고나고 그런다고. 좀비사태라도 막 일어나는거 아니야? 듀라한도 나름 언데드 취급받는 언데드계의 터줏대감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라네! 나를 뭘로 보고! 내 경력을 걸고 맹세코 그런일은 없을 걸세! 그저 자네의 유전자를 검사해서! 보통인간과 어떻게 다른지! 변이자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을 뿐이네!”
수상한 일에 몸을 담은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지! 저는 님 경력을 모릅니다. 이 라쿤맨아. 님이 10년이던 수십년이던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돈을 준다면 또 모를까. ‘이유진씨는 자금이 필요해요. 이 라쿤맨은 유료로 해줍니다’같은 전법이면 조금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자기보호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의 개다! 내가 존나 개다! 내가 개띠라서 그런건 아니고.
“백만원!”
어디서 나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가!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서 방송장비도 싼걸쓰고 편집자도 없어서 직접 편집하고 가계부를 적으며 한숨을 쉬는 이팔청춘이라지만 고작 백만원 따위에 넘어가지 않는다! 2주면 나도 백만원 벌 수 있어! 어? 아무리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다지만 100만원정도에 내 개인정보를 넘겨줄 리가 없잖아!
“삼백만원!”
잠깐, 3배? 어...어...어...삼백만원이면 한달 반 정도 되는 수익인데...? 갑자기 3배로 뻥튀기 된다고?
“오백!”
다, 다섯배? 어....어.....어................
“미치겠군! 천만원! 천만원일세! 이게 최대야! 지금 바로 계좌에 직통으로 꽃아주지!”
“콜!”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말을 바꿀세라 나는 머리카락을 한가닥 뽑아 라쿤맨에게 건넸다. 라쿤맨은 내 머리카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 어느샌가 꺼내든 투명한 봉투에 집어넣고 재주좋게 펜을 양손으로 잡고 ‘듀라한 머리카락’이라고 써넣었다.
머리카락 어떻게 뽑았냐고? 내가 뽑으려고 하면 뽑아지더라. 심심해서 한번 해봤는데 되더라고. 고마워 내 배려심 많은 모근아! 덕분에 천만원이 들어왔어!
계좌번호를 알려주자마자 심상치 않은 속도로 내 계좌에 천만원이 직통으로 때려박혔다. 타격감오지네! 천만원! 무한한 감사!
만세! 저걸로 마이크나 더 좋은걸로 바꿔야지! 세연이한테 최고급 수제 햄버거(2만원)도 사주고! 오늘 저녁은 파티다! 돈이 두배로 복사! 복사된다고!
우효! 초 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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