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29화 (29/352)

〈 29화 〉 28.설문조사는 전부 보통으로 찍는 타입입니다(2)

* * *

28.설문조사는 전부 보통으로 찍는 타입입니다(2)

오랜만에 입은 외출복이 불편했다. 엄마가 갖다준 옷들이랑, 내가 산 옷들이랑, 그럭저럭 되는대로 갖춰입고 거울 앞에 서니 비현실적인 외모의 모델이 서있었다.

캡모자와 후드로 머리를 가리긴 했지만 옆으로 새어나온 새하얀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황금색 눈동자는 토파즈를 깎아 박아넣은것만 같다. 피부가 살짝 창백한게 병약해 보이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너는 소갈비도 뼈째로 야무지게 씹어먹는 병약미소녀 본적 있니?

기껏 옷까지 입었건만, 나가기 싫다. 방구석 백수생활을 만끽하던 나에게 호출이라니, 정부에서 부른게 아니었다면 핑계를 대고 빠졌을거다. 국가의 부름은 어쩔 수 없지.

안가면 나만 손해란 것을 아니까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변이자 등록 신청이 접수완료 되었습니다. 익일 오후 3시까지 서울특별시청 내부의 기밀관리본부로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타 사정으로 인해 지정된 시간에 방문하지 못하실 경우, 해당 번호로 연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인터넷 접수 신청으로 끝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귀찮게시리...

사람을 부르기까지 하는걸 보니 생각보다 귀찮은 절차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이 아예 다른 종족으로 변하기까지 하는 데 인터넷만으로 얼렁뚱땅 등록이 가능할 리가 없지. 대충 두시간 정도 버스 갈아타면서 가면 되는 거리니까 휴방 확정이군. 왕복 4시간에 일을 보려면 한시간 정도는 있어야 할테니, 빨리 들어온다 쳐도 저녁이었다. 이참에 바깥에서 장을 보고 들어오면 되겠네.

나가는 김에 옷도 좀 살까. 슬슬 서늘하던 날씨가 조금씩 더위에 잡아먹히고 있는 중이었다. 변이 전에 입던 반팔 티셔츠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오래 입어서 이젠 걸레로 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적당히 반팔티 서너장이랑 돌핀팬츠 두세벌이면 되지 않을까. 노캠방송이니 굳이 꾸미지 않아도 되니까 이런 면에선 편하다.

나는 패션 같은건 모른다. 남자 때도 패션같은건 귀찮아서 적당히 입고 다녔던 사람이다. 어차피 직장에선 정장으로 고정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정장도 이젠 아예 맞질 않아서 옷장 어딘가에 쳐박혀 있지만. 내가 지금 정장을 입어봐야 어린애가 어른 옷 훔쳐입는 꼴 밖에 안된다.

당장 정장 셔츠만 입어도 허벅지의 절반이 가려질 정도로 큰데 입기는 개뿔. 내가 보는 입장이었다면 ㅜㅑ지만, 입는 입장에선 불편할 뿐이다.

목은 어떡할까. 이제 머리카락으로 목을 고정해서 붕대가 필요 없어지긴 했지만, 결국 연결되는건 아니라서 이음매가 보인다.

뭐 남의 목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도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세상은 넒고 변태는 많으니까 조심해서 나쁠건 없지.

기분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세상이다. 대비할건 대비하는게 세상살이에 덜 피곤하다.

머리카락을 조종해 목 아랫부분에 두른다. 딱 단면까지 머리카락이 덮자, 그럭저럭 연결부위가 감춰졌다. 하얀 실이 목을 감싸는 모양이아 악세서리 같기도, 왠 자기 목을 조르는 괴상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눈치챌 사람은 없다. 조금 간지럽기는 해도 붕대로 있는 힘껏 동여매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적당히 손으로 머리를 뽑아보려하기도 하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봤지만 머리는 조금 흔들리기만 할뿐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카락 성능 확실하네.

“...ㅁ...ㅜ...ㅊ...ㅣ...ㄴ...ㄹ...ㅕ...ㄴ...”

오늘도 꼴받게 하는 목소리에 머리만 180도 회전시켜 뒤를 보니, 빨래를 접고 있던 세연이가 갑자기 왠 지랄을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요즘 입이 거칠어진 것 같은데, 내 예전 스마트폰 공기계 가지고 노는걸 못하게 했어야 했나? 점점 갈수록 애가 타락하는 것 같아.

우리애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세연아, 나 나갔다 올게, 집 잘지키고 있어~”

“...ㅇ... ...ㄹ...ㄸ...ㅐ...ㅎ...ㅐ...ㅁ...ㅂ...ㅓ...ㄱ...ㅓ...”

언제적 드립이냐. 나랑 같은 X튜브 보고 있는거 맞아? 혹시 귀신들 전용 X튜브라도 있나?

­­­­­­­­­­­­­­­­­­­­­­­­­­­­­­

[다음 역은 서울 시청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으, 도착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1호선을 빠져나온 나는 스마트폰으로 길찾기 어플을 쳐다보며 지하철역을 걸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복잡하네. 길찾기 어플이 없었다면 꽤나 헤맸을 법한 번잡함이 있었다. 이 시국에 이정도로 사람이 많다니, 공무원들이 꽤나 고생하겠구만.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 답게 곳곳에 비치된 소독약이 눈에 띄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부스에서 소독약을 손에 펴 바르며 특유의 시원함을 만끽했다. 뭔가 소독약 바를때 느낌이 좋더라. 근데 나는 머리카락에도 발라야 하는거 아니야?

시청역은 서울의 중심가라 그런지 정말 넒었다.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번잡하기도 하고. 그래도 시청을 찾는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4번출구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건물이 서울특별시청 건물이었으니까.

민원접수처에서 기밀관리본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알아서 안내해줄거라고 했었으니까...근데 접수처가 어디지? 건물의 면 전체가 유리로 이루어진 기묘한 건물을 살피며 나는 일단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오, 시원하다.

역시 한 나라의 수도를 담당하는 시청이라 그런지, 건물 내부도 세련된 느낌이었다. 이런데서 일하면 일할맛 나겠네. 다행히도 접수처는 입구 근처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줄이 꽤 기네. 번호표를 뽑아들고 자리에 앉아 폰을 만지작 거리다. 기이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나처럼 기묘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보인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옷을 껴입은 사람이나, 건물 안인데도 장갑을 끼고 후드를 뒤집어쓴 모양새라던지, 머리두개는 더 커보이는 사람이라거나. 충분히 위화감을 느낄법한 모습이었지만, 스마트폰을 손에 쥔 현대인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법. 그렇게 관심받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 사람들도 변이자인 모양이었다.

눈알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살펴보기를 여러번, 나는 그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빼고는 속살이 아예 보이지 않는 복장을 한 사람. 마치 피부가 노출되는걸 극도로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랑 비슷한, 노오란색 눈동자가 보였다. 차이가 있다면,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보인다는 것. 고양이?

HOXY...고양이 수인이라도 되십니까?

조금 더 노골적으로 쳐다보자, 고양이 수인(아마?)이 시선을 피했다.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도 더 이상 쳐다보는건 좀 그렇다 싶어 시선을 다시 스마트폰으로 돌렸다. 적당히 웹소설이나 보며 시간이나 떼워야지. 대충 훎어보니 번호표 순번이 꽤 뒤인 것 같아서, 15분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업데이트된 웹소설을 보며 기다리니 금방 내 순번이 찾아왔다. 이 시간대에는 업데이트 하는 소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어제는 피곤해서 그냥 바로 눈을 감아버린 탓에 어젯밤 업데이트된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 17번 창구? 창구 앞에 비치된 의자에 앉으니, 웃음기 어린 얼굴의 접수원이 나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무슨일로 찾아오셧나요?”

“기밀관리본부에서 오늘 찾아오라 해서요.”

“기밀관리본부는 지하 4층으로 가시면 있습니다. 저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건너편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내려가시면 되세요.”

“아, 넵. 감사합니다.”

직원의 말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니, 노출도 0%에 수렴하는 수상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더워 죽을 것 같아. 그게 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같은 변이자니까 목적지도 똑같겠지. 접수원이 말한 엘리베이터는 내렸던 엘리베이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근데 좀...큰데.

사람을 태우는 엘리베이터라기 보다는 화물을 태우는 엘리베이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넒이였다. 내부는 다른 엘리베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니 사람이 타는 엘리베이터는 맞는 것 같다. 변이자 중엔 몸집이 커진 사람도 있는건가. 하긴 나처럼 줄어든 사람이 있으면 커진 사람도 있는거지. 마침 두껍게 옷을 입은 사람중에 농구선수마냥 큰키를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2미터는 되는 것 같네.

반대로 나보다 작은 사람도 있다. 내가 머리 포함 160cm언저리니까 아마 140cm즈음 되는 것 같다. 하필이면 거인 옆에 서있는 탓에 정말 조그맣게 보여서, 거인족과 소인족이 나란히 서있는 느낌이다. 둘다 온몸을 옷으로 꽁꽁 둘러싸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어차피 기밀관리본부인지 뭔지 하는 곳에 가면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엘리베이터를 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2층 내려가는건데 오래걸릴 수가 없는 법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서울특별시청과는 다른, 뭔가 하이테크스러운 분위기의 복도가 나타났다. 먼지한톨 보이지 않는 은색 바탕의 복도가 굉장히 인상적이랄까. 군데군데 설치된 CCTV가 이곳이 경계가 삼엄한 곳이라는걸 짐작하게끔 했다.

마치 정부기관이 아니라 수상한 단체의 비밀연구실 같은 곳으로 가는 느낌인데. 혹시 이거...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모두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머뭇거리고 있으니, 정작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잘 오셧습니다. 저는 기밀관리본부의 안내를 맡은 김창섭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휴게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사무적인 어투였지만, 허스키한 목소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안내역을 뽑은게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분위기 하나는 영화에 나올법한 요원같은 느낌이다.

현실 이기는 창작물은 없다더니, 아직 이 세상은 내게 숨기고 있는게 많은 것 같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