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20.이웃집 흡혈귀 김한솔양(2)
* * *
“으...”
“...정신차렸네. 손가락 몇 개?”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금발 미녀의 눈앞에 손을 흔든다. 정신을 잃은 사람이 깨어날 때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게 이거였다.
“4개...”
아직 상태가 안좋네.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빼고 펼쳐진 손가락이 3개. 옆옆집 이웃의 정신이 돌아오려면 좀 더 걸릴 듯 하다. 머리를 부딫힌 충격이 워낙 컷던지, 일어나려다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린다.
와, 와...
여자여서 다행이네. 남자였으면 얼굴도 못 봤을 거야. 그만큼 옆옆집 이웃의 신음소리가 요염했다는 소리다. 내가 남자였으면 장르가 바뀌었겠지. 이때만큼 TS가 된게 감사한 순간이 없었다. 최소한 외모 때문에 변태로 오인받지는 않을테니까.
“피...피...”
선생님, 거기서는 물이 아닙니까. 뜬금없이 피를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뜬금없이 피를 달라는 금발 적안 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피를 달라고 하는것도 그렇고, 작게 열리는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띈다.
설마 흡혈귀, 그러니까 다른 말로는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그거?
보통이면 좀 이빨이 날카로우시네, 라고 생각할만한데 내 박치기를 버텨낸 두개골 강도와 아무리봐도 '나 보통 사람 아니오'같은 외형을 보니 바로 촉이 왔다.
나랑 처녀귀신이 멀쩡하게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다른 인외들도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옆옆집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이 예상외의 전개는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같은 인외면 이야기가 좀 쉽게 풀릴 확률이 높으니까. 흡혈귀니까 내가 듀라한인걸 숨길 필요도 없을테고, 잘하면 내가 잘 모르는 정보까지 캐낼 수 있을 거다. 어차피 옆옆집 이웃이니까 시간을 들여 친해지면 될 일이고.
“피...피가 필요해...”
친해지기 위해선 여기서 조금이라도 빛을 쌓아두는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니가 그래놓고 빛 운운할 군번이냐는 듯 처녀귀신양이 꼬나보았지만 나는 쉿, 하고 입가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며 주방에 섰다.
범죄도 안걸리면 범죄 아닌거 몰라? 말하면 햄버거...알지?
처신 잘하라고. 어?
처녀귀신의 시선이 금새 다소곳하게 내려앉았다. 자본주의는 위대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자본가가 되려고 하는거야. 혁명 마렵다는 생각이 들면 통장 잔고를 확인해 봅시다. 돈이 없어서 혁명 마려운거지 돈 있으면 배부르고 따뜻한게 최고야. 이 세상에 돈보다 좋은게 없다. 안 닥치면 돈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주방 어디에 뒀더라? 피는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대체제가 필요했다. 병원가서 수혈팩달라고 하면 미친년 취급받고 경찰에 신고당할거 아냐. 어차피 머리가 이 모양 이꼴이라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지금도 어거지로 연결해놓은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몸을 살짝 앞으로 굽히고 걸어야 했다. 제대로 서려고 하면 머리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또 한번 떨어질 테니까.
머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선반을 뒤적거리며 물건을 찾는다. 직장인 시절에 챙겨먹었던 약들을 정리해놓은 선반이었다. 변하기 전에는 하루에 세번씩 챙겨먹었는데, 이렇게 변하고 나서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쌩쌩해져서 구석에 쳐박아 둔 것들이었다.
선반을 뒤적거리다 가장 구석에 쳐박혀 있던 약통을 꺼냈다. 철분 보충제. 피도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으니까 으깨서 물에 타면 결과적으로 피를 섭취한거랑 똑같은거 아닌가? 보통 피 모자라면 생기는게 빈혈이니까. 빈혈있는 사람은 철분 보충제 먹으라고 했으니 철분 보충제를 물에 타서 마시게 하면 피 대신 할 수 있는거 아니야?
얼마나 넣지? 머그컵에 액상 철분 보충제를 적당히 털어넣는다. 네봉지면 충분하겠지. 적당량 같은건 계산하지 않는다. 흡혈귄데 적정량 초과했다고 문제가 생기겠어? 나는 내 머리에 정면으로 충돌했는데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흡혈귀녀의 몸을 신뢰했다.
찬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투명했던 물을 어쩐지 건강에 좋을 것 같은 색으로 물든 액체로 만들었다. 이거 색깔 홍초 같은데. 철분 보충제라서 그런지 비린내가 난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지옥같은 액체다.
뒤틀린 황천의 영양제...
나는 컵에 끝이 휘어지는 빨대를 꽃아넣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자의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빨대를 물려주었다.
쪼옥쪼옥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마냥 컵안의 내용물을 깔끔히 비운 금발 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으...맛없어...이건 피가 아니잖아.”
“상식적으로 피가 일반 가정집에 있을 리가 있겠음?”
“그렇긴 한데...누구세요?”
“옆옆집 이웃인데, 복도에서 쓰러져 있길래 일단 데려왔는데.”
“내가 왜 기절했지? 피도 제때 마셨는데...”
너무 조심성 없이 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어쩌려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포...포...포...포테이토양은 정신을 차렸는지 상체를 휙 일으키며 나를 째려보았다. 나와 금발 머리 흡혈귀의 눈이 마주쳤다.
역시 이 년 눈으로 뭔가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거, 수작 좀 그만 부리지?”
“뭐야, 왜 안 통해?”
“아니, 같은 인외끼리 그러지 맙시다. 너 흡혈귀잖아.”
“아니 그게 무슨...뭐야, 변이자에요?”
“변이자?”
그게 뭔데 씹덕아. 지만 아는 용어 꺼내지 말라고. 대충 뉘앙스로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긴 하는데. 나랑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말하는 거지? 그렇지? 판타지 소설만 10년 넘게 읽은 짬이 있다. 척하면 척이지.
“설마 미등록자에요?”
“등록이고 뭐고 처음듣는 이야긴데.”
이 나라에 그런 제도가 있었다고? 그런 제도가 있다는건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내 생각보다 판타지 함유율이 높은 모양이었다. 0.00000001%즈음 될줄 알았는데.
조금만 있으면 게이트 열리고 몬스터들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겠네. 곧 성좌도 튀어 나오는거 아냐?
어느쪽이던 주옥같은 세상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판타지는 사절이야. 소설 속 주인공은 뭔가 개쩌는 재능이나 스킬같은거라도 받지... 나는 대가리 하나 분리되어버린게 끝이다. 액션물은 볼때나 재밌지 내가 하면 재미없는 법이다. 원래 싸움은 하는거보다 구경하는게 더 재밌으니까.
“용케 지금까지 안들켰네요.”
“이야기 꺼낸 김에 설명좀 해줘. 대충은 알겠는데, 설명이 필요해.”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변이자가 여기에 이사올 줄은 몰랐는데...알았어요.”
대충 변이자라는건 나나 내 앞의 흡혈귀처럼 갑자기 다른 종족으로 변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한다. 대부분은 정부에서 만든 비밀기관에서 먼저 눈치채고 요원을 파견해서 등록을 시키러 온다고 하던데, 가끔 담당 공무원 놈들이 공무원해서 나처럼 변이했음에도 방치되는 변이자가 드물게 있다고 한다.
보통은 변이자들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니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알려지는 일이 있어서 그럴땐 비밀기관이 필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한다고.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등록 꼭 해야돼?”
“등록안하고 버티다 큰 사고 친 다음에 등록하는 것보단 훨씬 나아요. 번호 알려줘요. O톡으로 등록사이트 링크 보내줄게요.”
폰 번호를 알려주니 곧바로 O톡이 왔다.
링크만 올려져있는 심플한 O톡이다. 링크를 눌러 들어가보니 전형적인 정부 사이트가 나타났다. 배너를 훎어보니 변이자 등록 신청 외에도 변이자를 위한 의료서비스 지원이나 취업알선 신청 같은게 보인다. 생각보다 수가 많나보네. 숫자가 수십명 단위였으면 이렇게 체계적인 지원같은걸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근데 생각보다 변이자 수가 많나봐?”
“한국에 오천명정도 있다고 하던데요.”
“와, TS가 오천명?”
암컷타락 한 사람은 몇명이나 되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성별 바뀐 사람은 거의 없는데?”
“?”
그 많은 변이자 중에 성별까지 바뀐 사람이 그렇게 적다고?
에반데...
정말로 암컷타락한 사람 있으면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설마 남자에요?”
“이젠 여잔데.”
“와, 에반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뚝배기로 후려쳐 버릴라.
듀라한 뚝배기 맛 좀 볼래?
“그럼 뭘로 변했어요? 요정? 아니면 저랑 같은 흡혈귀? 그 레게머리랑 관련 있어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어온다. 내가 뭘로 변했는지 눈치 못 챘나? 아까 내 머리에 맞은게 기억을 깡끄리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듀라한 뚝배기...기억 제거에 특효...메모...
“듀라한인데.”
“네?”
나는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뽑아냈다. 팔을 위로 쭉 뻗은 덕에 시야가 급격하게 높아져, 머리를 45도 정도 기울여서야 금발 머리, 감자녀를 볼 수 있었다.
“어, 어...”
듀라한 처음보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