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18.자라나라 머리머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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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자라나라 머리머리(3)
당신을 탈모빔에 맞았습니다.
30초안에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외치지 않으면 머리가 빠질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30...29...28...
“자라나라 머리머리...”
27...26...25...
“자라나라 머리머리...”
힘없이 거울을 쳐다본다. 머리가 너무 가볍다. 내 머리 무게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머리카락이 사라지니 입영전날 빡빡밀었던 군대머리가 떠오른다. 머리카락 속에 숨겨져있던 새하얀 속살이 눈부시다. 이런 건 알고 싶지 않았어...바닥을 빗자루마냥 쓸고다니던 내 머리를 되돌려줘...
어깨에 차가운 손길이 닿는다. 머리를 뒤로 돌려 확인해보니 1미터짜리 머리카락을 가진 처녀귀신이 나를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거 입가에 묻은 햄버거 소스는 좀 닦고 오면 안되냐.
“...나랑 머리 바꿀래? 지금이면 햄버거 다섯 개도 줄 수 있어.”
야 어디 가! 농담을 진담처럼 받아들이지마! 덜덜 떨면서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지도 마! 아무리 그래도 귀신 머리 똑 떼다가 머리에 붙이는 미친짓을 내가 할 리가 없다. 정말이다. 정말이야.
...사실 조금 혹했습니다. 역시 탈모빔 맞은 밤톨머리보단 관리하기 어려워도 물결이 굽이치는 폭포수같은 장발이 좋습니다. 머리야 다시 자라나라 머리머리!
“자라나라 머리머리!”
“...ㅁ...ㅜ...ㅊ...ㅣ...ㄴ...ㄹ...ㅕ...ㄴ...”
이젠 아주 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 꼴받네. 산 사람도 아니고 죽은 사람한테 동정받을 줄이야. 자긴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남아 있다는 거지?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 버릴까? K드라마로 숙달된 머리카락 뜯기 신공이 뭔지 보여줘?
뜯기기 싫으면 처신 잘하라고. 어?
“근데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왔어?”
귀신이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킨다. 컴퓨터? 내가 방송하는거 구석에서 계속 지켜보더니 채팅창 구경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참 좋은거 배우는구나...그래...근데 내가 할말은 아니네. X수들이랑 지지고 볶고 하는게 내 일이니까.
처녀귀신이 X수들 하는 꼬라지 보고 이상한 말만 배우지 않으면 된다.
“...ㅇ...ㅜ...ㅎ...ㅛ...”
“우효 같은 소리하네 시발.”
욕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아예 금발염색에 태닝까지 하고 오지 그러냐.
금발 태닝 양아치 처녀귀신이라니, 한번 보고 싶기는 하다. 어디에도 없었던 신선한 조합이 아닌가. 나는 머리를 손과 손으로 머리를 굴리며 금발 태닝 양아치가 된 이세연양을 상상했다. 귀신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건지, 새하얀 소복 대신에 체형을 짐작하기 힘든 새하얀 원피스 하나만 입은 이세연양은 내 눈짐작으로 꽤 몸매가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인 치고는 라인이 확실하게 나와있는 느낌?
금발 태닝 양아치의 기본 덕목인 육감적인 몸매는 충분하다. 얼굴은 처녀귀신 특유의 파리한 얼굴이라 그렇지, 좀 태우고 바르고 하면 충분히 먹힐만한 얼굴이지 않을까. 원래 여자의 얼굴은 화장으로 반즈음 먹고 들어가니까.
금발 태닝 양아치가 된 처녀귀신을 상상해본다.
‘...ㅇ...ㅜ...ㅎ...ㅛ...ㅊ... ...ㄹ...ㅓ...ㄱ...ㅋ...l!’
목소리가 문제구나. 저 쇠 긁는 것 같은 듣기 거슬리는 목소리가 깬다. 저게 저 귀신만 저런건지, 아니면 귀신들 특징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저 처녀귀신 말고 다른 귀신을 본적이 없다. 귀신이란게 생각보다 흔한 존재는 아닌가?
나는 혼자서 구석에 쳐박혀서 잘 놀고 있는 처녀귀신을 내버려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탈모고 나발이고 다 그만두고 싶다...머리가 짦아졌든 말든 습관적으로 머리를 만지작 거리니 절로 욕이 나온다.
시발.
내가 뭐 사이버펑크 2021을 찍는것도 아니고 어떤 수요가 있다고 이런 모습이 된건지. 좀 만있으면 아주 그냥 대가리에 칩이라도 박고 헛소리를 주절주절거리겠네. 한국에 큰 물은 한강밖에 없어요. 시발.
그래도...사이버펑크 꽤 멋있지 않나? 때깔은 좋잖아. 스킨헤드 만큼 얼굴이 받쳐주면 멋있는게 없다. 이렇게 된 김에 스킨헤드에 도전해 볼까.
미소녀 은발 스킨헤드 여중생 듀라한...점점 이상한 수식어가 늘어나는 것 같은데.
하나같이 강렬한 수식어들만 모아놓으니 싸구려같은 느낌이다. 도대체 누굴 대상층으로 보는건지 알 수 없는 조합. B급 감성 그 자체다. 이게 병도, 타의에 의한것도 아니라면 그냥 클리셰같은것도 괜찮으니까 머리카락이나 돌려줬으면 좋겠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내일은 머리가 길어졌으면 좋겠다.
“ㅇ... ...”
얼굴이 아주 기분좋은 감촉에 쌓여있다. 마치 아기 고양이의 배에 얼굴을 부빈 것 같은 이 보드라운 감촉은 닿는것만으로 마음이 풀어지는 효과가 있었다. 마치 자궁속에 다시 들어온 느낌이랄까. 아니 이 비유는 좀 변태같나.
시야가 어둡다. 지금 몇시지? 몸을 허우적대며 폰을 찾는다. 하지만 매일 폰을 놓는 베게 옆에서 만져지는 감촉은 충격흡수에 뛰어나다는 인조가죽 케이스의 감촉이 아닌, 어딘가 익숙한 감촉이었다.
“뭐야...?”
눈을 뜨니 익숙한 은색 실이 보인다. 아니, 보인다 수준이 아니다.
은색 실이 내 시야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침대에도, 바닥에도, 책상에도.
머리카락이...돌아왔어?
목근육을 튕겨서 머리를 세운다. 목 단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무거워진 뒷머리가 내가 다시 장발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끔 했다.
결국 머리카락이 줄어든 이유는 뭐였을까.
털갈이? 듀라한은 짐승인가? 아니면 머리카락이 사춘기라도 온건가? 아니면 설마 생리같은 건가? 이미 종족도 하는짓도 판타지다보니 술먹고 할만한 개소리라도 묘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냐! 뜬금없이 탈코르셋 선언하게 된 머리가 다시 제정신을 되찾았다는게 중요하지!
무~야호! 무야~호!
그만큼 기쁘시다는 거지!
기쁨을 만끽하기도 잠시, 나는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머리카락을 보며 사치스러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이 길어도 너무 길어. 못해도 10미터는 넘은 듯 했다.
자기 직전까지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외친 것 때문일까, 과하게 성장한 머리카락이 라푼젤 마냥 방안을 메우고 있다. 내 연약한 몸은 머리카락이 얽히고 섥혀서 명주실에 감싸인 누에고치 마냥 묶여있고, 방안의 온갖 물건들이 머리카락이랑 엮여 엉망이 되었다. 이정도면 이 3층짜리 방 창문에 머리를 내밀고 머리카락을 꺼내면 정말 바닥에 닿을지도 모른다.
정말 병신 같은 생각이군.
정말 병신 같은 생각이야...
나는 몸을 조심스럽게 꼼지락 거리며 몸 곳곳에 얽힌 머리카락을 풀었다. 다이아몬드로 실을 짜도 이렇게 튼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머리카락은 내 연약한 몸으로는 벗어나기 힘들었다.
머리카락과 사투를 벌이길 30분, 겨우 머리카락에서 벗어난 내 몸을 움직여 내 머리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제 혼자서 마찰력을 무시하는 듯 부드럽게 끌려오는 머리카락이 점점 손에 휘감긴다.
“너도 와서 좀 거들어봐. 안 그러면 너 햄버거 못먹어.”
언제나처럼 구석에 짱박혀 있던 찐따귀신 이세연양은 내 말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머리카락 푸는걸 도와주기 시작했다. 한동안 방안에는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만으로 가득했다.
스윽스윽
어떻게 정리해서 침대 위에 차곡차곡 쌓아놓으니, 머리카락 뭉치만 내 몸 만했다. 이걸 또 어떻게 하지. 머리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은 마치 사극에서 상궁들이 쓰는 가채같은 느낌이다. 단적으로 말해 미칠듯한 무게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머리카락이라도 10미터즈음 되면 거의 머리가 하나 더 늘어난듯한 무게다.
머리카락이 너무 짦아도, 길어도 문제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라푼젤 마냥 머리를 땋아볼까?
“혹시 머리 땋을 줄 알아?”
나는 전직 남자라서 그런거 할 줄 모른다. 남자가 머리를 땋을 일이 뭐가 있어. 애초에 귀찮아서 머리도 매번 짦게 자르고 다녔는데. 다행히도 우리 처녀귀신은 머리를 땋을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야, 햄버거 하나 더 추가 해줄 테니까 머리 땋기 콜?”
처녀귀신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햄버거는 못 참지.
세연이는 침대 밑에 앉아 내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잠깐 눈이라도 감아야지...
머리를 훎는 서늘한 감촉에 눈이 감긴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간다.
나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시발년아 머리를 땋으랬지 힙합전사로 만드라고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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