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8화 (18/352)

〈 18화 〉 17.자라나라 머리머리(2)

* * *

아버지, 제 몸이 이렇게 바뀌어도 탈모 유전자는 살아남았어요.

제 머리가...제 머리가 짦아지고 있어요...

이 무슨 바퀴벌레보다 질긴 유전자. 인외가 되어도 탈모는 피해가지 못하는 운명인가봐요...

유전자가...유전자가 너무 강함!

“ㅁ...ㅓ...ㅁ...ㅓ...ㄹ...ㅣ”

“개소리 집어쳐! 내가, 내가 대머리가 될리 없잖아!”

여자는 탈모에 잘 안걸린다고! 그렇게 들었단 말이야! 탈모라는 잔혹한 운명에서 벗어난거라 생각했는데!

탈모는 TS로도 막을 수 없단 말인가! 누가 나에게 탈모빔을 쏘았는가!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여중생이 두상이 이쁜 여중생이 될 리가 없다고! 차라리 군바리컷이 낫지!

이런 현실 난 인정할 수 없어!

TS를 원하는 누렁이들아, 기억해둬라...탈모는 TS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전능하신 아키라트여 영원하신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한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전능하신 아키라트여 영원하신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한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전능하신 아키라트여 영원하신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한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ㅁ...ㅓ...ㅁ...ㅓ...ㄹ...ㅣ”

나는 말없이 싱크대에서 가위를 꺼냈다. 고기를 자를 때 쓰는 가위지만, 오늘은 죽은 자의 고기를 자르는 엑소­시저다. 미술시간에 색종이를 자를때가 생각나는군...삐뚤빼뚤한 동그라미를 보고 짝꿍이 비웃었지... 찰캉찰캉 소리가 아주 감미롭구나.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처녀귀신이 방 구석으로 도망치지만, 도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눈치 없는 자는 벌을 받아야 하는 데스우...

이세연양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고 끌어당긴다. 아주 서늘하고 차가운 감촉과 함께, 다리를 붙잡힌 이세연양(향년 24세)는 양팔을 허우적대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근력의 상하관계에서 내가 우위라는건 요 일주일간의 경험으로 명확해진 상태였다.

“머리 딱 대!”

합리적인 처벌이 처녀귀신의 머리카락을 노린다! 너도 탈코르셋 머리로 만들어주지! 너도 이제 페미전사가 되는거야!

나는 처녀귀신의 배위에 올라타 머리카락을 붙잡고 가위를 갖다댔다. 처녀귀신의 머리카락에 닿은 가위가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고 통과한다. 아쉽게도 일반적인 가위로는 처녀귀신의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쳇.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대 귀신 결전병기, 맛소금을 꺼낸다.

그리고 컵을 꺼내 싱크대에서 수돗물을 담아 그 위에 맛소금을 한숟갈 넣는다.

니들은 성수의 재료가 소금이라는걸 알까? 서양도 그렇고 동양도 그렇고 귀신 쫒는데 소금이 최고다. 동서고금 귀잘알들은 소금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했다. 가위로 성수(소금물)을 휘휘 저어주며 다시 구석에서 벌벌 떠는 처녀귀신에게 다가갔다.

“자, 어디 한번 잘라 볼까? 내가 이래뵈도 고기는 잘 자르거든?”

전 직장에서도 1년 넘게 회식때 고기자르기 담당이었다고! 망할 최부장은 고기 존나 못자른다고 맨날 나에게 쿠사리를 먹였지! 본인은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회식 분위기를 박살내서 뒤에서 존나게 씹히던 주제에!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아주 천천히 가위를 가져다댄다. 가위를 몇 번 움직이니 쇠끼리 긁히는 소리가 자취방안에 울려퍼진다. 어제 갈아두었던 가위날이 전등 빛을 반사해 당장이라도 저 수두룩 빽빽한 머리카락을 잘라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처녀귀신은 도망 못친다. 그래도 바깥에 나갈 수 있는 나완 다르게 이 처녀귀신은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지박령이기 때문에, 도망쳐봐야 자취방 안의 어딘가였다.

침대 밑에라도 숨으면 잠시동안 평화를 만끽 할 수 있겠지만, 내 화를 돋굴 뿐이다. 엔딩은 변하지 않아.

엔딩은 배드엔딩 하나란다. DLC도 없어. DLC엔딩을 원하면 펀딩이라도 하던가. 물론 먹튀 엔딩이지만. 그러니까 순순히 머리를 내밀거라...너도 탈코르셋하는거야...탈코르셋 처녀귀신이라니, 아주 끝내주는 조합이지 않니? 온 세상이 너가 처녀귀신인걸 알게 해줄게...

아쉽게도 가위는 처녀귀신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고 통과했다. 역시 짜가 성수로 축복받은 가위로는 안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성수는 사제만이 만들 수 있는가...직업변경권이 절실했다. 왜 현실에는 직업변경권이 없는가! 나도 돈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누가 백수에서 돈 많은 백수로 직변권 사줘...

내가 자기 머리를 자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처녀귀신 세연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것은 가위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한 컵 남았다. 짜가 성수라도 성수는 성수. 네 머리에 뿌리면 땜빵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가위를 내팽개치고 희멀건한 소금물이 찰랑거리는 컵을 든다.

유리컵이라 내용물이 훤히 보이니 이세연양의 얼굴이 다시 공포에 물들었다...그래, 한 방울, 한 방울씩 머리에 떨어트려줄게...

“...ㅍ... ...ㄱ...ㄹ...ㅕ...ㄱ...ㅁ...ㅓ...ㅁ...ㅊ...ㅜ...ㅓ...”

“폭력? 포옥력? 이건 정당한 체벌이란다. 세상에는 건들면 안되는게 있는거야...”

대머리를 욕한자, 이 지옥불반도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수많은 탈모인들이 너를 심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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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서 자기 몸을 끌어안고 훌쩍거리는 처녀귀신을 무시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방송을 해야한다. 먹고 사는게 걸렸는데 갑작스레 탈코르셋 페미전사가 되던 말던 일은 해야 하니까.

아직 켜지지 않은 모니터에 반사된 내 머리를 본다. 요리조리 뜯어보니 이것마저 어울린다. 이젠 좀 보이시한 스타일의 미소년 같이 보이네. 이 정도면 대머리도 소화할 수 있는거 아니야?

대머리가 된 나를 상상해 본다. 반질반질한 머리를 가진 스님이 된 내 모습이다.

...차라리 모히칸 머리가 나을지도 모른다. 이 얼굴이면 그 어떤 아포칼립스한 패션도 소화가능할지도 모른다. 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잖아. 일찍이 흔히 말하는 꽃미남 꽃미녀 연예인이 일반인은 전혀 소화할 수 없는 괴상한 패션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케이스가 한두번이 아니다.

O빈이라던가. 그 어떤 촌스러운 패션도 미소녀는 소화할 수 있다! 얼굴값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겠지만!

그런데 왜 줄어드는 거야. 머리가 자라나는 것도 아니고 빠지는 것도 아니고 줄어든다. 시간 역행이라도 하는 건가? 머리 속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내가 의사선생님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최소한 이게 현대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최소한 나랑 같은 듀라한이나 그 비스무리한 존재라도 알아야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같은 녀석이 또 있을 리가 있냐고 하기엔 이미 나라는 선례도 있고, 거실에서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훌쩍거리는 처녀귀신도 있다.

흡혈귀, 도깨비, 구미호, 좀비, 기타등등 그런 초현실적인 존재가 실존할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반즈음은 확정이다. 좀비까지는 모르겠지만 흡혈귀는 있을법 하다. 흡혈귀...이쁘겠지?

듀라한도 왠만한 여돌(여자아이돌)을 오징어로 보이게 할만큼 이쁜데 흡혈귀도 그정도는 하겠지? 한번 보고싶다...

엄지 발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킨다. 슬슬 방송 세팅을 할 시간이다. 일단 방송이 끝나면 방법을 찾아보자...저 구슬프게 우는 처녀귀신좀 닥치게 하고.

“자라나라 머리머리...”

훈련병 시절을 연상캐 하는 뒷머리가 서럽다. 살아생전 이 밤톨머리를 다시하게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머리가 짦아져봐야 이제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데. 기분 잡칠때마다 머리카락 빗질하면 기분이 도로 좋아졌는데...내 머리카락...

“자라나라 머리머리...”

구슬프게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외치면서도 내 몸은 충실히 방송 시작을 위한 세팅을 하고 있다...이것이 바로 관성의 법칙인가, 아니면 그저 방송인의 직업병인가.

“자라나라 머리머리...”

방송 시작 10분전, 자리에 앉아 책상 앞에 머리를 놓고 빗을 꺼낸...난 공허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시청자들이 방송이 켜졌다는 소식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0, 20, 30, 40...이윽고 90여명까지 찬 시청자수는 평소의 절반정도. 이정도면 하꼬치고 시청자는 꽤 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왕이면 1000명단위까지 올라가보고 싶은데.

성장세가 가파른 정도는 아니고 완만하게 올라가고 있지만, 역시 시청자를 극적으로 늘리려면 노출될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캠방도 아닌 내가 어떻게 시청자 수를 쉽게 늘리겠어?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빛의 봉인검에 묶여서 쓰지도 못해.

답은 듀라한 스트리머들끼리 합방이라도 하는 거지만, 컨택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듀라한들끼리는 어떻게 연락하고 다니는 거지?

“자라나라 머리머리...”

아, 방송하기 싫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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