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4.응애 나 아기 듀라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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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나 아기 듀라한!
28짤!
귀신과 눈이 마주쳤어!
방구석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흐릿한 형체가 보여! 머리가 땅바닥을 쓸고 다니는거 보니까 처녀귀신이야! 이건 무조건 처녀귀신 각이야! 얼굴, 얼굴을 보자! 알고보니 장발 남자였다거나 그러면 머리를 쪼개주마! 처형이야 처형!
생애 첫 심령현상 목격에 흥분한 나는 중개인에게 방을 조금 더 구경해도 되냐고 부탁해서 키를 빌렸다. 한번 더 둘러보고 열쇠 반납하러 오라고 하더라. 가끔 있는 일이라 의심을 하진 않는 듯 한가보다. 중개인이 떠나자마자 방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는 귀신한테 손을 흔들어 본다.
손을 상하좌우로 움직인다. 난데없이 자기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당혹스러운 듯 처녀귀신(추정)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내 손을 따라 머리를 움직였다. 오, 반응한다. 희멀건한 눈깔에 창백한 피부, 목에 난 끔찍한 자국. 사인은 교살, 혹은 목 매달고 자살일까? 뭐 범죄드라마나 추리물 보면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난 모른다. 일단 얼굴만 보면 내 또래 같긴 한데. 내가 추리 해낼 수 있는건 액면가 정도다.
이정도만 해도 벅고 사는데 충분하잖아? 점쟁이 할것도 아니고. 난 무속인은 질색이야.
귀신도 난생 처음 보는 반응에 당혹스러운 건지,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나를 관찰하고 있다. 귀신과 눈이 마주친 나는 이상하게도 동요하지 않았다. 현실감이 있다 없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귀신을 보아도 섬뜩하거나 미지에 대한 공포같은... 그런거? 그런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질 않는다고 해야할까. 마치 모니터 너머에서 호러게임에서 튀어나오는 귀신을 보는 느낌이랄까. 참 신기한 감각이다. 그래도 귀신한테 쫄아서 공격당하지 않은게 어디야. 원래 사람은 뭘하던 뻔뻔해야 먹고 살기 쉬운 법이다. 그래도 범죄는 뇌절이지만.
신기하게도, 저 귀신이 나를 해할 수 없을거라는 확신이 있다.
트리위키에 듀라한은 저승사자 속성도 가지고 있다고 써있었지?
그게 나한테도 적용되는 거라면, 아마 내가 귀신을 보아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게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귀신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게 우리의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나는 듀라한이고, 어떻게 보면 동족이고, 트리위키의 설명에 의하면 저승사자다. 저승사자가 귀신을 무서워할 리가 있나. 저승사자들은 귀신 잡아가는게 일이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도 어느쪽이던 심장이 멀쩡하게 뛰는 산 사람은 아니어서, 아마도 동족인 녀석들끼리 공포감을 느끼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지 않을까.
귀신이 귀신 보고 놀라는건 꽤 유명한 클리셰긴 하지만.
“저기요. 귀신씨? 계속 그러고 있으면 허리 안아프십니까?”
귀신에게는 허리디스크가 없는 모양이었다.
“...”
대답이 없다. 시체인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저러고 쳐다보기만 하는 건가. 귀신이 해코지 한다느니 그런건 다 구라였나? 아니면 저 귀신이 특이한건가. 해결되지 못할 의문만 쌓여가니, 시시해졌다.
난생 처음보는 귀신에 좀 흥분하긴 했지만, 반응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한번만 더 해보고, 반응 없으면 그냥 가야지.
일을 저지르기 전에 앞서, 뒤를 돌아본다. 문은 굳게 닫혀있다. 내 비밀을 훔쳐볼 사람은 없다. 나는 귀신 앞에 주저앉아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었다. 붕대가 사라지자 지탱할 것을 잃은 내 머리가 굴러 떨어진다. 하도 떨궈서 이젠 어지럽지도 않다.
“.ㄹㄴㅁ으라?ㄷ룬어ㅏ루미ㄷ러우림ㅈ둘ㅇ냐ㅓ루무리너디”
이게 귀신역전세계...?
귀신이 왜 사람을 보고 놀라? 머리랑 몸뚱아리 분리되는 걸 보고 안 놀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냐마는. 넌 귀신이잖아.
그렇게 놀라실 것 까지야. 괜히 무안해지네.
몇걸음 다가가자 기겁하며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으로 도망치는 귀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이렇게 놀라. 머리 없는 사람 처음봤어? 귀신 업계에선 머리 없는 귀신 흔한거 아니야? 괴담에는 자주 나오던데. 목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남자라던가, 자기 머리 들고 돌아다니는 귀신이라던가...어릴적에 유행했던 괴담 만화책에선 단골 소재였는데.
지박령이라 그런거 못보나? 귀신들은 모임같은거 없어? 아 지박령들은 아싸라서 다른 귀신 못 만나나? 귀신들도 반상회 같은거 안하나? OO빌라 지박령 반상회 그런거.
먼지가 소복히 쌓인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를 다시 주워 먼지를 턴다. 얼굴과 머리에 묻은 먼지가 불쾌하다. 아, 그냥 들어서 뽑을걸. 놀래킨다고 너무 오바했네.
“거, 놀라지 좀 말고 이야기 좀 해봅시다.”
“...A....R...”
혹시 귀신은 사람말을 못하나? 아니면 귀신만의 언어가 있나? 한국말 못해? 혹시 외국인이야? 난 다른 나라말 못하는데. 제 2외국어도 맨날 반타작을 넘나들었다고. 영어는 취업에 필요한 최저점도 간신히 받았고. 외국인이 길을 물어봐도 어버버하다가 도망갈 자신이 있다.
그럼 분신사바라도 해야돼? 눈앞에서 분신사바하면 펜 잡고 이름이라도 써주려나? 다음에 올땐 종이랑 펜도 가지고 와야겠다. 일단 되는대로 내뱉어 볼까.
“hey, you. you’re finally awake?”
“こんにちは?”
“Здравствуйте?”
우리 (전직)인간답게 사람 말 하면 안됩니까? 내가 귀신을 노려보자, 귀신은 겁에 질린 얼굴로 더 구석에 쳐박혔다. 아니 왜 그래. 그러니까 내가 괴롭히는거 같잖아...같은 찐따끼리 사이좋게 지내자...너(자발적)도 아싸, 나(타발적)도 아싸니까 오늘부터 친구하자...
아싸는 아싸해서 친구 못한다고? 닥쳐! 라떼는 말이야 아싸도 깍두기라고 껴주고 그랬다고!
근데 깍두기가 뭐지?
해칠 생각 없다고 의사표현이라도 하면 좀 진정하나? 나는 두 손을 들고 해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필사적으로 어필했다. 뒤에서 누가 보고 있으면 왠 미친년이 미친짓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순간 등골이 오싹해서 현관문을 휙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는다. 다행이야...
밤중에 이불킥 찰 일은 없겠네...
나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걸 보다보니 그제서야 좀 진정된건지, 귀신은 떠는 걸 멈추고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생긴게 좀 시체처럼 보여서 말이지, 생전에는 꽤 예뻤을지도 모른다. 꽤 어려보이는데. 적어도 나보다 액면가가 두세살정도 많아보인다. 지금 내 액면가가 중학생~고등학생 사이니까, 기껏해야 대학생인가.
아닌가? 그냥 처녀귀신 보정인가?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녀귀신 나오면 잡티하나 없는 창백한 피부에 하얀 소복입고 다니잖아. 살아있는 사람도 귀신되면 여드름 같은거 안보이더라고. 귀신되면 피부 미백 효과가 쩌나봐.
“이름이 뭐에요?”
“...연.”
“뭐라구요?”
“...이..........세...연.”
“내 이름은 이유진인데. 같은 이씨네? 전주 이씨야? 아님 경주 이씨?”
난 어디더라? 전주 이씨였던 것 같은데, 별로 신경써본적 없는 일이라 잘 모른다. 자기 성씨가 어느 쪽인지 알 필요도 거의 없는 세상이고 쓸 일도 없어서...어릴적에는 그래도 좀 신경쓰셨던 것 같은데, 우리집은 가까운 친척도 별로 없다보니 더 신경쓸 일이 없다.
“...나...가...”
아까도 똑같은 말 하더니, 이번에도 그러네. 이 집에 그렇게 까지 집착할 이유가 있나. 아니면 ‘혼자있고 싶으니 나가주세요’같은 거야? 아니면 죽어서도 주거권을 주장하는거야? 귀신의 귀권을 보장해주는 법은 없으니 이 집은 빈집이다. 그리고 내가 입주할거다. 그럼 법적으론 이제 내 집이라 이거야.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아 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15분정도 지났네. 슬슬 안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귀신과의 흥미진진한 대화를 더 해보고 싶지만, 일단 오늘은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한 것도 아니라 오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저 아저씨도 퇴근은 해야지. 일단 나는 이 월셋방에 입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귀신이 나한테 달려들면 좀 고민했을텐데,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귀신이면 해코지 할 생각도 못하지 않을까?
돈 들어갈 일 없는 좋은 대화상대도 생겼고!
“그럼 난 가볼게. 다음에 봐!”
“....오...ㅈ...ㅣ....ㅁ...ㅏ...”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인건 착각이지? 귀신이 사람한테 겁먹어서 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 없단 말이야.
열쇠나 반납하고 집에나 돌아가자.
현관문을 닫기 전에 손을 흔들어준다. 역시 배웅해주진 않나보네. 친구끼리 너무하네~ 한국인은 옷깃만 스쳐도 친구인 나라인데~고놈이 삥을 뜯어도 뚝배기를 박살내도 친구취급해주는 나라인데 정이 없네~
틈새로 귀신을 쳐다보며 천천히 문을 닫는다. 그렇게 귀신과 눈을 마주쳐가며 문을 닫은 난, 계단을 내려가 중개사 아저씨가 일하는 사무소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15분동안 혼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둘러댈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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