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4화 (4/352)

〈 4화 〉 3. 누가 머리냐! 내가 머리다! 난 ㅈ됐다!

* * *

모자에 후드에 마스크까지 완벽구비한 모습은 수상해 보였지만, 이게 요즘시대의 대세 패션이다 이 말이야. 복장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절하게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안느뇨? 아니라고? 아 거기선 ㄹㅇㅋㅋ만 치는거야.

요즘 날씨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걱정되었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따뜻했다. 11시. 애매한 시간대라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백수가 아니면 이 시간엔 다들 일하러 갔겠지. 그런데 옷가게를 어디로 가야되지. 백화점? 아니면 동네 속옷 가게라도 가야되나? 아는게 하나도 없으니 골치아프다.

아니 누가 하루아침에 TS듀라한이 되버릴줄 누가 알았겠냐고. 차라리 전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몸이 변하는 클리셰 같은거라도 일어났으면 차라리 낫다. 그럼 조금 특이할 지언정 묻아갈 수는 있었을 테니까. 근데 현실은 그런 거 없다. 변한건 나뿐인 듯했다. 병원가서 ‘의사선생님 제가 미소녀 듀라한이 됬습니다’를 시전할 수도 없네.

지인 중에 의사도 없다. 지인 찬스도 못한단 소리다. 애초에 머리가 떨어진 시점에서 지인 찬스가 가능할 리가 없지만. 생명체의 기본 전제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이 몸뚱어리가 불러올 파급력은 상상도 하기 싫다. 현대인은 슬플만큼 자극에 굶주린 생물이다. 내 취급이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주머니에 들어간 폰을 만지작 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마음같아선 폰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것도 안된다. 재수없게 머리 떨어지면 안되잖아. 어차피 붕대 때문에 머리도 자유롭게 못 움직인다. 분명히 이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고민 끝에 백화점은 비싸기도 하고 눈에 띌 것 같아서 동네 속옷 가게로 행선지를 정했다. 나는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최대한 신속하고 빠르게,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지금 눈에 띈다는건 사회적 자살이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입장에선 얼굴만 이쁜 목잘린 시체가 돌아다니는 건데 난리가 안 나겠나.

후드랑 캡모자를 뒤집어써서 머리카락도 눈에 띄지 않게 집어넣었으니, 어지간하면 눈에는 띄지 않을거다. 결국 옷가게에 가면 벗어야겠지만, 직원 한 명한테 보이는것과 다수의 사람들한테 노출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말로 얼버무릴 수 있냐 없냐의 차이.

“아오 진짜 답없네...”

변할 거면 최소한 모가지는 붙어있는걸로 변하던가. 한숨이 쉴새없이 나온다. 내 처지가 처량하다. 남은 통장 잔고는 대략 1500만원. 많다고 하면 많지만 적다고 하면 적다. 지금 사는 월셋방에서 이사가려고 모아뒀던 자금인데, 마냥 까먹을 수는 없었다. 직장을 구하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던지. 반즈음 취미삼아 인방을 하고 있다지만 하꼬중에 하꼬다. 시청자수 5명이면 그날은 대박이다. 애초에 시작한지 일주일이다.

“후.”

여성용 속옷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 앞에 서서 쉼호흡을 한다. 전직 남자라서 긴장이 안될 수가 없다. 다행히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금남의 구역에 손님은 없어 보였다. 이 시국이라 안보이는 건가, 아니면 그냥 여기가 파리 날리는 곳인가. 근처에 자주 가는 편의점이 있어 자주 왔다 갔다 하지만 처음이라 잘 모른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차오르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문을 밀...아 당겨야지. 손잡이 옆에 적힌 ‘당기시오’라는 글자를 뒤늦게 눈치챈 나는 문을 당겨 열며 가게 안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거사러 왔어요?”

속옷. 속옷. 내 눈에 보이는게 죄다 속옷이다. 눈을 둘곳이 없다. 너무 민망해서 열이 오른다. 내가 어색하게 문 앞에 서있자, 카운터에서 폰을 만지고 있던 점원이 인사를 해온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보니 점원보다는 가게 주인인 것 같다.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일단 대답부터 하자.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

“그... 속옷 맞추러 왔는데요.”

“어휴, 그건 나도 알지. 목소리 들어보니까 학생 같은데 어떤걸로 맞추려는 거니? 편한걸로? 아니면 예쁜거?”

“...편한 거요.”

스물 여덞 전 남자 새끼로서 저 실크무늬 속옷 같은 건 좀 그렇다. 스포츠 브라나 사면 되겠지. 남들한테 보여줄 일은 없으니 디자인보단느 실용성 위주로 고를 생각이었다.

“학생, 자기 사이즈는 알고 있어?”

“아, 아뇨. 최근에 갑자기 커져버려서...”

고추 없어진지 하루 째라 그런 거 모릅니다 아주머니.

“학생 나이 때는 쑥쑥크니깐 그럴 수 있지. 자 손 번쩍 들어봐.”

점원 아주머니께서 줄자를 가지고 내 앞에 서자, 나는 어버버하면서도 점원 아주머니의 말대로 손을 번쩍 들었다. 아주머니는 줄자를 내 가슴팍을 몇 번 재더니, 혀를 쯧쯧 차며 입을 열었다.

“아니 학생, 여기까지 브라도 안차고 온거니?”

“너, 너무 답답해서요.”

“그래도 하고 다니는게 좋아. 어릴땐 탱탱하지만, 관리안 하면 축축 늘어지는건 한순간이란다.”

“아, 네에...”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서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듀라한은 일단 사람이 아니잖아. 점원 아주머니는 대충 사이즈를 가늠했는지, 카운터 뒤의 창고를 뒤져 작은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스포츠브라. 유명한 배우의 사진이 붙어있네. 최근에 나온 영화 꽤 재밌었지.

“자 학생, 가서 한 번 입어보고 나와봐. 사이즈는 얼추 맞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넵.”

점원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탈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괜찮아? 이래도 돼? 머리와 목의 접촉부위가 간지럽다. 거울을 보니 머리가 살짝 삐뚤어졌다. 입고 있던 후드티의 밑단을 잡고 잠시 망설였다.

이제 내 몸이긴 한데, 좀 그러네. 나는 조금씩 뜸을 들여가며 옷을 벗었다. 아직 알몸을 제대로 본적이 없어서 더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여자 손 한 번 잡아본적 없는 아싸는 아니지만, 바뀐 몸에는 아직 적응을 잘 못하겠다.

“...읍!”

시야가 어둡다. 머리가 어지럽다. 후드티에 걸린 머리가 옷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아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진짜 ㅈ됐다. 다행히도 비명을 지르는 건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후드티의 목부분에 끼어버린 머리가 문제였다. 머리가 같이 딸려가서 껴버린 탓에 앞은 안보이지, 머리가 뒤집힌 탓에 평형감각이 이상하다. 곧바로 쪼그려 앉아 한 손으로는 머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옷을 잡아당겨 머리를 빼냈다. 시야가 확보되자 나는 내 상반신 알몸을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뭐 하나 모자란 것 없는 아름다운 몸매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에, 백옥같은 살결,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라인...그야말로 요정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요정이라더니, 정말 요정같은 외모구나.

“학생, 너무 오래걸리는거 아니야? 무슨 문제 있니?”

“아, 금방 나올 게요!”

머리를 거울 앞 선반에 올려놓고 스포츠브라를 집어 든다. 그냥 런닝셔츠 입듯이 입으면 되는거겠지? 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뭔가 허무하리만큼 쉽게 입을 수 있었다.

야해.

다 벗고 있는 것보다 어중간한 노출이 더 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조금 그렇긴한데, 결국 이젠 내 몸이니까 적응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 몸에 들어온 것도 아니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보이고.

그런데 이대로 나가야 하나? 남자일 때 속옷이야 그냥 마음에 드는거 사이즈만 대충 맞춰서 사면 그만인데, 여성 속옷은 처음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생각이상으로 골치아픈 일이었다.

“아, 머리, 머리 머리...”

허겁지겁 붕대를 풀고 머리를 목 위에 얹는다. 아 거꾸로 올렸잖아. 다시 돌려야...

끼이이익­

“학생, 입기 힘들면 내가 도와주...!!!”

귀청이 떨어질듯한 소프라노톤의 비명이 탈의실에 울려 퍼졌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를 고정 시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급하게 하다가 머리를 180도 돌린 탓에 경악과 공포에 가득 찬 얼굴이 너무 생생하게 보인다.

어떡하지?

“119, 119를!!!”

안돼! 연구소에 잡혀갈 수는 없다! 임기응변! 임기응변!

“신고 멈춰!”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주머니이!!!!

“하, 학생...?”

“일단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이건 착각입니다. 목이 180도 돌아간건 그냥 유연성이 좋아서 그런 거에요. 결코 목이 떨어지거나 떨어지거나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냥 목이 너무 유연해서 그런 거니까 오해하시지 마시고 당장 휴대폰 내려놔!”

누가 볼세라 휴대폰을 낚아채고 머리를 재빨리 원래 방향으로 돌린다. 그리고 재빠르게 붕대를 감았다. 이제 증거인멸(물리)를 실시해볼까. 석상처럼 굳어있던 아주머니가 다시 비명을 지르려 하자 나는 재빨리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만 알고 계셔야 해요. 안 그러면 신변에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길거에요. 가령 장을 보러 갔는데 아주머니 차례에 세일 상품이 매진된다거나, 실수로 간조절을 잘못 해서 된장찌개가 소금찌개가 된다거나, 인생의 낙인 인기드라마가 갑자기 결방을 하거나 아무튼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아주머니만 알고 계셔야 해요. 알았죠?”

아주머니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어이없어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나는 후드티를 빠르게 입고 같은 스포츠브라를 5개 더 산 뒤에 도망치듯 옷가게를 빠져나왔다.

인생 시발...

정말 주옥같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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