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계약, 하지만…….
성진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계약자? 계약영혼?'
분명히 아는 단어였다. 아는 단어일 뿐 만 아니라 정확한 뜻까지 알고 있었다.
일단 계약자란 요즘 초능력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계약자들이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의 영혼과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어서이다. 성진도 김영민의 매니저가 된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계약자는 어떤 물건에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능력도 생기지만 물건과 관련이 있는 능력이 생긴다. 예를 들면 칼과 계약을 하면 절단을 할 수 있는 광선을 날릴 수 있다던가 그런 것이다.
관계가 없어 보여도 그 물건이 쓰임새에 따라 능력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계약한 물건의 영혼을 계약영혼이라고 했다. 성진에게는 전혀 상관없을 이야기다. 아니 이야기였어야 했다.
"내가 너의 계약자라고?"
[그래!]
"너는 내 계약영혼이고?"
[어!]이제는 완전히 삐졌다는 표정을 짓고는 새침하게 앉아 자신의 팔짱을 끼고 성진에게서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소녀를 보며 성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계약을 하는 것을 상상으로 해본적도 있었다. 바라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생각처럼 기분이 좋거나 행복한 기분이 아니었다.
뭐랄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처음에 로또를 맞으면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하는 것 같이 성진도 그랬다.
"왜 내가 계약자가 된 건데?"
[그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흥!]그렇게 말을 하면서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성진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으로 기점으로 무언가가 성진에게 밀려들어왔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성진은 웃었다. 아니 기뻤다. 미칠 듯이 기뻤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왜, 왜 울어. 내,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응?]
그럴 리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저 성진은 지금 그동안 고생해왔던 것들이 봇물이 터지듯이 감정으로 밀려들어온 것이었다.
"흐윽, 흐으윽."
성진은 흐느꼈다. 더 이상 약한 자가 아니다. 강해 질 수 있다. 현실에 부딪혔고, 자신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수긍해왔다. 자신은 약했고, 약하면 당하는 세상이다. 자신은 약했다. 그러니 당했다. 당연한 순리였다. 그런데 이제 약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강해질 수 있다. 성진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신이 아닌 김영민 같은 것이 계약자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러다가는 억울했다. 자신이 아닌 왜 저자식이냐고 왜 자신은 될 수 없냐고 그렇게 하소연을 해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억울했다. 그렇게 화가 나도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너도 알지 않느냐. 네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포기해라.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 옳은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이 틀리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 성진도 할 수 있었다.
계약자가 될 수 있었다. 강해질 수 있었다. 더 이상 약해지지 않아도 되었다.
"흐으으윽, 흑."
성진은 기뻤다.
그간 서러웠던 것이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뻤고, 이제는 억울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기뻤고, 더 이상 약해지지 않아도 돼서 기뻤다.
그 환희가 성진의 눈에 고여 흘러넘쳤다.
[우, 울지 마. 왜, 왜 울어 흑.]성진이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흐느끼며 울자 소녀도 성진의 그런 모습에 울먹이고 있었다. 마치 유치원에서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가 따라 우는 것 같이 소녀도 성진이 울자 자신도 모르게 슬퍼졌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응? 울지 말라고오. 흐아아앙]소녀는 성진이 계속 울자 자신도 울기 시작했다.
"풉."
그 모습에 성진은 실소를 터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나 있었고, 그 전까지만 해도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소녀가 지금 보니 완전 애였다.
이런 애를 보고 무서워했다는 자신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훌쩍, 훌쩍?]성진이 우는 것을 멈춘 것 같아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 성진은 소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푸하하하하."
눈물을 흘려서 눈 밑은 빨갰고, 콧물도 흘렸는지 입 주변이 전부 콧물 범벅이었다. [이, 이익! 너 왜 웃어! 훌쩍. 너 웃지 마!]소녀도 지금 자신의 꼴을 눈치 챘는지 성진에게 화를 냈다. 그런 모습이 성진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성진은 계속 웃었고, 소녀는 그런 성진을 보며 웃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성진과 소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난 뒤에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진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소녀는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둘은 마주보고 있었고, 그 둘 사이에는 접이식 상위에 화장실에 있던 현무암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성진도 들을 자세를 제대로 했고, 소녀도 감정이 담겨있지 않는 표정을 짓고는 성진을 봤다.
성진이 나름 긴장이 되었는지 심호흡을 하고 소녀에게 물었다.
"후우, 그러니까 나는 이 현무암인 너와 계약을 한 거야?"
[그렇다. 그대여 엄밀히 말하자면 이 암석이 아닌 나 레아와 계약을 했다는 것이 옳다.]본래 성격이 이미 들통이 났지만 소녀는 애써서 그것을 외면하고 다시 고상한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지 않아 성진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대도 생각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본제는 평범한 계약영혼과는 다른 존재이다. 아직은 그대와의 동화(同化)가 낮아 아직은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없느니라.]성진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그럼 왜 내가 너와 계약을 하게 된 건데?"
성진의 질문에 자신을 레아라고 말한 소녀가 살짝 눈을 감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
꿀꺽.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모른다.]
"엉?"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성진이 조금 짜증이 났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네가 모르면 누가 하는 데!"
[아! 나보고 어쩌라고 눈을 감았다 뜨니까 이런 현무암 따위에 갇혀 있고, 웬 남자새끼가 벌렁 벗고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성진이 소리를 지르자 소녀, 아니 레아도 짜증이 났는지 소리를 질렀다.
성진은 남자새끼에 찔러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럼 너도 영문을 모른 다는 거지?"
[어.]레아가 삐졌는지 고상한 척은 끝내고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레아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성진에게도 좋은 것이 없으니 성진은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으음,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모습이 유지가 되?"
[아니. 이건 본신의 힘을 잠시 가져다 쓰는 거고, 그것도 이제 연결이 끊겨서 아마 10분? 그 정도 남았을 걸? 근데 왜……]레아는 답을 해주면서 말끝을 흐리고는 성진을 무슨 벌레 보는 듯한 경멸어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두 가슴을 감싸며 말했다.
[변태새끼 가까이 오지 마.]
"……"
성진은 어이가 없었다.
성진도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어서 레아를 보며 말했다.
"날 변태로 만들지 마! 난 단지 씻으러 옷을 벗었을 뿐이라고!"
성진의 억울함이 진짜로 느껴졌는지 레아도 민망한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하아, 그럼 이제는 못 보는 거야?"
[흥. 아닌 척하더니 너도 나를 결국 보고 싶어 하는 거군.]
"하아. 말을 말자."
성진이 진짜 됐다는 식으로 침대에 가서 눕자 레아는 살짝 그 기세가 누그러져서 작게 말했다.
[너, 너하고 동조가 높아지면 힘, 힘도 더 강해지면 더 다시 나올 수 있어…….]
하기야 그녀도 성진과 친하지 않으면 저 답답한 현무암 속에서 썩을 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본신의 힘에서 가져온 일부의 힘으로 현신하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성진이 기운을 넣지 않으면 이렇게 현신 할 수 없었다.
계약자도 능력을 쓰는데 한계가 있는데 어떤 힘이 느껴진다고 한다. 무협지나 판타지에 나오는 그런 기운이 아닌 영혼의 힘이라고 한다.
그 기운이 다 떨어진다면 인간 보다 강해진 힘도 비상식적으로 늘어난 재생력도 평범한 인간으로 잠시 되돌아온다. 물론 다 떨어진 기운은 휴식을 취하면 하루만에도 돌아온다.
기운은 계약영혼과의 동화율 즉, 싱크로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기운의 양 더 많아지고 질도 더 좋아져서 쓸 수 있는 능력도 새로 생기고, 기존에 있던 능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물론 싱크로율이 낮을 때는 빠르게 오르지만 대부분의 계약자들은 B급이 되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D급에서 C급으로 올라가는데 짧으면 1년 길면 5년이었고, B급으로 올라가는 데에는 그에 배의 시간이 걸렸다.
C급으로 올라가는데 3년이 걸렸다면 B급으로 올라가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싱크로율을 높이는 것은 다 개인차였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강해지면이라.'
성진은 강해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여기서 그냥 레아와 그저 그런 사이가 된다면 강해지는데 좀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 레아 앞으로 잘해보자!"
그렇게 성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레아가 있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
아마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성진이 너무 생각을 오래 하다보니까 중간에 시간이 다 되서 사라진 것 같았다.
"험, 험."
성진은 그렇게 민망해진 손을 입으로 가져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레아가 현무암 속에서 볼 수 있었기에 최대한 민망하지 않은 척을 하려고 했다.
"일단, 누나에게 상담을 해보자."
그렇게 성진은 자신이 아는 계약자 중에 제일 가까운 사람인 누나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일단 밤이 늦었으니 자고 일어나서 하기로 했다. 내일이 일을 나가야 하는 날이었지만 계약자라는데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씻고 잠을 청하는 성진이었다.
계약자들에게는 3재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었다.
겁화의 마녀.
겁수의 무녀.
겁풍의 마인.
이렇게 세 사람은 불교에 나오는 3재와 같이 불을 다루고, 물을 다루며, 바람을 다뤘다.
그들이 유명한 것은 그들이 강하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이 남은 자리에는 몬스터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사냥을 한다고 하면 그 주변에 사냥계획을 가진 계약자들이 알아서 피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저 세 명은 국내에는 얼마 없는 A급이다. A급은 무엇보다 무서운 점이 쓸 수 있는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운만 넘쳐 난다면 자신의 계약영혼이 다루는 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어떤 능력이 늘어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용을 하냐가 중요해 지는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는데 그것만이라면 계약자들이 알아서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격적으로 조금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우선 가장 양호한 겁수의 여인은 던전을 공략을 하려고 그 던전에 물을 채우다가 그 안에 있는 계약자들이 익사 할 뻔 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그녀가 했던 말이 화재가 되었다.
"어머, 약해서 다 몬스터인 줄 알았죠."
무엇보다 그녀의 말이 진심으로 들려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항상 개량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무녀와 같다 해서 겁수의 무녀가 되었다.
그리고 겁풍의 마인은 랭크 4인 몬스터를 잡다가 화가 나서 토네이도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몬스터를 쓰러트린 것이 아니라 도시 근처로 날려 보내서 엄청난 대형 사고를
일으킬 뻔했는데 그 당시 그가 아르논 협회에 한말은
"실수니 봐줘."
A급이고 별다른 희생이 나오지 않아 둘 다 주의를 줬다고 한다. 문제는 겁화의 마녀.
겁화의 마녀가 3재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상대였다. 것 보기에는 평범한 계약자였는데 몬스터를 잡겠다고 산 하나를 풀한 포기 남기지 않고 태웠다고 한다.
그때 그녀가 한말은
"죄송합니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정상적이었지만 그녀가 몬스터를 잡을 때의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를 연상 시킨다고 했다. 한마디로 안 건들면 조용하지만 건들면 터지는 폭탄 그것이 겁화의 마녀였다.
지금도 그녀의 주변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몬스터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크워어어어!"
화르르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는 몬스터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거대하던 몸통은 아래는 녹았는지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팔은 반쯤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랭크 4. 그 몬스터의 랭크는 4였다. 거의 도시하나에 떨어지면 비상사태가 발령이 되는 랭크이었다. 그런 랭크의 몬스터를 혼자서 잡았다.
잡은 것이 아니라 처참하게 사냥을 했다.
전에 있던 그 오만하고 고고한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랭크 4의 몬스터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그 몬스터를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미소를 띠우고는 자신의 오른손에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는 화염을 던졌다.
화르르르.
"크워어어어!"
몬스터는 고통스러워하며 생을 마감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겁화의 마녀는 불과 다르게 냉철했고, 이성적이었으나 불과 같이 자비란 없었다.
그때 겁화의 마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아르논에서 만든 특수한 휴대폰으로 웬만한 일로는 고장 나지 않는 최첨단 폰이었다.
겁화의 마녀는 전화를 받으며 싱글벙글한 표정이 되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겁화의 마녀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응, 우리 진이 웬일로 전화를 했어요?"
겁화의 마녀 성유진.
그것이 한 병원에 의사이자 성진의 누나의 진정한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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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누나가 화끈했던 이유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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