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29-응답하라! 1994!
<29> 응답하라! 1994!
한편, 1994년 한 해를 며칠 앞둔 시점.
마침내, 김태풍은 정말 빠른 속도로, 두 건의 영어 논문작성을 마무리했다.
번개 같은 속도였고.
선배들도 놀랐고.
동기들도 더 까무러치게 놀랐다.
박한식 교수의 교정이 거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영어 논문 작성을 해낸 것이다.
물론 똑똑한 이공계 교수들 중에는 실험 데이터만 확실히 있다면, 단 하루 만에 영어 논문 작성을 완성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학생 수준으로 보면, 김태풍의 실력은 이미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1994년 12월 31일.
김태풍은 석사 학위와 관계된 영어 논문부터 관련 분야 전문 학술지에 투고했고.
그리고 스스로 치유가 가능한 고분자 소재와 관련된 논문본(manuscript)은 네이처지에 투고했다.
그렇게 일을 마치자, 한참 뿌듯한 기분을 느끼던 김태풍.
“야. 근데 오늘, 드디어 1994년의 마지막 날이잖아. 너희들 오늘 밤에 뭐 할 거냐?”
그렇다.
오늘은 1994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내일은 어느덧 1995년 1월 1일.
빨간 날, 즉 공휴일이다.
그래서 일부는 오늘 저녁, 고향 집으로 가거나.
일부는 여전히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내일 1월 1일 휴일에도 실험실에 나가 실험에 몰두할 계획을 짜기도 한다.
그렇게 학교에 남아 있으려는 친구들.
사실, 너무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또 연구도 하지만.
그런 지독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사회에 나가면.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일례로 어떤 회사든, 회사에 재정적인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구조조정을 하는 곳이 바로 회사 부설 연구소다.
그래서 회사 연구원들은 때로는 파리 목숨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태풍아. 그럼 너는 집에 안 가냐?”
안성훈도 묻자, 김태풍은 잠시 생각했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수원에 있는 자신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주 굴뚝같았지만.
또한, 새해가 시작되는 마당에 부모님과 차분하게 지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할 일이 지금 태산이었다.
스톡옵션까지 받았던 메드TX의 일을 몰래 진행해야 하고.
강신혜 박사와 함께 진행하는 연구도 있다.
또한, 박한식 교수가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는.
새로운 신약 후보 물질의 발굴.
물론 그 연구는 박한식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상태라.
학생 신분인 김태풍은 적극적으로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흠. 가고 싶지만, 할 일이 많아서.”
“야. 너 때문에 우리도 못 가잖아!”
“어?”
“아냐. 하하.”
사실, 김태풍 때문에 동기들의 마음가짐이 완전히 바뀐 게 사실이었다.
보통 잘 나가는 동기가 있으면, 시샘과 질투가 저절로 일어나게 되는데.
그러나 김태풍한테는 그런 마음을 절대 품을 수가 없다.
도와달라고 하면, 무조건 도와주는 의리남 김태풍.
특히, 배진수는 그간 동물실험을 하느라 정말 애를 먹었는데.
그때마다 김태풍은 이것저것 코치를 해 줬고.
또한, 쥐를 핸드링하는 방법도 차분하게 배진수에게 알려줬다.
그런 동기한테 어떻게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있을까.
“그럼 밤 11시에, 기숙사 휴게소에서 만나자.”
기숙사 휴게소?
잠깐 생각하다가, 피식 웃는 김태풍.
그래. 어디 갈 데도 없는 나의 불쌍한 동기들이여!
그래. 다들 솔로였다.
먼저, 배진수는 어쩔 수 없을 테고.
최기호도 시크한 성격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안성훈은 한 여자에게 얽매이길 싫어하는 프리한 도시 남자.
그리고 남은 자신.
모태 솔로! 으으!
“내가 치킨 시켜 놓을 테니까, 같이 먹으면서 연말 가요대상이나 보자.”
연말 가요대상?
하하. 그것도 뭐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약속을 잡은 김태풍은 다시금 실험에 몰두하다가.
한참 뒤에 자기 자리로 돌아왔는데.
잠시 놔두고 갔던 삐삐를 챙겨서 보니.
의외로 여러 개의 음성 메시지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바로바로 하나씩 확인해 보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말들.
그게 대다수다.
메드TX 서정철 사장한테서 온 것도 있었고.
서희선한테서 온 것도 있으며.
최하영, 송아란, 정민지한테서도 음성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최하영과 정민지는 어떻게 자신의 삐삐 번호를 알았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태풍은 이내 생각을 접고.
곧바로 답장을 해야 했다.
차분하게 음성 녹음들을 마친 뒤.
김태풍은 피식피식 웃는다.
뭐야? 이러고 보면, 내가 꼭 어장 관리하는 놈 같잖아? 실속은 하나도 없는데? 하하하.
어쨌든 그렇게 1994년, 김태풍의 회귀 첫해는 저 멀리 과거 저편으로 달아나고 있었는데.
아마도 좀 더 시간이 지나.
언젠가 이런 회귀 첫해를 회상할 때가 되면.
김태풍은 이렇게 외치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응답하라! 1994년! 야호!
김태풍의 회귀 첫해.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
1995년 1월 초순.
학회에서 소포가 왔다.
저번 연말에 진행된 학회 시상식.
그때, 김태풍은 학생 연구 부문 장려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학회 시상식에는 최우수 수상자 학생만 무대에서 시상을 받았고.
김태풍은 겨우 장려상 수상자라서.
종잇조각 상패만 소포로 온 것이었다.
심포지엄 때 파란을 연출한 결과치고는 너무 초라한 결과가 아닌가.
- 야. 이거 좀 심하다. 이게 말이 돼?
- 진짜 학회도 썩었어.
- 맞아. 자기들끼리 파벌만 만들고, 자기들끼리만 끌어주고.
- 이게 교수들이 할 짓이냐?
- 태풍아. 네가 참아라.
선배들마저도 말도 안 된다며.
학회 측을 비아냥거렸지만.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이미 끝난 일이었다.
아무래도 박한식 교수의 적대 세력들이 많아.
김태풍의 최우수상 시상은 무척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김태풍은 더는 연연하지 않았는데.
대신에, 그런 수상보다 더 좋은 일이.
김태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게. 거기 좀 앉지.”
갑자기 자신을 찾은 박한식 교수.
그의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박한식 교수는 부드러운 눈빛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에 말이네. 듀폰 쪽에서 전화로 나한테 연락이 왔네.”
뭐? 듀폰?
“하하! 그때 제퍼슨이 몸이 바짝 달아올랐나 봐.”
제퍼슨? 제퍼슨 연구소장? 혹시 그 일인가?
“그 친구가 하는 말이, 2월 중순쯤이면 좋겠다던데. 자네와 나를 미국으로 초청하고 싶다고 하네. 어떤가? 같이 갈 수 있겠지?”
어느덧 박한식 교수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네. 교수님. 그러면 제가 뭘 준비해야 합니까?”
김태풍이 조심스레 묻자, 박한식 교수는 간단히 대답했다.
“뭐 별 게 있나? 하하하! 우리야 뭐, 그 기술을 얼마에 팔지, 그것만 생각해야지. 하하하!”
“네?”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미국 특허 출원도 바로 준비해야겠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저번에 발표했던 자료, 그걸 좀 더 길게 할 수 있도록, 슬라이드를 더 만들어 보게. 그땐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결과를 다 발표하지도 못하지 않았나?”
“아!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네. 말씀하십시오.”
“그 기술은 자네 아이디어지만, 어쩔 수 없이 자네가 내 학생이라서, 소유권을 모두 주장하기는 힘들어. 그리고 학교 이름으로 출원이 된 상황이라서, 그게 직무발명에 해당이 되어버리네. 그래서 결국 특허권은 학교 소유로 바뀌는 거고. 대신에 기술이전이 되면, 상당한 포지션을 돌려받을 수는 있네.”
김태풍은 이미 예측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그 기술을 공개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목적은 달성했다.
물론 그 기술의 가치가 낮지 않지만.
그럼에도 실질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은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이 정도는 자신한테 손해가 되지 않을 거로 김태풍은 판단했고.
그래서 그 결과를 공개한 것인데.
그러고 보면, 지금 김태풍의 머릿속에는 그런 기술 이상의 지식들이 가득 축적되어 있지 않은가.
앞으로 그런 기술들이 하나둘 공개가 된다면.
그야말로 김태풍은 천재 중의 천재.
가장 높은 천재의 반열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든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하하! 자네는 많이 겸손하군.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눈빛이 달라질 텐데, 전혀 그렇지도 않고. 어쨌든 이 기술이 만약 듀폰으로 기술이전이 된다면, 뭐, 자네 몫으로 전체 기술이전료 중에 40%가량을,내가 꼭 보장해 주겠네.”
박한식 교수의 그 말에 김태풍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정도로 박한식 교수가 양보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의 아이디어를 강탈하는 수많은 교수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시대.
그러나 박한식 교수는 보기와 다르게 전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네 덕분에 내 몫으로도 한 15% 정도가 오게 될 거네. 나머지는 학교에서 학교 몫으로 가져갈 테고.”
그러니까 자신은 40%, 박한식 교수는 15%.
나머지 45%는 학교가 먹는 셈이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받게 될 15%도 자네한테 다시 돌려주겠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 의견을 먼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그러나 김태풍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40%만 해도 아주 충분합니다.”
그러자 씩 웃는 박한식 교수.
“하하하! 자네는 역시 사회성까지 좋군. 하하하!”
그렇게 웃던 박한식 교수.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하며, 말을 이었다.
“방금 그건 내가 그냥 해 본 소리야. 하하하. 나는 자네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그 신약 후보 물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게 진짜 돈이 될 거니까. 그래서 이번에 운 좋게 기술이전까지 된다면, 그 기술이전료는 자네한테 몽땅 줄 테니까, 이번 일의 성과는 자네가 다 가져가게. 대신에 현재 내 아이디어로 진행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해서 확실하게 학교 기준에 따라, 향후 이익 배분이 될 거네. 그 점은 자네도 꼭 양해해주게.”
순간, 김태풍은 움찔 놀라며,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또 놀랍기도 하기 때문이다.
눈앞의 박한식 교수.
그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나?
꼬질꼬질하고, 학생들 잘못만 미친 듯이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남자.
그런 사람이 이렇게 소탈할 줄은.
김태풍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 과거.
김태풍은 박한식 교수의 진면목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졸업을 했던 것이다.
욕심만 많은 수많은 교수들 중에서.
저 박한식 교수는 진정한 별종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미국 출장 건은 같이 가는 거로 정리하고, 우선 현재 하는 일에 더 집중해 보게.”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듀폰 쪽과 기술이전 협상이 잘 되면.
모든 기술이전료를 김태풍에게 주겠다는 박한식 교수.
그래서 김태풍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 실릴 수밖에 없었다.
##
1994년 1월 중순.
한밤중에 폭설이 요란하게 쏟아지더니.
결국, 다음 날,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수북한 눈 때문에 땅이 미끄러워져.
이날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할 수 없게 된 학생들.
김태풍 역시 직접 걸어서.
실험실, 학생 식당, 기숙사를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밤늦은 시간.
뜻밖에도, 낯선 모습의 강민수를.
김태풍은 실험실에서 보게 되었다.
박사과정 3년차 강민수.
곧 박사과정 4년차가 되는 강민수는 현재 병특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가 내일부터 4주 기초군사 훈련을 받으러 가게 되었다고 한다.
머리를 빡빡 민 강민수의 낯선 모습.
그리고 약간 두려워하는 눈빛을 한 채 강민수는 실험실에 나타났고.
후배들은 눈이 동그래져 강민수를 쳐다봤다.
“형. 그럼 4주간 훈련소에 들어가는 건가요?”
“그래. 4주간. 아우우! 이거 완전히 미치겠다. 거기서 4주 동안 어떻게 버티냐?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형. 화생방 훈련이 제일 힘들다던데,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좀 괜찮지 않겠어요?”
“야. 나는 화생방보다는 완전군장에 야간 행군하는 게 제일 걱정이 돼. 내 체력이 그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어.”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막 군에 입대하는 20대 초반과 다르게.
몸이 팔팔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공부에 찌들고.
실험에 찌들고.
그래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은 강민수.
그런 그도 피할 수 없는 게.
병특 과정에서 4주 기초군사훈련은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병특 대상자들에게, 4주 훈련은 거의 4년 훈련이라는 그런 우스갯소리까지 돌게 된다.
즉, 4주 기간이, 거의 4년과 같이 길다는 그런 이야기.
아마도 현역들이 그 말을 듣게 된다면, 그냥 코웃음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병특 대상자들은 입영 전에 많이 긴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강민수 선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태풍은 이내 쓴 미소를 짓고 만다.
자신도 과거.
저런 4주 훈련을 받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태풍은 그때 아주 대단한 행운아였다.
야간행군을 이틀 앞둔 날.
훈련소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고.
그날 야외 숙영이 예정되어 있다 보니.
폭설 여파가 상당히 컸다.
그래서 일부 소대만 화생방 훈련을 받지 않고.
바로 야외 숙영지로 갔는데.
눈을 치운 뒤, 야외 텐트를 세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야외 숙영지에 도착해 보니.
그쪽 눈이 거의 다 녹아 있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별로 할 일도 없는데.
화생방 훈련을 운 좋게 피한 것이다.
아무리 화학 실험을 많이 한 연구자라고 해도.
화생방 훈련 중에 쏟아지는 눈물과 콧물 등의 점액질을 피해갈 수가 없는데.
그걸 김태풍은 운 좋게 피해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꼭 김태풍의 운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회귀 전, 김태풍은 결혼도 못 한 채 이팔청춘 다 날려버리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걱정이 태산이던 강민수.
그가 다음날 일찍, 4주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러 실험실을 떠났고.
그 뒤, 실험실은 다시 조용해졌는데.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저녁.
김태풍은 잠시 시간을 내어, 자신의 투자 일에 잠깐 집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