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25-최고 꿀맛 할머니 밥상
<25> 최고 꿀맛 할머니 밥상
“야. 다음 주가 곧 개학이다. 이야! 방학이 어떻게 이렇게 지나가냐? 석사 1년차가 이렇게 암담한 줄은 진짜 몰랐어.”
한탄하는 안성훈.
그런 안성훈의 말에 동기들도 다들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대학원 과정부터는 방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진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에게 여름 방학이든, 겨울 방학이든, 있으나 마나 한 것.
즉, 방학 여부에 상관없이, 실험실에 무조건 출근을 해야 하고.
퇴근 시간은 언제나 동일하다.
간혹 좋은 실험실 같은 경우, 여름 휴가를 주기도 하는데.
이곳 실험실의 박한식 교수는 그런 게 절대 없다.
학생은 무조건 공부하고 실험해야 하는 원칙.
그 원칙에 철저했고.
교수 본인도 여름 휴가를 가지 않는, 지독한 골수 학자다.
그래서 유일한 탈출구는.
랩의 공식적 일정으로 분류가 되는 학회.
그런 학회에 가는 것이 있다.
국내 학회도 괜찮지만.
가장 좋은 것은 해외 학회.
특히, 교수와 동행하지 않고.
학생들끼리만 가는 그런 해외 학회는.
바로 달달한 꿀을 빠는 것이나 다름없다.
낮 동안, 학회 발표를 먼저 듣고.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음대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국적인 도시를 보고 즐길 수도 있다.
또, 일부 학회는 주변 관광을 위해, 자체적으로 일부 낮 시간대에 한해서 학회 일정을 비워두기도 하는데.
그런 시간대까지 얻게 된다면.
더 마음껏 세상을 보며.
활보할 수가 있게 된다.
“야. 우리는 짬밥이 낮아서, 해외 학회도 못 가고… 우울하다. 이거 진짜 우울해.”
그렇게 한탄하던 안성훈.
그러다가 갑자기 눈빛이 이상해진다.
“아! 맞아! 야! 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끼리 1박 2일로, 어디 잠깐 다녀올까?”
“1박 2일? 어디?”
갑자기 안성훈은 1박 2일 번개 MT를 제안했고.
모두들 호기심을 갖고서, 안성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큰둥한 최기호마저 지금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뭐, 가장 그럴싸한 게… 아! 그래! 요 근처에 있는 안면도나 한번 갈래?”
“안면도?”
“우리가 남해나 동해로 가기엔 너무 멀잖아. 가까운 안면도로 가서, 하룻밤 민박하고, 그러고 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그리고 번개 모임이니까, 당장 오늘 저녁에 떠나는 거야. 뭐, 괜히 머리 아프게 따로 준비하지 말고. 그냥 무작정 고! 고!”
“그럼 내일은?”
“뭐, 아침 일찍, 거기서 출발하면, 얼추 출근 시간도 맞출 수 있을 것 같고. 사실, 교수님은 태풍이 외에는 우릴 찾지도 않잖아?”
“와! 그거 괜찮겠다. 그럼 진짜 우리만 가는 거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갑작스럽게 정해진 MT.
그리고 네 사람만 갈 것인지 서로에게 묻는 것이다.
그때, 김태풍이 슬쩍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음. 우리끼리 가는 것도 뭐 괜찮지만, 요즘 꽤 심심해 보이는 현중이 형, 현상이 형을, 우리가 데려가는 건 어떨까?”
“뭐? 그 형들을?”
“다들, 그 형들이 가장 편하잖아?”
“아. 그렇긴 한데….”
그러나 그렇게 두 사람을 데려가게 되면.
동기 모임이라는 취지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김태풍의 제안을 받고서.
다들 잠시 고민했으나.
곧 웃으며, 다들 동의했다.
“하긴, 그 형들은 진짜 편하지! 그 형들을 데리고 가면, 확실히 먹을 것도 많이 사줄 거야!”
그렇다.
이게 바로 물주와 동행하는 영리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좀 특이하지만 사람 좋은 두 형들.
물론, 다른 선배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동행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현중, 조현상은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다.
“그리고 더 데려갈 사람, 더 없을까?”
조현중, 조현상을 그런 식으로 집어넣자.
갑자기 일이 더 커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모두들 고민하면서.
자판기에서 뽑아낸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씩 빨아댔다.
“쓰읍! 야. 야. 그럼 이건 어떨까?”
이때,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연 사람은 배진수다.
“우리, 타 실험실 동기들도 데려갈래?”
“다른 랩 동기들까지? 그게 가능할까? 전부 다 데려가긴, 일이 어려워질 텐데?”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각자 한 명씩 추천하고, 시간 되는 사람만 데려가면 되잖아.”
큰 뿔테 안경을 쓴, 키 작은 배진수가 모처럼 자기 의견을 내자.
모두들 잠깐 생각을 하다가, 곧 웃으며 동의했다.
이왕 가는 거, 좋은 사람들 더 데려가지 뭐.
이런 식이다.
그렇게 의견을 모으던 중.
결국, 최종적으로 네 사람이 추천되었다.
한선영, 김혜정, 김민국, 최성근.
여자 둘에 남자 둘.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실험실로 돌아왔고.
안성훈이 총대를 메고, 타 실험실 동기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곧이어 결과가 나왔다.
한선영이 간다고 하니까, 계속 뒤로 빼던 김혜정도 오늘 간다고 약속했고.
김민국과 최성근은 저녁에 랩 회식이 있다면서 오늘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확인된 인원은 총 8명.
김태풍, 안성훈, 배진수, 최기호, 조현중, 조현상, 한선영, 김혜정.
이렇게 여덟 명.
이 여덟 명이 갑작스러운 번개 MT를 가게 된 것이다.
“야. 다들, 빨리 일 끝내고, 저녁 6시에 건물 앞에서 모이자.”
이렇게 약속까지 정해지자.
그때부터 김태풍은 더 정신없이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는데.
부랴부랴 주변 정리까지 마치고.
실험 가운을 벗던 중.
그때, 김태풍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린다.
설마 별일은 없겠지?
과거에 김태풍은 이런 MT를 가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동기들이 서로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동기들 간에 사이가 좋아져.
이런 번개 MT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색다른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번개 MT.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물씬 피어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
그리고 어느덧 저녁 6시.
건물 앞으로 8명이 모였다.
한선영과 김혜정은 언제 기숙사에 다녀왔는지.
옷가지를 채운 가방을 등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여섯 사람은 가방도 없이 빈손이다.
기숙사에 들르지도 않았고.
곧장 실험실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야. 택시는 2대 불렀지?”
택시 2대.
지금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좀 번거롭고, 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각자 돈을 나누어내면, 택시비로 충분할 것이다.
아무리 대학원생들이 가난하다고 해도.
학비가 공짜인 이 학교에서.
매달 생활비 조로 학교에서 받는 돈도 있고.
몰래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또는, 그냥 단순히 집이 부자인 인간들도 있어.
이런 비용은 크게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저녁에는 민박을 할 생각이라.
크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여행도 아니었다.
잠시 후, 택시 2대가 차례로 도착했고.
2팀으로 나누어 택시에 탑승했다.
조현중, 조현상, 안성훈, 최기호.
이렇게 네 사람이 먼저 택시를 타고 떠났고.
곧이어, 김태풍, 배진수, 한선영, 김혜정이 같은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5분 정도.
김태풍은 동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나.
곧 조용해지고 말았다.
다들 실험이며, 공부로 피곤했고.
지루한 주행이 이어지자.
하나둘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얼마나 흘러갔을까.
“다 왔습니다. 손님. 손님!”
택시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태풍.
그는 가장 먼저 눈을 떴다.
그리고 동기들을 깨운 뒤.
회비로 모은 돈으로 택시비를 먼저 계산했다.
그리고 택시 밖으로 내리자.
바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쏴르르 밀려드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와! 대박!”
여기저기 건물 불빛이며 가로등 불빛들이 있긴 하지만.
사방이 어두워.
바다 풍경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변가의 풍경이 흐릿하지만, 두 눈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우아! 뛰자! 와아아!”
“바다다! 야호!!”
“야. 니네, 같이 가!”
“어머. 바닷냄새!”
김태풍이 뛰자, 배진수, 한선영, 김혜정도 한껏 웃으며 백사장을 달렸다.
비록 해가 저문 시각이라, 수영을 할 수는 없지만.
바다 냄새를 이렇게 맡고.
이렇게 백사장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꽉 막힌 실험실에서 탈출한 기분이었고.
온통 세상이 자유롭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방방 뛰고.
또한, 신발과 양발을 벗고서.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한참 즐기다가.
어느 순간.
다들 하나둘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근데 성훈이는 왜 이렇게 안 오지?”
안성훈 팀.
먼저 출발했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설마 택시가 길을 잘못 들었나? 삐삐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배진수가 중얼거렸는데.
문제는 요 주변에 공중전화 박스가 없다는 것이다.
“좀만 더 기다려보자.”
그렇게 해서, 우선은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는데….
그런데 설마?
설마? 하는 설마?
그런 설마가 정말 설마가 되고.
더 큰 설마가 되어.
어마어마한 설마로 되어 돌아올지는.
그때까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로부터 무려 한 시간이 지나가 버렸고.
그리고 마침내.
모두들 정색을 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설마 사고가 났을까?
어째, 사정없이 불안하기도 하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먼저 민박집부터 구하자.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전화기를 빌려서라도 삐삐부터 치자. 뭔가 이상해.”
피곤한 탓에 눈 밑이 쑥 들어가 있는 한선영.
어깨가 축 늘어진 김혜정.
그리고 김혜정은 김태풍의 말에 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김태풍. 야! 이게 뭐야?”
그러나 김태풍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분명히 2팀으로 나눠 택시를 타고 갔다.
자신들은 먼저 왔고.
그런데 앞서간 그들은 왜 감감무소식일까?
결국, 네 사람은 캄캄한 길을 걸어갔고.
어느덧 민박 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방을 구하려고 했는데….
“오늘 하룻밤 민박 될까요?”
“아. 이거 어쩌나? 아까 사람들이 들어와, 꽉 찼어요.”
“아. 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저기 하룻밤….”
“전화 안 하셨죠? 그럼 여기보다 저쪽으로 가보세요.”
어느 민박집 주인이 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가.
한쪽 구석진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이야기한 대로, 수북한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자.
곧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였다.
“저기 계십니까? 계십니까??”
목소리를 높이자.
낡은 문이 쓰윽! 열리며.
안에서 걸어 나오는 어느 할머니.
“저희는 민박 좀 하려고 왔는데….”
“아? 민박. 어라? 총각들하고 아가씨들이네. 근데 어쩌나? 우리 집은 민박 방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를 어쩌지?”
“아. 할머니. 저희는 친구들이라서, 방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어? 괜찮다고? 그럼 어서 들어와. 어서!”
“근데 할머니. 요 주변에 저녁 먹을 곳이 없을까요? 저희가 저녁을 아직 안 먹어서….”
“어이쿠. 이 사람들. 여태 저녁도 안 먹고 뭐 했대? 쯧쯧쯧. 그럼 내가 차려줄까? 일 인당 천원이면 되는데?”
와! 일 인당 천 원짜리 밥이라.
진짜 싸다.
이런 관광지는 물가가 비쌀 텐데.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김태풍은 저녁을 먹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양해를 구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낡은 전화기를 잡고는 곧바로 삐삐를 연거푸 쳤다.
음성 녹음까지 마쳤는데.
그리고 20분가량 힘없이 기다리자.
마침내 요란한 벨 소리와 함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누구…? 야! 인마! 너, 태풍이냐?
안성훈의 목소리다.
김태풍은 흥분하며 곧바로 외쳤다.
“야! 안성훈! 너, 대체 어디냐? 왜 안 와???”
목소리가 자연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안성훈의 볼멘 목소리.
- 야. 진짜 말도 마라. 너는 왜 우리한테 이런 재앙을 던져줬냐?
갑자기 웬 재앙 타령?
그런데 뭐? 재앙?
재앙이라고???
?????
그리고 이때, 스멀스멀 느껴지는 무언가 불안한 느낌.
초조한 느낌.
설마?
진짜 설마?
혹시 조현중, 조현상?
“대체 무슨 일인데?”
호기심이 커진 김태풍.
그리고 호흡도 가빠지고 있었다.
- 현상이 형.
“뭐, 현상이 형?”
- 야! 사고 쳤어!!
사고?
- 현상이 형이 또 사고쳤어!!!!!
“뭐? 또오?????”
이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조현상을 데려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김태풍이었다.
김태풍이 다급히 묻자.
안성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설명했다.
- 우리가 현상이 형을 대우한다고, 택시 앞자리에 앉혔거든.
그러니까, 택시기사의 옆자리.
좀 더 앉기 편한 조수석에.
조현상을 앉혔다는 말이다.
“그래서?”
- 택시 타고 가다 보니까, 괜히 졸리잖아?
그래.
자신들도 그래서 한참 졸았다.
- 한참 자고 나서, 일어나보니까. 택시기사가 그러더라. 도착했다고.
“그래서?”
- 내렸지. 그리고 밖에 나와 보니까, 백사장이 흐릿하게 보이고, 바닷냄새가 진동해서, 다들 난리가 났어. 마구 뛰어다니고, 아주 난리가 났거든.
어? 이건 우리랑 똑같네?
근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 그런데 말이야. 뒤늦게 다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주변을 다시 쳐다봤는데, 그게 허연 달빛하고 우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뭐?”
이때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 너희들도 보이지도 않고….
“그, 그래서?”
- 이상해서, 현상이한테 물어봤어. 그랬더니, 여길 오는 내내, 택시기사 아저씨랑 이야기를 했대. 잠도 하나도 안 자고….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조현상과 조현중은 야간에 실험을 하는 야간조들이니까.
지금 이맘때가 되면, 두 사람의 뇌는 가장 맑을 것이다.
- 택시기사 아저씨가 그랬대. 자기도 자주 안면도에 가는데, 남들이 잘 안 다니는, 아주 깨끗하고 좋은 해변이 있다고 했대.
어????
- 그리고 거기는 목적지랑 가깝다고 했는데, 택시기사 아저씨가 한번 가볼 거냐고 물어봤고… 그때 현상이 형은 목적지랑 가깝다고 하니까, 그냥 그러라고 했대.
“그럼 거기가 어딘데?”
- 몰라.
엥?
- 너무 컴컴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냐?
그리고 이때부터 이야기가 점점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 그래서 그냥 우리는 한동안 정신없이 헤맸어. 가깝다고 해서, 우리끼리 너희들 쪽을 찾아간 거거든. 그런데 아무리 가도, 안 보이잖아. 할 수 없이 간신히 민박집부터 구했는데….
“그럼 거기가 어디냐고?”
- 퓨후! 이거 어떡하면 좋냐? 우리가 하필! 너희랑 반대쪽으로 걸어갔대.
오! 마이 갓!
- 여긴 택시 부르기도 힘들다고 하고. 내가 진짜 미쳤지. 현상이 형을 그냥 놔두고 자는 게 아니었는데….
“야! 그래도 현중이 형은 안 잤을 거 아냐? 너처럼 최기호는 자더라도….”
- 그래. 현중이 형은 안 잤어. 그래서 뭐했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그냥 잠시 멍 때리고 있었대.
멍?
풉!
아! 미쳐!
“그럼 어떡하냐?”
- 우리가 별수 있냐? 그냥 니들은 니들끼리 놀아. 우리는 우리끼리 놀게.
“야. 그건….”
- 퓨후! 나도 진짜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대책이 없으니까, 그냥 끊자. 지금 현상이 형이 미안하다고, 밥 사준대. 마침 요 앞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어서, 미친 듯이 먹으려고.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 그냥 안주에 소주나 퍼마시고 잘래.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김태풍.
그리고 작은 민박 방으로 돌아온 김태풍.
그가 나타나자.
한참 기다리고 있던 한선영 등은 눈을 반짝이며, 김태풍을 쳐다본다.
그런데 대체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절로 한숨만 나오다가.
할 수 없이 김태풍은 앞선 광주 학회 일까지 설명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태풍의 이야기가 쭉 이어졌고.
- 진짜야? 진짜? 그 오빠들, 진짜 속초까지 갔다고? 푸하하하하!
- 나, 지금 숨을 못 쉬겠어!
이내 배꼽을 잡고 요란하게 웃는 한선영과 김혜정.
그렇게 웃은 덕분에, 다들 마음은 좀 편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여 와! 밥 먹어야지.”
할머니가 문을 톡톡 치며 불렀고.
네 사람은 즉시 나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 중앙에는 작은 상이 하나 차려져 있었는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알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고봉밥 네 그릇.
그리고 가득 담겨 있는 김치.
아주 짭조름해 보이는 간장.
유난히 노랗게 보이는 배추 쌈.
수북한 된장.
그리고 노오란 계란 프라이 4개.
반찬 세 개에 간장, 된장 각각 하나.
일 인당 천 원짜리 밥상이다.
그래도 은근히 정성스럽고.
또 깔끔하다.
“어여! 먹어!”
“아. 네. 할머니.”
역시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그때부터 정신없이 퍼먹기 시작하는 네 사람.
그리고 이내 서로를 쳐다보며.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태풍아. 우리 밥 먹고 해변에 다시 나갈까? 혜정이도 괜찮다고 하고.”
“좋지. 그럼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좀 모아서, 거기서 캠프 파이어나 한번 해볼까?”
“야. 그러다가 경찰서에 잡혀가면?”
“몰래 몰래 하면 괜찮을 텐데? 근데 진짜 괜찮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러자, 옆에 앉아서 옷을 개고 있던 할머니가 한마디 말을 거들었다.
“밤엔 여기 아무도 안 와! 군 초소도 저 멀리 있고. 다들, 살짝 다녀오면 그냥 괜찮아. 나중에 나갈 때, 집 앞에 있는 장작개비들 몇 개 주워서 가.”
“아! 네.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다시 해변으로 나갔고.
잠시 후, 불을 활활 지피며.
나란히 주변에 앉았다.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돌아가면서.
노래도 부르고.
또, 박수를 치며 놀기 시작했다.
안성훈, 최기호, 조현중, 조현상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서로 다른 곳에서 이 밤을 보내게 된 사람들.
그러나 이내 그들에 대한 생각은 잊혀지고.
다시금 대화의 꽃이 피워 올랐다.
실험실 이야기이며, 선배들 이야기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근데, 태풍아. 그럼 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어?”
문득 한선영이 그렇게 물었고.
김태풍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됐어.”
으으! 쪽 팔려!
비록 사실대로 말은 했지만.
쪽 팔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배진수도 가만히 말없이 앉아 있다.
그러나 한선영은 묻지 않는다.
아마도 물어보지 않아도.
배진수가 모태 솔로라는 것은.
누구나 다 예상이 가능한 모양이다.
“너, 진짜 재밌다. 내가 소개팅해줄까?”
김태풍에게 묻는 한선영.
그러나 김태풍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고….”
“야! 김태풍! 사는 게 뭔데? 그러다가 평생 네 짝을 못 찾아!”
그래. 과거엔 그러고 말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좀 다르지 않을까?
또 모르지 뭐!
그리고 그 사이,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어쨌든 힐링은 힐링인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몇 번의 해프닝(?) 끝에.
무사히 실험실에 도착한 김태풍.
랩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모처럼 선양텔레콤 주가를 확인하다가.
절로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