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23-레전드 당뇨병 신약
<23> 레전드 당뇨병 신약
그날, 랩미팅 이후로….
석사과정 1년차 김태풍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특히, 단숨에 박한식 교수의 애제자로 등극한 김태풍.
김태풍은 수시로 박한식 교수의 방에 불려 들어가기도 했는데.
짧을 때는 10분.
길어질 때는 무려 2시간씩이나.
박한식 교수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보통 2시간짜리 면담은, 교수한테 야단을 맞는 경우가 보통인데.
그러나 김태풍은 달랐다.
늘 담담한 모습으로 박한식 교수의 방을 나왔고.
동기들뿐만이 아니라 선배들까지.
그런 김태풍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 또 다른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자네, 12월에, 대구에서 젊은 과학자(young scientist) 심포지엄이 열리는 거 알지?”
“네? 아. 네. 교수님.”
“그때 학생 구두발표 섹션이 몇 개 열리는데, 자네가 실험실 대표로 톡(talk) 하나 해봐.”
“네?”
톡이라는 것은 구두발표를 의미한다.
보통, 이런 경험은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주어지는데.
대체로 말년차 박사과정 학생들이.
이런 구두발표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런 대형 학회에서 그런 발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자신이 에이스급 학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학회 연구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명예로운 길이었다.
“교수님. 박사과정 선배님들이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레 김태풍은 물었고.
박한식 교수는 단칼에 잘랐다.
“우리나라 학회는 너무너무 구질구질해. 뻔한 결과만 갖고 와서, 다들 잘났다고 난리야. 난리! 이제는 진짜 세계적인 결과가 나올 때도 됐어. 자네가 그 일을 한번 해 봐. 학회 분위기를 자네 같은 사람이 일신해야지.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10월 추계 학회 때 구두발표를 할 거니까, 그건 염려할 거 없네.”
“아. 네. 교수님.”
“그리고 그때쯤이면 결과도 얼추 나올 거고. 그걸 가지고, 네이처 웍(work)도 시작하면 될 거야. 참! 10월 중에 초록 접수가 있으니까, 무조건 그때까지 현재 하는 실험을 마무리해 보게.”
“네. 교수님.”
“할 수 있지?”
확답을 원하는 박한식 교수.
그리고 그의 축 처진 눈매가 살짝 날카롭게 빛난다.
여기서 김태풍이 못 하겠다고 하면, 몹시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10월, 12월까진 아직 시간이 많았다.
김태풍에겐 충분한 시간.
“네. 할 수 있습니다.”
“음. 그래. 그럼 그렇게 하고. 그리고 앞으로 결과가 나오는 대로 나한테 가져오게. 일이 빨리 끝나면, 바로 박사과정 연구 일로 넘어갈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나중에 박사학위 받는 것도 더 빨라질 거야. 물론 코스웍 때문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코스웍.
일명 학위 과정 중에 수강해야 하는 강의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학원 과정도 정상적인 교육 과정이므로, 여러 과목들을 이수해서 학위 수여에 필요한 학점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학기마다 들을 수 있는 과목의 숫자가 제한적이라.
아무리 잘해도, 박사학위를 1년 만에 받을 수는 없다.
그렇게 구두발표 건이 거의 확정이 되면서.
김태풍은 다시 바빠졌는데….
##
어느덧 따사로운 봄은 가고.
점점 무더워지는 여름이 시작되었을 때.
김태풍은 다시금 대박 찬스를 얻게 되었다.
- 태풍아, 잘 있지? 나, 희선이. 방금, 비공식적으로 연락이 왔는데… 이번에 대상 입상하게 됐어! 하하! 너무 고맙다. 완전히 너 덕분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말.
-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 주말에, 정철이 오빠를 만나기로 했거든! 그때 서울에 올래? 이 음성 확인하면, 바로 연락 줘! 안녕!
그렇듯 삐삐 음성 사서함에 녹음이 된 것은.
한참 기다렸던, 서희선의 발랄한 음성 녹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김태풍은 무언가 다른 일들이.
진행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
여름 장마 때문에.
쉴 새 없이 비가 내리다가.
날씨가 다시 좋아졌을 때.
장마철 습도 때문에 한동안 진행을 못 하던 유기합성 실험이 다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보통 비가 오는 날이 되면, 습도는 100%다.
비가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공기 중 수분 함량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이야기.
그런데 여름철은 꼭 비가 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특성상 고온다습하다.
유기합성 실험을 하기엔 여름이 최악의 시기라는 의미다.
즉, 공기 중에 가득한 수분 함량이 유기합성 반응을 망치는 원인이 되는데.
물론, 랩에서 에어컨을 계속 가동하면, 습도를 낮출 수가 있다.
이런 에어컨 시설이 갖춰진 랩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에어컨 시설조차 없는 랩들이 이 무렵, 국내에서는 아주 많은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건 랩 사정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적인 사정이었다.
아직 에어컨 보급률이 그리 높지 않았고.
그래서 여름 열대야가 시작되면.
서울시민 중 일부는 한강 고수부지로 텐트를 들고 나가.
거기서 밤을 보내곤 한다.
이런 모습이, 뉴스에서도 간혹 나오기도 하는 시대였다.
“와! 이 자리가 제일 시원한데, 여긴 기운이 안 좋아서, 영 밥맛이야.”
투덜거리면서도 감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박사과정 2년차 장공석.
그는 몸 여기저기에 지방살이 많다 보니, 더위에 더 취약했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이 랩 공간만큼은 도무지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박한식 교수의 랩은 총 세 개의 블록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벽들을 그대로 뚫어 버리면.
길쭉한 공장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하지만, 벽들이 중간에 세워져 있어.
정확히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교수실과 거의 맞닿아 있는, 가장 안쪽 공간.
그곳은 최상준과 일부 짬밥 높은 박사과정 학생들이 점거하고 있었고.
가운데 공간은 그 외 박사과정 학생들이.
끄트머리 공간은 석사과정 학생들이 주로 일을 하는 곳이다.
물론 각 공간은 학생들의 책상이 있는 곳과 후드, 실험대 등의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공존하고 있었다.
포닥실처럼 실험공간과 분리가 되어, 쾌적한 사무 공간만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정도의 쾌적한 여건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어컨은 모든 공간에 설치된 게 아니었다.
최상준이 있는 그 공간.
그곳만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두 곳은 연일 선풍기들이 돌아가고 있다.
“야. 태풍아. 거기서 뭐 하냐? 너도 반응 돌릴 게 더 있어?”
에어컨 앞에 선 장공석.
그는 후드 앞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태풍에게 물어봤다.
여름철에는 습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이 있는 최상준의 공간으로 들어와.
유기합성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자 김태풍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진수 거, 좀 도와주고 있습니다.”
“야. 빨리 끝내고, 빨리 튀자. 곧 마왕 올 시간, 다 됐어.”
마왕?
그래. 마왕 최상준.
최상준은 장공석보다 더 선배였다.
박사과정 2년차 장공석마저도 주눅이 드는 선배.
“선배님은 좀 더 계시지 그래요?”
“아니. 좀만 더 있다가 나도 가야지. 휴와아! 이렇게 좋은데! 왜 저기랑 여기는 천지 차이가 나냐?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 불덩이 천국보다는 차라리 이 시원한 지옥으로 이사나 올까?”
불덩이 천국? 시원한 지옥?
말은 저렇게 해도, 장공석은 절대 여기로 옮기지 않을 것이다.
한번 여길 들어오면, 쉽게 나가질 못한다.
저 봐라.
최기호는 아직도 여기 잡혀있다.
이곳이 시원하긴 하겠지만.
저기 앉아 있는 최기호의 표정.
전혀 시원한 기색이 아니다.
그는 최상준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나마 의자에 푹 몸을 파묻고 있지만.
조만간 최상준이 돌아오면, 곧바로 어깨 각을 잡아야 한다.
“공석이 형. 그럼 저랑 자리 바꾸죠?”
이때, 시크한 목소리로 한마디 말을 툭 던져보는 최기호.
그러자 장공석은 금방 성깔을 드러낸다.
“인마! 내가 미쳤냐? 내가 그 자리에 가게? 저기도 자리가 많잖아. 혹시 가도, 제일 멀리 떨어진….”
“형. 여긴 어디나 똑같아요.”
“뭐? 똑같다고?”
“궁금하면 직접 오시든지?”
“아우우! 야! 그만하자. 내가 저 달콤한 에어컨에 취해서, 정신이 그만 나갈 뻔했네. 야. 태풍아. 다 했냐? 가자! 가자!”
“네. 선배님. 다 끝났습니다.”
실험 장갑을 벗은 태풍.
후드를 닫았다.
그리고 주변을 이리저리 살핀다.
혹시라도 빈틈이 있는지.
몇 번이고 살피는 것이다.
작은 오점이라도 남겨놨다가.
마왕의 부름(?)을 받는 불상사를 만들기는 싫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확인을 마친 김태풍.
그는 이곳을 나서면서, 최기호를 슬쩍 쳐다봤다.
“근데, 기호야. 요즘 김철중 선배는 통 안 보이네?”
김철중.
박사과정 4년차.
랩 짬밥으로 치면, 상당히 고참 뻘인 남자.
물론, 최상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철중이 형? 아. 저번 주부터 계속 출장 다니고 있던데.”
“출장?”
“듣기로는, 유기 코팅제 연구가 잘 되고 있다고 하더라고. 화연(한국화학연구원)과 공동 연구잖아.”
“아. 그래?”
“거의 막바지라던데. 뭐, 잘 되면 논문거리가 나올 거라고 하고. 아침에 여기 잠깐 나왔다가, 바로 거길 가는 것 같더라.”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통 얼굴 보기가 힘들었구나. 알겠어.”
##
그리고 며칠 뒤.
토요일 저녁, 일요일 오후의 학생 과외를.
일요일 늦은 시각으로 몽땅 미룬 김태풍.
그리고 그는 토요일 저녁에.
고속버스를 타고서 수원에 도착했다.
모처럼 자신의 집에 도착한 김태풍.
아주 젊어진 부모님들을 만나.
웃으며,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고는 일요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서, 그는 서울 강남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덧 도착한 강남대로.
마침 오전이라,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늘 학교에만 있다가, 이런 곳에 나와 보니.
사람의 가슴이 좀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과거, 바이오벤처 기업에서 시작해서, 거대한 바이오 기업의 회장이 되었던 어느 사업가.
그는 이 강남대로를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자신을 수행하던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봐라. 내가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부자야. 나보다 부자인 사람은 지금 나와보라고 그래!”
그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자신감.
아무리 강남땅에 부자들이 많다고 해도.
순식간에 주식 갑부가 된 그의 재산만큼은 아닐 것이다.
한때, 대한민국 공식 부자 순위 5위 권.
그 안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올렸으니까 말이다.
그렇듯, 이 넓은 땅 위에 서 있다 보니.
김태풍은 자연스레 그의 당당함이 부러워지는 게 사실이었다.
‘아! 늦겠다. 시간이 다 됐어.’
어느덧 아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시각.
이내 현실감을 회복한 김태풍은 다시 서둘렀다.
아침 11시.
서정철 사장을 만나.
오전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다.
그리고 잠시 후, 김태풍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
“태풍아! 여기!”
손을 흔들고 있는 서희선.
김태풍은 웃으며 다가갔다.
그리고 서희선의 옆에 앉아 있는 준수한 남자.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업가.
메드TX의 서정철 사장이다.
“반갑습니다.”
천천히 일어나 손을 내미는 서정철 사장.
김태풍은 가볍게 악수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풍입니다.”
“하하. 저는 서정철입니다. 자! 자리에 앉죠.”
자리에 앉았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
그러나 이런 상황을 예상한 터라.
김태풍은 바로 입을 열었다.
“우선,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요? 하하. 제가 아직 유명한 것도 아닌데.”
겸손한 말투.
그러나 그는 이미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기자들과 종종 인터뷰까지 하는.
아주 잘 나가는 젊은 벤처 사업가다.
조만간 주식 상장까지 일사천리로 달려갈 능력 있는 남자.
한편, 눈썹이 진하고, 또 얼굴각이 날렵한 서정철 사장은 누가 봐도 훈남 스타일이기도 하다.
“많이 바쁘신 분한테 제가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긴 싫습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 뵙자고 한 이유를 바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이렇게 빨리요? 그럼 먼저, 마실 거부터 주문하죠.”
사실, 이런 사람들한텐 시간이 금이라, 그래서 김태풍은 그걸 배려하느라 서두른 것인데.
다행히 서정철 사장은 여유가 있었다.
잠시 후, 커피와 음료 주문이 끝나고.
서희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태풍이는 아이디어가 좀 특이한 사람 같거든요. 보통 식상한 컨셉과는 확실히 달라서,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면, 오빠도 관심이 갈 거예요!”
서희선의 지원 사격에 서정철은 입가에 미소를 보인다.
“우리 희선이가 사람을 이렇게 칭찬할 때도 있군요. 하하. 좋아요. 무슨 이야기인지 한번 들어볼게요. 분명 제 회사와 관계가 있겠죠?”
한국연구기술대 화학과 석사과정 학생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면.
신약 벤처 기업, 메드TX와 관련이 있다고, 바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다만, 대기업 연구원이나 학계 교수급이 만나자고 요청한 게 아니기 때문에.
서정철은 그저 가볍게 들어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취업 청탁일 수도 있고.
현업과 관련된 질문일 수도 있다.
또는, 벤처 지망생이 직접 하는, 또 다른 인터뷰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곧이어 이어지는 김태풍의 이야기는 뜻밖이다.
지금 김태풍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설명들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시장 상황, 전망 예측 등을 포함하여.
새로운 신약 후보 물질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아주 폭넓게 설명하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차세대 당뇨병 치료제라고 했죠? 이 화학 구조만 보면… 뭐, 제가 섣불리 예측하자면, 어느 정도 효능은 예상이 되지만, 그게 기존 약물과 대비해서, 뚜렷한 효능을 갖긴 쉽지 않을 텐데요?”
대다수 첫 시작은 의심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의심을 풀어주는 것은 개발자의 몫이다.
합성된 물질로 증명하거나.
혹은 합당한 이론과 논리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김태풍은 우선 후자의 방법을 썼다.
“현재 대표적인 당뇨 치료제는 인슐린 제제가 있고, 그 외 설포닐 유레아 계열, 티아졸리 딘디온 계열, 비구아니드 계열, 알파-글루코시다제 저해제, 미글리 티아니드 계열 등이 있습니다.”
우선 배경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곧이어.
“보통 1차 약제로 메트포민, 2, 3차 약제로 설포닐 유레아 계열, 티아졸리 딘디온 계열 등을 쓰고 있고, 이후 GLP-1(glucagon like peptide-1) agonist 주사제 혹은 인슐린 주사제 등이 사용되고 있죠.”
김태풍은 말을 계속 이었다.
“제가 말씀드린 이 새로운 화합물은 GLP-1과 유사해서, GLP-1의 기능을 대거 수용했지만, 분자량이 상당히 적습니다. 합성 공정상, 약물의 분자량이 커질 경우, 화학구조검증과 QC(품질제어)가 어려워질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그 부분을 쉽게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태풍은 비슷한 사례를 제시했다.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년 전, 미국에선 새로운 당뇨 치료제가 개발되었다.
일종의 추출, 분리 과정을 통해 얻은 신약인데.
그 추출 대상체는 바로 미국, 멕시코 일대의 사막 지역에서 출몰하는 힐라 몬스터 도마뱀.
그 도마뱀의 타액에서 추출한 것이다.
그 신약의 이름은 엑세나타이드(Exenatide).
이 물질은 2형 당뇨병 치료제로써, 현재 한창 연구개발 중인 물질이다.
나중에 2005년이 되어서야.
미국 FDA의 허가를 받게 되는데.
그 작용 방식은 인체 내에 존재하는 GLP-1 호르몬의 기능과 비슷했다.
*GLP-1: 혈당 농도가 높아지면, 인슐린 분비를 강력하게 자극하는 호르몬. 다만, 문제는 GLP-1을 주사하면, 체내에는 GLP-1을 분해하는 효소가 있어, 혈중 반감기가 2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실질적인 효과는 상당히 낮음. 그래서 혈중 반감기를 증진할 수 있는 방법 연구가 추진되고 있으며, 혹은 GLP-1의 유사체 연구 쪽으로 발전이 되고 있음*
어느 정도 김태풍의 설명이 끝나자.
서정철은 묘한 눈빛을 보였다.
김태풍의 실력 때문이다.
보통 포닥급 혹은 교수급 정도의 설명을 하고 있어.
그가 석사과정 1년차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눈앞의 김태풍은 자신이 만든 샘플들이라며.
몇 개의 샘플들까지 제시했다.
“우선 간단히 효능 테스트를 해 보시면 될 겁니다. 뭐, 이 샘플들은 아직 완성판은 아닙니다. 그리고 경구용 제제는 아니고 주사형 제제라서, 위장관 내의 약물 흡수 경로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화학 구조상으로 당연히 좀 더 개량할 것이 남아 있는데, 그래도 이 시점에서 한번 테스트해 보셔도 무방할 겁니다. 기존 약물 대비해서, 차별적인 효능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으음. 근데, 혹시 이 아이디어가, 박한식 교수님한테서 나온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 이건 제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니까, 멋모르는 석사과정 학생이 지도교수의 아이디어를 유출한 것이 아닌가 하고.
서정철은 먼저 확인을 한 것이다.
“으음.”
그러나 지금 서정철은 선뜻 확답을 줄 수가 없었다.
과학계에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학벌과 학위라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발명가라고 외치며, 수많은 특허들을 출원하고 또 등록하는 민간 개발자들이 더러 있지만.
학계에서는 그들을 동등한 선상에 놓고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무시부터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그걸 수행하는 과정은, 보통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인정할 만한 과정이라는 것이 학계가 통상적으로 인정하는 범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과학계는 훨씬 더 폐쇄적일 수도 있다.
석사 학위도 없는 일본 화학자이자 분석기기 개발자인 다나카 고이치가 훗날 노벨화학상을 받았을 때.
모두가 놀랐던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선, 확인부터 하신 뒤에 다시 한번 뵙는 게 어떨까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냥 제 요청을 무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김태풍이 강하게 나오자.
씩 웃는 서정철.
“그래도 우리 희선이 친구인데, 제가 그렇게까지 삭막하게 대할 순 없죠. 뭐, 우선, 저희 회사 연구원들을 통해, 시험은 한번 해 보도록 하죠.”
서정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김태풍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마 김태풍이 지방의 변변찮은 대학 출신이었다면.
서정철은 김태풍의 요청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아직 학벌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 기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저희 회사에서도 이번에 신약 파이프라인에 당뇨병 치료제 후보군을 하나 올리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시험 방법을 세팅할 필요가 없어, 효능 테스트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말하는 서정철.
“아! 이건 아직 비밀이니까,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해선 안 돼요.”
“아. 네! 알겠습니다.”
김태풍은 그냥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이 회사가 상장한 상태라면, 그 말은 정말 중요한 내부 정보가 될 수 있다.
사실, 신약 개발 회사에서는 신약 후보 파이프라인을 설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것도 있겠고.
주가 상승을 통해, 투자를 크게 유치할 수도 있다는 장점도 생기게 된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보통, 주식 투자자들은 신약 후보 파이프라인만 보고서, 신약 회사 혹은 바이오 회사에 과감하게 주식 투자를 했다가.
좋게는, 순식간에 수십 배 이익을 볼 수도 있지만.
혹은 하루아침에 주식이 종이쪼가리가 되는 꼴을 보게 된다.
일례로 이런 경우가 있다.
어떤 신약 회사가 신약 후보 물질의 임상 2상 시험에 성공한 뒤, 임상 3상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 때문에 주가는 폭등할 것이다.
그런데 임상 3상에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겨, 임상 3상을 중단하게 된다면?
그러면, 바로 그 순간, 그 회사의 주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이때, 그 회사에 다른 신약 후보군들이 없다면, 그걸로 그 회사는 몰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신약 후보군들이 파이프라인에 올라가 있다면.
보통 회사는, 하나가 실패하면, 다른 것을 내밀어 시장에 강력하게 어필한다.
그러면 폭락했던 주가가 다시 상승세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흐름을 잘못 보고.
큰 손해를 입었음에도 미리 손절한다면, 주식 투자자들은 뒤늦게 큰 후회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반면, 이런 경우도 있다.
이런 폭락세가 터졌을 때, 오히려 주식을 매집하는 사람들.
이런 경우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런 신약 파이프라인이 얼마나 괜찮은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투자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부분은.
결국, 그 회사가 어떤 신약 파이프라인을 가졌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마찬가지인 게.
신약 개발 회사들 역시, 신약 파이프라인을 최대한 보강하고 싶어 한다.
지금 김태풍이 내민 것은 바로 그런 회사의 그런 목적과 부합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구태여 임상 시험에 성공하지 않더라도.
김태풍의 도움으로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강할 수 있다면.
단기간에 회사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김태풍은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해서 가세요.”
“태풍아. 학교에서 보자!”
1시간가량 미팅을 끝낸 뒤.
커피숍을 나서는 김태풍.
그의 표정은 밝았다.
왜냐하면, 서정철 사장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고 젠틀하고, 또 똑똑하게 보이는 서정철 사장.
향후 그가 어떤 판단을 할지 모르겠지만.
김태풍은 우선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서정철 사장과의 만남을 끝낸 김태풍.
곧바로 터미널로 이동했고, 고속버스를 타고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는데.
어느덧 8월 하순 무렵.
갑작스럽게 서희선을 통해 연락을 받은 김태풍.
그는 서정철 사장과의 만남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에서가 아니다.
무더운 일요일.
서정철 사장이 직접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