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20-악마의 유혹
<20> 악마의 유혹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어느덧 일요일이 되었다.
마지막 발표 정리를 신중하게 해 가던 김태풍.
그런데 그는 오후 늦게, 한국대 화학과 송아란으로부터 긴급한 호출을 받았다.
아. 맞아. 깜빡하고 있었네. 지금 선배들 미팅하고 있지? 근데 잘 됐을까?
그러나 약간 불안하다.
송아란이 자기 번호를 보내면서, 8585라는 번호도 같이 찍어 보낸 것이다.
8585(바로바로).
바로 전화를 해 달라고?
김태풍은 얼른 실험실 전화기를 잡고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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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란아. 나, 김태풍. 어떻게 됐어?”
- 풉! 오빠.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한 거 아닌가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몹시 높아져 있었다.
“왜?”
미팅에 나간 박사과정 2년차 선배들의 외모.
혹시 그거 때문일까?
그건 김태풍이 송아란에게 이야기했던 것에 비하면, 좀 많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남자답게 생겼다.
완전 추남들은 아니지 않은가.
김태풍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당당했는데.
이어지는 송아란의 말에 바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태풍이 오빠. 그 오빠들 사이에 노총각 아저씨를 끼워 넣으면 어떡해요? 친구들도 적당히 감안하고 나갔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하잖아요?
“뭐? 누가 노총각 아저씨라는 거야?”
- 그분… 이름이 뭐였더라? 아. 장공석씨.
풉!
그 순간, 김태풍은 입바람 소리를 크게 낼 뻔했다.
족발 야식까지 쐈던 장공석 선배.
야식 매니아라서, 나이답지 않게 아랫배가 좀 많이 나오긴 했다.
그러다 보니, 얼굴에 기름기가 좀 낄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이 학교 학생들 특성상 대가리가 좀 크다 보니.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더 많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홍병호, 김창용, 장공석.
박사과정 2년차들인 이 세 사람은 나이 차이가 고작 한 살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동년배들이었다.
그런데 누구는 아직까지 오빠라는 소리를 듣는 거고.
누구는 바로 노총각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아. 어쨌든, 미안. 근데 그게 실은… 그 선배가 좀 살이 쪄서 그렇지, 나이는 27살밖에 안 됐어.”
- 네에?? 오빠!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분이랑 커플이 된 지영이가 저한테 엄청나게 화내면서 그랬어요. 30대 후반 정도라고 하던데?
뭐, 30대 후반?
그렇게나 많이?
이때, 김태풍은 곰곰이 장공석 선배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왜 30대 후반으로까지 봤을까.
그런데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그 정도 나이가 든 것 같진 않았다.
“음.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내가 그 선배 주민등록증을 복사해서 보내줄까?”
- 네? 설마 27살이라는 말, 진짜였어요?
“내가 왜 그런 걸 거짓말하겠어?”
- 아. 맙소사. 뭐, 그렇다면야 좀 다행이지만…. 하지만, 장공석씨 그분. 웬만하면 그런데 나오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이를 어쩌나.
장공석 선배.
앞으로는 몸매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송아란의 그 말을 듣자마자.
김태풍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칫 야식이라는 금단의 길에 접어들었다간.
자신도 어느 순간 90kg대의 돼지로 돌변하게 될지 모른다.
야간 실험을 하는 대학원생들.
그들에게 야식은 정말 달콤한 영약.
사악한 악마의 유혹인 것이다.
“그럼 다른 선배들은 어땠어?”
홍병호, 김창용 선배들에 대해서 묻자.
송아란은 약간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아직 데이트 중인 것 같은데… 우선은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했어요.
와!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저번에 콜드룸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홍병호 선배.
앞머리가 좀 길지만, 수시로 앞머리를 넘기는 습관이 있는 홍병호 선배.
그게 옛날 DJ들이 하는 습관인데도, 다행히 미팅녀한테는 애교로 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김창용 선배.
키가 멀대같이 크다.
대략 185cm 정도.
이 시대에 이 정도의 키라면, 아주 큰 편에 속한다.
그래서 그는 농구를 아주 잘했고, 몸놀림도 꽤 날렵한 편이었다.
장공석과 다르게, 몸매 관리를 평소에 하다 보니.
다행히 그는 미팅녀한테 아저씨라는 소리까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그곳에 원자폭탄(?)이 한 명 있었고.
그게 바로 장공석 선배라는 것이다.
그때, 과감하게 야식 쏜다고 외치던.
그 장공석 선배의 처절한 추락을, 멀리서 지켜보는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그럼 장공석 선배 파트너는?”
- 예의상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대요.
‘그랬구나.’
결국,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돌아올 장공석 선배의 얼굴.
그게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래도 세 사람이 나가서.
두 사람이 선방한 것만 해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 근데, 오빠. 혹시 그 학교에, 정말 오빠 또래의 사람들은 좀 없어요?
“어?”
- 남자들이 머리가 좀 큰 거 크게 모난 건 아닌데, 세 사람 모두, 머리가 유별나게 컸대요. 아까, 저한테 전화했던 지영이가 그 말까지 하던데….
‘아! 머리가 크다?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지.’
사실, 보통 사람들의 안목은 매한가지일 수밖에 없는데.
그건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실제 이런 예도 있다.
사실, 박사과정 입학과 동시에 병역특례(병특) 자원으로 편성이 되면.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에, 그럼에도 4주간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 지급받는 전투모나 방탄모.
보통 이 학교 출신 남학생들의 평균 전투모 사이즈는 58호에서 60호에 걸쳐있다.
물론 개중에 머리가 작은 사람들도 확률 분포상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미팅에 나간 세 사람.
그들의 평균 사이즈는 아마 60호 혹은 61호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 훗날 훈련을 받게 될 훈련병들 중에서.
머리 크기로는 탑10 안에 들어갈 사이즈들.
얼굴은 가느스름한데, 머리통이 큰 홍병호 선배까지.
놀랍게도,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꼭 머리 자체가 크진 않을 텐데.
참 이상한 일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또래 애들? 미팅을 다시 주선해 달라고?”
- 네! 그리고 이번에는 오빠도 포함해서요.
“어?”
- 5대5, 어때요?
“5대5, 그렇게나 많이?”
- 어때요? 저도 그땐 해 보려고요.
송아란이 미팅을?
그러자, 김태풍은 바로 부담스러워졌다.
저번에 송아란이 자신한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은근히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밀당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 바로 끝났어요. 사귄 것도 아니고. 두 번째 만나고 바로 끝냈어요.
“아? 그래?”
- 그래서 제가 한다니까, 민지(정민지)도 한다고 하고, 그리고 그때 봤던 최하영이 있죠?
‘최하영?’
그 순간, 김태풍의 눈이 약간 커진다.
김태풍의 이상형에 좀 가까웠던 여대생.
그런데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김태풍의 기대감을 훨훨 날려 버린다.
- 하영이는 남친 때문에 못 하니까, 대신에 그때 사회를 봐 주겠대요. 서로 커플을 고를 때, 자기가 게임을 주도해주겠대요.
‘뭐? 사회?’
그 순간, 기분이 확 상해 버리는 김태풍.
역시 자신은 최하영과 인연이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송아란과도 인연이 아닐 테고.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신에 한 번 생각해 볼게. 그런데 여긴 성훈(안성훈)이 같은 애들이 별로 없는데….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 아. 뭐….
김태풍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일 랩미팅이라서 많이 바쁘거든. 미안하지만,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자.”
- 아… 네. 그래요. 오빠!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김태풍.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잡념들을 털어 버린다.
사실, 김태풍은 미팅을 하러, 서울까지 갈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선배들의 미팅은 곧 끝날 것이고.
이번에 도움을 준 안성훈에게 밥이나 사야겠다고.
김태풍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근데 저 녀석, 절대 양반은 못 될 거야. 마침 저쪽에서 오네.
“야. 성훈아!”
김태풍이 정답게 부르자, 피식 웃으며 다가오는 안성훈.
“야.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긴 한데. 먼저 너부터 해. 왜 날 불렀어?”
“알았어. 내가 먼저 말할게. 개인적인 질문인데, 너 혹시 여자친구 없지?”
그러자 다시 씩 웃는 안성훈.
“프리한게 얼마나 좋은데, 벌써부터 여친을 만들어?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래. 저런 게, 차가운 도시 남자 스타일이다.
하하하.
“야. 안성훈. 내가 저녁에 짜장면 사줄까?”
“흠. 그 전에 말이야. 선배들은 미팅을 잘했대? 그리고 설마 너, 그걸 짜장면으로 때우려고?”
“야. 미팅 이야긴 나중에 해 줄 테니까. 그것보다, 넌 그럼 뭘 원하는데?”
“임마. 짜장면은 내가 사줄 테니까, 자전거 타고, 학교 앞, ‘사천 차이나’로 가자.”
“무슨 말이야? 내가 사야지. 그리고 괜히 움직일 필요 없이, 배달시켜도 되잖아?”
“배달은 무슨? 그 가게는, 가서 먹어야 더 맛있어. 잠깐 나갔다가 오자. 진수와 기호도 같이 간대.”
“아. 그래?”
갑자기 동기 모임이 또 결성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네가 사려는 건데?”
“아. 하하.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뭐?”
“으으! 이거 쑥스럽지만, 오늘! 내 생일이야.”
“???”
“왜 아닌 것 같아? 우리 집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생일을 쇠거든.”
“야. 임마! 이 강아지 같은 놈아!”
순간, 욱하는 김태풍.
자신이 미리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세상에 누군들 음력 생일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동기를 무안하게 만드는 놈.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작은 욕설(?)이 나왔던 김태풍은 이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안성훈.
그 역시 좀 특이(?)한 놈인데.
김태풍은 그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너, 안 됐다. 내일이 랩미팅인데, 오늘이 음력 생일이라? 그럼 오늘 술도 못 마시겠네?”
“내일 끝나고 마시지 뭐.”
“그래. 미안해서 술은 내가 살게.”
“야. 그걸로 미팅 건, 퉁칠 생각 마. 그건 내가 다르게 쓸 생각이니까.”
“그래. 알았다. 임마.”
김태풍이 과거로 돌아온 이후.
이것저것 세상 일들이 과거와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쥐 소동도 그러했고.
광주 학회 소동도 그러했다.
과거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비 효과와 같은 것일까?
자신의 행동들이 여러 사람들한테 은연중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과거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안성훈.
이런 녀석과도 이렇게 친해지고 있는 걸 보면.
물론 배진수도 마찬가지이며.
이제 마음을 연 최기호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이상야릇하다.
김태풍의 눈빛은 조금 더 깊어졌다가, 이내 밝아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변화들이 나쁘지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최기호는 아직 걱정이 되긴 한다.
누군가와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의 담장을 넘어서서.
조금씩 더 상대를 이해하고, 더 인정하게 되는 과정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