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9-첫 랩 미팅 발표
<19> 첫 랩 미팅 발표
‘휴우! 할 일이 참 많네.’
논문 자료들도 다시 읽어야 하고.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던 지식들 역시 탄탄하게 다시 무장할 필요가 있었다.
랩미팅에서 어떤 돌발질문들이 나오든 간에, 확실하게 대처할 생각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특히, 달달한 게 당기고 있었다.
실제로, 뇌 대사에서는 포도당이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래서 머리를 많이 쓰게 되면, 달달한 것이 더 당기게 된다.
물론 당을 먹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포도당 신생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분의 포도당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달달한 것을 먹는 순간, 혈액에 채워지는 당 수치는 순식간에 높아질 것이다.
그 덕분에 뇌도 방긋방긋 웃을 테고.
‘한데, 뭐, 먹을 게 없나?’
마침 그런 고민을 할 때쯤.
아마 이런 생각들은….
지금 실험실에 남아 있는 랩원들 대다수가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의 와중에,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박사과정 2년차 장공석 선배였다.
덩치가 좋고, 아랫배가 살짝 나온 장공석 선배.
그는 이번 주 일요일 날, 서울에서 (김태풍이 주선해준) 미팅이 잡혀있었고.
그래서 부족한 실험을 미리 하려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고함을 질렀다.
“야! 야식 먹을 사람들! 다들 모여!!”
‘그래. 야식, 아주 좋지.’
김태풍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둘 장공석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장공석은 그런 녀석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때, 김태풍은 발견하고는 씩 웃는다.
“야. 내가 오늘은 태풍이를 봐서, 야식 쏜다! 하하하. 내가 태풍이 덕에 미팅도 하잖아. 하하하하!”
그렇게 환하게 웃고는 장공석은 배진수에게 지시했다.
“야. 진수야. 24시간 하는, 저 족발집 있지? 저기에 빨리 시켜. 족발하고 막국수가 푸짐하게 오니까, 다들, 좀만 기다려.”
그제야 모두들 웃으며, 흩어졌고.
이때, 김태풍은 기분이 좋아졌는데.
야식을 공짜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야밤에 먹는 기름진 야식은 정말 꿀맛이다.
사실, 족발이 아니더라도, 뭘 가져와도 꿀맛 그 자체.
그러나 여기에도 피할 수 없는 단점이 있긴 했다.
이런 야식을 많이 애용하다가는.
점점 아랫배가 불러온다는 것.
그 아랫배라는 것은 지방덩이 살을 말하는 것이다.
살이 찐다는 것.
그러고 보면, 김태풍이 과거 박사과정을 졸업했을 때.
키 178cm에 몸무게가 무려 90kg에 육박했을 정도다.
피둥-피둥한 돼지.
물론,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김태풍은 몽땅 살을 빼긴 했다.
무척 고통스럽게 말이다.
보통, 체중은 운동을 하게 되면 몸 신진대사가 더 좋아져, 더 불어나게 되는데.
그래서 살을 빼려면, 적당한 운동과 함께 무조건 안 먹어야 한다.
그건 아주 고통스럽다.
‘뭐? 아직은 괜찮으니까.’
아직은 석사과정 초창기다.
그래서 김태풍은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꿀꺽! 근데 왜 이렇게 침이 고여? 아. 배고파라. 어서 족발을 먹고 싶다. 족발아! 어서 와라!’
##
랩미팅 있는 그 날까지.
시간은 정말 더디게 간다.
30살인 사람은 세월이 시속 30km로 가고.
60살인 사람은 세월이 시속 60km로 간다지만.
지금 김태풍에게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 내내 할 일이 정말 많았다.
강신혜 박사의 도움을 받아.
LC-MS 분석까지 마쳤고.
데이터 검증까지 끝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가 되었을 때.
조용히 혼자 일을 하던 최상준이 석사과정 1년차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김태풍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첫 발표지?”
“네. 선배님.”
“준비는 많이 했냐?”
“아닙니다. 아직 좀 더 해야 합니다.”
다들 그런 식으로 대답하자.
재벌 3 세답게 얼굴은 번지르르하게 생긴 최상준.
그의 입꼬리가 이상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자식들. 선배들 얼굴에 괜히 먹칠할 생각하지 마. 너희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단단히 준비해. 흐리멍덩한 인간은 교수님도 아주 싫어하지만, 씨발, 내가 가만히 안 둬. 알겠냐?”
“네! 선배님!”
“혹시 데이터 나온 사람?”
그리고 상황을 슬쩍 물어보는 최상준.
안성훈 등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김태풍을 곁눈질했다.
신입생들 중에서 유일하게 데이터를 뽑아낸 이는 김태풍.
그 혼자다.
그러나 김태풍은 지금 모른 척하며, 입을 꼭 닫고 있다.
그게 이상한 배진수와 안성훈.
반면, 요즘 최상준에게 붙들려, 죄수 신세나 다름없는 최기호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다.
“없어?”
“네. 선배님.”
이때, 김태풍이 바로 목소리를 높이자.
배진수와 안성훈은 더는 뭐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최상준은 씩 웃는다.
“데이타 뽑는 게, 뭐 국수 뽑듯, 쉽게 뽑혀져 나오는지 알지? 존나 뺑이를 쳐야 겨우 나와. 빈둥거리지만, 똑바로 해! 똑바로! 응?”
“네. 선배님.”
“니네들은 군대를 안 가지만, 여기가 군대라고 생각해. 행동거지도 조심하고, 할 일도 제각제각 제대로 해. 알겠어?”
“네! 선배님!”
다시 목소리가 높아지는 석사과정 1년차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한테 잘해. 어떤 새끼는 벌써부터 선배들한테 개기고 그런다던데? 그러다가 어디 나한테 한번 걸려봐라.”
슬쩍 위협까지 하는 최상준.
그리고 최상준은 김태풍을 또렷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차경석과 관련된 일을 최상준이 아는 걸까?
그러나 김태풍은 일부러 모른 척했고.
또한, 최상준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있는 김태풍.
사실, 지금 김태풍의 모습은 확실히 다른 동기들과 달랐다.
다들,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김태풍만 머리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준의 눈매가 자연 더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야. 김태풍.”
“네.”
“너, 나한테 할 말이 있냐?”
“없습니다.”
“그럼 왜….”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러나 뒷말을 더는 하지 않는 최상준.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쳐다봤으니.
김태풍이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서로 간의 일반적인 부분이다.
최상준이 대통령도 아니고, 겨우 실험실 선배일 뿐.
대신에 묘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최상준.
“암튼, 잘하라고. 알겠냐? 짬밥도 안 되는 새끼들이 함부로 개기지 말고. 그리고 이번 랩미팅 때 못하는 새끼들은 내가 따로 관리할 테니까, 잘 숙지하고 준비해.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네! 선배님!!”
그렇게 최상준과의 면담은 끝이 났다.
랩짱에 대선배이긴 해도, 자기가 교수도 아닌데.
저렇게 난리다.
그러니 마왕이라는 소리를 듣지.
그리고 곧바로 실험실 밖으로 나가는 동기들.
자기 자리 쪽이 아니라, 실험실 바깥 쪽이다.
“야. 다들 커피 마실 거지?”
“오케이!”
모두들 동의하자,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
그리고 잠시 후.
커피자판기에서 뽑은 달짝지근한 커피를 입속에 흘려 넣자.
이제야, 사르르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들은, 남들이 잘 오지 않는.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거기서 뭘 하려고 그러는 걸까?
그렇다.
지금 그들은 뒷담화를 좀 까려는 것이다.
아무리 최상준이 랩짱이고 재벌 3세라고 해도.
뒷담화 까는 것은 못 가진 자들의 유일한 낙(?)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것 자체가 초라하고 소심스럽고, 또 바보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꽉 막혀서, 실험실 생활을 오래 할 수가 없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즉각 즉각 풀어야 하고.
스트레스 원인균(?)은 확실하게 뒷담화로 박멸해야 한다.
누가 그런 모습을 보고서, 순 병신 같다고 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 불쌍한 연구자들이여!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불치병인가 보다.
하긴, 이 세계(?)에 뒷담화만큼 안정적이고 값싼 치료법(?)은 없으니까.
“근데 기호야. 너 괜찮냐?”
“흐음. 나, 요즘 고민이 많다.”
힘이 하나도 없는 최기호.
“너,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나?”
그리고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크크 거리며 웃는 최기호.
이내 표정을 바꾼 듯 입을 열었다.
“그냥 학교 때려치울까 생각 중이야.”
“학교를? 야!!”
그리고 한편으로는 눈빛도 이상해지는 최기호.
“너희들은 내가 진짜 뽕쟁이 아닌 거 알지?”
“어?”
“야. 내가 좀 말이 심해서 그렇지, 그럴 의도는 절대 아니거든.”
“너, 무슨 일이 있었냐?”
퓨우우!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는 최기호.
곧이어 최기호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이야기했다.
“나, 일성병원 다녀왔어.”
“일성병원? 거긴 왜?”
“검사 안 하고 오면, 학교에 알려서 퇴학 조치를 취하겠대.”
“뭐??? 최상준 그 새끼가 그랬어? 그럼 갔다 왔어?”
“응.”
“어떻게 됐는데?”
놀라며, 쳐다보는 동기들.
그리고 배진수의 동공이 동기들 중에서 가장 커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검사 결과, 혹여 최기호가 뽕쟁이로 나타날까 봐, 그게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천만뜻밖이다.
“소변도 뽑고, 혈액도 뽑고, 정밀검사까지 받았는데….”
“그래서?”
“내가…… 아이씨이! 존나 구려. 나한테 존나, 당뇨가 있대.”
“뭐어????”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는 동기들.
마약 검출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지듯, 갑자기 튀어나온 당뇨 이야기.
“야. 마약은? 아. 미안. 큭!”
자신도 모르게 물어보고 나서, 배진수는 머리를 긁적인다.
냉담하던 최기호의 얼굴이 바로 그 순간, 헐크처럼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네들!! 진짜 날 못 믿어???”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하는 소리잖아. 웃자고.”
김태풍이 나서서, 무마하자.
그제야 최기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운동도 부족하고, 생활 패턴도 불규칙적이고, 거기다가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서.
그 젊은 나이에 벌써 당뇨가 왔다는 것이다.
그런 진단을 받고 나자, 최기호는 더 우울해진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약 먹어야 돼?”
“음. 우선은 살부터 빼고. 앞으로 운동 좀 하려고. 그리고 나랑 안 맞는 여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진로를 찾을까 생각 중인데….”
“너, 그러면 군대 가야 하잖아?”
“뭐, 군대 가면 되지. 그게 뭐 어렵냐?”
“야. 너보다 나이도 어린 애기들한테 맞을 텐데? 반말 찍찍, 이놈 저놈, 개놈 소리까지 들을 텐데?”
이 무렵, 군대에서는 은밀한(?) 폭력 행위들이 밤마다 끊이질 않고 일어나고 있었고.
그런 일들은 군대에서 만성화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특히, 최기호 같은 이상한 녀석이 군대에 가면 어마어마해질 것이다.
바로 관심사병으로 분류가 될 녀석.
“몰라. 아무튼, 고민이야. 군대 다녀와서 수능이나 볼까 생각 중인데.”
그 말에 김태풍의 눈이 약간 커진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최기호의 말 때문이었다.
이건, 지난 과거와도 다른 것이다.
과거에 최기호는 조용히 석사 학위를 마쳤고.
또, 박사학위도 마쳤다.
그리고 잠깐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를 했고.
병특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미국으로 포닥을 나간 뒤.
거기서 최기호는 훨훨 날아다녔다.
토종 한국인이, 아시아 남자들을 우습게 여기는 백인 미국 여자와 결혼에도 성공했고.
(이 녀석은 대체 무슨 다른 능력(?)이 있었을까?)
영주권에 이어서 시민권까지 받은 녀석은 나중에 조지아공대 교수까지 되었다.
그런 녀석이 지금 학계를 떠나려고 한다.
김태풍이 바뀌자.
최기호의 인생에도 무언가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렇게 우울한 대화가 이어지자.
최상준에 대한 뒷담화를 실컷 하려고 모였던 그들은 이내 답답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후,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실험실로 돌아왔다.
어쩌지? 최기호, 저 녀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김태풍의 고민도 자연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