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138화 (138/153)

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7-강신혜 박사

<17> 강신혜 박사

그리고 다음 날.

정말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그간 실험실에서 간단한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내던.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인 포닥 강신혜 박사.

33살인 그녀가 김태풍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보조개를 보이며.

안경 너머로 눈웃음도 보이고 있는 강신혜 박사.

그녀는 웃으며, 2D NMR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김태풍은 바로 두 눈을 반짝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민영이한테서 들었는데, 2D 쪽에 관심이 있다며?”

“네. 박사님.”

“그럼 나랑 딜을 하나 할래?”

딜?

“앞으로 내 연구를 좀 도와줄래? 민영이만으로는 좀 힘들어서. 만약 네가 좀 도와주면, 나중에 논문 작성할 때, 꼭 네 이름을 공저자로 올려줄게. 물론, 최상준이 모르게 진행해야 돼. 우리가 상준이 눈치를 많이 보거든.”

최상준? 하하. 역시.

랩짱 최상준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네. 그건 걱정 마세요. 박사님.”

“대신에 나도 네 일을 도와줄게.”

“그럼, 박사님. 한 가지 더, 제 일을 도와주면 안 될까요?”

갑자기 조건을 재빨리 거는 김태풍.

강신혜 박사는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봤다.

“제가 앞으로 물질 합성할 거리가 아주 많은데, 박사님이 제 물질 분석을 좀 전담해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교수님 몰래요.”

“뭐?”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강신혜 박사.

자신은 박사이고, 김태풍은 일개 석사과정 학생이다.

그런데 자신더러 분석 일을 전담해 달라고?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일.

그런데 이어지는 김태풍의 말에 강신혜는 솔깃한 표정을 짓는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밖으로 나가죠. 제가 그 정도 수준이 되는지 한번 시험해 보세요. 만약 안 된다면, 그냥 앞으로, 박사님 꼬봉 노릇할게요.”

“뭐? 꼬봉? 호호호!”

“네.”

“너, 재밌다. 말투도 웃기고, 꽤 도발적이고.”

“그러니까, 제가 실력이 된다고 생각되시면, 완장 서로 따 떼고, 서로 돕기로 하죠?”

“우와. 나 갑자기 머리가 아픈데?”

“박사님. 박사님은 분석화학 쪽 박사님이시니까, 그쪽을 더 많이 아실 수밖에 없잖아요? 반면 저는 골 때리는 아이디어맨일지도 모르잖아요?”

강신혜는 다시 웃었다.

UC버클리 학부 출신에,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강신혜.

그녀도 이곳 학생들이 상당히 똑똑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 박사학위자에게 감히 도전을?

하룻강아지도 범 무서운 줄 알아야지.

그래서 강신혜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너 간이 크구나? 좋아. 잠깐 나가서 우리 이야기해보자.”

한국에서 교수가 되려고 귀국해서, 지금 박한식 교수의 일을 돕고 있는 강신혜 박사.

그런데 훗날, 그녀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교수 직종을 잡지 못했다.

아마도 여성 과학자에 대한 편견 때문이겠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강신혜는 훗날 UCLA에서 패컬티, 즉 교수로 임용되게 된다.

정말 똑똑한 여자인 것은 분명했는데.

그래서 혹시?

얼레레?

내가 설마 밀리진 않겠지?

뒤늦게 부담감이 팍팍 느껴지는 김태풍.

그래서 김태풍은 정면 돌파보다는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49살이었던 김태풍과 33살인 초짜 박사.

잔머리는 역시 김태풍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

“네이처급 아이디어라고?”

놀란 모습 좀 봐라.

역시 사람은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게 실현성은 있고?”

“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푸마질린(fumagillin)은 원래 항균제죠. 하지만 이걸 화학적으로 변형한 유도체 TNP-470은 이미 신생 혈관 생성 억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판단한 바로는 이것은 항암 물질로 임상 시험 단계 진입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이런 TNP-470를 한 번 더 변형하면, 그 효능은 놀라울 정도로 상승될 수 있어요.”

전문적인 화학 개념들이 주르르 이어지다가.

김태풍은 눈치껏 복잡한 나노머신 개념까지 가미했다.

학문적 분야에서 일종의 잔머리를 쓰는 것이다.

“이 TNP-470의 변형체가 결합된 나노머신. 이게 체내에서 오랫동안 잠복하면서, 신생 혈관 생성 억제 작용을 더 상승시킬 수도 있어요. 이 나노머신은 우스개 판타지 소재가 아니라, 제약 쪽에서 가장 현명하게 접근하는 방법이 되죠.”

과거, 나노 의약품과 관련해서도 관심이 많았던 김태풍.

아직 초창기 개념에 불과한 나노 의약품, 나노머신에 대해서 썰을 풀기 시작하자.

강신혜 박사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을 것이다.

단순한 분석 파트에만 집중하다가.

이런 식으로 응용 쪽 이야기가 나오면.

제아무리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이라고 해도.

다리가 풀릴 수밖에.

“하지만, 그 물질은 신경계통에 독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임상 시험까지 갈 수 있겠어?”

그래도 감각은 있어, 바로 틈새를 노리며 쪼아대는 강신혜 박사.

“그런 쪽은 투여 용량과 체내 잔존 농도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뭐, 어지러움, 기억 상실, 우울증 등, 신경계통에서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겠죠.”

“그런 점들이 아주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 생각엔 그런 문제점들을 한 번에 해결하면 됩니다.”

“뭐? 그걸 어떻게?”

잘 돌아가던 강신혜 박사의 머리가 이때부터 삐꺽거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되죠. 저희는 화학을 막 공부하는 코흘리개 학생들도 아니고,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현실적인 접근?”

“네. 이 약물은 혈관-뇌 장벽(Blood-Brain Barrier: BBB)을 통과해서 뇌로 잘 흡수가 되는데, 이걸 인위적으로 막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간단히 약물의 덩치를 키우면 되죠. 그게 바로 나노머신과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초고분자체와의 결합. 이런 방식으로도 충분히 해소될 수가 있죠.”

*혈관-뇌 장벽: 일부 약물은 이 장벽을 쉽게 넘어가, 뇌로 흡수가 아주 잘 되지만, 대다수 약물은 이 장벽 때문에 약물 흡수가 잘 안 되어, 뇌 관련 질환 치료가 극단적으로 힘들어지고 있음. 혈관-뇌 장벽 관련 이슈는 제약 업계의 핫 이슈 중의 하나임*

이렇듯 김태풍은 어떤 질문이든 막힘이 하나도 없다.

때로는 애매한 질문이 나오면.

그 즉시, 훗날 나오는 지식들까지 교묘하게 이용해서.

그 애매한 부분을 사정없이 덮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인 강신혜는 점점 밀릴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순하게 생겼지만.

말을 할 때마다 눈빛이 완벽하게 달라지는 김태풍의 모습.

이게 이 학교, 석사과정 1년차 수준인가?

한국 학생들의 지식수준이 이렇게 높아졌나?

믿을 수가 없는 일.

“박사님. 이 정도면 하면 안 될까요? 랩미팅 준비도 해야 해서, 더는 시간이 무리인데?”

‘설마 내가 어쭙잖은 학위만 믿고서 공부를 너무 등한시했나?’ 문득 그렇게까지 자책하던 강신혜 박사.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음. 네 말이 맞는지 아직은 잘 분간을 못 하겠어. 그래서 아까 네가 했던 말들은 잠깐 보류하도록 하자. 대신에… 내가 2D NMR 쪽은 알아봐 줄게. 국내 장비가 별로라면, 스탠퍼드대에 아는 사람한테 보내서, 그 샘플 분석을 의뢰해줄게.”

와! 강신혜 박사, 이렇게 화끈한 면이 있었나?

스탠퍼드대까지 샘플을 보내서 분석을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그건 학술대회 발표할 것도 아니고, 겨우 랩미팅에 발표할 분석인데.

국제적으로 노는 것은 좀 그렇다.

“고맙습니다. 박사님.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2D 분석에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저도 다른 방책을 쓰는 수밖에요. 우선은 LC-MS(액체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법)를 한번 써볼까 생각 중입니다.”

“LC-MS? 너, 그것도 알고 있었어? 와! 최영욱 교수님 랩에 최근에 세팅된 걸 또 어떻게 알았어?”

아. 그랬었나?

그런 사정까진 자세히 몰랐던 김태풍.

그 분석 기기를 찾기가 힘들다면.

강신혜 박사에게 그냥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근처에 LC-MS 기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제가 쓸 수 있을까요?”

“내가 최영욱 교수님을 도와드린 게 있어, 아마 가능할 거야. 거기 학생들, 오퍼레이팅(operating) 교육도 내가 도와주고 있거든. 하지만, 아주 비싼 기기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돼. 샘플은 확실히 건조가 된 거 맞지? 괜히 용매가 남아 있어, 분석이 이상해지면 안 돼. 그리고 순도도 어느 정도 높아야,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있어.”

“네. 그 점은 염려 마세요.”

보통 석사과정 1년차들이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도, 김태풍은 전혀 무리 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강신혜 박사는 그런 모습이 무척 신기하기만 하다.

만약, 김태풍이 박사과정 학생이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겠지만.

얼마 전에 석사과정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 아닌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

“야. 김태풍.”

“응? 왜?”

강신혜 박사와 대화를 마친 뒤, 다시 실험실로 돌아온 김태풍.

그리고 랩미팅 준비를 위해, 한참 실험에 몰두했고.

그리고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

잠깐 자리에 앉아.

각종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때마침 랩 테크니션 김민영은.

김태풍이 이제 크게 어색하지 않은 듯.

먼저 다가와, 그렇게 입을 열고 있었다.

아마도 순진하게 생긴 김태풍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것을 봤기에.

부담감이 많이 사라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너, 실험 골초지?”

그런데 날아온 질문이 은근히 따끔한 딱총 총알 같다.

내가 실험 골초?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나?

골초라면, 담배 애연가?

김태풍은 저절로 입이 약간 벌어졌다가, 곧 되물었다.

“왜? 내가 실험 골초야?”

“어떻게 공부하면 그렇게 많이 알 수가 있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강 박사님이 포닥실에서, 너 칭찬을 되게 많이 하더라.”

“아. 강신혜 박사님이? 정말?”

“그렇게 똑똑한 애는 처음 봤대. 말빨로 밀렸던 건, 자신의 박사학위 심사 때 심사위원으로 들어왔던 독일 교수님 이후로 처음이래.”

“그래?”

“그 독일계 교수님이, 너 누군지 알아?”

“누구?”

“나도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 그분이 바로… 어?”

그런데 갑자기 말하다가 마는 김민영.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 어머, 이를 어째? 이름이 뭐였더라? 독일 이름이라서… 악악악! 분명히 정확히 들었는데. 내 머리는 왜 이렇게 나쁜지 몰라. 분명히 들었는데.”

김민영은 답답하다는 듯, 얼굴이 갑자기 하회탈처럼 변하더니, 자신의 작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퉁퉁 친다.

얼굴 근육 움직임이 아주 활발한 그녀의 모습.

김태풍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랩 테크니션이지만, 그간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액션이 재밌는 여자인 줄은 지금껏 몰랐다.

저렇게 털털한 모습이라면, 대학 다닐 때도 친구가 아주 많았을 것 같다.

“정말 기억이 안 나?”

“아. 뭐였더라?”

결국, 인상을 팍팍 쓰며, 먼 산을 쳐다보듯, 위쪽 천장 쪽을 쳐다보는 김민영.

그러고는 한참 생각하다가.

갑자기 눈썹이 꿈틀꿈틀하더니.

난데없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요즘은 세상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이제 형광등도 파란색 조명인가 봐.”

어?

“그래. 시대가 달라지니까, 형광등도 점점 칼러풀하게 바뀌나 봐. 저거 괜찮다. 나도 저런 거 사서, 집에다 달아놓을까?”

“응?”

의아해하며 되묻는 김태풍.

그러자 김민영은 자신이 보고 있는 쪽, 저 멀리 한쪽 천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것 봐. 아주 조명 색채가 이쁘잖아?”

김태풍의 책상 앞에는, 전공 서적들을 꽂을 수 있는 긴 책장이 높게 세팅되어 있어.

김태풍은 그쪽을 보기 위해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쪽을 쳐다봤다.

반대편, 그쪽.

석사과정 1년차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학생 데스크들.

거기에는 배진수, 안성훈이 앉아 있었고.

석사과정 2년차 중에는 김창민, 조현중의 자리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김민영이 가리키고 있는 형광등이 무언가 요상하다.

파르스름한 불빛.

그 빛이 요란하게 쏟아지고 있다.

보통 형광등은 주광색이거나 주백색 혹은 백색이다.

저런 파란색은 분명히 없을 텐데?

김민영의 말대로, 요즘 형광등 역시 현재의 X세대같이 다양한 색채로 출시가 되나 보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도로 자리에 앉으려던 김태풍.

그런데 갑자기!

바로 그 순간.

정말 눈알이 훅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고 있는 김태풍.

“야!! 진짜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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