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6-봄날은 간다
<16> 봄날은 간다
한국대 화학과 3학년 송아란.
송아란에게 거는 전화였는데.
사실, 저번에 계획된 미팅 건이 이제 어느덧 성사 단계까지 왔다.
다가오는 이번 주 일요일.
그때, 3대3 미팅이 잡힌 것이다.
즉, 송아란의 다른 친구들과 박사과정 2년차 선배들의 미팅.
물론, 장소는 서울 강남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올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녀들은 신촌 쪽이 아니라, 일부러 강남 쪽으로 장소를 잡았고.
그 점에 김태풍의 선배들도 무척 만족해했다.
“아. 아란아. 나, 김태풍. 잘 지내? 근데 무슨 일로 삐삐 쳤어?”
- 아. 태풍이 오빠. 잘 지내죠?
“뭐, 그냥 그렇지 뭐! 실험실에 늘 잡혀서, 실험만 하다 보니까, 별로 재미도 없고.”
- 오빠! 힘내요. 히히! 그리고 오빠네 선배님들한테 긴히 부탁드릴 게 있는데….
“뭐? 어떤 거? 뭐든 말해.”
- 네. 약속 시각에 절대 늦으면 안 된다고 꼭 말씀해주세요. 친구들이 그런데 아주 예민하거든요.
“그 점은 염려하지 마. 내가 확실하게 말해둘게.”
- 그리고… 커플이 정해지면, 꼭 찢어져야 한다고 말씀해주세요. 같이 움직이는 거, 애들이 아주 싫어하거든요.
뭔 조건이 이렇게 많을까?
“그래. 그 말도 꼭 전할게. 그럼 네 말은, 단체로 놀지 말고, 따로따로?”
- 네. 주로 노땅, 아, 아니! 그냥 나이 드신 분들이 미팅하면서 찢어지지도 못하고… 단체로 같이 노는 걸 좋아한다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그건 좀!
그 말에 김태풍은 씩 웃고 만다.
대체로 여자친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미팅 자리 자체가 무척 민망해서.
각자 커플이 정해진 뒤에도.
바로 찢어지지 못하고, 다 같이 움직이려고 하는데.
송아란은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미리 태클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 노땅이라?
지금 자유로운 신촌 거리를 누비고 있을 대학생들.
그들한테 대학원생들은 정말 나이도 많은 노땅일 것이다.
송아란의 입에서 ‘나이 드신’이란 말이 그냥 나오진 않았을 테고.
하지만 정말 억울하다.
여기 대학원생들의 나이는 적게는 22살(과고 출신 플러스 1년 빨리 학교 다닌 경우).
많아 봤자, 27살, 28살에 불과한데.
어르신이라니.
억울, 그 자체다.
- 그리고 태풍이 오빠! 혹시 서울에 한번 놀러 안 오세요?
“서울?”
- 네. 거기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요?
“아. 그렇긴 한데….”
- 그럼… 저랑 다음 주에, 이번에 나온 새 영화, 같이 볼래요? 여기 서울에서….
뭐? 영화? 새 영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김태풍.
그런데 안타깝다.
비록 송아란이 귀여운 외모이긴 하나, 김태풍의 이상형은 아니었다.
‘으으. 미안하다. 아란아. 내가 죽일 놈이야!’
김태풍은 입술을 질끈 깨문 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
“아란아. 그게….”
그러나 세상에.
여자의 눈치는 정말 눈치 백 단인가 보다.
- 오빠. 혹시 오해하지 마세요.
“어?”
- 저는 그냥 친한 오빠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절대 오해하면 안 돼요. 그리고 저는 저번 주에… 소개팅한 남자랑 밀당도 하고 있다니까요.
밀당? 밀고 당기다? 그런 애가 왜 나한테 영화를 보러 가자고 그래?
김태풍으로서는 그녀의 속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대충 예상은 되긴 하지만….
그리고 그럼에도 송아란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
김태풍은 다음 말을 하기가 더 쉬워졌다.
“미안. 아란아. 사실, 다음 주 월요일에, 내가 첫 랩미팅 발표를 해야 하거든. 첫 발표라서, 이번 주말은 아무 데도 못 가고, 무조건 실험이야.”
- 아? 첫 랩미팅? 진짜요? 안 됐다. 그럼 할 수 없지. 그럼 영화는 다음에 같이 봐요.
“그래. 그러자. 그리고 그 미팅 건, 다시 한번 고맙다. 만나면, 내가 꼭 밥 살게.”
- 잊지 마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는 김태풍.
한국인들의 약속 중에 제일 믿을 수 없는 약속.
그게 바로 ‘나중에 밥 살게’와 ‘나중에 밥 한번 먹자’ 인데.
김태풍은 그런 약속을 남긴 뒤.
쓴 미소를 지었다.
‘몰라!’
지금 랩미팅이 중요하니까.
실제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월요일.
석사과정 1년차들이 처음 발표하게 되는 그 랩미팅 시간.
저절로 떨릴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것은, 트집쟁이 박한식 교수가 어떤 돌발적인 질문을 던질지, 그게 걱정될 수밖에 없었고.
요즘 최기호를 가지고 놀고(?) 있는 최상준 선배.
그 인간이 그날 랩미팅에서 무슨 괴상한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과거였다면, 바짝 쫄았을 텐데.
그나마 김태풍은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만사 불여튼튼!
많이 준비해서, 확실하게 자신의 가치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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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 좀 봐. 여기, 여기, 이런 시약들은 앞으로 특별히 잘 관리돼야 돼.”
박사과정 1년차 배준희는 에탄올, 메탄올, 톨루엔, 다이에틸이써(diethyl ether), 디메틸포름아마이드(dimethylformamide) 노르말헥산(n-hexane), 아세토니트릴(acetonitrile) 등의 액체 시약들을 양손으로 스르륵 써 내려 가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김태풍은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다.
“참! 너, 다음 주가 랩미팅 맞지?”
“네. 맞습니다.”
“뭐, 처음이라 준비할 게 더 많을 거야. 하지만 다음 주부터, 넌 공용 액체 시약 구매 담당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돼.”
“네. 선배님.”
“저번에 쥐 잡는 거 보니까, 열심히 잘하던데? 항상 그렇게만 하면, 누구도 너한테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배준희는 웃으며 말했고.
김태풍도 씩 웃었다.
“그리고 여기 목록에 나와 있는, 이런 류의 개인 액체 시약들은 개인적으로 각자 구매하는 거라서, 네가 따로 신경쓸 필요는 없다. 대신에 이런 액체 용매 같은 것들은 매번 체크해 둬. 미리 미리 잘 구매해야 하니까. 혹시 재고가 없으면, 선배들부터 난리가 나니까, 정신 바짝 차려.”
“네.”
그리고 어느덧 5월 하순을 향해 가면서.
석사과정 1년차들은 이제 신입생 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랩의 일원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분담하게 되었다.
안성훈은 소모품을 담당하게 됐고.
배진수는 새로 만들려고 하는, 실험동물 사육장 관리.
최기호는 공용 기기실 관리와 폐수통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석사과정 1년차들은 단체로 액체질소 배송 일도 맡게 되었는데.
수시로, 큼직한 액체질소통을 들고서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고.
그리고 건물 외곽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액체질소 저장고에서 액체질소를 뽑아.
통에 담아 실험실로 가져와야 한다.
이런 액체질소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이 된다.
그 첫 번째는, 실험실에서 합성된 물질의 진공건조 과정에서 사용이 된다.
이런 식이다.
샘플 속에 남아 있는 수분 혹은 유기용매들.
그게 진공 상태에서 쉽게 휘발되어 빨려 나가면.
그때 차가운 트랩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바로 고체가 되게 된다.
기체가 바로 고체가 되는, 이른바 승화 원리.
즉, 액체질소의 온도가 영하 196도나 되기 때문에.
웬만한 용매는 이 온도에서 바로 얼어붙어 고체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 이 트랩에 잡힌 용매 고체를 제거해 주면(즉, 온도를 조금 높이면, 용매 고체가 바로 액체가 되므로 쉽게 제거할 수가 있다).
진공펌프에 무리가 가지 않게.
오랫동안 진공펌프를 쓸 수 있게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진공건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트랩 주변에 액체질소를 채워 넣어, 트랩의 온도를 낮추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용방법은, 바로 세포 실험과 관련이 있다.
최근에서야 배진수를 통해, 동물실험을 계획하고 있지만.
이곳 실험실은 나름 세포 실험 역시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액체질소는 바로 동결된 세포를 보관하기 위한 용도다.
즉, 특정 조성의 용매를 이용해서, 세포를 현탁한 뒤.
그걸 초저온의 액체질소를 이용해서 바로 얼려버리는데.
그렇게 동결된 세포를 액체질소 통에 넣고 보관하는 방식이다.
훗날, 다시 그 세포를 꺼내서 배양하게 되면.
그 얼어붙었던 세포가 다시 살아난다.
이른바 동결 보관법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써 ‘냉동인간’ 같은 것도 있다.
미래 의학기술을 기대하며, 죽음에 이른 사람을 얼려서 보관하는 방식.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람의 혈액을 모조리 뽑아내게 된다.
대신에 다른 용매를 주입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물이 얼음이 되면, 그 부피가 커지기 때문이다.
즉, 온도가 떨어져, 얼음이 된 혈액은 혈관을 바로 찢어버린다.
특히, 뇌혈관까지 찢어버린다면.
아무리 미래 의학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냉동인간을 되살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특수 용매를 사용하는데.
이 용매는 얼어붙어도 부피 변화가 거의 없어, 혈관 손상이 전혀 없다.
참고로, 혈액은 섭씨 0도에서 얼지 않고, 섭씨 –0.52도에서 얼어 고체가 되는데.
혈액은 단순한 순수 용액 상태가 아니라, 혼합물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이용해서.
세계적으로 인간을 냉동 보관하는 회사들이 여럿 있다.
미국에는 알코르 생명 연장 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 냉동보존연구소(The Cryonics Institute), 크라이오닉스(Oregon Cryonics).
그리고 러시아에는 크리오러스(KrioRus) 등이 있다.
“그런데 선배님. 항상 물어보고 싶었는데… 저런 것들은 다 어디서 모으셨어요?”
한참 액체 공용 시약 구매와 관련된 설명을 들은 뒤.
어느덧 업무 인계가 마무리될 때.
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김태풍.
지금 김태풍은 그의 책상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은 피규어들을 가리키며 묻고 있는 것이다.
“아? 이것들? 하하! 그냥 내 취미야.”
어쨌든, 딱딱한 이야기가 아닌, 피규어 이야기가 시작되자.
바로 웃음꽃이 피어오르는 배준희.
양손으로 글을 쓰는 그는 아주 섬세한 편이었고.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극도로 좋아하는, 오타쿠적인 면모도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아기자기한 취미 덕분에.
이 랩에서 유일한 여자 연구원들인 랩 테크니션들.
그녀들의 관심을, 그는 흠뻑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듯 잠깐 피규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꽃에 꿀벌이 꼬이듯.
그의 자리로 여자 테크니션들이 조용히 나타났다.
“오빠, 오늘도 슬픈 예감은! 오오오! 역시 틀리지 않더라!! 하하! 나, 어떡해? 저주받았어! 실험 꽝 났어…. 이걸 어째… 어? 어머?”
그런데 마침 김태풍이 옆에 있는 걸 보고는 바로 말문을 닫는 김민영과 장혜주.
학번은 김태풍과 똑같은 90학번들이다.
그러나 실험실에 소속된 두 명의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 일명 포닥)들에 대한 연구 보조 역할을 맡고 있어.
김태풍과는 별다른 교차점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인 것이다.
“야. 니들 실험 꽝 났다고? 야. 실망하지 마. 이럴 땐, 커피나 마시자. 김태풍. 너도 같이 안 갈래? 커피 안 마셔?”
그렇게 물으며, 배준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는 작지만, 눈이 동글동글한 김민영.
그리고 눈 밑에 애교살이 진한, 역시 작은 키의 장혜주.
그녀들이 김태풍을 힐끔 쳐다본다.
이때, 김태풍은 바로 대답했다.
“그래요. 저도 같이 갈게요.”
그렇게 바로 승낙하자.
약간 표정이 묘해지는 두 테크니션들.
약간 부담스러운 것이다.
같은 실험실인데도 사람이 많아, 친한 사람, 친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나뉘는 게 다반사다.
“근데 너희들한테,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가면서 이야기해도 될까?”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슬쩍 경계심을 보이는 김민영과 장혜주.
그러나 김태풍은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계속 말을 이었다.
“그냥 실험하는 거, 궁금한 게 있어서.”
“실험? 어떤 거? 어떤 게 궁금한데?”
김태풍은 과거와 달리, 최대한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사람 사이에 호감이 만들어지는 방법은 대화다.
그리고 우선은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는 이공계 연구자들이 늘상하는 뒷담화부터, 그렇게 시작하는 것은 최고의 방법!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 오빠들, 완전 촌스러.”
“하하. 너무 그러진 말자. 나도 촌스럽잖아?”
“넌 쌍팔년도는 벗어난 것 같은데? 쬐금!”
“하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1층 휴게실로 향하면서.
이제서야 김태풍은 이것저것 실험에 관해서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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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는 비스무스 셀레나이드(Bismuth selenide, Bi2Se3)를 코팅하려고, 여러 화합물을 합성하고 있다고?”
“그래. 자세한 이유까진 모르겠고. 박사님들이 시키는 데로만 반응을 돌리고 있는데, 많이 꽝 나고 있어. 대체 앞으로 뭘 하려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이때, 김태풍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김태풍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녀들이 하는 일들이 모두 포닥(박사후연구원)들의 연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배준희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사실, 그는 랩 테크니션들과 커피 한잔 마시는 사이가 되었지만.
포닥들의 연구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최상준 선배의 존재 때문.
랩의 주도권을 계속 갖고 싶은 최상준이 포닥들의 일을 돕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두 박사들(포닥들) 역시 최상준의 눈치를 잔뜩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최상준과 혹시 모를 대척점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연구 외에 다른 학생들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태풍이 너는, 비스무스 셀레나이드를… 왜 박사님들이 쓰려고 하는지, 이해가 돼?”
자판기에서 커피가 하나둘 나오는 동안.
슬쩍 물어보는 배준희.
“대충 감이 오긴 해요.”
“대충?”
눈이 약간 커지는 배준희.
그리고 김민영, 장혜주마저 눈을 반짝이며 김태풍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비스무스는 X선 조영 효과가 좋고, 방사선 암 치료 쪽에 도움이 될 수 있죠. 셀레나이드는 활성산소를 억제할 수 있는, 이른바 항암 물질이고요.”
“오우!”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탄성을 지르는 김민영과 장혜주.
그녀들의 추임새에 배준희의 목소리도 약간 높아졌다.
“와! 너, 어떻게 그걸 알아?”
“아. 어쩌다가요. 그래도 그걸 조합해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겠어요?”
“그림이라? 그럼 혹시 암 진단, 암 치료 쪽?”
역시 배준희는 똑똑했다.
금방 이해를 한다.
그러나 랩 테크니션들인 김민영과 장혜주는 바로 이해를 못한 표정들.
보통 사람의 경우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겠지만.
역시 배준희는 달랐다.
“즉, 비스무스 셀레나이드의 독성 문제 때문에, 독성을 낮추려고, 이른바 외부 코팅을 하려는 목적인 것 같네요. 뭐, 그거야 잘 되겠죠. 하하!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하죠. 그보다 선배님. 혹시 장정호 교수님 랩에 있는 장남기 선배님, 혹시 잘 아세요?”
“어? 장남기 선배? 남기 형? 그야 잘 알지. 박사과정 3년차잖아?”
“혹시 그 선배랑 대학 동문이죠?”
“그거야 그렇지.”
배준희는 타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곳으로 넘어온 케이스다.
역시 군대는 가지 않았고, 현재 병특(전문연구요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연희대 출신이었다.
한국대보다는 입학성적이 낮지만.
연희대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사학 중의 하나가 아닌가.
“왜? 남기 형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혹시 뭐, 분석할 게 있어?”
“네. 다음 주, 첫 랩미팅 발표잖아요.”
“랩미팅 발표야 앞으로 할 것만 잘 정리하면 될 텐데? 처음이니까. 어? 그럼 혹시 너? 벌써 분석할 만한 샘플이 나왔어? 벌써???”
석사과정 1년차 주제에 벌써 분석할 게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이다.
“네. 곧 진공건조가 끝나는 샘플들이 있는데, 그걸 NMR(화학 구조 분석 기기)로 분석 좀 해보려고요.”
“NMR? 그건 나도 찍을 수가 있는데?”
즉, NMR 분석기기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걸 이용해서 시료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의미.
“아뇨. 그 정도가 아니라, 2D로 해 보려고요?”
“뭐?”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표정이 많이 이상해지는 배준희.
단순한 1H 혹은 13C NMR이 아닌, 2D NMR?
김태풍의 언급에 배준희는 몹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화학 구조 분석에, 1H 혹은 13C NMR 분석을 하는데.
1H라는 것은 화학원소 중에 H(수소)에 대해서 따져 보는 것이고.
13C라는 것은 화학원소 중에서 C(탄소)에 대해서 따져보는 방식이다.
앞에 1 혹은 13이라는 숫자는, 바로 동위원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태풍이 이야기하는 2D NMR 분석이라는 것은.
시료 내, 두 원소 핵들이 서로 상호 작용을 할 때.
두 원소 핵 사이의 상호 작용 정보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것인데.
이른바, 화학물질 내부의 수소 핵들간의 긴밀한 상호 작용을 따져보거나.
혹은 수소-탄소 핵들간의 상호 작용도 따져보는 방식들로.
변수가 두 가지 이상이 된다.
그런데, 수소이면 수소.
탄소이면 탄소.
각각 한가지씩만 따져서.
화학물질의 내부 화학 구조를 밝히는 방식에 비해서.
두 가지 변수를 생각하다 보니, 결과 처리 과정이 훨씬 더 복잡했다.
“그거 불가능할 텐데?”
“뭐, 일반 NMR이 정확하긴 하지만,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노이즈 같은 피크들 때문에 불순물의 존재를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 그 때문에 정교한 분석이 안 될 수도 있죠.”
“그래도 그렇게 복잡한 화학 구조가 아니면, 그냥 일반적인 방법으로 하는 게 낫지 않아? 단백질, 펩타이드 분석하는 것도 아니면서? 불순물이 문제이면, HPLC를 써 보든가?”
“그렇긴 하죠. 하지만, 한번 시도해보려고요.”
“쉽지 않을걸?”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기상의 문제도 있다.
그래서 김태풍은 완벽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수소-탄소.
두 개의 NMR 정보를 2D 형태로 교합시켜.
대략적인 2D 수준으로, 데이터를 산출할 생각이다.
물론, 완벽할 순 없지만.
최대한 정확한 화학 구조 분석을 하려는 김태풍의 시도다.
“우선 가능한지 문의 좀 하려고요. 국내에 분석이 가능한 기관들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서, 장남기 선배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서요.”
“으음.”
잠시 고민하는 배준희.
그리고 흡사 별종같다는 눈으로 김태풍을 쳐다봤다.
이제 겨우 석사과정 1년차인 녀석.
학위 과정 연구는 혼자서 하는 독립적인 일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의욕적으로 나서는 놈은 처음 보았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시도를, 지금 하려는 녀석.
자신도 과거엔 저러지 못했는데.
“그럼 내가 한번 그 형한테 연락해 볼게. 그러나 확답할 순 없어. 그 형이 많이 바쁘잖아? 그리고 그냥 무턱대고 가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다. 충분히 방법까지 숙고한 뒤에, 그 형을 만나봐. 물론 그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진 말고.”
배준희는 그렇게 말했고.
김태풍은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