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135화 (135/153)

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4-퀸카 서희선

<14> 퀸카 서희선

그간 잊고 있었던 터라, 놀라며.

귀를 쫑긋 세우는 김태풍.

- 미안. 내가 그동안 좀 바빴어. 저번에 말했던 그 논문 경진대회 있잖아? 네 도움이 이제 필요한데, 혹시 시간 되면 나한테 연락 좀 줄래? 그럼 잘 있어. 안녕!

옥구슬같이 아주 듣기 좋은 목소리다.

그래서 김태풍은 그 음성 메시지를 한 번 더 듣고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음. 방금 보낸 것 같은데… 바로 전화해도 괜찮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김태풍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잠시 통화연결음이 이어지다가.

곧 착신이 되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서희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아주 밝은 목소리다.

“아. 희선아. 나 김태풍인데….”

- 아아! 태풍아. 내가 보낸 음성 메시지는 받았어?

음성 메시지를 들었으니까, 전화를 한 건데.

물론 서희선이 그냥 안부 삼아서 한 말인걸.

김태풍은 모를 리가 없다.

“잘 받았어. 이제 논문 작업을 시작하려고?”

- 아니. 벌써 한창 준비 중인데, 너 오늘 저녁에 시간이 좀 돼?

“저녁?”

-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아. 괜찮아. 그냥 내가 시간을 잠깐 내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너 부루마블(보드게임) 게임 알지? 황금열쇠카드를 볼 때처럼 너한테 도움이 되면 좋겠다.”

- 뭐? 황금열쇠? 아하하하.

갑자기 요란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태풍아. 너, 너무 자신만만하다.

“그래야 네가 상을 타는 데 도움이 되지. 그리고 상 타면, 내 작은 부탁 하나 꼭 들어줘.”

- 그거, 아주 간단한 부탁 맞지? 그럼 괜찮아. 그럼 우리… 학생회관 휴게실에서 저녁 7시쯤에 잠깐 보자. 내가 커피 사서 가지고 갈게.

“커피?”

- 응. 혹시 다른 거 마실래? 학교 밖에 있는 커피숍에 들렀다가 갈 거거든.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 괜찮아. 운전해서 갔다 올 거라 상관없어.

“그래? 그럼 나는 그냥 커피.”

- 알았어. 그럼 그때 보자.

‘커피? 하하!’

전화를 끊고 난 김태풍은 살짝 웃었다.

가난한 대학원생들에게 커피는, 자판기의 그 달달한 커피가 전부다.

연애를 하지 않는 이상, 밖에서 커피를 사 먹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간혹 선배들은 커피를 주문하기도 한다.

교수님이 다른 데 출장을 가면.

그때, 인근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껌을 짝짝 씹는 레지 언니가.

달달한 커피를, 커피포트째 들고서 나타난다.

우습게도, 아직은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휴대폰으로 전산망에 들어가 정보 검색을 할 수도 있고, 워크맨 없이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거? 포켓클럽 미니처럼 게임을 할 수도 있고, PC통신에 접속하지 않더라도 채팅도 가능하다는 말이잖아?”

“뭐 그런 셈이지. 휴대폰 역시 기계의 일종이고, 사람들의 편리성을 위한 기계라서, 휴대폰의 미래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물론 미래의 일이지만….”

“아? 그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서희선의 크고 짙은 동공은 빛이 났다.

그녀는 머리가 좋았다.

영리했고, 또 응용력도 나쁘지 않았다.

김태풍의 말을, 그녀는 황당무계한 소리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비상한 쪽으로 생각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요즘 화두인 CDMA 쪽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 말대로 그런 쪽으로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겠어.”

CDMA. 즉, 코드분할 다중접속 방식.

이런 디지털 이동전화 방식은 이 시대에 첨단 기술이었고.

대다수 전문가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좀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칩셋과 관련된 기술적인 부분, 기지국과 관련된 시설적인 부분, 그리고 미래 전망까지. 우선 이런 식으로 챕터들을 나눠서 정리하면, 정말 괜찮은 논문이 나올 것 같은데?”

입꼬리가 귀엽게 길어지고 있는 서희선.

너무 맑고 짙어, 상대방의 얼굴이 그녀의 동공 위로 반사될 정도다.

그녀의 눈동자는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 캠퍼스 퀸카라는 쉽지 않은 별칭이 붙은 거겠지.

“태풍아. 고맙다.”

“뭐, 도움이 된다면 내가 고맙지.”

“근데, 네가 하려는 부탁이 뭔데? 지금 조금 이야기해줄 순 없어?”

호기심을 보이는 서희선.

“아. 특별한 건 아니고….”

“내가 맞춰 볼까? 혹시 너… 소개팅하고 싶은 거지?”

뭐? 소개팅?

작은 부탁이라고 했더니, 서희선이 이런 식으로 오해를 했나 보다.

“너, 눈빛도 학부 때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고. 자신감도 꽤 있어 보이고. 이 정도면, 소개팅해도 성공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자신의 변한 모습이 서희선에겐 그렇게 비쳐졌나 보다.

좀 더 자신감이 생겨 보인다?

뭐,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그건 아니고. 그런 종류의 부탁이 아니거든. 다른 게 있어.”

“뭐? 어떤 거?”

“너희, 사촌 오빠들 중에 벤처 하시는 분이 계시지?”

“어? 벤처? 야!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의아해하는 서희선.

그러나 김태풍은 그걸 모를 수가 없다.

과거, 신약 개발의 주역이었던 김태풍.

그가 임시로 초대를 받아 갔던 일성그룹 임원 파티장.

그곳에서 서희선 전무를 만났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던 중.

이런 자리에서 동기를 만난 게 즐거웠던지.

그녀는 자신의 사촌오빠에 관한 이야기도 했었다.

메드TX.

신약 관련 초기 벤처 기업.

이 기업을 90년대 초반에 설립했고.

한국 증시에 상장까지 해서.

순식간에 시총 규모 천억 원대 기업으로 올려놓았던 남자.

그 메드TX의 서정철 사장은 훗날 그 회사를 정리한 뒤.

미국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회사를 새로 설립한 뒤.

거의 천문학적인 수준의 주식 상장 대박을 터트린 인물이었다.

“신문에서 봤어. 그 메드TX라는 회사.”

“와! 메드TX? 그거까지 알아? 하지만 그 오빠랑 내가 사촌인 건 어떻게 알고?”

두 눈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것 같이, 눈빛이 강렬해지는 서희선.

아마 자신의 뒷조사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그러나 김태풍은 일부러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메드TX를 지원한 벤처캐피탈이 너희 아빠 회사잖아. 신화캐피탈 서인겸 사장님. 예전에 네가 그 캐피탈에 대해 자랑한 적도 있는데?”

“아! 신화캐피탈? 그것도 신문에 났어?”

“그럼! 메드TX가 떠오르는 벤처계의 신성이잖아. 아직 벤처라는 말이 보통 사람들한텐 익숙하지 않겠지만, 경제란에 인터뷰 기사가 나면서, 그때 나란히 언급이 됐어. 자신의 큰아버지가 큰 도움을 줬다고.”

“아. 그랬었구나.”

의문이 풀리는 서희선.

이른바, 서희선은 금수저다.

아버지는 신화캐피탈의 서인겸 사장.

사촌오빠는 메드TX를 일꾼 젊은 사장, 서정철 사장.

그런 집안 내력이 받쳐주다 보니.

그녀의 뛰어난 외모를 떠나서.

대한민국을 쩌렁쩌렁 울리는 일성그룹의 며느리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정철이 오빠는 왜?”

“좀 봤으면 해서. 나중에 소개 좀 해주면 안 될까?”

“소개?”

“응.”

“하지만 시간이 날지 모르겠는데? 그 오빤 정말 바쁜데.”

“지금은 힘들겠지만, 내가 조급하게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그분, 테헤란로에 계시지?”

“맞아. 거기 있어.”

이맘때, 한국에는 테헤란로가 벤처 인큐베이션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일요일 언제든, 내가 무조건 시간을 맞춰 볼 테니까. 만약 시간이 난다면 언제든 나한테 삐삐쳐 줄래? 내가 바로 서울로 갈게.”

“아….”

그런데 선뜻 확답을 주지 않고, 가만히 생각하는 것 같다가.

서희선은 두 눈을 반짝인다.

“근데 만나서 뭐 하려고?”

역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사회에서 김태풍이 만났던 똑똑한 금수저들.

보통 저런 모습이었다.

그냥 말없이 넘어가도 될 일도, 항상 꼼꼼하게 따지는 식이다.

특히, 재벌가의 로열패밀리들은 더 심하게 질문을 한다.

그들은 질문하는 것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고.

또 사람들로부터 답변을 받는 데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부탁 좀 하려고.”

“부탁?”

“오랫동안 구상한 신약 물질이 하나 있는데, 우선 의견을 한번 구해보려고. 만약에 괜찮다고 판정되면, 잘 되면, 그분의 파트너도 돼 보려고. 보통 이런 쪽 분야의 전문가들은 화학식만 봐도 대략 기능적 부분을 예감할 테니까.”

“근데 뭐? 파트너?”

서희선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제 겨우 석사과정 1년차.

그런 애가 무슨 파트너 운운을 한단 말인가.

참 꿈이 야무진 애구나?

이런 눈빛을 보이던 그녀는 이내 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태풍. 너, 생각보다 유머 감각도 있다? 하하! 알았어. 네가 벤처에 관심있는 건 이제 알겠으니까. 뭔 말인지 대충 알겠어. 그러니까 우리 오빠한테 미리 눈도장을 찍고 싶다는 그 말이잖아? 내가 다음에 정철이 오빠를 만나게 되면, 그때 같이 가자. 간단히 차라도 마시든지. 그럼 됐지?”

“고맙다. 너 욕 먹지 않게 잘 준비할게.”

“피이!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오늘은 어쨌든 고마웠어. 나중에 논문 마무리가 되면, 한번 봐 줄 수 있지?”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1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던 두 사람.

이제 자리에서 일어났고.

학생회관 휴게실을 나왔다.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주변을 밝히고 있는, 약간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들.

을씨년스럽긴 하지만.

어둔 공간을 쓸고 가는 바람은 그리 차지도 않았다.

“내가 바래다줄까?”

이곳 학생들은 실험하느라, 공부하느라.

이 시간이 되면.

주변에서 학생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주변이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

김태풍이 젠틀한 남자처럼 그렇게 호의를 보이자.

서희선은 기뻐했다.

그렇게 전자공학과 건물로 서희선을 바래다주고는.

김태풍은 서둘러 화학과 건물로 뛰어갔다.

##

‘제법 괜찮았단 말이야. 내가 그 정도까지 호의를 보였으니까. 나중에 희선이가 서정철 사장을 소개해주긴 하겠지?’

김태풍은 자신의 실험실 자리에 앉자.

논문 자료를 펼쳐놓고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이어 나갔다.

또 다른 투자를 할 수 있는 욕심이 이 순간 안 날 수가 없었다.

향후 김태풍이 메드TX 서정철 사장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신약 아이디어를 넘기고 지분을 받으려는 목적.

그리고 서정철 사장을 통해, 주변 인맥을 더 넓히고 싶은 목적이 있었다.

과거, 메드TX의 서정철 사장은 회사 파이프라인에 있던 신약 후보들 중에서, 단 한 개의 신약 물질만을 다국적 기업에 기술이전을 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워낙 언론 플레이를 잘해서 기업 가치를 아주 많이 높였고.

메드TX를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아주 매끈하게 처리했다.

그는 다른 신약 벤처들과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주가 조작, 내부자 정보 거래 등등.

온갖 범법 행위로 얼룩진 이 바닥 현실들과 달리.

그는 젠틀맨 이미지에 딱 맞았다.

메드TX를 외국 기업에 매각하면서도.

소액 주주들마저 배부른 주식 잔치를 할 수 있게 했던 서정철 사장.

그리고 그렇게 매각한 메드TX 비용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벤처 기업을 설립했고.

그는 더 승승장구했다.

이른바 벤처 투자 쪽은 회사가 지닌 핵심 기술을 곰곰이 따져 보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면모도 가장 중요하게 보게 된다.

즉, 사람을 본다는 것!

벤처 기업의 오너가 누구인지.

이것을 따지는 게 이 바닥 투자 시장이었고.

그 부분은 아주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주로 제 잘난 맛이 강한 교수 출신들보다는.

활동적이면서도.

신뢰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투자금이 더 몰리는 법이었고.

메드TX라는 좋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정철 사장은 이후 더 큰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받을 수 있었다.

‘뭐, 소문에 사람은 괜찮다고 하지만, 그건 실제 만나봐야 아는 일이니까. 우선, 몇 가지 장치를 하고서 만나봐야겠어.’

이른바 적절한 장치.

즉, 중요한 화학 작용기 몇 개를 뺀, 불완전한 아이디어를 그에게 제시할 생각이었다.

그걸 합성한 뒤, 효능 시험을 하면.

제법 괜찮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 약물에 비하면, 애매한 수준의 효능 증진.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그런 식의 실효성이 부족하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김태풍은 서정철 사장의 인간성부터 확인한 뒤.

그 다음 일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잘 되면, 대박.

안 돼도, 약간의 시간 낭비 정도에 끝날 것이다.

그럼 그건 그렇게 정리하도록 하고….

“야. 태풍아. 나 지금 급한데, 혹시 시간 돼?”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 공부를 하려던 차.

그런데 때마침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치는 목소리.

실험실에서 좀 논문 공부를 하려면, 꼭 이런 식이다.

왜 이렇게 요즘 인기가 좋은지.

김태풍은 숨을 몰아쉬는 배진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또?”

“나 큰일났어.”

“무슨 일? 혹시 사고 쳤어?”

“야! 어제 내가 받아온 쥐들 있잖아.”

타 학과 실험실에서 받아온 쥐들.

실험용 쥐 케이지(cage)에선 역한 사료 냄새가 풍겨서.

케이지(cage)에 든 쥐들을 임시로 공용기기실에 보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화학과 건물에는 따로 실험용 쥐 사육시설이 없었고.

그래서 박한식 교수는 작은 실험공간을 받아.

그곳에 임시로 쥐 사육시설을 만들려고, 본부 시설팀장과 회의를 진행 중인 상태였다.

“그건 어제 잘 가지고 왔잖아?”

그런데 김태풍을 쳐다보는 배진수의 표정이 이상했다.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입술도 바르르 떨리고 있다.

설마?

뭔가 감지한 김태풍.

이마를 뻑뻑 긁는 순간.

배진수가 말했다.

“야! 좇됐다. 케이지 하나가 열렸어! 쥐 다섯 마리가 도망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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