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3-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13>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뭐? 쥐??”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김태풍이 바로 되묻자.
“나, 진짜 죽겠다. 태풍아. 아까 교수님이 찾으셔서, 교수님 방에 갔다가 왔는데. 나더러 쥐 실험도 준비하라네.”
“뭐? 쥐 실험?”
김태풍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혹시 몰라 자신의 과거를 한번 회상해 봤다.
배진수가 쥐 실험을 한다고?
그러다가 곧 뭔가가 떠올랐다.
‘혹시 그거 때문일까?’
그러나 확실치가 않아.
김태풍은 바로 물어봤다.
“그럼 혹시 너, 갑자기 석사 연구 주제가 바뀐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교수님이 미국 학회에서 본 게 있다면서, 갑자기….”
‘아. 그래. 바로 그거였구나.’
국제 학회에 갔다가.
아이디어 하나를 물고 돌아오신 박한식 교수님.
그 초기 아이디어를 배진수에게 넘긴 것이다.
애초에 배진수가, 세포 DNA와 결합이 가능한 안트라퀴논 계열의 물질을 합성한다고 해서.
그걸 좀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역시, 배진수의 석사 주제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배진수의 진짜 석사 주제는 중간에 바뀐 것이었다.
아마도 이번 주제는 골수 손상을 막아주는, 새로운 신경전달물질의 합성일 것이다.
박한식 교수가 짜낸 아이디어.
의외로 그 합성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문제는 그 다음 실험을 위해서.
골수 손상 동물 모델 프로토콜(실험과정)을 미리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쥐를 보면 기겁을 하는 배진수.
그 때문에 녀석은 석사과정 내내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과거, 배진수는 신경안정제까지 복용해야 할 정도였다.
“너 진짜 큰일났다.”
“큰일?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불안해하며 김태풍을 쳐다보는 배진수.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주변에서 듣기로는 말이야. 쥐 실험을 하다 보면, 일종의 간이 수술같은 것도 해야 하는데. 너 괜찮겠어?”
“뭐?? 서, 설마? 아니, 교수님 말씀으로는 그냥 약물만 투여하면 된다던데?”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완전하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때 환부에 직접 소형 임플란트 같은 물질을 삽입해서 질병 모델을 좀 심화시킬 수도 있고. 물론 나중에 직접 환부를 절개해서 조직 분석도 해야 하니까. 최소한 그런 작업들은 필수야.”
김태풍은 간단히 설명했는데.
지금 배진수의 얼굴은 눈에 띄게 노래지고 있었다.
쥐를 만지지도 못하고, 그냥 부들부들 떠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그 일을 시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같이 보이지만.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교수가 지시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실험에 관해서는 더더욱!
만약 실력이 안 돼서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기관으로 출장 가서, 그 기술을 배워오면 된다고.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이공계 교수들의 특기였다.
물론, 개중에 그러지 않는 교수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
어느덧 이공계 대학원생들 사이에는 흔한 용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즉, 교수가 시키면, 맨땅을 향해 헤딩도 할 수 있는 것.
이야! 우리나라 대학원생은 용기가 가히 대단하지 않은가?
“태풍아. 그럼 혹시 너는 쥐를 만질 수가 있어? 우리 학부 때, 그런 실험은 없었잖아.”
물론 그런 게 학부 실험과정에는 없었다.
여긴 화학과니까.
“그냥 동물 해부 관련해서 책을 본 게 좀 있거든. 그래서 간단한 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겠는데. 아! 한데 아직 너한텐 실험용 쥐도 없잖아?”
“없기는? 교수님이 타 학과 교수님 실험실에서 쥐를 빌려오기로 했어. 지금 그 실험실로 가야 하는데, 나랑 같이 가 줄 수 있겠어?”
배진수는 애처로운 눈으로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배진수가 원하는 도움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쥐를 다른 실험실에서 받아오는 것.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는.
실험동물에 대한 윤리 제도 자체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이렇듯 실험동물을 여기저기서 마음대로 빌려 와.
즉각 실험에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음. 지금 당장은 안 될 것 같은데? 왜냐하면, 촉매를 넣을 타임이 1시간 뒤거든. 1시간 뒤에는 갈 수가 있어.”
“그건 괜찮아. 나도 저녁 먹고 갈 생각이거든. 마음의 준비도 좀 해야 하고.”
“그럼 나 말고, 혹시 널 도와주는 사람은 따로 없어?”
“그쪽 실험실 박사과정 선배가 이것저것 알려준다는데… 야. 태풍아. 이왕 같이 가는 김에 너도 같이 들어볼래? 나 혼자서는 확실히 힘들 것 같아서.”
“알았어. 그럼 대신에 너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뭐? 어떤 거? 뭐든 말해.”
자기 간이라도 뽑아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래서 김태풍은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요즘, 최상준 선배가 날 계속 째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어? 상준이 형?”
최상준. 실험실 랩짱.
그때 랩미팅 이후로, 김태풍을 아주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든 걸려라! 하는 이런 눈빛이다.
그러면서 김태풍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하지만 김태풍은 오래된 습관 때문에.
실험 뒷정리까지 아주 완벽했다.
폐 용매는 확실하게 폐수통에 버렸고.
초자에 남아 있는 유기물질도 깨끗하게 씻어서, 그 용액을 폐수통에 버렸다.
혹시라도 용매 냄새가 실험실 내부에 퍼지지 않도록.
칼같이 후드 유리창을 내려놓고서, 실험도 했다.
유리 초자를 깨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더러워진 초자는 클린 솔루션(초자 세척용 강염기성 용매)에 확실히 담갔다가.
유리가 손상 가지 않게, 바로 빼서 세척도 곧잘 했다.
“그러니까, 내가 실험할 때마다, 혹시 상준이 형이 날 째려보면, 중간에 나한테 좀 알려줄래? 특히, 차경석(석사과정 2년차) 선배랑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땐 언제든 나한테 알려주고.”
“어? 그냥 알려달라고? 그거 별거 아니잖아. 혹시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당장 알려줄게.”
“그럼 부탁한다.”
배진수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흔히 랩짱 최상준을 악마 중의 악마. 거의 마왕급 악마라고 부르는데.
그가 실험실에서 가장 값비싼 재료를 독점하고 있고.
또, 대다수 측정 기기들을 관리하고 있어서.
그런 별칭이 붙은 것만은 아니었다.
진짜 악마같은 놈.
한성그룹 로얄 패밀리의 일원인 최진태 사장의 아들.
잘난 맛에 취해 있는 녀석.
그런 녀석에게, 자기 재능에 도전하는 경쟁자가 나온다면.
절대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실험실에는 여러 천재급 인재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다들 하나같이, 무언가 꼭 한 가지씩 나사가 빠진 천재들이었고.
그래서 최상준은 그들을 무시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조현상, 조현중만 하더라도.
저번에 광주 학회는 구경도 못 해 보고.
속초 바닷가만 보고 돌아온 귀한(?) 인재들이 아닌가.
그나마 제 정신으로 보이는 박사과정 3년차 강민수.
박력도 있고 허우대도 멀쩡한 그에게도, 아주 놀랍게도 말 못 할 하자(?)가 있었다.
강민수 선배는 대단한 길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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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벌레, 실험 벌레인 강민수 선배.
그는 늘 학교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올 초 설날에, 자신의 집으로 갔는데.
마침 부모님들이 이사를 해서, 새 아파트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설 연휴 며칠간, 집에만 틀어박혀 논문만 쓰다가.
친구들이 잠깐 만나자고 해서, 외출을 했던 강민수.
그리고 밤늦게.
자신의 집 근처 전철역에 도착했는데.
이 전철역이 북부 방향과 남부 방향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상황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남부 방향 출구로 나왔고.
무조건 직진부터 했다.
왜냐하면, 옛날 아파트의 지리와 약간 혼선까지 생기다 보니.
그냥 무턱대고, 대략 30분째 직진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뭔가 이상해서 멈춰 서 보니.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아파트 단지들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는 206동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
대충, 아파트 벽면에 쓰는 동 표시는 102동, 103동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그 아파트 단지 내를 이리저리 활보했다.
106동?
어? 여기가 아닌데?
108동?
여기도 아닌데.
어? 여긴 공용 체육 시설?
우리 아파트 주변에 이런 시설이 있었나?
한참 그 아파트 단지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그는 기진맥진한 채 그 아파트 단지를 나왔고.
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얼른 탑승했다.
“아. 미주 아파트 206동으로 가죠. 혹시 거기가 요 근처 맞죠?”
“아뇨. 손님. 훨씬 더 가야 해요. 여기서 거리가 좀 되는데?”
“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택시기사.
그러고는 마침내 도착한 미주 아파트 206동.
자신의 집 근처에서 내린 (택시 애용자) 강민수.
그러고는 힐끔 뒤돌아보던 그.
그런데 바로 등 뒤에, 자신이 아까 도착했던 바로 그 전철역이 보이지 않은가.
도대체 자신은 지금껏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온 것일까.
혹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한 번씩 새로운 세상을 헤매게 되는 강민수.
그는 마력적인 길치인 것이다.
##
그리고 며칠 뒤.
학생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뒤, 김태풍은 바로 실험실에 출근했다.
아주 상쾌한 아침.
그러나 아직 출근을 안 한 랩원들이 많았고.
그리고 조현상, 조현중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아마 밤샘 실험을 하고서.
이맘때쯤에 기숙사로 기어들어 갔을 것이다.
다만, 조현상이 자신 때문에.
좀 더 일찍 실험실에 나올지는….
그건 김태풍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김태풍은 일찍 나온 만큼.
행동도 빨리했다.
현재 자신은 실험실 짬밥이 아주 낮다.
때때로 못된 선배들을 만나면, 한 번씩 기어오르기도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할 일을 등한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김태풍은 먼저 실험실 곳곳을 쓸고, 닦았고.
그 일을 마치고 나자.
어제 돌린 반응기들을 점검했고.
오늘 진행할 실험 일정도 체크했다.
그런 뒤에 김태풍은 학교 전산망을 통해, 주가 관련 자료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현재 주식 가격을 체크해 봤다.
현재 2,200만 원의 투자금이 들어간 선양텔레콤 주식.
그러나 아직은 조용했다.
‘이게 대체 언제 주가가 오르더라? 혹시 내가 너무 빨리 투자를 한 건 아니겠지?’
고민에 휩싸이며, 내내 머리를 굴리던 김태풍.
그러다가, 그의 두 눈에 갑자기 요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맞아. 조만간 CDMA 방식 시스템에 대한 운용 시험 소식이 터져 나올 거야. 그게 호재로 작용해서, 곧바로 수직 상승할 거고. 그 일이 얼마 안 남았어.’
다시 말해서, 조만간 선양텔레콤은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시스템에 대한 시험을 실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11월에는 그 시험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후 1996년에는.
세계 최초로 CDMA 디지털 이동전화 상용화를 이루는 쾌거를 달성할 것이다.
‘그럼 주가가 오르면, 어떻게 하지?’
그대로 주식을 계속 들고 갈 것인지.
아니면, 팔고 나와서.
다른 주식을 살 것인지.
문제는 아직 투자금이 그리 많지가 않다는 점이다.
‘차라리 과외를 더 늘릴까?’
그러나 초고액 과외도 아니고.
그냥 일반 중고등학생들 과외는.
돈이 별로 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과외비 역시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디 누가 한 1억 원 정도, 나한테 주면 안 될까? 돈을 막 굴려서 더 크게 만들어서, 되돌려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김태풍은 절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시대에도 로또복권 대신에 주택복권이 있는데.
미래를 아는 김태풍의 눈에는 애처로울 정도로 1등 당첨금이 작았다.
겨우 1억 5000만 원.
에게!
뭐, 그렇다고 해서, 이런 주택복권에 당첨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는 삐삐 진동음.
김태풍은 바로 정신을 차렸고.
바지 주머니에서 얼른 삐삐를 꺼내 살펴보았다.
호출 번호 하나와 음성 녹음 하나다.
‘어? 이건 처음 보는 전화번호인데?’
이제 딴생각을 접고, 본격적으로 오늘 아침 실험을 진행하기에 앞서.
김태풍은 이 음성 녹음부터 먼저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 …삐익. 삐익… 현재 한 개의 음성 메시지가 있습니다. 확인을 원하시면 1번….
옛날식 사운드.
김태풍은 곧바로 1번을 눌렀다.
그리고 그 음성 사서함을 통해.
누군가가 녹음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 아. 태풍아. 안녕? 나 서희선인데….
앗! 서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