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130화 (130/153)

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9-물 먹는 하마

<9> 물 먹는 하마

한선영은 울상을 보였다.

“김태풍. 그건 교수님 말씀과는 전혀 다른데?”

“왜냐하면, 조건을 완전히 새로 잡아야 하니까, 그래서 그게 노가다 일이지. 그러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아무 답이 안 나올 거야. 대체로 가교 반응은 조절 자체가 힘들어. 정확한 반응 위치도 식별할 수가 없고.”

“그럼 랜덤이라는 말이지?”

“맞아. 랜덤으로 화학 반응이 일어나서 분석도 무척 힘들어. 그래서 좋은 학술지에 게재하기도 무척 힘들고. 만약 재현성 확보가 필요하다면 정말 꾸준히 그 물질을 만들어야 해. 그땐, 샘플 양을 단순히 수 그램 단위로 생각할 게 아니지. 어쩌면 수백 그램 단위 혹은 킬로그램 단위로 만들어야 할 수도 있어.”

“뭐, 키, 킬로그램 단위?”

고개를 끄덕이는 김태풍.

오! 마이 갓! 갓! 갓!

세상에 이런 미친 일이 다 있담?

한선영은 눈앞이 갑자기 노래지고 있었다.

김태풍의 말을 듣고 보니, 교수한테 완전히 속은 것 같다.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고.

계속 딴소리만 하던 교수.

순 구라쟁이가 아닌가.

“그럼 다른 방법은 없어?”

“미안. 다른 방법은 없어.”

보통 실험실 단위에서 새롭게 합성되는 화학물질들.

그것들은 시중에서 절대 구할 수가 없다.

그 자체가 너무 귀하다.

그래서 아주 많이 아껴서 실험에 사용되곤 하는데.

어떤 학생은 겨우 0.2 그램짜리 합성물질만 만든 뒤.

그걸로 분석을 실시해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김태풍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려 킬로그램 단위의 생산.

이럴 땐, 합성이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니라.

공장 같은 곳에서 쓰는 ‘생산’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많이 부담되지? 달리 방법이 없는 그런 물질합성 방법 말고, 사실 나한테 딱 한 가지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

“뭐? 어떤 거? 대체 무슨 방법?”

김태풍의 말에 바로 조급해지는 한선영.

“야. 잠깐. 나 맥주잔 비웠어.”

“???”

처음에는 이해를 못해, 김태풍을 빤히 쳐다봤다가.

얼른 웃으며, 한선영은 3000cc 맥주컵을 들었다.

하얀 거품을 내며 잔에 채워지는 맥주.

“고마워. 너한테 맥주도 이렇게 받아먹고. 하하하.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일도 다 있네.”

“야.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알았어. 방법은 이거야. 그냥 너희 교수님한테 가서 그 일을 못 한다고 해.”

이런 맙소사.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다 있담?

한선영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너, 대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말이 안 돼? 내 생각엔, 너 같은 인재는 그런 일을 하는 것보다는, 좀 더 섬세한 반응을 하는 게 더 어울려.”

“김태풍! 내가 어떻게 교수님한테 가서, 주제를 바꿔 달라고 하냐고? 그걸 묻잖아!”

슬쩍 짜증도 내는 한선영.

“봐. 우리나라 대학원생들은 너무 소극적이야. 그런 이야긴 죽어도 못할 것 같지? 그리고 아직 안 해봤잖아? 물론 학생들의 말을 잘 들어주시는 교수님도 계시고, 노발대발하실 분들은 더 많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엔, 너희 교수님은 젊잖아. 그래서 가능성이 있어. 그래도 그게 싫다면, 그냥 노가다 뛰어. 그것도 하다 보면 재밌을 거야.”

“야! 너 진짜 죽을래??”

“난 틀린 말을 한 거,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일도 하다 보면 괜찮다니까. 예를 들어, 부피가 확 늘어나는 물질은 응용성도 아주 좋아.”

“뭐? 응용성?”

“너 몰라? 물먹는 하마?”

“물 먹는 하마?”

“물 먹는 하마에 사용된 초기 물질이, 흔하디흔한 쌀밥, 즉 전분 성분이었어. 그건 전분을 화학적으로 가교시킨 거잖아. 그렇게 만들어진 물질은 내부에 전분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데, 즉 전분과 수분 사이에서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발생해. 이른바 수소 결합이라는 거고, 그래서 그 가교 전분이 수분을 잡아먹을 수 있는 구조야.”

*수소결합: 통상적으로 H, O, N 등의 화학원소들끼리 상호 간에 붙으려는 인력을 이야기함. 응용 예로, DNA는 두 쌍의 유전자 정보가 꼬여있는 이중 나선 구조인데, 두 쌍의 유전자 정보는 수소결합에 의해 헬릭스 구조를 형성함*

“아.”

“아마 80년대 초반일 거야. 그때,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기계식 농사법이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쌀이 남아돌게 됐어. 그래서 그 쌀을 가지고 별의별 연구를 하던 중에, 옷장에 넣어두면 습기를 제거할 수 있는, 그런 물먹는 하마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뭐, 지금은 그 제품 안에 들어가 있는 구성 물질들의 화학 구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시작은 그런 쪽이었어.”

“그럼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니. 그건 아닐걸. 더 이상 물먹는 하마를 만들 필요는 없잖아. 아마 다른 쪽이 될 거야.”

“그게 뭔데?”

“하하. 미안. 그건 말하기가 좀 곤란하네.”

“왜?”

“내가 생각하는 걸, 너희 교수님도 아는지 내가 확실하지 않거든. 만약 너희 교수님이 내가 생각하는 걸 알고서 목표로 삼고 있다면, 아마 나중에 너한테 그걸 알려줄 거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구태여 내 아이디어를 노출할 필요가 없잖아.”

그러니까, 알면서도 알려주기 싫다는 말이다.

한선영은 갑자기 묘한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자신이 한참 뒤로 밀려난 기분.

보통 동기들은 자신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어느 순간부터 계속 자신이 김태풍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다.

아니, 김태풍이 저리 똑똑했었나?

어떻게 저 녀석은 자신의 석사 학위 주제를 단번에 파악할 수가 있을까?

혹시 구라를 치는?

아니.

그건 아무리 따져봐도.

그런 것 같진 않다.

의문투성이였던 것들.

김태풍의 설명을 듣고 나자.

이해가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혹시 이런 게 연구자의 다른 시각?

학부 때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대학원 과정에서 빛이 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던데. 김태풍도 그런 부류?

사실, 천재의 영역에선 뛰어난 지능이 모든 것이 아니다.

과거 영국을 세계 제일의 국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산업혁명.

당시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천재는 반드시 실행력이 있어야 한다.

웃기는 게, 우리나라 언론에서 나오는 천재들은 머리만 좋을 뿐, 아무 실행력이 없는 속된 말로 둔재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천재의 정의를 다시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알쏭달쏭.

그러나 그런 묘한 느낌을 감추며, 한선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너 지금 날 놀리는 거 아니지?”

“천만에.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네가 뭐 교수급이라도 된다고 거냐? 너도 이것저것 논문을 보고서, 겨우 얻은 지식이잖아. 동기한테 그런 이야기도 못 해줘?”

“아! 미안. 이 일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서.”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선영이 하려는 일은 잘만 조정이 된다면.

우리나라 제약 산업이 시대를 앞서, 한 단계 앞으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이 된다는 이야기.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걸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약간 당황하던 김태풍.

그러나 다행히 바로 그 무렵.

어느 순간부터 각자 따로 대화를 하던 동기들.

그들의 시선을 바로 모으게 하는.

아주 큰 목소리가 한쪽에서 터져 나왔다.

“야아! 야! 야! 야! 다들 이제 좀 조용히 좀 해 봐!”

- 야. 김재구. 너 대체 왜 그러냐?

- 뭐야? 왜 저래? 벌써 취했냐?

- 임마. 너 학교 때려치우려는 거 아니지? 야. 참아라. 참아.

- 그래. 우리도 1년 지나면, 선배가 될 수 있어.

- 임마. 빨리 좀 말해. 왜 고함부터 지르고 그래?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질렀고.

그리고 그때, 그 녀석은 씩 웃더니.

소란스럽던 장내를 휘어잡듯 재빨리 말을 마쳤다.

“잠깐 대화는 스탑하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노가리만 까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저기 좀 봐라. 지금 축구 한다고. 축구. 친선 경기. 카메룬이랑 우리나라랑.”

“뭐? 카, 카메룬?”

1990년 FIFA 이태리 월드컵.

아프리카팀으로는 최초로 8강 진출.

일명 아프리카 돌풍의 주역이었던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

어느덧 다가오는 6월 17일은 미국 월드컵 개최일이다.

그 월드컵이 어느덧 코앞이었고.

그래서 이맘때.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최고조로 높아지던 시기였다.

그 순간, 모두가 일제히 조용해졌고.

한쪽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텔레비전에.

모두의 시선이 단숨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어느덧 10여 분쯤 지났을까…

슈웃! 고오오오올!!! 우와와아아! 골입니다. 고오올!!! 이거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김현석 선수, 골입니다. 골!! 골!! 와아! 멋지지 않습니까?

순간,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아주 놀라운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중계 아나운서의 요란한 함성!

지금 한국 국가대표팀이 강호 카메룬을 상대로 한 골을 뽑아낸 것이다.

“야. 뭐해? 다들 빨리 잔부터 채워!”

누군가 외쳤고.

그 순간, 김태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거 소심하게 박수만 치던 모습에서.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김태풍.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오오오오오! 화이티이잉! 코리아!!”

과거 광화문에 모여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면서,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응원했던 김태풍.

그때의 기억이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김태풍은 제법 영리하게 중간에 적당히 노래를 끊었다.

딱 그 정도만 불렀는데.

쟤는 왜 저래? 하던 눈빛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게 바로 대히트감이었다.

입에 철썩 달라붙는 중독성.

그리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가벼운 리듬감.

다시 한번 김태풍이 그 응원가를 부르자.

그 순간, 온 힘을 다해 다 같이 필승 코리아를 외쳤고.

한순간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런 자리에서도.

꼭 소외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수학 천재 최기호.

그는 축구에 관심이 없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실험 걱정에 짓눌린 한선영.

남들 따라 웃으면서도, 제대로 웃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동기 모임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서.

콜라만 계속 마시고 있는 동기 최원석.

그 역시 최기호와 비슷한 부류였다.

아마 6살이 되었을 무렵이었을까.

흑백텔레비전에도 나왔던, 그 유명한 암기 신동인 최원석.

바로 저 최원석은 지금도 전공 원서(영어 서적)를 통째로 암기가 가능한 녀석인데.

그런 녀석보다 한선영이 학부 학점이 높았다는 것은, 어쨌든 한선영 역시 보통 인간은 절대 아니라는 의미였다.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그 와중에도 생난리를 피우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 보면, 과거 김태풍은 그저 그런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앞에 서서, 스스럼없이 리드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실직 한번 하고.

또 번개 한번 맞더니.

저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걸까.

어쨌든 김태풍은 지금 긍정의 에너지로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