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6-랩 미팅
<6> 랩 미팅
“여기 있습니다. 고객님, 주식거래 하는 방법도 알려드릴까요?”
“네. 조금만 설명해주세요.”
“우선, 거래소에 오셔서….”
그리고 쭉 이어지는 설명들.
아직 이 시대는 주식 거래에 용이한 home trading system, 즉 HTS가 없었다.
앞으로 3년 뒤, 1997년이 되어서야 관련 법들이 개정되고.
각 증권사마다 HTS를 일제히 도입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대에서는 주식 거래를 위해서는 매번 객장을 찾아가야 했고.
또 객장에서 주가를 확인해야 하는 심각한 불편함이 있었다.
물론 특정 단말기를 이용하면, 주가를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도 있지만.
전화비 부담감 때문에 그것도 문제였다.
어느덧 설명을 다 들은 김태풍은 상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한번 쓱 둘러봤다.
‘와~ 역시 텔레비전에서 봤던 그 모습들이네. 과거로 돌아온 게 확실히 맞아.’
이곳 증권회사 객장.
이미 인원은 만원이었다.
주식계좌를 새로 오픈하려고 온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지만.
한쪽에선 주가 대형 창을 보면서 생난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기가 투자한 종목의 주가가 한 번씩 요동치듯 내려가면, 땅이 꺼질 듯 탄식이 터져 나오고.
주가가 오르면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흡사 도떼기시장 같은 곳.
이곳이 바로 이 시대의 객장이었다.
물론, 그나마 좀 나은 점은, 최근에는 주식 매수 주문을 넣으면, 거래 체결 여부를 좀 더 빨리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완전히 수작업매매만 하다 보니.
매수 혹은 매도 주문을 내더라도, 당일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다음 날이 되면, 체결 여부를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대다수 종목별 거래 호가 건수는 10만 건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
그러나 이제 전산 매매가 많이 확대되면서.
매매체결을 좀 더 신속하게 알 수 있는 시대로 전환되었고.
그나마 그런 상황인 것을 만족하며.
김태풍은 곧바로 주식 매수 주문을 넣었다.
“선양텔레콤에 몽땅 넣어주세요.”
자신이 가진 200만 원을 몽땅 집어넣는 것이다.
“아. 손님. 이 계좌를 보니까, 혹시 거래가 처음이시죠?”
“네?”
“아. 제가 지금 많이 바빠서 간단하게만 이야기 드리면, 한군데 집중 투자하는 것은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커요. 분산 투자라고 혹시 들어봤어요? 그러니까….”
“아뇨. 저 역시 바빠서 그런데,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시세대로 매수 주문을 넣어주시고요.”
“네? 아. 뭐 그러시다면야.”
그렇게 매수 주문을 넣고 잠시 기다리자.
다행히 바로 결과가 나왔다.
아직은 선양텔레콤에 매수세가 터져 나오고 있지 않았다.
매도하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았고.
그렇게 선양텔레콤 주식을 순식간에 매수하는 데 성공한 김태풍.
일을 마친 뒤, 객장을 나오면서 그는 머릿속으로 셈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주가 상·하한가 제도 때문에 4%, 5%가 상한가란 말이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사실, 2015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의 주가는 상한 +30%, 하한 -30%까지 주가 상·하한가 제도가 설정된다.
그러나 현재 이 시점에서 주가 상하한가 제한은 17단계의 정액제였다.
이 정액제라는 것은 주가 수준에 따라 특정액을 상하한가로 정하는 방식이다.
이런 불편한 정액제 방식을, 단순히 계산하기 편한 정률제 방식으로 환산한다면.
대략 평균 가격제한폭이 ±4.6%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가격제한폭이 상당히 좁다 보니.
주가가 오르는 종목은 연일 상한가를 치는 일이 아주 빈번한 시대였다.
‘그러니까 선양텔레콤은 9번이나 상한가를 칠 거라고 했으니까, 그럼 수익률이 어떻게 되지?’
현재 김태풍이 구매한 주가는 주당 15,300원.
대략 130주 정도를 구매했다.
이게 대략 9번 상한가를 치고 소폭의 상승을 더 한다고 하더라도.
우습게도 겨우 50% 이익률밖에 나지 않는다.
200만 원이 겨우 300만 원이 되는 것이다.
‘에게? 이게 뭐야?’
인상을 찡그리던 김태풍.
그러나 곧 표정을 바로 한다.
‘뭐, 이제 시작이니까. 하긴 50% 수익률도 나쁘진 않아. 투자금이 작아서 문제지.’
과거 주식 투자를 했었던 김태풍.
2만 원대의 한독통상 종목을 샀다가.
한번 상한가 30%를 맛보기도 했다.
그렇게 돈맛을 보게 되자, 저축해 두고 있던 수억 원을 들고서 바로 겁도 없이 투자에 뛰어들었다가.
그 이후로는 만지는 종목마다 왜 그렇게 파란불(주가 하락)만 들어오는지.
손절(손해를 보고 파는 것)하고 나가면, 그 주가는 무조건 올랐다.
주식이 꼭 자신의 약을 올리는 것만 같았는데.
열심히 주식 공부도 하면서, 그렇게 손실 만회를 꿈꿨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
주식 투자로 결국 1억 원이나 날린 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식을 접은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달달한 투자.
꿀맛 같은 투자.
만약 내가 과거로 간다면 어떨까?
오르지 않을 것 같던 종목도 결국 오르게 된다는 것을 다 알게 되고.
추락하는 놈은 미리 알아본 뒤, 얼씬도 하지 않게 될 거고.
그렇게 투자를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박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그땐 그런 생각을 정말 한도 끝도 없이 했었다.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김태풍은 웃으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암튼 나는 언제 부자가 되지? 그래. 아직 멀긴, 멀어. 석사 학위도 아직 받지 못했는데. 그냥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하네.’
하지만 복습하는 이 삶이 은근히 즐거울 것 같아.
김태풍은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갖기로 결심했다.
으싸으싸! 긍정맨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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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예요.”
- 아. 태풍아. 잘 지내 있어? 밥은 잘 먹고 다니고?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아? 교수님은 잘 해주시고? 선배들은? 실험은? 몸은 안 아프고? 감기 안 걸렸어? 요즘 많이 춥지? 기숙사 밥은 잘 나와?
그렇듯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엄마의 통화 목소리.
그랬던 관심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런 식으로 바뀌기도 했었는데….
“태풍아.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내. 참한 아가씨가 있다고 하네. 너도 나이가 있으니까, 그쪽 나이가 있는 거는 좀 감안하자. 태풍아. 엄마가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한데, 너도 이제 눈을 좀 낮춰. 언제까지 엄마랑 같이 살 거니? 나도 며느리도 좀 보고 싶고, 손자·손녀도 한번 안아보자….”
누군들 결혼하기 싫어서 못했을까.
신약 하나 만들어 보려고 인생을 몽땅 바쳤던 거다.
그러나 그게 말짱 도루묵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엄마. 아빠도 잘 계시죠?”
- 그래. 뭐, 똑같아. 항상 쥐꼬리만 봉급에다가 구질구질하게….
“하하. 엄마. 지금 저 바빠서 이만 끊을게요.”
- 아? 그래? 그러면 너도 잘 지내고, 다음에 또 통화하자.
“네. 엄마. 건강하세요”
- 오냐. 우리 아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김태풍.
마치 큰일을 치른 기분이었다.
과거를 거슬러, 젊은 엄마와 통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참! 근데 왜 희선이한테서는 삐삐가 안 오지?’
슬쩍 관심이 가는 김태풍.
저번에 논문 경진대회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음. 뭐, 언젠가 연락이 오긴 하겠지.’
그렇게 신경을 끊은 김태풍은 실험 노트를 챙긴 뒤, 잠깐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어느덧 저녁 7시 35분.
그러고 보면, 오늘 저녁 8시에 랩미팅(랩 연구원들이 지도교수 앞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이 계획되어 있다.
그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더 남은 상태.
그래서 바로 논문을 뒤적거리며.
김태풍은 잠깐 시간 동안 공부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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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덧 저녁 8시.
이때, 실험실 소속 학생들은 자기 순번이 오면, 지도교수의 앞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그런 시간을 갖게 되는데.
즉, 그런 랩 미팅(lab meeting) 시간을 오늘 저녁 8시에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실험실 구성원들은 모두 긴장한 채 자리에 착석했고.
5분쯤 지났을 때.
세미나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지도교수가 등장했다.
풍채가 아주 좋은 50대 후반의 지도교수.
날카로운 뿔테 안경에 덥수룩한 머리카락.
반 정장 차림이지만.
양복 상의가 무척 꾸깃꾸깃하다.
천생 학자가 아니고서는.
어떤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인 그.
“음. 다들 준비는 됐나?”
앞줄에 착석하자마자, 곧 심드렁하게 말한 뒤, 뒤쪽을 한번 쓱 쳐다보는 지도교수.
날카로운 뿔테 안경 너머로, 인상이 오늘따라 더 사납게 보인다.
그리고 이 순간.
누구 할 것 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다들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 시대의 교수는 절대군주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교수의 앞에서 김태풍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시선이 잠시 김태풍의 얼굴에 가닿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시선을 돌렸고.
“음. 오늘 미팅은 누구부터 발표지?”
짤막한 교수의 물음.
“네. 교수님. 오늘 랩 미팅 발표자 4명이고, 김창민, 최문호, 장공석, 강민수 순으로 발표할 겁니다.”
랩짱 최상준이 요약해서 대답하자.
순간, 교수의 가늘고 주름진 시선은 마치 칼날 같이 번득거리고 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발표자들 중에서 가장 짬밥이 낮은 석사과정 2년차 김창민.
그가 먼저 앞으로 나왔다.
이후, 박사과정 1년차 최문호, 박사과정 2년차 장공석, 박사과정 3년차 강민수 순으로 발표가 이어질 예정인데.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주, 혹은 그 다음 주 등으로 나눠서.
발표를 하게 된다.
즉, 랩 인원이 너무 많다 보니.
한주에 몇몇 사람들만 각자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식이다.
이때, 재빨리 누군가가 소등을 하자.
세미나실 내부는 시커멓게 변했고.
슬라이드 투사기에서는 새하얀 빛을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 빔프로젝터가 없는 이 시대.
그래서 OHP 필름을 슬라이드 투사기에 올려놓고서.
발표를 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여는 김창민.
그는 지금 한국말이 아니라 영어로 설명을 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맞춘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한 시도.
그래서 김창민은 더듬더듬하면서도 영어로 설명을 이어 나갔는데.
그나마 연구 데이터들이 제법 많아서.
교수의 입꼬리는 쓱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E°(표준환원전위) 값은 얼마라고?”
“네. 교수님. 여기 cyclic voltammetry 그래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 Epc와 Epa를 가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음. 그래. 뭐, 그 정도 값이라면 나쁘지도 않네? 그거 잘하면, 조만간 좋은 논문 하나, 만들 수도 있겠는데?”
“네. 그런데 교수님. 다만, 50 cycle 정도 반복해서 측정했을 때, 이 슬라이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한 오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는 김창민.
그리고 바로 교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건 또, 왜 그렇게 심하게 차이가 나? 도대체 왜 그래?”
그 순간,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고.
또한, 미간을 더 심하게 찌푸리고 있는 교수.
교수는 무언가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눈을 반짝이고 있던 김태풍.
그가 슬그머니 입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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