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4-내가 노벨상 받으면?
<4> 내가 노벨상 받으면?
“그럼 대학교는 한국연구기술대를 나온 거네요? 현재는 대학원에서 공부 중이고?”
“네.”
“과고 나왔어요?”
“네.”
“어느 과고?”
“네. 경기과학고요.”
“와~ 공부 잘 했네요! 그럼 수학은 정말 잘 하겠어요?”
“맡겨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흐뭇하게 김태풍을 쳐다보는 학부모.
수학 과외 일을 하려고, 김태풍은 직접 학부모를 만나는 중이다.
“근데 제 딸이 좀 노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걱정도 많이 되고. 혹시 서태지라고 아세요?”
서태지?
김태풍은 피식 웃는다.
당연히 알 수밖에.
1992년도에 처음 발표된 음반에서 ‘난 알아요’라는 노래로 공전의 대히트를 친 가수.
작년에는 ‘하여가’를 대히트시키며.
최근, 대한민국 가요계의 신드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80년대까지 발라드와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 풍토.
이 풍토를 완전히 바꾸어 나가는 데, 그들은 일조하고 있었다.
“그럼 어머님. 팬덤, 아니 혹시 팬클럽 쪽에도?”
“네. 맞아요. 저희 애가 서태지를 너무 좋아해서… 서태지 본다고 몇 번 서울을 왔다 갔다 했어요. 정말 속상하다니까요. 지금 고1인데,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
“어머님. 그럼 제가 그것도 한번 이야기해볼게요. 그리고 기본수학 정석은 제가 최대한 빨리 떼 드릴게요.”
“아? 그래요?”
김태풍의 밝은 목소리에 학부모는 솔깃한 표정이다.
특히, 회귀 후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확인한 뒤.
저절로 자신감이 넘치게 된 김태풍.
사실,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가장 긍정적으로 변해야만 한다.
아마 자신의 옛날 모습이었다면.
팬덤에 푹 빠진 여학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무진장 걱정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김태풍은 달랐다.
“그럼 선생님. 한번 해보세요. 하지만, 제가 옆에서, 조금만 지켜봐도 될까요?”
사실,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학부모.
더군다나 어느덧 성숙한 딸 아이가 성인 남자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은근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어머님. 차라리 거실에서 가르칠게요. 그게 오픈되어 있고. 또, 앞으로도 공부할 때, 그게 더 낫지 않겠어요?”
“아! 그래요? 어머! 진짜 그렇게 하면 되겠네! 그럼 오늘은 간단하게 앉아서 수업하시겠어요?”
“네. 좋습니다.”
그녀는 얼른 거실 한 가운데에.
앉은뱅이책상을 하나 갖다 놓은 뒤.
방석 두 개를 마주 보게 세팅했다.
그러고는 그녀는 안쪽 공부방에 있던 고1 여학생을 데리고 나왔는데.
키도 크고, 눈도 큼직큼직한 게.
꽤 이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다.
그런데 그 여학생!
김태풍을 보자마자, 곧바로 콧방귀를 끼고 있다.
그러나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김태풍.
대신에 김태풍은 여학생이 들고나온 일반수학 정석 책 앞표지와 거기에 붙어 있는 서태지 사진을 한번 쳐다본 뒤.
밝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내 이름은 김태풍. 야! 너 서태지 팬이라며?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면… 맞지? 하하하! 사실 나도 서태지 노래 많이 좋아해. 예전에 방송된 가수 데뷔 코너! 나도 그거 봤거든. 10점 만점에 7.8점인가? 그때, 그거 보고, 완전히 욕 나올 뻔했다니까.”
기억력이 무척 비상한 김태풍.
그는 우연히 보았던, 당시의 특종 TV 연예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김태풍이 그걸 언급하는 순간.
여학생의 표정은 갑자기 확 바뀌어 버린다.
“그거 진짜 봤어요? 진짜 말도 안 되긴 했는데. 7.8점!! 그게 점수에요?? 그 심사위원들!! 진짜 나쁜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우리 클럽에서는 그 사람들한테 편지도 보내고, 항의도 막 하고, 그래도 아직도 속상하고, 울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주르르 말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흠칫 놀라며, 입을 꼭 닫고 있는 여학생.
그리고 이때, 약간 놀란 표정을 하며.
김태풍과 딸 아이를 한번 쳐다보던 학부모.
그녀는 이내 밝게 웃었다.
“어머~ 잘 됐다~ 유정아. 봐. 봐. 선생님도 서태지를 좋아하고, 너랑 죽이 정말 잘 맞겠다. 호호호~ 그리고 이분 선생님이 수학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니까, 잘 배워봐.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좋은 대학 가면, 엄마가 서태지 콘서트, 무조건 다 보내줄게. 그러니까 너는….”
“엄마! 엄마!”
고1 여학생 박유정.
이때, 자신의 엄마가 계속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자.
아주 싫다는 표정까지 지으며 인상까지 팍팍 쓴다.
완전히 사춘기 여학생다운 모습이다.
“어머님. 하하. 저희는 이제부터 공부할게요.”
다행히, 김태풍이 적당하게 잘라주자.
박유정은 힐끔 김태풍을 쳐다봤고.
고1 여학생 박유정의 입가에는 실타래 같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그럼 그러세요. 유정아. 엄마는 안방에 있을 테니까 잘 해봐. 문 열고 있을 게.”
아무래도 김태풍이 좀 더 마음에 든 모양인지.
식탁에 앉아 쳐다보지 않고.
좀 더 멀리 자리를 피해 주겠다는 학부모.
그리고 그 덕분에 김태풍은 좀 더 편안하게 첫 과외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름이 박유정이라고?”
“…네.”
“나는 김태풍.”
“???”
“하하.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음. 오빠. 진짜 이런 말 하는 거 죄송한데, 이름이 왜 그리 촌스러워요?”
“촌스럽다고? 하하. 하지만 내 부모님이 지어주신 건데.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내가 나중에 노벨상 받으면, 진짜 멋진 이름이라고 다들 그럴걸?”
“치이! 구라치지 마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빤 꿈도 야무지네?”
“하하. 그렇지만 내 영어 이름은 멋져.”
“영어 이름? 그게 뭔데요?”
“뭐, 여권상의 이름까진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 외국 친구들이 날 부를 땐 그냥 닉네임을 쓰게 만들려고.”
“닉네임?”
“그래. 에드워드, 이거 어때?”
“풉! 푸하하하!”
순간, 박유정은 아주 요란하게 웃는다.
“왜? 왜 그래?”
“오빠, 진짜 이유를 몰라요?”
“뭘?”
“요즘 이상하게 생긴 개그맨! 그 개그맨이 자기가 영국 귀족 에드워드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웃기는데….”
그러고는 계속 재밌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박유정.
“음. 그래도 말야. 네 말대로 영국 귀족 냄새는 좀 풍기지 않아? 이름이 좀 귀족스럽고….”
“아뇨. 순 유치해요! 절대 그 이름 쓰지 마세요!”
“으음. 음음, 그래. 알았어. 그 이름 안 쓸게. 대신에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하고. 우리 공부 좀 할래? 끝나고 서태지 노래나 같이 듣자. 어때?”
“아~ 네.”
눈빛이 아주 많이 밝아지고 있는 박유정.
그리고 이때부터 김태풍은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발휘했다.
학문은 꼭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이해하는 순간, 모든 것들이 너무너무 쉽게 풀려나가게 된다.
물론, 이해하는 과정이 무척 고달프지만.
그리고 그걸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과정은 훨씬 더 수월해질 수밖에 없다.
김태풍은 자신의 노하우를 아주 쉽게 풀어나갔고.
박유정은 몇 번이고 놀라며, 김태풍은 쳐다보곤 했다.
“오빠. 이런 건… 선생님들도 이야기 안 해주던데?”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
이 교육에서는 무조건 문제 푸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태풍의 설명 방식.
이건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어느덧 순식간에 2시간이 지나갔는데.
아주 무난하게 과외 교습을 마치자.
이때, 학부모는 환하게 웃으며.
김태풍을 바라봤고.
그리고 그에게 곧바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두 달 치에요. 혹시 다른데 일정 잡으면 절대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 유정이, 계속 부탁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김태풍은 기분 좋게 웃으며 두둑한 봉투를 받았다.
현시대는 아직 5만 원짜리가 나오지 않아.
모두 만 원짜리인 상태.
총 100만 원이다.
단순히 한 달 과외비가 아니라.
무려 두 달 치 과외비를 선불로 받게 된 것이다.
‘오! 두 달 치 과외비를, 이렇게 미리 땡길 수도 있는 거구나.’
곧이어 두 번째 과외수업을 하기 위해서.
다른 아파트로 이동하면서.
이때 김태풍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다음 과외 장소에서도 두 달치 과외비를 먼저 받게 된다면.
총 두 타임이니까.
총 200만 원이 생기게 된다.
이 정도면, 곧바로 투자를 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이런 소액으로는 거창한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없었고.
바로 주식투자는 가능했다.
주식투자!
회귀 전, 신약개발 연구를 제외하고는, 그의 유일한 인생 낙이었던 주식투자!
물론, 무진장 하한가의 쓴맛을 맛보았고.
그 때문에 무진장 투자금을 말아먹지만.
그때 공부했던 것들 대다수는 온전히 기억날 정도로.
김태풍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그래. 1994년. 연말까지 종합주가지수가 제법 괜찮았어.’
비록 자신과 악연은 있지만.
그래도 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 일성전자는 네 차례나 상한가를 치게 된다.
거기다가 선양텔레콤은 무려 아홉 차례의 상한가를 치게 되는 이 시대.
그리고 그걸 기억한 김태풍!
그의 두 눈은 점점 더 빛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연구도 중요하지만.
그런 힘든 연구를 하면서.
돈 많은 연구자 역시 되고 싶은 욕망!
다시 말해서 그런 욕망이.
이제 김태풍의 가슴에 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야. 김태풍. 병호 형이 부르는데?”
“병호 선배가? 왜?”
“몰라. 아까 콜드 룸에 들어갔으니까, 거기 가보든지, 아니면 좀 더 기다리든가.”
동기 안성훈.
그는 월요일 아침, 막 출근을 하던 태풍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박사과정 2년차 홍병호 선배가 왜 자신을 찾는 걸까.
잠깐의 고민 뒤, 태풍은 입꼬리가 씩 올라가고 있다.
혹시 그거 때문인가?
저번 주, 학생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선배들은 태풍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신입생들도 이제 들어왔으니까.
실험실 노총각들의 소원 좀 풀어달라는 거다.
이른바 단체 미팅!
주로 박사과정 2년 차 선배들이 그 미팅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 박사과정 연구에 적응도 된 터라.
옆구리가 갈수록 시리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일반인들 눈에는.
박사과정 2년 차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선생님들 같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그러나 이 학교는 그런 분위기와는 확실히 달랐다.
대다수가 병역특례 대상자였던 것.
그래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그들의 나이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또한, 대다수 과학고 출신이다 보니, 조기에 고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터라.
다른 학교, 같은 학번들보다 한 살 어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선배들의 나이는 이제 겨우 26살 혹은 27살에 불과했는데.
‘흠. 어떡하지? 할 수 없이 아무 데나 전화부터 돌려야 하나?’
딱히 요 근처 마땅한 여대가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능한 것은, 인근 국립대에서 가장 여학생들이 많은 그런 학과들부터, 차근차근 탐색해 볼 여지는 있을 것 같았다.
‘휴우. 49살 나이에… 여대생 미팅 주선이라니.’
회귀 전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며.
잠시 헛웃음이 올라오던 김태풍.
그러나 김태풍은 오늘도 역시 긍정의 에너지를 최대한 발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콜드 룸부터.
김태풍은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10층으로 올라갔고.
한쪽 실험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소 좁은 공간인 그곳.
거기에는 간단한 실험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러 교반기(stirrer) 위에 여러 개의 반응기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콜드 룸에서 실험을 어느 정도 마친 뒤.
그리고 중간에 반응기들을 밖으로 빼놓은 모양이었다.
‘그럼 우선, 안으로 들어가 볼까?’
김태풍은 바로 손을 뻗어.
그 콜드 룸 입구 쪽, 묵직한 손잡이를 잡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화악 밀려드는 찬 공기.
그리고 그 좁은 콜드 룸 안쪽.
그곳에는 실험 가운을 입고서, 한참 실험 중인 선배 홍병호가 있었다.
“아? 태풍이냐? 야. 잠깐만.”
마스크를 쓰고 있던 홍병호는 간단히 손짓을 했고.
김태풍은 옆에서 잠깐 지켜봤다.
지금 그는 날카로운 스테인리스 주사침이 달린 유리 주사기를.
3-neck 반응기의 한쪽 고무마개에 꽂아 넣더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유기용매를 주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교반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화학 반응기들이 무려 이십여 개에 달했는데.
저걸 모두 홍병호 선배가 직접 준비한 모양이었다.
“휴우. 이걸로 다 됐어. 야. 나가자.”
“네. 음. 근데 선배님. 조금 전에 넣은 그 투명한 액체가, 혹시 피롤(Pyrrole)인가요?”
“오?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야! 이 자식, 좀 아네? 너 랩미팅 때 졸지 않고, 다른 사람 발표 잘 듣고 있나 보네?”
“아. 네. 조금.”
“야. 너 진짜 잘 하고 있다. 1년 차는 무조건 정신 바짝 차리고, 선배들 하는 거. 아주 잘 듣고, 또 아주 잘 봐야 돼. 야. 춥다! 나가자!”
콜드 룸에서 바로 나오자.
곧 한기가 싹 사라진다.
곧이어 마스크를 벗은 홍병호.
그러고는 그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휙 위로 쓸어올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용매 정제하는 걸 제법 잘 한다던데? 문호가 그러더라. 그럼 조만간 본격적으로 합성 진행할 생각이냐?”
“아뇨. 아직은요. 좀 더 용매부터 정제하고. 그리고 그 뒤에 본격적으로 전구물질 합성부터 들어가려고요.”
“오~ 이 자식! 준비성도 철저하네? 그럼 상준이 형한테서, 그거 관련해서 허락은 받았어?”
“네?”
“야. 너 그거, 진짜 중요한 거 몰라? 상준이 형한테 허락 안 받고 했다가, 나중에 무슨 개소리를 들으려고? 그리고 혹시 모르는 것 있으면, 상준이 형한테 가서 물어봐. 뭐, 그러니까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아무리 더러워도, 상준이 형은 랩짱이니까, 그냥 알아서 우리가 납작 엎드리는 게 좋아. 응?”
“음.”
최상준. 박사과정 6년 차.
랩짱 최상준을 그렇게 언급하면서.
홍병호는 슬쩍 그에 대한 뒷담화도 하고 있었다.
“음. 그런데 선배님. 무슨 일로 절 불렀어요?”
콜드 룸 밖에서 이것저것 실험 도구를 챙기던 홍병호.
그는 그 말에 바로 반응하며, 씩 웃었다.
“야. 미팅 말이야. 미팅! 미팅, 우리 언제 해줄 거냐? 봐라. 내 얼굴이 갈수록 팍팍 삭아간다. 이러다가 천연기념물이 되겠다. 야. 사람 좀 살려주라.”
역시 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