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123화 (123/153)

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2-김태풍의 첫 정제

<2> 김태풍의 첫 정제

잠시 후, 김태풍이 진행한 실험은 디메틸 아세트 아미드(dimethylacetamide)의 정제다.

화학 반응을 시작하기 전에 용매의 순도가 가장 중요한데.

이 시절 용매는 초고순도 용매를 사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가격도 너무 비싸다.

그리고 남들을 믿지 못하는 꼬질꼬질한 화학자들의 습성 때문에.

연구자들은 직접 정제작업을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특히, 이 용매는 물과 잘 섞이기 때문에.

소량의 수분이 용액 내에 잔존하고 있었고.

그래서 반드시 수분을 잘 잡아줘야 했다.

김태풍은 몇 가지 물질을 넣어 수분을 잡았고.

디메틸 아세트 아미드가 디메틸 포름 아미드(DMF)보다 끓는점이 10℃ 이상 높은 153℃라서.

진공펌프를 이용한 감압증류 방법을 통해서.

잠시 후, 순수한 디메틸 아세트 아미드를 얻게 되었다.

“그래. 이걸 잘 구운 분자체(molecular sieve)들이 채워진 공병에 넣어두면, 이걸로 끝이야. 질소 충전도 좀 하고….”

김태풍은 혼잣말을 하면서 어느덧 용매 정제를 마무리했는데.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작업은 다시 한번 세척 작업.

마치 요리를 하고 난 뒤에, 다시 접시를 닦는 것처럼.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이 세척 작업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다.

다음 실험을 위해서, 반드시 깨끗하게 잘 닦아서 건조기 오븐에 넣어둬야 하기 때문이다.

“태풍아. 나도 그거 좀 가르쳐줄래?”

“이거?”

“응.”

씩 웃는 김태풍.

“점심 먹고 와서, 다시 할 거니까 그때같이 하자.”

“정말? 좋아. 그럼 약속한 거다?”

“알았어. 우리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어? 밥? 근데 아직 시간이 안 됐잖아? 형들하고 같이 가려면?”

“아니. 그냥 가자. 배고프잖아. 아까 최상준 선배가 교수님 방에 들어갔다고 했지? 아마 논문 교정을 끝내려면, 쉽지 않을걸?”

“그러니까 우리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거 아냐? 우리만 따로 가면, 눈치도 보이고. 그리고 혹시라도 상준이 형이 우리한테….”

“야. 그냥 가자. 내가 책임질게.”

김태풍은 손을 씻은 뒤, 바로 실험실 가운을 벗었다.

여전히 눈이 동그래진 배진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김태풍이 실험실 밖으로 나가자, 마침내 결정한 듯 얼른 뒤쫓아 나갔다.

“정말 이래도 돼?”

“괜찮아. 아마 교수님 방에서 엄청 혼나고 있을 거야. 그 선배는 기분 나쁘면, 점심 안 먹잖아. 지금 안 봐도 뻔해. 오늘은 단체로 움직이지 못하고, 아마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점심 먹으러 갈걸?”

“뭐? 진짜?”

“나만 믿어.”

실험실 랩짱, 최상준.

실험실 1년 선배 차경석이 아주 약한 꼬맹이 악마라면.

저 최상준은 악마 중의 악마. 거의 마왕급의 악마였다.

실험실에서 가장 값비싼 재료들을 독점하고 있었고.

대다수 분석 기기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심한 꼰대 짓을 하고 있는 그런 인간.

그래서 모두들 최상준의 눈치를 보느라 다들 신경이 곤두섰는데.

보통 랩짱과 다르게, 그가 그런 권한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최상준의 또 다른 신분 때문이었다.

최상준의 아버지가 바로 한성그룹 로얄 패밀리의 일원인 최진태 사장이다.

최진태 사장의 대학 동기인 지도교수.

그래서 최상준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최상준의 별난 성격 때문에 서로가 무척 곤혹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태풍아. 근데 너 말이야. 너 원래 성격이 그랬어?”

“어?”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김태풍은 고개를 들었다.

“나? 나 말이야?”

“응. 갑자기 뭔가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아서.”

“아. 그런 게 좀 있어. 사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잖아?”

“뭐? 사는 게 뭐?”

“아. 그런 게 있어.”

“너 진짜 바뀐 것 같아…. 확실히 너는… 아! 태풍아. 저기 좀 봐.”

한참 태풍의 성격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딴말을 하고 있는 배진수.

의아해진 김태풍은 고개를 돌렸고.

배진수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곳을 응시하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는 기분이다.

산뜻한 외투를 입고서 또박또박 걸어오고 있는 어느 아리따운 여학생.

아직 꽃샘추위가 한창이라 추울 텐데도.

멋을 부리는 사람들한테 이따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여학생의 주변에는 머리가 남산만한 남자들이 주렁주렁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실험실 선배들인 듯.

그들은 그 여학생과 나란히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공부하는 애들이 대체로 머리가 좀 큰 편인데.

그에 반해서 저 여학생은 얼굴이 정말 작은 주먹만한 크기였다.

“와아! 진짜 쟤 이쁘지 않아?”

배진수의 감탄사에 피식 웃는 김태풍.

“야. 그만하고, 밥 빨리 먹고, 랩에 들어가자.”

그러나 배진수는 계속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희선이 쟤는 정말 얼굴도 이쁜데, 집안도 아주 좋다잖아. 너 들었어? 강남 갑부 집 딸이라던데?”

“야. 그만해. 밥이나 빨리 먹어.”

김태풍이 살짝 짜증을 내자.

그제야 배진수는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숟가락질하며, 식판의 음식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리고 먼저 다 먹은 김태풍은 잠시 기다려주다가.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언가 좋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번쩍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사람들 때문이다.

저 멀리 식당 밖.

그곳에서 실험실 선배 몇몇이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그들을 보는 순간, 김태풍은 아주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던 것이다.

“야. 진수야. 근데 우리 나중에 말이야. 우리는 병특(전문연구요원) 지원할 거라서 군대 안 가도 되잖아?”

“어? 뭐, 그렇긴 하지. 여기서 군대 가는 애들은 아무도 없잖아?”

“그래서 묻는 건데. 이쁜 여동생이나 후배가 있는 애들은 군대에서도 인기가 제법 있다며? 물론 소개팅시켜달라고 고참한테서 열라 쫑꾸도 당한다고 하던데?”

“그래? 난 잘 몰라.”

“모르면 지금 잘 봐. 여기가 군대는 아니겠지만.”

식판을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태풍.

실험실 몇몇 선배들이 거의 학생식당 근처에 다다랐을 때.

김태풍은 곧바로 서희선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서희선의 주변에는 이미 머리가 큼직한 선배들이 그녀를 둘러싸듯.

식탁 주변에 자리를 잡고서 앉아 있다.

그리고 제법 늘씬한 체격에 얼굴도 곱상한 김태풍이 다가오자.

흠칫 놀라며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인간들.

그러나 김태풍은 모른 척하며.

서희선에게 바로 말을 걸고 있다.

“야. 희선아.”

“어???”

처음에는 바로 못 알아보는 서희선.

그러나 한 템포 늦게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김태풍? 맞지? 와! 반갑다. 잘 지내고 있지?”

서희선과 김태풍은 학부 시절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였다.

그러나 평소 소심했던 김태풍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아는 척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냥 뭐, 그렇지 뭐. 그런데 너는 잘 지내?”

“아. 나도 뭐, 그렇지. 근데 너, 점심은 다 먹었어?”

“아. 나는 방금 다 먹었어. 참! 다른 게 아니라, 너 이번에 경진대회 나간다고 했지?”

“어? 태풍아. 어떻게 알았어?”

알 수밖에.

일성그룹에서 이맘때 실시했던 논문 경진대회에서 서희선은 결국 대상을 차지했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더 유명해지는 서희선.

얼굴도 이쁘고 똑똑하다고 다들 난리였는데.

이때, 시상식에서 만난 일성그룹 김신웅 회장의 친손자의 눈에 띄어.

훗날 서희선은 일성그룹의 며느리까지 되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김태풍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신약개발로 자신이 한창 주가를 날릴 때.

김태풍은 일성그룹 회장에게도 불려가, 상도 받았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임원 파티에 임시로 초대를 받아 갔을 때.

거기서 서희선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는 일성화재 전무로 재직 중에 있었고.

일성그룹 며느리지만.

너무 똑똑해서 그냥 두질 않고 일성화재 전무로도 발탁되었던 그녀.

이른바 꽃길만 걷는 게 바로 그녀의 미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이번에 일성그룹이 주최한 논문 경진대회였다.

“내가 좀 도와줄까?”

“어? 네가 어떻게? 이번 주제는 휴대폰 사업의 미래라고 하던데? 너 화학과잖아?”

“내가 전자 쪽도 관심이 높아. 혹시 의심스럽다면, 어쩔 수 없고. 하지만 아이디어는 화학과 사람한테서도 나올 수가 있잖아.”

“아. 뭐,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 다른 쪽의 시각이라면 더 재미가 있겠어. 그런데 넌 어떻게 내가 그 경진대회에 나가는 걸 알았어?”

“보통, 그런 대회는 석사과정들은 안 나가잖아. 그냥 네 소문이 들리니까….”

“음. 하긴,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좀 떠들어대긴 했지. 그냥 이것저것 설문 조사 겸. 그럼 태풍아. 날 정말 도와줄 수 있어?”

“물론 도와줄 수 있지. 대신에 네가 내 도움으로 상을 받으면, 나중에 내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 어떤 거?”

“뭐, 어려운 건 아니고. 아주 간단한 거. 친구끼린데, 어디 어려운 걸 부탁하겠어?”

“그럼 괜찮겠다. 나중에 내가 삐삐치면 되지? 아! 깜빡할 뻔했네. 네 번호 좀 알려줘.”

“알았어.”

얼른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는 김태풍.

그러나 주변에 종이가 없어 두리번거리자.

서희선은 웃으며 자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냥 여기다 적어.”

“괜찮겠어?”

“괜찮아.”

꽤 털털한 모습이다.

그래서 김태풍은 마다하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에 번호를 적는데.

간지러운 듯 그녀는 이리저리 어깨를 비틀어댄다.

“미안. 끝났어. 그런데 네 삐삐 번호는?”

“그건, 다음에 내가 삐삐칠 때 알려줄게. 나는 휴대폰이 있어.”

그래. 역시나 그녀는 삐삐가 아니라 휴대폰이 있었다.

사실, 이 시대는 삐삐 시대다.

무선호출기 삐삐.

미래에 한때 유행하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도 자주 등장하던 그 삐삐.

이 삐삐는 작년까지 가입자 수가 230만 명이었고.

최근에는 400만 명을 육박할 수준으로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 삐삐 시대에도 돈 많은 집 아들딸들은 큼직한(?) 휴대폰을 들고 다니고 있었는데.

물론 기지국의 제한 때문에 통화 품질은 그리 좋지가 못했다.

그렇게 서희선과의 대화를 마치고 이제야 비로소 슬쩍 뒤돌아보던 김태풍.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김태풍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식판을 들고 서 있는 실험실 선배들.

셀프 배식이라 자신이 먹고 싶은 만큼, 밥이나 국, 반찬 등을 떠서 가져가는데.

그들은 지금 멍한 표정을 하고서, 김태풍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김태풍이 캠퍼스 퀸카와 저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러나 애써 그런 눈빛을 모른 척하는 김태풍.

대신에 그쪽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선배님들. 오셨습니까? 식사 맛있게 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

얼른 자신의 식판을 처리하고 있는 김태풍.

멀뚱멀뚱 서 있던 배진수.

그도 얼른 뛰어가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김태풍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선배들.

- 야. 저 자식. 인기가 좀 있나 보네?

-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허울대가 멀쩡한 게, 좀 먹히나 본데?

- 음. 혹시 이 생각 어떠냐?

- 뭐?

- 우리 저 자식한테 말해서 단체 미팅이나 해 볼까? 뭐, 실험실 차원에서?

- 음.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우리도 여친 하나 만들어야 되잖아. 근데 저 자식, 여자애들이랑 많이 친한 것 같은데?

- 암튼 나중에 한 번 이야기해보자. 야! 그러고 보니까 모처럼 괜찮은 후배가 들어왔어….

순 노총각 냄새를 풀풀 풍기는 실험실 선배들.

김태풍은 그런 선배들에게 호감을 얻었고.

곧이어 회귀 이후 다음 일들을 착착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좀 더 차리고서 생각해 보니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경우가 다 있을까.

회귀 충격으로 잠깐 멍청이가 되긴 했지만.

점점 더 머리 회전은 빨라지고 있었고.

그래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이런 것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었다.

차라리 지금부터 과외를 시작해서, 목돈부터 차곡차곡 만들어둘까?

사실, 연구원 생활은 무척 배가 고픈 게 사실이다.

늘 회사 인센티브에 목을 매야 한다.

달마다 받는 봉급.

그건 그냥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재벌은 항상 재벌이고.

배고픈 회사원은 항상 회사원일 뿐!

그런 인생을 살았던 김태풍.

그래서 이런 좋은 기회에 재테크를 한다면, 얼마나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을까.

물론, 화학자로서, 신약 합성자로서, 과학자로서의 목표를 다시 세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명성은 한순간!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인 것 같았다.

속된 말로 돈벌레가 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김태풍은 당당해질 생각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손가락질에 주눅이 들 필요 없이.

완전히 다른 김태풍이 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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