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김태풍의 각성 (에피소드 연재 시작)
<에피소드EP-1994년도 이상한 천재들>
<1> 김태풍의 각성
1994년도 4월 초순.
김태풍이 우여곡절 끝에 회귀를 한 지, 막 한 달이 지나가는 시점이다.
이 무렵 쌀쌀한 날씨 속, 꽃샘추위는 기승부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런 바깥 기온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김태풍은 한동안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야. 랩 미팅 준비 안 하냐?”
“랩 미팅?”
“야. 너 왜 그래?”
“아. 아니….”
여전히 멍한 모습의 김태풍.
다름이 아니라, 불과 한 달 전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이었다.
번개에 맞고서 죽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대학원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현재 90학번인 김태풍.
그는 이제 석사과정 1년차.
과학고 출신이라,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했고.
그래서 현재 한국 나이로 23살인 김태풍.
이렇게 회귀를 한 탓에 온몸이 너무 젊고 활기에 꽉 차 있었다.
그런 몸이 무척 낯설기만 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디 아픈 데도 하나도 없고.
40대 초반에 생긴 만성질환이었던 오십견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혈압도 정상이다.
관절도 좋고.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얼굴 혈색도 좋았다.
아. 미치겠네.
좋긴 좋은데.
앞으로 어떡하지?
처음에는 막연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래도 사람이란 게 정말 어디서든 적응이 되나 보다.
아마도 생전 처음 보는 곳에 떨어졌다면, 더 큰 공황상태에 빠졌을 테지만.
그래도 이곳은 자신에게 아주 익숙한 곳이 아닌가.
그래서 그나마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거겠고.
그나마 조금씩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야. 니네 신입생들. 여기로 다들 모여봐. 봐봐. 저기 좀 봐! 니네들, 아침에 나오면 랩실 청소나 좀 해라. 존나 짬밥도 없는 것들이 벌써부터 편하게 지내려고 그래?”
그리고 실험실을 울리는 이 짜증나는 목소리에도 금방 적응이 되고 있었다.
실험실 1년 선배.
석사 2년 차인 차경석은 상당히 꼼꼼한 성격인데.
위로는 십여 명에 이르는 선배들.
아래로는 몇몇 안 되는 후배들을 둔 그에게 꼼꼼한 성격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사실 그냥 좋게 본 것이고.
다시 말해서, 성격이 좀 지랄 같다.
오늘도 석사 1년 차 4명을 불러놓고서 꼰대 짓을 시작하고 있는 모양인데.
과거 김태풍은 그의 태도가 무척 아니꼬웠지만.
그땐 울화를 꾹꾹 눌러가며 참기만 했다.
분통에 속이 터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선배!
그래도 실험실 선배라서, 그에게 대접을 해야 하기 때문인데.
거기다가 실험을 막 배우는 입장이라.
이 시기에는 선배들에게 찍히면 그날로 끝장이다.
초자(실험용 유리 기구) 하나 다루는 것을 배울 수가 없고.
화학 반응을 거는 방법도 전혀 전수받을 수도 없다.
가장 어려운 것은 용매를 정제하는 과정!
여기에 특히 수분.
수분의 함량을 줄이는 것이, 이 용매 정제의 가장 엑기스.
왜냐하면, 용매 속에 남아 있는 초미량의 수분이 여러 화학 반응을 잡치는 원흉이기 때문이었다.
“야! 김태풍! 너, 지금 무슨 생각하냐? 내 말에 집중을 못 하냐? 너, 요즘 완전 병신 같다?”
“네?”
우두커니 선 채로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김태풍은 ‘병신’이라는 말에 바로 반응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자신을 노려보며 눈을 완전히 흘기고 있는 차경석.
얼굴이 하얗고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저 차경석은 사실상 여자 후배들에겐 아주 친절한 사람이지만.
남자 후배들한테는 저렇듯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서 매번 쳐다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갑자기 표정이 확 변하고 있는 김태풍.
“선배. 그냥 저한테 관심 좀 끄면 안 됩니까?”
“??”
“선배도 좀 눈이 있으면 저기 좀 보시죠. 선배 자리가 제일 더러운데? 선배도 아침 일찍 오면, 자리부터 치우면 안 됩니까?”
“……???”
과거였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
그러나 김태풍은 다신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런 소심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이 회귀한 것을 확인한 이상, 더는 병신처럼 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이제는 따질 것은 따지고.
잘난 것은 잘난 척을 하면서 살 생각이었다.
인생의 모토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
하긴, 누구든지 어디 한번 회귀를 해봐라.
평생 일한 직장에서 이미 신약 실패라는 쓰라림을 맛본 뒤였고.
인생 실패작이 되어 직장에서 내쫓김마저 당한 뒤였다.
그런 판국이니.
어쩌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전 이제부터 실험을 시작해야겠어요.”
“실험? 실험??? 야! 이 새끼가!! 지금 뭣 하는 거야?? 너 지금 죽으라고 지랄하냐? 이 시발 새끼가!”
저렇듯 욕설을 하고, 또 저렇듯 눈을 부라려 봤자.
김태풍은 전혀 무섭지 않다.
이른바, 김태풍의 의식이 깨인 것이다.
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일종의 각성 같은.
“저 바쁘니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쌩하니 몸을 틀고 있는 김태풍.
그 순간, 김태풍의 뒷덜미를 거칠게 움켜쥐려는 차경석.
그러나 김태풍은 이제 만만한 김태풍이 아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틀더니.
곧바로 손을 뻗어.
차경석의 목덜미를 단숨에 거머쥐는 김태풍.
그 행동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어.
차경석의 손놀림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차경석을 위협하듯.
오른 주먹을 어깨 위로 드는 김태풍.
‘???’
깜짝 놀란 차경석.
차경석의 두 눈은 튀어나올 듯 동그래지고, 그의 어깨는 움츠러들고 만다.
허장성세의 비뚤남 차경석.
그는 지금 무척 경악하고 있는 것이다.
“선배. 저 성격 더러워요. 그냥 건드리지 마세요.”
김태풍은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실험 가운을 챙겨입는다.
이때, 놀란 듯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는 동기들.
그러나 김태풍은 누구 눈치 하나 보지 않았고.
실험실 초자 진열장으로 걸어가, 이것저것 초자(비이커, 플라스크 등)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김태풍은 가장 먼저 세척 작업을 시작했다.
‘휴. 휴. 심장이 계속 벌떡벌떡 뛰네. 휴! 하지만 진짜 앞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돼. 정신 차리자. 정신 바짝 차리자! 김태풍! 넌 분명 과거로 돌아온 거야!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고!’
김태풍은 그렇게 속으로 외치며 다시 정신을 집중했는데.
한편, 화학 반응을 시도할 땐, 절대 다른 사람의 손에 의존해서도 안 되고, 또 다른 사람의 반응기를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닦아 놓은 초자.
그곳에 혹시라도 흠결이 있다면, 꽝 나는 것은 자신의 실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늘 자신이 직접 닦아서 시작하는 게 맞다.
특히, 실험에 있어서 무척 꼼꼼한 김태풍.
그는 전날 세척해 둔 초자도 믿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사연(즉, 누군가 만졌을 수도)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일성그룹 수석연구원이었던 김태풍.
그가 연구원 경력 내내 철두철미하게 지켰던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김태풍의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이 차경석은 지켜보고 있다.
“뭐야? 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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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태풍아. 너 괜찮냐? 경석이 형한테 그래도 돼?”
놀란 동기 녀석들.
특히, 같은 과학고 출신의 동기인 배진수는 눈이 동그래져서 김태풍의 옆에서 계속 조잘거리고 있었다.
“너, 그러다가 따 당하면 어떡하려고?”
“따?”
“야! 그거 몰라? 우리 윗 기수 선배, 천장수 선배. 잘난 척하다가 그 꼴을 당했잖아. 작년에 선배들이 실험하나 안 가르쳐줘서, 결국 자퇴했잖아. 너, 그러다가 큰일난다.”
큰 뿔테 안경을 쓴, 키 작은 배진수는 김태풍을 걱정해서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어느덧 초자 세척 작업에 이어서 건조까지 마무리한 김태풍은 이제 초자를 가지고 후드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초자들을 이리저리 붙여가며 실험 세팅을 시작했다.
“어? 어? 야. 김태풍. 너, 그런 거 대체 어디서 배웠어?”
“이거? 별거 아닌데? 우리 학부 실험 때, 이런 거 많이 해 봤잖아.”
“학부 실험? 그거랑 다르잖아.”
“임마. 뭐가 달라? 똑같아. 단지 조교 형이 하던 대로 따라 하는 것과 지금은 직접 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야. 너 혼자서도 할 수가 있어. 물론 조금만 트릭을 쓰면, 이런 식으로 변형도 가능하고.”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가 사고 나면 어떡하려고?”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능숙하게 세팅을 마친 김태풍은 곧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척 손놀림이 빠르고.
또한, 한 치의 실수조차 없다.
진공 펌프 쪽과도 완벽하게 연결을 끝낸 김태풍.
이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차경석.
그가 무언가 냄새(?)를 맡고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김태풍한테서 당한 게 있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차경석.
그리고 이왕이면 아주 제대로 작살을 낼 생각이라.
그의 두 눈은 도끼같이 변해 있었다.
물론 확실하게 응징할 방법이 있다.
강압적으로 청소 따위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
실험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
이걸 실수하는 인간은 실험실에서 바로 매장당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함부로 실험하다가 사고가 터지면.
다른 학생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실험실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은 화학 관련 실험실에서 더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차경석은 머리를 굴렸고.
일부러 박사과정 1년차 선배까지 대동하고서 후드 쪽으로 다가갔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김태풍의 실험 후드에 막 도착한 박사과정 1년차 최문호.
그는 갑자기 놀란 표정을 하면서.
차경석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야아! 차경석! 너, 애들 진짜 잘 가르쳐놨네! 넌 앞으로 그냥, 1년 차 애들 도맡아서 잘 가르쳐 놔라. 자식! 나한테 칭찬받고 싶어 부른 거야? 암튼 잘 했다! 자식아! 아씨이! 난 지금 머리 아파 죽겠어. 교수님이 과제보고서 작성 마무리하라고 난리라니까!”
그러고는 곧장 사라져버리는 최문호.
어? 뭐야?
이게 아닌데?
눈이 동그래진 차경석.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김태풍의 어깨너머에서 그 실험 세팅 형태를 노려보다가.
그냥 그대로 그 표정이 일그러지고 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부르르릉~
실험용 진공 펌프까지 가동되면서.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세팅된 실험 장치에는 어떤 허점조차 없다.
자칫해서 장치가 터지거나, 망가질 우려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실, 대학원 실험은 대학과정(학부) 실험과 차원이 다르다.
김태풍의 세팅 실력은 확실히 완벽했다.
“선배. 무슨 볼일 있습니까?”
조금 전 최문호 선배가 떠들썩하게 차경석을 칭찬했던 것을.
김태풍도 똑똑히 들었지만.
그러나 김태풍은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고.
대신에 정색하며.
그렇듯 차경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새끼야. 어디 너 혼자서 잘하나 보자. 실수 하나라도 해 봐! 내가 교수님한테 싹 다 일러바칠 테니까.”
소심한 차경석의 저주.
그러나 김태풍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
과거 자신을 비롯한 후배들을 괴롭혔던 고약한 성격인 차경석.
그가 저렇듯 물러나자.
오히려 김태풍은 속이 시원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때.
그런 김태풍이 아주 놀랍다는 듯.
동기 배진수.
그는 눈이 동그래져 쳐다보고 있다.
회귀 후.
아직 경력 초보인 김태풍의 파란만장한 석사과정 1년차 생활.
즉, 1994년도 4월.
미래를 위한 김태풍의 반격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