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러브 인 뉴욕
그 뒤, 대략 15분 뒤.
한 대의 중형차가 그들의 앞으로 나타났는데.
거기서 정장 차림의 누군가가 내렸고.
그는 김태풍에게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김태풍 역시 그를 향해 마주 인사한 뒤.
곧이어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여기 타시죠.”
“네? 어머? 이 차는?”
“다행히 아는 분한테 부탁한 겁니다.”
“아. 네.”
그제야 표정이 무척 밝아지고 있는 권현정 대리와 김혜정 대리.
그녀들은 깨끗한 뒷좌석에 탔고.
김태풍은 조수석에 앉았다.
그렇게 차량은 출발했는데.
잠시 후.
김혜정 대리가 슬쩍 입을 열고 있다.
“근데 소장님.”
“네?”
“제가 보기엔 소장님은 꽤 높으신 분들을 많이 아시고 계실 텐데, 신문에서도 그런 분들과 사진도 많이 찍으시고.”
“아, 근데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정치인이나 장차관 같이 높으신 분들한테 말씀드려서, 저런 택시 승차거부! 저것 좀 해결해 주실 수 없나요? 친구들이랑 밤늦게 놀다 보면, 항상 저래요.”
29살의 김혜정 대리.
그녀는 술 때문에 기분이 많이 업된 상태였고.
특히, 회사에서와 달리, 이런 사석에서 김태풍이 무척 편한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렇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네? 저더러 승차거부를 해결해달라고요? 하하, 제가 뭐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소장님은 좀 다르시잖아요?”
“저는 그냥 연구소장입니다. 뭐, 한다면야, 시청이나 건교부(건설교통부)에 민원을 넣을 수 있겠죠. 한번 그쪽은, 같이 해보도록 하죠.”
그렇게 소박하게 말을 했지만.
그러고 보면, 지난 대통령 순방사절단 일을 수행하면서.
김태풍은 국가 고위직 공무원들과도 두루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인맥은 청와대, 국정원, 각 정부 부서 쪽까지 고루 뻗어있었고.
이건 보통 인맥이 아닌 게 사실이었다.
“근데 소장님. 그럼 혹시, 영화 보는 거는 좋아하세요?”
이번에는 아주 요조숙녀 같은 권현정 대리.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목구비가 곱상하고 이뻐.
연구소 내에서도.
그 미모가 몇 손가락 안에 든다는 여자 연구원, 권현정 대리.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가 그렇게 불쑥 물었고.
조수석의 김태풍은 바로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이때, 눈을 반짝이며 김태풍을 응시하고 있는 권현정 대리.
약간 시선이 강렬했지만.
김태풍은 그저 밝게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네. 당연히 영화 보는 거 좋아합니다. 물론, 요즘 너무 바빠서, 제대로 영화 볼 기회가 없긴 합니다. 혹시, 요즘 나온 영화, 좋은 영화가 있나요?”
그러자 바로 표정이 한층 밝아지고 있는 권현정 대리.
“When I fall in love. 이건 미국 개봉 제목인데, 국내에서는 러브 인 뉴욕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어요. 혹시 보셨어요?”
“아, 하하. 죄송합니다. 배우가 대체 누구죠?”
“음. 리차드 쇼어가 남자 주연이고, 여자 주연은 케이트 코니. 이 영화 보신 분들의 평가로는, 이 영화가 무척….”
그런데 그 순간.
김태풍은 갑자기 권현정 대리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 맞아! When I fall in love!’
그리고 비로소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 영화의 제목.
그리고 그 순간.
김태풍의 머릿속에는 한 여자의 얼굴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케이트 코니!
지난 7월, 브룩하이머 교수의 추모 때.
LA에서 잠깐 봤지만.
그건 고작 몇 시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술기운이 잔뜩 오른 상태에서.
그녀의 이름이 귀에 들어오자.
김태풍의 기분은 갑자기 묘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덴마크 코펜하겐 이후, 그들은 그들만의 시간을 따로 보낸 적이 없다.
아무리 전화 통화를 자주 하더라도 말이다.
‘음. 내가 너무 바쁘긴 했어. 케이트도 또 바빴고. 참, 그러고 보니까… 지금 찍고 있는 영화가 9월이면 다 끝난다고 했는데…. 음. 이럴 게 아니라… 10월 초에 연차, 월차 휴가를 써서, 휴가나 한번 다녀올까?’
따지고 보면, 김태풍.
그는 월차, 연차, 이런 것들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다.
여름 휴가마저 반납한 채, 그는 일에 몰두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조금이나마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케이트가 너무 보고 싶기도 하다.
그녀와 키스를 나누고 싶고.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고 싶다.
그렇듯 김태풍의 두 눈에는.
아기자기한 열망이.
샘솟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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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5일 월요일.
아침 최저 기온이 섭씨 17도까지 떨어져, 이제 선선한 가을 날씨가 더 짙어지고 있는 이 날.
김태풍은 저녁 무렵, TPI홀딩스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 김태풍은 홍콩 HK투자파트너스로 옮겨간 김의준 대표를 대신하여.
이제 TPI홀딩스 내 국내외 인수합병 부문을 지원하게 된 전기영 전무를 만나게 되었다.
40대 후반의 나이인 전기영 전무.
그는 이곳에 입사하기 전, 한성그룹 내 한성경제금융연구소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었고.
과거 홍콩 소재 대형투자 회사에서 김의준 대표과 함께 일을 같이 했던 적도 있었다.
특히, 그는 세계적인 사모펀드(PEF), 테논퍼시픽그룹(TPG)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미국 식료품 회사 GHR Food를 단 3년 만에 되팔면서.
무려 85%에 달하는 IRR(내부수익률)을 기록한 적도 있는, 인수합병 분야의 전문가였다.
“김 박사님.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제 리칸 홍 이사님과 김의준 대표님으로부터 긴급 연락을 받은 게 있어서, 긴히 뵙자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주 넓은 회의실.
김태풍이 주로 쓰고 있는 이 심플한 회의실에서.
지금 김태풍은 전기영 전무로부터 그렇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네. 그 이야긴 어제 잠깐 들었습니다. 사실, 아직 업무 파악하시기도 힘드실 텐데, 일이 너무 일찍 시작되어서 제가 죄송합니다.”
김태풍이 그렇게 말하자.
전기영 전무는 씩 웃는다.
아주 얇은 안경을 쓴, 대체로 말쑥한 이미지인 전기영 전무.
짙은 쌍꺼풀 때문인지 특히 눈매가 선명한 전기영 전무는 또렷한 동공을 반짝이며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김 박사님. 회사에서 일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아주 큰 프로젝트가 가동된 거 같아, 저로서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미 한성경제금융연구소에서 한 이삼 년 쉴 만큼 쉬었으니까, 저도 이제 뛰어야죠. 아무리 연봉이 많아도, 앉아서 연구하는 쪽은 역시 제 스타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양질의 기업을 노리고 사냥하는 냉정한 사냥꾼.
한편으로는 수천억 원대의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안겨주는 금융 시장의 하이에나들.
전기영 전무는 바로 그런 쪽의 사람이었다.
특히, 국제사모펀드 쪽에서 오랜 일을 했던 터라.
그런 계산 감각이 아주 남다른 모습인데.
어제 리칸 홍 이사가 제안한 프로젝트를.
그는 단순히 김태풍에게 전달하는 식이 아니라.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냉철하게 분석한 뒤.
자신의 감각과 느낌을 더해서.
김태풍에게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김태풍이 저 전기영 전무를 연봉 50억 원 플러스 알파라는 초고액 연봉까지 제시하면서, TPI홀딩스에 영입하게 된 이유는.
결국, HK투자파트너스 리칸 홍 이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월, 리칸 홍 이사를 파트너로 받아들이면서.
김의준 대표는 전기영 전무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는데.
이른바, 리칸 홍 이사의 일을 도울 수 있는.
가장 걸맞은 인재가 될 거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어지고 있는 전기영 전무의 의견을 들으면서.
이때, 김태풍은 그를 회사로 영입한 게, 절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먼저, 아시다시피, 홍콩 역시 외환위기로 인하여, 현재 큰 곤경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홍콩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고, 홍콩 금융회사들의 구조조정 역시 아직도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IMF 위기를 순탄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홍콩 역시 점점 더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그의 말.
“특히, 지난해 배럴당 8달러까지 급락했던 국제유가는 점점 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석유수출기구(OPEC)에 대해, 서방 국가들의 석유 증산 요구가 아주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경기 회복세. 즉, 이런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홍콩 금융업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전기영 전무는 리칸 홍이 먹잇감으로 던진 홍콩 스탠더드 은행에 대한 분석 자료도 설명했다.
“먼저, 이 은행은 홍콩금융관리국에서 인가은행으로 분류가 된 곳인데, 당좌예금, 보통 예금, 담보대출 등등, 각종 주요 은행 기능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총자산 규모는 1,500억 홍콩 달러, 원화로 환산한다면 대략 21조 원쯤 되는 대형 은행입니다.”
자산가치만 해도 21조 원짜리 은행.
어마어마하게 큰 은행이다.
이런 큰 은행을 인수합병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지금껏 김태풍이 해 왔던 일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한 인수전략을 설명하기에 앞서, 결과적으로 먼저 말씀드린다면, 리칸 홍 이사님은 홍콩 스탠더드 은행 인수를 위해서 대략 2조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략 1조 1,000억 원 내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단, 1조 1,000억 원이라고요?”
“네. 그리고 이 홍콩 스탠더드 은행을 향후 인수하더라도, 그만한 이익이 담보가 되어야 할 겁니다. 단순히 은행 경영에 욕심내고서 벌이는 일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전기영 전무.
그는 아주 냉정한 기업사냥꾼답게 말을 했는데.
그래서 김태풍은 그의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홍콩 은행을 실질적으로 운영할지 말지는 둘째치고.
이런 조 단위투자에서 충분한 이익이 담보되어야 한다.
즉, 김태풍이 추진하고 있는 홍콩 투자 쪽은.
결국, 자신의 돈을 더 부풀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이익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홍콩 은행 인수. 솔직히 말해서, 전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전기영 전무는 어떻게 은행을 사고팔면서, 이익을 챙길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선, 제가 분석한 이 은행의 가치는, 현재 국제적 기준(IBP: international best practices)에 따라 평가되는 이 은행의 가치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은행 인수 협상 시, 무조건 IBP 기준에 따라 인수 협상을 진행해야 하고. 특히, 이 은행과 은행 채권자들과의 협상 과정에서도 풋백 옵션 조항까지 넣게 된다면, 충분히 리스크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지고 있는 그의 말.
“특히, 채권과 지분 인수 과정에서 저희가 현명하게 접근한다면, 지분 51% 인수에 시가 1조 1000억 원 투자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향후, 이 은행이 정상화됐을 때, 이 은행 지분을 외부에 매각하게 된다면, IMF 외환위기 이전의 홍콩 경기를 고려해서, 최대 3배 이상의 차익 창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풋백 옵션이라는 것은, 다른 채권자들의 협조까지 받은 뒤, 향후 내부 자산이 부실해지면, 이 부실 상황에 대해서 연대 책임을 지는 옵션이다.
“참고로, 홍콩 스탠더드 은행의 부실 채권 규모는 총 6조 원 정도가 됩니다. 이 은행의 자산가치 21조 원에 비하면, 그렇게 크지 않지만. 부실 채권 규모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서, 이미 주가는 폭락한 상태입니다. 특히, 이 은행은 총여신의 절반 이상이 기업·개인의 부동산 담보 대출에 의존하고 있어, 부실 채권은 나날이 급증하고 상황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좀 더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기영 전무는 드디어 리칸 홍 이사의 전략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