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미친 듯이 열광하는 미국인들
<32> 열광하는 미국인들
1999년 11월 9일 화요일 오후.
김태풍은 이날 미국 ANN 방송국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 대기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전날 오후 늦게,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이런저런 한담을 나눴던 Relian Medical Corporation의 CEO 존 러쉬 박사와 CTO 송정민 박사.
그들 역시 이 대기실에 차례로 나타났는데.
그렇게 만나,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토크쇼 촬영 2시간 전.
ANN 방송국의 최고 히트 라이브 쇼, ‘해리 킹 라이브’의 호스트이자, 미국인들이 무척 사랑하고 있는 유명 토크쇼 진행자 해리 킹.
그가 수행진 하나 없이 조용히 그들의 대기실에 나타났다.
그러고 보면, 한국 나이로 올해 67살인 해리 킹.
큼직한 뿔테 안경에 멜빵 바지, 그리고 넓은 이마를 가진 그는 다소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면서도, 아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라이브 쇼에 출연할 김태풍 등을 무척 유쾌한 목소리로 반겨주고 있었다.
“아, 젠틀맨들! 저는 해리라고 합니다. 오늘 당신들을 탐색할 나쁜 입을 가진 늙은이입니다. 하하하!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해리, 저는 존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해리 킹씨. 저는 토니라고 합니다.”
이때, 송정민 박사는 자신의 이름을 ‘토니’라고 소개했다. 과거 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토니 정민 송으로 바꾸었는데. 그래서 일반 미국인들 앞에서는 자신의 영어 이름을 쓰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해리! 저는 태풍, 그냥 대니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곧이어 김태풍도 자신을 소개하며, 그와 악수했는데.
바로 해리는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하.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제 혀가 잔뜩 굳어 있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이게 이렇게 쉽다니! 지저스! 전 언제나 행운아입니다.”
다들 의아해하자, 인상 좋게 웃던 해리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과거에 제가 Best in Bread(빵집 중 최고)를 Breast in Bed(침대 속의 젖가슴)라고 했는데, 제 직업상 간간이 말이 꼭 꼬이곤 합니다. 특히 아시안 멋쟁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 이 요물스러운 혀가 자주 꼬여요. 그러나 오늘은 그런 실수가 절대 없을 것 같군요. 존! 토니! 대니!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렇게 너스레를 떨던 그는 특히 김태풍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니, 그런데 당신은 정말 젊군요. 제 토크쇼에 출연한 어린 래퍼들을 제외하곤 당신이 가장 어려 보이는데, 혹시 나이가 20살인가요?”
김태풍은 그 말에 웃으며 바로 대꾸했다.
보통 미국인들은 동양인들의 나이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 상황은 해리 킹도 비슷했다.
“한국 나이로 28살입니다.”
그러자 깜짝 놀랐고, 이내 그는 씩 웃는다.
“오~ 확실히 말하지만, 당신의 그런 아주 젊은 모습과 그 순수한 눈빛에 아마 모든 미국인들이 매료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말하던 해리는 곧이어 라이브 쇼에 임하는 팁을 김태풍에게 이야기했다.
“대니. 방송은 처음인가요?”
“아,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오! 엑셀런트! 그렇다면 더 말하기 쉽겠군요. 오늘, 당신은 부담 없이 당신의 그 심장을 열고, 아주 진실되게 인터뷰에 응하면 됩니다. 이것만 꼭 기억하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장 진실된 사람을 좋아하고 또 존경하게 된다는 것을.”
해리 킹은 미국 토크쇼의 제왕다웠다.
라이브 쇼에 임하는 간단한 자세를 이야기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가장 진실된 사람을 좋아하고 또 존경하게 된다는’ 그의 지론은 김태풍의 마음에도 크게 와 닿았다.
1950년대 라디오 디스크자키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다양한 방송들을 진행해 온, 미국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
김태풍은 그런 그를 눈앞에서 보게 되자, 무척 신기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런데 한편.
2시간 뒤, 라이브쇼가 시작되기 때문에, 조금 긴장이 되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리 킹은 계속 말을 이어가며, 김태풍의 그런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주었다.
“오늘 주제는 퓨어 센서를 만든 당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지옥에서나 가능한 저 악마적인 의료보험 시스템 때문에, 지금 모든 미국인들은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미국인들은 당신들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도 당신들의 발명품에 무척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히어로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귀를 기울이게 될 겁니다.”
해리 킹의 목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왔고.
한편으로 사람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달변가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대화를 마친 뒤.
해리 킹은 힘찬 발걸음을 하며, 그곳을 나갔고.
곧이어 ANN 방송국 PD와 관계자들이 대기실로 들어와.
오늘 라이브 쇼의 진행 방법들과 2주 전에 보내줬던 질문 목록들을 다시금 점검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런 말을 끝에 남겼다.
“…음! 그런데 해리는 좀 짓궂을 때가 있으니까, 그건 좀 조심해야 합니다. 뭐, 이 질문 목록은 그냥 스탠다드일 뿐이고, 따로 대본이 없으니까, 갑자기 돌발적인 질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면, 그냥 솔직하게 힘들다고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해리는 곧바로 다른 식으로 대화를 풀어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해리 킹에게 전적으로 라이브쇼 진행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그냥 솔직하게 인터뷰를 하고, 또 대화를 해달라는 요청이기도 했다.
어쩌면 크게 부담감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크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라이브 쇼.
그런 다소 애매한 상황에서 시간이 유유히 흘러갔는데.
그리고 어느덧 방송 시간이 되었고.
존 러쉬 박사, 송정민 박사, 김태풍 등의 출연자들이 카메라 앞, 좌석에 배석하자.
마침내 해리 킹 라이브쇼, 즉 생방송 촬영이 시작되게 되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멜빵바지, 그리고 팔꿈치를 괴고서 잠시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해리 킹.
그런데 ‘큐!’ 사인과 함께, 드디어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라이브쇼를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간단한 인사와 소개말이 이어졌고.
곧이어 퓨어 센서 R1과 퓨어 센서 R2에 대한 설명들이 이어졌는데.
Relian Medical Corporation의 CEO 존 러쉬 박사.
그는 아주 유창하면서도, 또한 아주 깔끔하게 진단 장치들에 대한 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곧이어 송정민 박사는 좀 더 디테일한 영역들과 일반 소비자들이 알고 싶은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대화가 한참 진행될 무렵.
갑자기 해리 킹은 약간 묘한, 그러나 약간 날카로운 시선으로 김태풍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해리 킹 특유의 토크쇼.
“그럼, 이제부터는… 질문의 방향을 좀 바꾸어봅시다. 닥터 킴! 아니, 대니!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 놀라운 퓨어 센서 기술 개발을 시작하게 된 겁니까? 아, 잠깐!”
김태풍이 뭔가 답변하려는 순간, 서둘러 제지하고 있는 해리.
해리 킹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먼저, 제가 방금 들었던 내용 중에, 당신은 토니를 찾아가, 놀라운 기술 개발을 제안했다고 했습니다. 이건 과거,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가, 당대에 가장 뛰어난 과학자 중의 한 명인 새뮤얼 랭글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 경우와 비슷하군요. 그러나 그들에겐 축복과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비행기 제작에 성공했지만, 그러나 랭글리는 지독한 시샘과 지독한 질투만을 던졌을 뿐이죠.”
그렇게 말한 뒤, 해리 킹은 김태풍과 송정민 박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이내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김태풍을 응시했다.
“대니! 그리고 토니! 당신들은 무언가 다르군요. 그럼 먼저, 당신은 어떻게 저 토니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까?”
김태풍은 약간 쑥스러운 질문을 받게 된 것인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자신이 그때 가져간 신문 스크랩 자료들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해리 킹은 곧바로 건수를 잡고서.
이것저것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김태풍은 자신과 소개팅을 했던.
송정민 박사의 딸까지 언급하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점점 더 난처해지고 있던 김태풍.
그런 그를 향해 해리 킹은 좀 더 강력한 질문을 날리고 있었다.
“대니!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그녀와 사귀고 있습니까?”
놀란 김태풍.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땐, 단지 소개팅을 했을 뿐입니다.”
김태풍의 그런 대답에 송정민 박사는 놀란 표정으로 김태풍을 쳐다봤는데.
이때, 해리 킹은 다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대니! 이건 정말 사적인 질문이지만, 모든 미국인들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설마 당신 같이 젊고 잘 생긴 천재에게 어떤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는지, 혹시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당황한 김태풍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고.
그 순간, 해리 킹은 이 절묘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이거 정말 뜻밖의 순간이군요. 설마 아직 여자친구가 없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이건 지구상의 모든 여자들을 저주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하하! 그럼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묻겠습니다. 설마 당신같은 멋쟁이 천재에게 정말 여자친구가 없는 겁니까?”
해리 킹의 발언은 확실히 맛깔나다는 점은 있지만.
무언가 감추고 싶은 사람에게는.
점점 더 상황이 지랄 맞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김태풍은 무척 난처한 순간이라, 솔직하게 대답하며, 이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다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방송 전, 대기실에서 해리 킹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세상 사람들은 가장 진실된 사람을 좋아하고 또 존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심적 변화가 온 듯, 김태풍의 굳었던 표정은 바로 풀렸고.
김태풍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네. 좋습니다. 해리. 왜 이런 질문까지 나오게 되었는지 사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주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밝힐 수는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아직 확신이 없어, 현재는 그저 진행형일 뿐입니다. 현재, 좀 더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발전적인 부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좀 더 진지하게 서로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우리는 약속했으니까요. 그 약속을 한 지 이제 불과 이틀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웃는 김태풍.
그리고 그 순간.
“오, 마이, 갓! 대니! Just two days?”
김태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순간.
이때, 아주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니! 하하하! 좀 더 힘을 내는 게 어떨까요? 저는 제 아내 캐서린을 처음 본 그날! 바로 그날에 청혼을 했고, 또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누구든 진심을 담는다면, 남녀 간의 사랑은 단 하루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Relian Medical Corporation의 CEO 존 러쉬 박사가 갑자기 흥분하며 그렇게 말을 했고.
순식간에 해리 킹의 관심은 존 러쉬 박사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마치 토크쇼의 주제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놀라운 점은 해리 킹의 토크쇼 진행 능력이었다.
퓨어 센서 개발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정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한참 이어지다가.
그러고는 다시 미국 일반 가정들의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인 의료보험 문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라이브쇼 말미에 이르게 되자.
해리 킹은 아주 날카롭게 사회 시스템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면서.
또한, 과학적 발전에 대한 기대감과 찬사를 더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이런 젊은 천재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재앙적인 의료보험이 우리의 목줄을 쪼이고, 또한 지독하게 멍청한 사회 시스템에 의해 삶이 짓눌리고 있으나,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해법을 슬기롭게 찾아 나갈 겁니다. 세상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자유! 지저스! 아메리카! 그리고 지구! 우리의 과학은 늘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그렇게 해리 킹 라이브 쇼가 끝났고.
모두가 웃으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각 미국 신문, 1면 혹은 2면마다 김태풍의 얼굴이 크게 도배가 되었고.
신약 개발자로서 김태풍의 이름이 들어간 신약들 외에도.
김태풍이 기술 개발에 크게 관여했던 호킨스 교수의 뉴스킨 테라피(New Skin Terapy, NST) 회사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이방인 김태풍이 미국 의료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으로 묘사한 기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인즉, Relian Medical Corporation에서 출시한 퓨어 센서 R1의 질병 진단 테스트 비용은.
고작 10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해리 킹 라이브 쇼 직후.
Relian Medical Corporation은 향후 최대 100가지 이상의 질병 진단이 가능한 제품 개발을 목표로 한다고 언론에 발표하자.
퓨어 센서 기술의 가장 핵심 물질 기술을 제공한 천재 김태풍!
그에 대한 미국 언론들과 시민들의 관심은 거의 폭발 직전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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