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실험하는 연구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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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그 회의에 참석하신 한 분 사장님을 통해서 제가 듣기로는… 회장님께서는 이 합병 문제에 대해서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뭐? 그게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그래서요?”
- 다만,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조정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앞서 김신웅 회장은 김선호 대표에게 좋은 기회를 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신웅 회장이 저렇게 반응한 터라, 김태풍은 다소 혼란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예측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혹시, 그 회의 뒤에 회장님을 따로 찾아뵈신 적은 없습니까?”
- 실은, 제가 그 사정을 듣자마자, 바로 면담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쁘다는 핑계 말씀만 주시고, 면담 요청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십니다.
무언가 사정이 복잡하다는 느낌.
김태풍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현재로써 김태풍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일에 대한 미래를 김태풍도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성SD신약!
김태풍의 회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회사.
즉, 김선호 대표의 의지에서부터 출발된 새로운 회사.
그래서 과연 이 회사가 어떤 식으로 일성그룹 권력 구도에 영향을 줄지.
김태풍은 감히 어떤 예측도 할 수가 없었다.
“음. 대표님.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이 고심하시는 만큼, 그게 최악일 수도 있겠고, 또 최선일 수도 있겠지만… 더욱 현실적인 대책을 확보하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일성제약과의 최악의 합병까지 가정해서, 앞으로 고민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음. 그럼 어떻게 말입니까?
“어찌 되었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한 것은 김 대표님입니다.”
- 네. 그래서요?
“만약 거대한 합병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대표님께서는 합당한 보상을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위치가 됩니다. 물론, 좀 억울하시더라도, 차후의 상황을 대비하시는 게, 때로는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음. 그 말씀은 지분 같은 걸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리고 회사에 계속 붙어 있는 게 좋다는 말씀입니까?
“네. 대표님.”
지금 김태풍은 28살 연구자의 시선이 아니라.
회귀 전 인생 경험이 풍부했던 김태풍의 관점에서 조언을 하고 있었고.
다행히 김선호 대표도 김태풍의 말이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네… 감사합니다. 김 소장님. 이렇게 전화를 하고 나니, 아주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지고 있는 그의 말.
- 그럼 어쨌든 메드TX와의 합병이 먼저니까, 이 일부터 잘 매듭지어야겠습니다. 뭐, 메드TX와의 합병 건은, 사장단 회의에서 모두 찬성 의견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물론, 일성제약 쪽과의 합병 전까지, 아직 시간들이 많이 있을 테니까… 그동안 저는 제 개인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김선호 대표는 전화를 끊었고.
김태풍은 좀 더 복잡해진 일성SD신약 상황을 잠시 생각하며,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유추해 보다가.
이내 그 생각들을 접었는데.
이제 그는 드디어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휴! 군대 다녀 왔더니 머리가 좀 멍해지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서둘러 신약 아이템부터 발굴해야 하고… 또 김신웅 회장에게 줄 신약 컨셉도 마무리해야 하는데.’
우선, 김태풍은 김신웅 회장에게 줄 신약 컨셉의 진행 상황부터 점검하기로 결정했다.
이 신약 컨셉은 김태풍이 아이디어를 낸 상태인데.
실질적인 물질합성은 미국 TSP 연구진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현재, 생각보다 합성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김태풍은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음. 이게 합성 테크닉의 차이 때문일까? 그럼 이렇게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차리리 내가 직접 합성을 해 볼까?’
그러고 보면, 현재 자신이 맡고 있는 이노베이션 연구소는 회사 내에서도 좀 더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누구 간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김태풍의 입지는 확실하다.
김태풍은 더 이상 신출내기 신입 연구소장이 아니라는 사실.
어느새 일성SD신약 연구소장 출신이라는, 경력직 연구소장이 되어버린 김태풍.
‘그래. 확실히 누구 눈치 볼 것은 없으니까.’
더군다나 국내 임상 2상 시험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당뇨병 신약 물질의 개발자가 바로 김태풍이라는 사실을.
회사 내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태다.
‘그래. 그냥 하자. 뭐… 이런 방식이 이노베이션 연구소 설립 목적에 어긋난 것도 아니니까.’
즉, 이노베이션 연구소는 새로운 신약 아이디어들을 창출하고, 또한 인큐베이션 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기존 연구소들과 다른 차별성이 있는 게 좋았고.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연구소장이 직접 실험에 참여하는 것이, 어쩌면 크게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연구자들은 그럼에도 이 상황이 무척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내가 급한 거니까. 그럼 대체 무엇부터 시작할까?’
그때부터 김태풍은 실험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자신이 필요한 화학 시약들이 이곳에 있는지.
확인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저기, 김 비서님. 제가 적어놓은 이 화학 시약 목록들. 이것부터 좀 확인해주시겠습니까?”
“네? 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이 시약들. 혹시 기초신약연구1팀이나 다른 연구소에 있는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앞으로 제가 두 달간 기초신약연구2팀 실험공간을 사용할 생각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원들에게도 전달하기 바랍니다.”
이노베이션 연구소 연구소장실에 배속되어 있는 고졸 출신인 김은지 비서.
얼굴이 아주 이쁘장하게 생긴 그녀는 바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네? 그럼 혹시, 소장님께서 저번에 새로 세팅한 M214호 실험실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왜요?”
“저도 실험하려고요.”
“네?”
한 번씩 말투가 톡톡 튀고 있는 김은지 비서.
김은지 비서는, 아주 예의 바르게 김태풍의 일을 도왔던 일성SD신약의 강지연 비서와 좀 달랐다.
아무래도 상사에 대한 조심성과 이해가 좀 부족한 김은지 비서.
메드TX가 용인 내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하다 보니.
결국, 강지연 비서처럼 숙련된 비서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메드TX 연구직종의 경우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인데.
요즘 메드TX가 워낙 이름 빨을 날리다 보니까.
현재는 중견 제약 기업 연구소에 준하는 경쟁률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 시약 목록부터 잘 확인해주시고. 혹시 없는 게 있으면, 최대한 빨리 주문해서, 제가 받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당부한 뒤.
곧이어 김태풍은 기초신약연구1팀 남상훈 팀장을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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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남 팀장님. 뭐, 남 팀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이노베이션 연구소는 인원이 좀 많이 부족합니다.”
김태풍의 말에 바로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고 있는 남상훈 팀장.
“네. 저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희 연구팀 역시 인원이 좀 부족합니다.”
37살의 나이라, 아주 젊은 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상훈 팀장.
그는 6년 전, 국내 거점 국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쳤고.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후연구원(포닥) 과정을 거친 연구자다.
원래 교수 임용을 원했으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바로 노선을 바꾸어 회사로 넘어온 케이스였는데.
아직 신출내기 팀장이었다.
팀장 경력은 고작 2년.
그래서 현재 팀장을 맡고 있지만, 그럼에도 직급은 차장급이었다.
“그래서 연구원 충원을 위해서 조만간 상반기 공채가 진행될 겁니다. 물론, 적어도 5월, 6월쯤에 새 사람들이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연구소가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 이야기는 좀 있다고 하도록 하고. 혹시 1팀에서는 몇 명의 인원이 더 필요합니까?”
김태풍이 그렇게 묻자.
남상훈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사정 설명을 했다.
“사실, 저희 1팀 구성이, 좀 기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개발본부 학술팀에서 일하던 직원 셋이 저희 팀에 넘어온 건데. 그러다 보니까, 실험연구 수행은 고작 연구원 다섯 명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뭔가 일을 액티브하게 진행하는 게 많이 힘든 상황이라….”
“그럼 대체 몇 명이 더 필요합니까?”
“소장님. 가장 시급한 게 바로 박사급입니다. 저희 팀에선 절 제외하고, 아직 박사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급 2명, 석사급 1명. 되도록 경력직이면 더 좋겠지만, 정 안 된다면 신입도 괜찮습니다. 최소 이 정도 인원이 꼭 필요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제가 사장님께 건의해 보겠습니다. 참! 그리고 아까, 잠깐 이야기도 했지만, 새 인원이 확충되는 동안, 음! 연구2팀 공간에서, 제가 따로 실험을 진행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네? 소장님께서 직접요?”
흠칫 놀라고 있는 남상훈 팀장.
그가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연구소 내 소장이나 팀장은 실험을 직접 수행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매니징 역할을 해야 하는데.
특히, 연구소장은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서.
연구소 전반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며.
또한, 연구 경영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한편, 연구팀장은 하위 팀원들이 수행하고 있는 각 프로젝트들을 총괄적으로 감독해야 하고, 또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필드에서 직접 실험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이공계 교수들 역시 직접 실험을 수행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의욕적인 젊은 교수들이나 혹은 대학원생 숫자가 부족해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실험을 해야 하는 교수들도 있지만.
대다수 이공계 교수들은 직접 실험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거나.
혹은 각종 연구 프로젝트들을 총괄적으로 감독하면서.
학생 교육과 연구지도에 집중하는 쪽이다.
물론 이런 이공계 교수들은 자신들이 학생이었을 때, 밤새워 실험했던 경험들이 있어서.
학생 지도 자체가 훨씬 더 정교해질 수밖에 없고.
또한, 상당히 전문적인 실험 교육도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일반인들이 오해하게 되는 부분들 중의 하나.
이렇게 실험도 직접 하지 않는다면.
이공계 교수들이야말로 진짜 편안한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연구과제 발굴을 위한 논문 분석 및 특허 분석.
담당 대학원생들에 대한 전공 교육과 실험지도.
학부생 전공강의 및 진로·취업 상담.
학교 내 다양한 행정 업무 지원.
수많은 교내 회의 참여.
대학 입시 면접 참여.
그리고 이 외에도, 학회참여, 정부 혹은 민간 기관 위원회 참여 등, 각종 대외활동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연구하는 이공계 교수들은 할 일이 태산인 것이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다 보니.
김태풍이 직접 실험을 하겠다는 말에.
남상훈 팀장은 깜짝 놀라고 있었는데.
그러나 연구소장이 직접 솔선수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남상훈 팀장은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음.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연구소가 갑자기 설립되어서, 사실 이것저것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연구소가 갑자기 설립된 것.
그건 바로 김태풍 때문이었다.
아마 이 연구소 설립이 추진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김태풍은 현 신약연구소에 배속되었을 거고.
또한, 최윤영 연구소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연구소가 새로 설립된 터라, 김태풍은 여러모로 운신하기가 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주일 뒤.
드디어 김태풍은 직접 실험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제 김태풍이 개발하려는 것은 바로, 파킨슨병 치료를 위한 신약 물질이었다.
‘흠. 이건 좀 재밌는 접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 당뇨병 신약의 또 다른 면모. 하하. 이걸 내가 부각한다면, 기존 신약 연구도 겸하면서… 또다른 뭔가 획기적인 것들을 도출할 수 있을 거야.’
즉, 기존 신약 연구, 현재 메드TX가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당뇨병 신약과 관련하여, 김태풍은 보강 연구를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뭔가를 도출할 생각인 것이다.
물론, 아주 영리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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