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논산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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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어요. 근데 왜 이렇게 머리를 짧게 잘라요?”
논산훈련소 입소를 어느덧 하루 앞으로 앞두게 되자.
일요일 오후 늦은 시각.
김태풍은 집 근처 미용실로 가서, 머리를 아주 짧게 깎게 되었다.
오래전, 중고등학교 때.
그때 이후, 이렇게 짧은 머리를 한 적은 없었는데.
그래서 미용실 큰 거울 속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군대 가려고요.”
이때, 김태풍은 여자 미용사의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런 대답 자체가 무척 어색하게만 느껴져,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나이. 어느덧 28살.
이런 늦은 나이에, 자신은 군대에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씩 웃으며.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김태풍.
그는 커트 비용을 지불한 뒤, 곧장 미용실 밖으로 나왔고.
그길로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귀와 얼굴이 무척 시리기만 하다.
아무래도 겨울의 끝자락인 2월의 스산한 추위.
그리고 자신의 짧아진 머리 때문에 더 추위를 타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곧 봄은 올 테지만.
향후 꽃샘추위까지 생각한다면.
결국, 아직은 미래의 따뜻한 봄을 상상하기에 이른 시기인 것이다.
‘이거 괜히 싱숭생숭하네. 현역 입대자들은 더 기분이 이상할 텐데. 근데 앞으로 4주를 어떻게 버티지?’
우선 아주 답답할 것만 같았다.
특히, 4주간 꽉 막힌 곳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
그건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태풍은 모처럼 일요일을, 일요일답게 보낼 생각으로, 다시 아파트 밖으로 나왔고.
그 길로 곧장 집 근처 찜질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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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
찜질방의 모습.
아무래도 주말이라서 그런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찜질방에 모여 있는데.
특히, 찜질방 중앙에 놓인 TV.
어느 인기있는 드라마가 TV에서 재방 중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을 하고서 앉아 있거나 혹은 누워있는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느라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 어머머. 어쩜 저렇게 꼬이지? 저런 식으로 겹사돈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 어떻게 되긴! 처형님이 제수씨가 되는 거고, 형수님이 처제가 되는 거잖아.
- 어머. 진짜 미쳤어. 그럼 사돈 양반들끼리는 또 어떻게 되는 거야?
- 그러니까 재밌잖아. 경수 엄마. 저 드라마 작가가 누군지 알아? 강남 인어아가씨 알지?
- 아! 인어아가씨? 나도 그거 재밌게 봤는데.
- 그래. 그 드라마 작가라잖아.
- 어머. 진짜?
눈이 동그래지고 있는 경수 엄마.
그러고 보면,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막장 전개의 가족 드라마였다.
잔잔하면서도 또한 자극적이라, 아주머니들은 이 드라마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아내와 함께 모처럼 찜질방을 찾은 아저씨들.
그들 역시 자연스레 이 드라마에 한껏 몰입하고 있었다.
‘하긴, 막장이라도 재밌으면 그만이지. 뭐, 아직 이 시대에 다양한 드라마 포맷들을 기대하긴 힘들겠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젊고 활기찬 연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는데.
특히, 차가운 식혜에 구운 달걀을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있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자.
김태풍은 문득 자신의 옆구리가 한층 더 시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휴. 밤에 전화나 해야겠어.’
그 순간,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케이트 코니의 얼굴.
물론, 미국과의 시차 때문에, 지금 당장 전화하기는 힘들다.
‘뭐, 그래도, 1주일에 한 번씩 꼭꼭 통화는 하는 거니까, 내가 4주 훈련 받으러 가는 거. 그건 꼭 알려줘야겠어.’
아직 케이트 코니와의 관계는 좀 애매했다.
조금 더 가까워진 친구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더 진전이 없어, 그게 좀 고민스러운 김태풍.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게르마늄 맥반석 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벌떡 일어났고.
이번에는 사람들이 좀 더 적게 모여 있는 불한증막에서 들어가, 땀을 쭉 빼고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림욕 방에 들어가, 베개를 베고 누운 김태풍.
‘휴. 개운하긴 하네.’
이렇게 누워 있으니.
그야말로 세상만사가 한없이 조용해지고.
일요일 하루는 무척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하하. 그래. 이것도 기분은 좋네.’
살며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김태풍.
그는 거기서 한동안 단잠을 잔 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저녁 무렵.
김태풍은 자신의 랩 동기들인 배진수, 안성훈, 최기호에게 각각 전화를 했다.
아직 한국연구기술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들 역시 내일 논산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동병상련 같은 느낌도 드는 것이었다.
- 야. 김태풍! 너도 좀 싱숭생숭하냐? 갑자기 전화를 다 주고? 야! 나, 죽겠다. 은근히 난 부담스러운데, 이게 겨우 4주 훈련이라고…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우리 엄마는, 그냥 얼른 다녀오라고 그러더라. 아들 군대 가면, 다들 우신다던데. 그냥 쌩쌩해! 그런 것 하나도 없고!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최기호.
- 오! 김태풍! 너, 잘 지내냐? 하하. 요즘 회사 생활은 잘하고? 야! 너, 회사 옮겼다며? 아? 나 말이야? 지금 여친이랑 밥 먹고 있지. 하하. 그럼 우리 논산에서 곧 보겠네? 야, 형들 말로는, 전문연구요원들끼리 따로 소대가 만들어진다고 하더라. 그럼 우리 논산에서 보자.
그렇게 아주 씩씩한 모습인 안성훈.
- 휴우. 넌 어떠냐? 난 걱정이 태산이다. 휴우. 형들 말로는, 4주가 1년 같다던데…. 그리고 요즘 실험도 잘 안 되고, 이것저것 미치겠어. 교수님은 날마다 쪼고만 있고…. 휴. 암튼, 우리 논산에서 보자.
그리고 풀이 죽어있는 배진수까지.
그렇게 전화 통화를 마친 김태풍은 이제 부모님께도 잠깐 전화를 한 뒤.
그리고 밤늦은 시각.
케이트 코니와 잠깐 통화도 했다.
물론 케이트 코니는 김태풍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4주간 기초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는 한국의 병역 시스템.
그런 시스템이 그녀에게는 무척 생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럼 거기서 전화할 수 있으면 또 전화해요.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김태풍은 웃으며, 자신의 상황을 다시 설명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훈련소에 있는 동안 국제전화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녀와의 통화를 마친 뒤.
김태풍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김태풍은 논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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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네. 줄을 맞추어 서십시오.”
“이쪽입니다. 이쪽 뒤에 서시면 됩니다.”
“거수경례하는 요령 알려드릴 테니까, 절 잘 보십시오.”
한편, 입소식 행사 직전.
조교들의 무척 친절한 모습 때문인지.
우려와 달리,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였던 빨간 모자를 쓴 조교들.
그러나 입소식 행사가 어느덧 끝이 나자마자.
마치 양 떼를 몰 듯, 어리바리한 입소 장정들을 사각 건물 사이로 데려온 조교들.
그리고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조교들은 완전히 돌변해 버렸다.
“야!! 야!! 너 이 새끼!! 눈깔 안 깔아!! 정신 못 차려?”
“야!! 넌 오와 열도 몰라? 이 새끼가 죽을라고!”
“똑바로 해! 똑바로!”
“이 새끼들, 여기 군대야!! 군대!!”
“설마 여기 놀러 온 사람들이 있나? 야! 거기 너! 열외!!”
“이 새끼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야! 전문연구요원들! 특히 조심해. 정신 차려!”
“현역!! 이 새끼들!! 너희들 여기서 못 나가!! 더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그 순간, 표정들이 바짝 굳어지고 있는 입소 장정들.
여기에는 나이가 많은 전문연구요원들도 있었지만.
20대 초반의 현역들도 섞여 있는 상태다.
사실, 4주 과정만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는 전문연구요원들과 달리.
앞으로 긴 시간 동안 군 생활을 해야 하는 현역 입소자들.
그들의 표정은 조교들의 돌변과 함께, 순식간에 납덩이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 입소식,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탠드 쪽에서 자신들을 바라봤던 부모, 형제, 친구, 지인들.
그들의 존재감이 아직도 생생한데.
하지만 약간의 거리 차이로, 이제 자신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거고.
또한, 이 낯선 환경에.
저절로 두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이런 입소 장정들 중에는 전문연구요원들 외에도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바로 경찰대를 졸업한 사람들.
이들 경찰대 출신들은 이 논산훈련소에서 향후 4주간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한 뒤.
퇴소하게 되는데.
이후 경찰교육원에서 8주간 전술 지휘과정 교육을 받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전경대 혹은 기동대 소대장으로서 병역 의무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밑에 위치한 현역 훈련병들에 비하면, 그나마 이쪽도 훨씬 더 상황이 좋은 게 사실이었다.
여하튼 그런 장정들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
김태풍은 잠시 후, 조교들의 통솔을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조교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신의 몸에 맞는 군복으로 갈아입었고.
그리고 그 사이,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더니.
어느덧 밤늦은 시각.
조용히 불침번을 서기도 했다.
‘휴우. 역시 군대는 군대야. 두 번째 오는 거지만. 역시 여긴 답이 없어.’
그러고 보면, 김태풍은 이 훈련소 입소가 벌써 두 번째다.
회귀 전, 4주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는데.
다시 한번 그는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보통 군 제대를 한 뒤, 혹은 훈련소 퇴소(병특 기준)를 한 뒤.
때때로 사람들은 악몽을 꾸게 되는데.
그게 바로 훈련소 재입소 꿈이다.
그러나 김태풍은 그런 꿈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서.
다시 한번 논산훈련소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무슨 훈련을 받을지 대략 생각이 나서.
심적으로 편한 게 사실이었고.
주변 훈련병들과 비교하면 더 여유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제 실질적인 기초군사 훈련을 받게 될 소대로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간에 비만 소대로 편입될 훈련병들은 한쪽으로 열외가 되었고.
그 뒤, 잠깐의 행군 끝에.
앞으로 4주간 머물 내무반에 김태풍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입소식 때 잠깐 보았던 최기호, 안성훈, 배진수.
그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곳은 군대라서, 눈인사만 하고서.
서로 제대로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자! 다들 잘 듣습니다! 여긴 4주 캠핑장이 아닙니다! 앞으로 조교 지시에 불응하는 사람! 그 사람은 즉시 퇴소명령을 받게 될 겁니다! 재입소하려면, 얼마나 시간 낭비인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나이 어린 조교.
그는 처음에는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그렇듯, 일반 현역병들과는 좀 다른 풍경.
물론,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들과 개인용품을 소포 박스에 넣어서 집으로 보내는 현역들과 달리.
전문연구요원들은 자신들의 소지품들을 배낭에 넣어 담은 뒤, 나중에 퇴소할 때 그걸 다시 돌려받는 식이다.
그래서 나이어린 조교들이 이런 전문연구요원들을 위협하는 말은 바로 퇴소 명령!
대다수 전문연구요원들은 회사 소속 연구원들이기 때문에.
기관장의 허락을 받고서 입소한 상태인데.
그런데 ‘퇴소’를 당하게 된다면, 개인적 위신에 큰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걸 노리고서.
조교들은 현역과 다른 신분인 전문연구요원들의 기강을 잡는 식이었는데.
어느덧 2회차 훈련을 하게 된 김태풍은 그저 속으로 웃기만 했다.
‘상관없어. 뭐든 상관없어. 휴! 그저 시간만… 빨리 가거라.’
그렇듯 김태풍의 간절한 염원대로.
시간은 아주 느린 듯하면서도, 또한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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