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만남(1)
<23> 1998년, 그녀와의 만남
1998년 9월 1일 화요일.
어느덧 가을을 예고하는 단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일성SD신약 혁신신약 연구소.
이 연구소 소속의 신약연구2팀.
이 팀에 박사학위과정을 갓 마친 29살의 김준성 박사가 입사를 했다.
사실, 김태풍이 연구소장으로 부임한 이후로.
혁신신약 연구소는 아주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중에 우수 인재 확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20대 후반의 젊은 박사 김준성은 그런 변화의 시기에 일성SD신약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입사 첫날.
김준성 박사는 바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아직 30대가 아니라, 29살, 즉 20대라는 나이에 박사학위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고.
그래서 나름 자존심도 강해졌는데.
입사 첫날 만나게 된 김태풍 연구소장.
그를 보자마자,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입사 최종 면접 때 김태풍을 본 적이 있다.
젊은 김선호 대표의 우측에 앉아 있었던 어떤 남자.
그러나 나이가 지긋한 최경도 전무, 강재현 전무, 장태윤 전무 등도 그 최종 면접 장소에 참석한 터라.
무척 떨렸던 김준성 박사는 신문에서 보았던 김선호 대표를 제외하고는.
대체 누구 누군지.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상 입사를 하고 나자, 다시 만나게 된 연구소장 김태풍.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그와 악수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설마 그가 연구소장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갑습니다. 김준성 박사님! 하하! 회사 연구소는 학교 실험실과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뭐, 처음에는 회사 조직에 적응하는 데 집중해주시고, 회사 전산망과 결재 시스템 쪽도 최대한 빨리 익숙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그리고 또 부드러운 말투로 설명을 이어가는 김태풍 연구소장.
“오늘 중으로 전병준 팀장님이 아마 이야기하겠지만, 연구소 전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략 두 달 정도는 실험보다는, 앞으로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 신약 분야들에 대해서 한번 점검해 보세요. 그 와중에 좋은 테마가 떠오른다면, 바로 기술 동향 보고서부터 작성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신약 개발 아이디어를 직접 결재 시스템을 통해 저한테 품의해도 됩니다.”
그렇게 자상하게 설명을 마치는 김태풍.
그런데 김준성 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 나이에 일성그룹 계열사 연구소장이 될 수 있지?
그냥 얼굴만 봐도 딱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연구소장.
“하하. 아마 첫날이라 모든 게 낯설 겁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잘 배워나가시면 됩니다.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죠.”
김태풍은 웃으며 다시 악수를 청했고.
김준성 박사는 얼떨결에 김태풍과 다시 악수했다.
그리고 잠시 뒤.
신약연구2팀으로 돌아온 김준성 박사.
너무나도 젊은 연구소장을 보았기 때문인지.
여전히 얼떨떨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근무할 부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준성씨! 혹시 시간 있으세요?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김준성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그쪽을 쳐다봤다.
최현지 연구원.
경력직 연구원인 그녀는 경력 6년차다.
작년에 일성SD신약으로 이직해 온 그녀는 현재 선임연구원 직책으로 직급은 과장급이었다.
비록 석사학위만 있지만, 김준성 박사보다 2살이나 많았고.
그래서 김준성 박사도 좀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제가 지금 심혈관계 질환 치료제 분야 쪽, 미국 특허들을 분석하고 있는 중인데, 이 특허 검색하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네?”
그 순간, 김준성 박사는 당황하며 되묻고 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최현지는 바로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김준성 박사를 쳐다봤다.
“혹시 특허 검색 안 해 봤죠?”
“네. 아, 딱히….”
“음. 좋아요, 그럼! 제가 가르쳐드릴 테니까, 제가 한번 하는 걸 보고, 따라서 검색해 보세요.”
그러면서 최현지는 특허 검색 방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키워드들을 집어넣은 뒤, 쭈르르 검색되는 특허들.
이들 중에서 어떤 특허들을 더 유심히 봐야 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들, 특허 청구항들을 어떻게 이해할지 등등.
이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최현지의 설명을 들은 김준성 박사.
그는 곧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아, 특허 검색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할 때.
최현지의 옆으로 몇몇 동료들이 다가왔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각자 개인 컵에 든 믹스 커피를 들고서 연구소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시작되는 대화.
“어때? 저 사람?”
“아? 김준성씨? 뭐, 박사라고 다를 게 있어요?”
“그치? 회사에 처음 들어오면, 다들 어리바리하다니까. 현지씨가 앞으로 힘들겠네? 괜히 사수를 맡아서?”
“어쩌겠어요? 팀장님이 도와주라고 그러는데.”
“그래도 박사들. 그 사람들은 조금만 지나면 뭐든 잘하잖아?”
“풉! 잘하긴 개뿔! 정훈 선배!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회사에서는, 박사들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아세요?”
“어땠는데?”
“거긴, 그냥 석사들이 다 알아서, 제품 개발 아이디어까지 냈다니까요. 제 생각엔 기업 연구소 쪽은 박사가 거의 필요가 없어요. 석사 연구원만 해도 충분하다고, 전 생각해요.”
“흠! 하긴 좀 그렇긴 하지. 회사 연구소가 뭐, 학교도 아니고…. 학문적 개념은 확실히 떨어지니까, 박사학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지. 근데, 석사는 뼈 빠지게 일해도, 팀장 되기가 힘들잖아. 박사는 뭘 조금만 해도, 초고속으로 승진해 버리고. 쩝! 나도 나중에 파트타임 과정으로 박사나 받아야겠어.”
“음. 근데 정훈 선배! 우리 소장님은 좀 다르지 않나요?”
“아. 김태풍 소장님?”
“네.”
“그분이야 진짜 대박이지. 와! 박사학위 마치고, 바로 연구소 소장부터 시작했잖아. 그런데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게, 어떻게 신출내기 박사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어. 지금 우리 연구소 시스템도 김 소장님이 싹 다 바꿔놨잖아?”
“맞아요. 저도 그 시스템은 확실히 마음에 들어요. 우리도 잘만하면, 곧바로 PL(프로젝터 리더)이 될 수도 있고. 훗!”
“그래서 내 생각인데, 김 소장님 나이가 20대가 아닌 것 같아. 내 생각에는 30대 혹은 40대가 아닐까? 얼굴이 동안일 수도 있잖아? 그럼 딱 논리가 맞아떨어지게 되고.”
“음. 그러게요. 그건 진짜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치만, 신문기사에서 나온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수군거리면서 그들은 연구소의 화제 김태풍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김준성 박사 같은 신출내기 박사들이 회사 연구소에 첫 입사를 하게 되면.
기존 연구원들의 눈에는 모든 면이 미숙해 보일 수밖에 없다.
즉, 학교와 현장과의 괴리 때문!
특히, 이 무렵, 신출내기 박사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기술이전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을 테고.
그러다 보니, 특허 쪽 외에도 제품 개발 실무 부분 역시 무척 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주로 학교에서는 다양한 논문들을 읽고 연구하면서.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학술 논문 발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특허권 확보를 통한 제품 개발!
그런데 신임 연구소장 김태풍.
그는 그런 부분들에 있어서도, 놀랍게도 현직 팀장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모습이었고.
더 나아가, 회사 연구소 조직과 시스템마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겉치레가 아니었다.
실력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시킨 김태풍.
그래서, 이제 연구소 내에서 그 어떤 누구도.
감히 김태풍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었다.
##
“김준성씨! 지금 뭣 합니까? 오후 3시가 거의 다 된 거, 몰라요?”
어느덧 시간은 흘러.
오후 3시를 코앞에 둔, 오후 2시 57분.
특허 명세서들을 읽으며 정신없이 분석을 하고 있던 김준성 박사.
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전병준 팀장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벌떡 일어난 김준성 박사.
“네? 팀장님? 오후 3시는 왜?”
“음. 이보세요. 김준성 박사! 입사 첫날이라 이해하는데, 아까 내가 아침에 이야기했죠? 오늘 3시에 박사급 회의가 있다고! 첫 입사 날이라고 해도 얄짤없이 무조건 참석해야 돼요.”
“아. 네! 팀장님!”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 김준성 박사.
그는 부랴부랴 회사 다이어리를 손에 들었다.
그러자 전 팀장은 곧바로 앞장을 섰고.
또 다른 2명의 박사들도 전 팀장의 뒤를 바로 따라붙었다.
이미 책임연구원 신분에 직급도 차장급인 2명의 박사들.
신출내기인 김준성 박사로서는 아직 친해지는 게 무척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김준성 박사는 조용히 그들을 뒤따라갔고.
잠시 후, 회사 내, 대형 회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그곳에는 40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그래서 김준성 박사는 얼른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혁신신약 연구소 소장 김태풍이 회의실 문을 열고서 나타났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깔끔한 정장 차림인 김태풍.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이때, 가장 상석 자리에 앉고 있다.
이런 박사급 회의는 매주 한 번씩 열리게 되는 회의인데.
김태풍이 주도하고 있는 예타(예비타당성) TFT의 1차 회의를 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때, 각종 신약 아이디어들을 신랄하게 파헤치는 작업이 이 회의에서 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또한, 새로운 사실과 지식들을 공유하기도 하고.
세계 각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약 정보들을 차례로 분석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1차 TFT 분석 회의에서, 특정 아이디어 건이 통과하게 되면.
이후, 비정기적으로 열리게 되는 2차 분석 회의에서, 다시 한번 그 아이디어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진행되게 되는데.
이런 2차 회의는 책임연구원급 이상이 참석하는 회의로써, 석사학위자, 박사학위자 관계없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런 회의의 참석자가 대체로 박사학위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고.
즉, 자연스레 일반 석사학위자들은 이런 회의에 빠지게 된다는 맹점이 있었다.
그래서 김태풍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1차 회의 참석자 조건에 대해서, 한 가지 예외 사항을 뒀다.
다시 말해서, 경력 3년차 이상의 석사학위자들!
그들은 누구나 원한다면.
1차 회의에 대해, 의무사항이 아니라 선택 사항으로 참석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단 것이다.
그러나 TFT가 오픈된 뒤, 초반 여러 회의들에 참석했던 석사학위자들은 이내 경악하며.
다시는 그 회의 참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참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오늘부터 다시 강행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운을 떼고 있는 김태풍.
그리고 자신을 또렷하게 쳐다보고 있는 수십 개의 시선들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그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재 우리 연구소에서는 2개의 신약 프로젝트와 1개의 공동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회사의 운명을 이 3개의 프로젝트에 모두 맡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시도를 해야 하고, 또한 더 많은 데이터들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지난번 회의 때도 말씀드렸지만, 올해 연말까지의 목표! 총 10개의 프로젝트를 앞으로 의욕적으로 가동하는 겁니다.”
즉, 10개의 신약 개발 프로젝트의 가동.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신약 개발이라서.
팀장급 이하 연구원들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출된 아이디어 쪽에 문제가 있다면, 각자 일을 분담해서 다시 새롭게 기획을 하면 됩니다. 그래도 컨셉이 부족하다면, 거기서 안주할 게 아니라, 반드시 외부에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누구든 좋습니다! 어떤 대학 연구소에서든, 또 어떤 곳이든 간에, 만약 좋은 연구결과만 있다면, 우리 회사 차원에서 언제든 라이센스 인(licence-in, 기술을 사는 것) 작업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태풍은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들을 이어 나갔다.
이때 멍하니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던 김준성 박사.
그러나 한순간 정신을 차리며, 서둘러 김태풍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사실, 회의 초반에, 늘 김태풍은 산더미 같은 숙제들을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분하고 있었고.
그 숙제들은 모두에게 지독히 머리가 아픈 것들이었다.
한편, 자신보다도 나이가 더 적은 것 같은 김태풍 연구소장.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의를 아주 능숙하게 진행하고 있는 그의 모습
한편으로는 조용한 카리스마까지 뿜어나오는 모습인데.
이제 김준성 박사는.
단 하루 만에 김태풍을 바라보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