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33화 (33/153)

49-어쩌면 재벌이 될 수도 있는 길(1)

<17> 어쩌면 재벌이 될 수도 있는 길

“야. 배진수! 최기호! 안성훈! 정말 오랜만이다! 하하!”

1997년 1월 13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한 김태풍.

그는 그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며 피로를 풀었고.

부모님께 현금 2천만 원을, 귀국 기념 선물로 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로 학교로 복귀한 김태풍.

가장 먼저 기숙사 방을 새로 배정받았고.

그 뒤 곧장 랩에 출근했는데.

이때, 자신을 무척 반겨주고 있는 동기들과 드디어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이다.

“야! 김태풍! 너 미국물 좀 먹었다고, 얼굴이 아주 훤해졌는데?”

“왜 그렇게 깔끔해졌냐?”

“우와! 어디서 산 외투냐?”

“좋겠다. 이 자식! 난 언제 미국물 한번 먹어보냐?”

“시차 적응은 할 만해?”

“미국은 뭐가 달라? 때깔부터 완전히 달라졌잖아.”

반 농담으로 주고받는 인사들.

그러고 보면, 눈앞의 안성훈, 배진수, 최기호, 이 녀석들은 어디 하나 변한 게 거의 없다.

하긴, 6개월 만에 뭔가 변한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근데, 태풍아! 민수형 말이야. 박사 디펜스 무사히 끝냈어.”

그러고 보니, 랩짱 강민수 선배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작년 12월 초순, 박사학위 디펜스(심사)를 무사히 마쳤고.

얼마 전, 두경그룹 계열사인 두경케미칼 연구소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 랩을 나가, 회사 연수원에 들어간 상태.

따라서 강민수 선배를 제외한 다른 선배들, 후배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고.

한편, 김태풍은 자신이 갖고 온 작은 선물들(초콜릿, 영양제, 가죽 장갑, 손수건, 양말 등등)을 랩원들에게 뿌린 뒤.

이제 박한식 교수의 방으로 들어가.

그와 잠깐 대화를 나누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태풍아! 조금 전, 학과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어. 지금 당장 내려오라는데?”

“어? 알았어!”

곧장 그 길로, 학과 사무실로 내려간 김태풍.

그는 병역특례와 관련된 행정 처리(복귀)를 한 것 외에도.

미국 유타대에서 틈틈이 이수했던 대학원 과목들에 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 일들을 모두 마친 뒤.

다시 랩으로 돌아와, 또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된 김태풍.

그리고 갑자기 든 생각.

‘맞아! 현상이 형, 현중이 형도 있었지.’

김태풍은 슬쩍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야간조들답게, 이 시각이라면.

아마 기숙사에서 정신없이 꿀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이걸 보면, 내가 확실히 랩에 복귀한 게 맞아.’

조현상, 조현중, 두 야간조가 있는 랩.

그리고 동기 녀석들의 힘찬 목소리들.

또한, 어느덧 실험 실력이 무르익은 후배들이 각자 쏟아내고 있는 크고 작은 목소리들.

여긴 분명히 한국연구기술원 실험실이 맞았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힘껏 기지개를 켜면서.

뻣뻣했던 어깨 근육을 힘껏 풀어내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 보면, 곧 3월이 되면.

김태풍도 이제 박사과정 2년차가 된다.

회귀한 뒤, 제법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고.

김태풍의 실험실 짬밥이 제법 높아진 상태다.

“야! 김태풍. 지금 뭐 하냐? 가자. 커피나 마시러 가자.”

잠깐 남모를 감상에 젖어 있던 김태풍.

그러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갑자기 나타난 안성훈 때문이다.

건물 밖으로 나가서 커피를 마실 생각인지.

지금 안성훈은 새하얀 오리털 잠바까지 챙겨 입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잠바의 하얀 색깔 때문인지, 안성훈의 얼굴은 훨씬 더 환해진 모습.

“그럼 기호랑 진수는?”

“그 녀석들도 금방 내려올 거래. 동물실험실에서 쥐 잡고 있을 텐데, 금방 끝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바로 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는데.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던 중, 김태풍은 불쑥 안성훈에 질문을 던졌다.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

출국 전, 안성훈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김태풍.

그 일이 문득 떠올라, 김태풍은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안성훈은 씨익 웃는다.

“조만간 200일.”

“와! 벌써?”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대략 그 정도의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200일을 운운하는 걸 보면.

안성훈은 지금 여자친구와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근데, 나 좀 달라 보이지 않아? 좀 더 멋있어진 거. 하하! 내 친구들도 나한테 그 말을 많이 하던데.”

“야! 안성훈. 너 혹시 여자친구 있다고 자랑하는 거냐?”

“하하.”

“인마, 너 옷 스타일이 이전보다 더 밝아진 건 맞네.”

“그치? 근데 말이야. 너도 확실히 달라졌어.”

“뭐? 내가 뭘?”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내려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계속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하. 이 자식이 누굴 속이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난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야! 김태풍! 유타대에 엄청난 미녀 박사가 있다면서? 그냥 이실직고 말해. 너 그 여자랑 무슨 썸씽 있었어?”

“뭐?”

그 순간, 두 눈이 갑자기 동그래지고 있는 김태풍.

유타대 미녀 박사?

혹시 설마?

“어쭈! 계속 모른 척하기야? 그럼 내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까? 일본 출신 미녀 박사!”

맙소사!

안성훈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김태풍은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안성훈은 이시하라 카스미 박사에 대해서, 지금 말하고 있었다.

“인마! 내가 다 알아. 내가 완전 마당발이잖아. 그러니까 내 앞에서, 오리발 내밀 생각, 하지도 말라니까.”

확실히 무언가 알고 있다는 표정을 보이며, 계속 말을 잇고 있는 안성훈.

“내 중학교 동창 하나가 지금 유타대 학부를 다니고 있어. 넌 그거 몰랐지?”

“야. 근데, 왜 그걸 이제서야 이야기해? 진작 말했으면, 거기서 인사나 하고 지낼걸.”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자판기 커피를 뽑으면서도.

그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 녀석을 최근에 만났어.”

“뭐? 최근에?”

“그래. 작년 연말! 중학교 동창회 겸, 망년회(송년회)를 했거든. 그때, 진짜 오랜만에 본 거야. 웬걸! 그 자식이 유타대에 다닌다고 하더라고. 크리스마스 시즌 겸, 미국 겨울 방학(winter break) 기간이라 잠깐 귀국했다는데. 네 이야기를 한번 해 봤어. 근데, 그 자식이 전화를 몇 번 돌리더니, 네 정보를 바로 갖고 오더라.”

“내 정보를?”

“야! 미국이라고 해서, 뭐 별거냐? 그 바닥이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좁다며?”

“아. 그거야….”

“야. 눈치 못 챘어? 그 녀석도 순 마당발이야.”

그 말에 김태풍은 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마당발 안성훈의 친구.

그렇다면, 정말 그 사람도 마당발(즉, 훗날 말로, 인싸)일 가능성이 크다.

서로 비슷한 성향이어야, 친구가 되는 법인데.

물론, 이런 특수한 상황, 랩에서의 친구들은 좀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인마! 너 이제 진짜 거짓말 못 하게 된 거, 알겠지? 김태풍! 몽땅 다 불어! 얼마나 진행된 거냐? 지금 그 여자랑 연락하고 있지?”

“야. 대체 그게 무슨 말인데? 내가 왜….”

“아우! 속 터져. 내가 꼭 내 입으로 말해야 되겠냐? 네 여친! 일본인 여자 박사! 진짜 쭉쭉빵빵에 엄청나게 이쁘다던데? 너랑 밥 같이 먹는 거, 공항까지 라이딩해주는 거, 같이 캠퍼스 산책하는 거, 걔 친구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이 쫙 퍼졌다던데?”

그 순간, 두 눈이 다시 동그래지고 있는 김태풍.

세상에, 비밀이라는 건 정말 없는 걸까.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소문으로 퍼질 수가 있단 말인가.

휴! 그러니까, 세상이 좁다는 말을 하게 되는 거겠지.

“성훈아. 그거야…. 그냥, 카스미 박사는, 이쪽 더어크(Derck)사 연구원이라서, 나랑 같이 공동 연구도 진행해야 하는 입장이고….”

“인마! 누굴 계속 속이려고 그래?”

“무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인마! 내 친구가 유타대 내에서도 좀 노는 부류야. 걔 친구들이 본 거라면, 확실히 맞아. 자꾸 빼지 말고, 그냥 말해. 그 여자 박사랑 사귀는 거 맞지? 이제 완전히 국제적으로?”

“휴!”

결국, 김태풍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시하라 카스미 박사.

그녀와 좀 묘한 추억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마도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좀 묘한 분위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일이….

‘몰라. 모르겠어.’

결국, 김태풍은 다시 한번 더 한숨을 내쉰 뒤, 정색하며 입을 연다.

“잠깐만, 성훈아.”

“야! 김태풍! 이제야 이실직고할 용기가 났냐? 자식,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여자친구 사귀는 일이 뭐 부끄러운 일이냐?”

“잘 들어. 유타대 카스미 박사 말이야.”

“그래. 뭐?”

“그 박사한텐… 음. 그게, 좀 애매한 상황인데, 휴! 할 수 없지. 네가 괜히 오해할 필요가 없잖아? 내가 진짜 사실을 이야기한다면, 그 박사한테, 흠. 일본인 약혼자가 있어. 그러니까, 나랑 아무 관계가 없는 거고.”

결국, 김태풍은 그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는데….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안성훈은 정말 크게 놀란 듯.

두 눈은 갑자기 찢어질 듯 커지고 있었다.

정말 그 사실은 안성훈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때부터 허둥거리기 시작하는 안성훈의 모습.

그는 확실히 김태풍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 생뚱맞게 일본인 약혼자의 존재가 나올 줄은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한편, 영리한 안성훈.

그는 바로 무언가를 직감하고서, 이 순간 표정마저 싹 바뀌고 있다.

“크! 이런!”

갑자기 인상까지 팍! 쓰며, 자신의 머리를 뻑뻑 긁고 있는 안성훈.

“그 말, 설마 진짜지?”

“그래. 내가 너한테, 왜 그런 걸 거짓말하겠어?”

“으으. 태풍아. 그럼 오늘 저녁에, 밖에 나가서 술이나 마실래? 내가 그냥 술 살까?”

그렇게 아주 미안해하며, 또 술을 사겠다고 하던 안성훈.

그러다가 이내, 그는 무언가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 듯.

갑자기 두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재빨리 다른 쪽으로 바꾸고 있다.

“아! 맞다! 참! 그게 있었지! 그렇다면 말이야. 갑자기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는데?”

그러고는 안성훈은 이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김태풍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다.

“우리, 나가서 커피 마시자. 너한테 진짜 좋은 건수가 있어. 하하하! 이 형아가 진짜 좋은 정보 줄 테니까, 밖에 나가서 마시자.”

그러고는 잠시 뒤, 두 사람은 건물 뒤로 돌아가, 늘 커피를 마시던 곳에 당도했다.

며칠 전, 눈이 심하게 내린 듯.

아직 치워지지 않은 눈들이 한쪽에 가득 쌓여 있었고, 주변 나뭇잎들도 아직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다소 날씨가 추워.

하얀 입김을 풀풀 날리면서, 안성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가고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