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미국 유학 생활
물론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서 솔트레이크로 날아올 때, 약간의 티켓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그러나 솔트레이크에 도착한 이후, 모든 게 수월해진 게 사실이다.
공항에서 자신을 맞아준 롭, 카스미, 류노스케 등과 저녁을 먹었고.
이후 유타대학교 게스트하우스에서 첫날밤을 보낸 김태풍.
사실, 앞으로 김태풍은 그곳 게스트하우스에서 6개월간 숙박할 예정인데, 그곳은 가구가 다 세팅되어 있어 다른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즉, 6개월만 체류해야 하는 김태풍에게는 딱 적당한 숙박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한달 렌트비가 어마어마한 게스트하우스.
하지만 김태풍은 직접 렌트비를 낼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더어크(Derck)사에서 전액 부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학교가 생각보다 너무 넓어서.
자동차 없이 학교 내를 돌아다니는 건 무척 어려워 보인다.
“다행히 생각보다 잘 자고 나왔습니다.”
“아? 그런가? 하하! 갓 블레스 유! 처음 온 사람들은 다들 힘들어하던데, 별문제가 없다니 그건 다행이네. 하하. 여긴 고도가 좀 높네. 4,200피트 높이라 고산지대라고 할 수 있지.”
4,200피트, 대략 1,280미터 높이.
한라산 높이가 1,950미터인데.
솔트레이크는 상당히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주 건조해서, 화학 실험을 하기엔 딱이지. 여긴 습도가 높은 날은 비 오는 날 빼고는 1년 내내 항상 건조하네.”
그 말을 듣고서, 표정이 한층 밝아지고 있는 김태풍.
보통 화학 실험을 하는 중에, 공기 중의 수분도 불순물로 작용해서, 아주 다양한 부반응(원하지 않은 화학반응)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여긴 그럴 걱정이 덜한 것이다.
“아! 고산지대라서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하. 그럼 더 열심히 실험하겠습니다.”
김태풍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그리고 그때부터 브룩하이머 교수는 이것저것 학교 소개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향후 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
새로운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혹시 박 교수한테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뭐,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우연히 관여하게 됐네. 나는 자네가 합성한 물질을 다시 분석하고, 이를 보고하는 역할이네. 그 때문에 더어크(Derck)에서 4년간 2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네. 그래서 그런 단순 분석 역할 외에도 추가적으로 신규 물질 발굴도 또 진행하고 있네. 앞으로 여기서 연구하면서,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날 찾아오게. 연구 파트너로서 언제든 디스커션(discussion)을 해 줄 수 있으니까.”
김태풍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더어크(Derck)사에서는 이번 신약 개발에 정말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이 신약이 임상시험을 통과하게 된다면, 진통소염제 분야에 일대 지각 변동이 생기게 될 것이고, 그래서 더어크(Derck)사에서는 그 점까지 예견하고서 이렇듯 집중 투자를 하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네가 쓸 수 있는 재료비 항목으로, 대략 십만 달러 정도를 따로 책정해 놨으니까, 어떤 시약이든 간에 상관없이 마음껏 구매해서 사용하게.”
그 말에 김태풍은 다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신약 물질합성 연구 외에도.
하버드대 데릭 호킨스 교수와 협력하고 있는, 백금(platinum) 유도형 신규 고분자 물질에 대한 추가 합성도 여기서 진행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뭐, 나중에 닥터 류노스케가 자세히 안내하겠지만, 이 캠퍼스 내에는 케미컬 재고들을 쌓아놓은 곳이 따로 있네. 거기 들르면, 일반적인 액체 시약, 고체 시약, 초자, 마그네틱 바 등도 바로바로 구매할 수 있네. 그 외 시약은 미국 현지 배달이라서 배송 기간이 아주 짧으니까, 앞으로 마음껏 연구하도록 하게.”
그러니까 미국은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시약 구매 배송에 들어가는 시간이 짧게 소요되어, 좀 더 빠르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김태풍이 생각했던 것보다 이 학교는 연구 퍼실리티(facility)가 뛰어났다.
이것저것 분석기기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꽤 만족스러웠던 것.
화학과 건물 내에 대다수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외의 기기들도 다른 학과 건물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하. 앞으로 잘해 보세.”
“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그렇게 브룩하이머 교수와 짧은 면담을 끝낸 김태풍은 곧이어 젊은 일본인 류노스케 박사와 그곳 박사과정 학생인 잭 커비의 도움을 받아, 페이퍼 웍(paper work)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여권 등의 서류를 들고서 유타대학교 내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에 들러 자신의 입국 사실을 증명했고.
이후 학교 ID 등을 받는 신청서를 작성했으며,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도 받았다.
그리고 학생 식당 뷔페에서 점심을 먹다가.
이때, 김태풍은 류노스케 박사로부터 짤막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음. 근데 여긴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은데, 혹시 원한다면 한국인 학생을 소개해줄까요?”
뭐, 한국인 학생이라고?
사실, 미국생활 둘째 날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말에 바로 반색하고 있는 김태풍.
자신이 소개받아서 전혀 나쁠 게 없지 않은가.
김태풍은 즉시 웃으며 동의하자.
류노스케 박사는 잠시 후, 타 랩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인 박사과정 학생을 소개해주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
“아! 여기 오신다는 그분이군요?”
바로 들려오는 유창한 한국말.
김태풍의 입꼬리가 저절로 길어지고 있다.
“반갑습니다. 저는 로렌스키 교수님 랩의 박사과정 박형준입니다. 하하.”
“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는 김태풍입니다.”
키도 크고 인상이 좋게 생긴 박형준.
그는 김태풍보다 3살이나 많았는데.
지방 국립대에서 대학을 마치고, 이곳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온 유학생이었다.
“하하.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아, 가장 먼저 종교가?”
“네?”
곧바로 김태풍의 종교부터 물어보고 있는 박형준.
그는 다시 설명했다.
“아,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기독교나 가톨릭. 이런 종교 쪽은 따로 서사이티(society)가 있어서, 일요일 예배드리러 가면, 그쪽 분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근데 게스트하우스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죠? 그럼 따로 가구 같은 것은 필요 없겠군요.”
그러면서 간단히 설명해주는 박형준.
미국 유학생들은 학교 졸업을 하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데.
웬만한 짐은 그때 버리고 간다는 것이다.
그걸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한인 분들이 갖고 있다가.
새로 이곳으로 이주해 오는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가구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때 제법 쓸만한 가구들을 구할 수가 있고.
특히, 침대 매트릭스 같은 것은 꽤 오래 쓸 수가 있어.
시기만 잘 만난다면, 거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안 세팅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김태풍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뭐, 그래도 한인들을 만나려면, 그런 데 들르면 좋습니다. 참! SSN(social security number)는 아직 신청 안 했죠?”
“네?”
“아. 그거 몰라요? 하하. 그게 있어야, 학교에서 주급을 받을 수 있는데?”
*주급: 미국 학교 혹은 회사의 임금은 월급이 아니라 월 2회 혹은 4회에 나눠서 받는 경우가 많아, 한국과는 차이가 있음. 즉, 1주 혹은 2주마다 급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네? 근데 대체 SSN(social security number)이 뭐죠?”
과거, 미국 출장 경험은 많지만.
박사후연구원(포닥) 경험이나 따로 미국에서 산 적이 없는 김태풍.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박형준은 씩 웃으며 입을 연다.
“역시 그랬군요! 닥터 류노스케, 그 자식, 좀 얍삽한 놈인데, 그런 것도 설명 안 해줬죠? 그러니까 저한테 소개만 하고 얼른 튀었잖아요. 괜히 자기 시간 뺏겨가면서, 남 도와주기 싫으니까. 그 자식, 쩨쩨하다니까요.”
“네?”
김태풍이 의아해하자, 박형준은 닥터 류노스케에 대한 뒷담화를 멈추고, SSN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SSN(social security number)는 한국 개념에서 일종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데, 이게 있어야 학교에서 주급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운전면허증 시험도 치를 수 있다고 한다.
이 신청을 하려면, 아침 일찍 소셜시큐리티 오피스(한국 기준으로 대략 동사무소 같은 곳)에 가서 신청서를 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SSN을 받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는데.
지연되면, 한 달을 넘기는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보통은 2주 이내에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럼 당연히 은행 계좌 이야기도 못 들었죠?”
“네?? 아, 네!”
“그럼 그것부터 처리하죠. 근데 제가 지금 하던 일이 좀 남아 있어서, 딱 1시간쯤 뒤에 제 차로 출발하죠. 우선, 저랑 같이 가서 은행 계좌부터 받고, 그리고 내일 아침에 SSN 신청을 하러 가죠. 중간에 괜찮은 몰(Mall) 같은 데도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약속을 잡은 뒤, 다시 브룩하이머 교수의 랩으로 돌아온 김태풍.
그는 자신의 데스크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음. 일본인이라….
자신이 만난 과거 일본인들.
겉으로는 아주 친절했고, 인사성도 늘 밝았다.
그래서 특별한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데.
과거, 일성그룹 임원 파티에 잠깐 초대받아 갔다가.
그때 임원들로부터 들었던 일본인들의 모습은, 김태풍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른바 힘 있는 일본인!
고위 공직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경제인들.
그 위치 때문인지 저들의 위세는 아주 대단하다고 했고, 그 콧대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 음. 자네들, 겉만 보고, 함부로 그 인간들한테 속을 드러냈다간 금방 병신 취급당할 테니까, 특히 조심하게. 그놈들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 근성이 뼈까지 스며든 놈들이 상당히 많이 있으니까, 특히 조심해야 하네.
그때 어느 나이 많은 임원이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닥터 류노스케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다.
‘음. 25살의 나이에 일본 최고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 보통 천재가 아니겠군.’
잠깐 닥터 류노스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던 김태풍은 잠시 후, 박형준을 다시 만났고, 이제 그와 함께 학교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근처 은행.
Saving account와 Checking account가 따로 있는 미국 계좌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태풍은 이때, 특별한 이득이 없는 Saving account를 제외하고, Checking account만 오픈했다.
그러자 은행직원은 바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SSN이 나오면, 즉시 저한테 알려줘야 합니다. 이건 임시적으로 계좌를 오픈한 거니까, 반드시 그 번호를 저희가 알아야 합니다. 꼭 기억하세요! 이런 임시 허용은 일부 다른 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리고 이 개인 수표(personal check)는 임시 수표라서 쓸 수 있는 데가 제한적이니까 꼭 참고하세요. 또한, 이 직불 카드(debit card)도 임시적인 거라서, 나중에 새로 발급될 겁니다.”
미국은, 개인이 개인 수표를 쓰는 문화다.
한편, 그 일을 마친 뒤, 은행 주차장으로 걸어 나온 두 사람.
박형준 소유의 낡은 미국산 자동차에 다시 탑승한 뒤, 박형준은 운전하기에 앞서, 김태풍에게 수표 쓰는 법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 임시 개인 수표는 거의 쓸 수가 없을 거라고 이야기해줬다.
수표 내에 개인 주소가 아직 인쇄되어 있지 않아.
대다수 상점에서는 이게 위조되었을 거라고 의심부터 한다는 것이다.
“그냥 그건 기념으로 갖고 계시고, 우선은 현금이나 임시로 발급된 직불카드(debit card)를 쓰면 됩니다. 근데 운전면허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운전면허?
그러고 보니까, 환경이 바뀌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진다.
단순히 유학을 왔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닌 것이다.
만약 자신이 값비싼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일반 아파트로 들어갔다면.
전기 신청부터 시작해서 전화기 설치, 전화 통화 신청, TV 설치, TV 케이블 방송 신청, 인터넷 신청 등을 다 직접 해야 한다.
특히, 한국과 달리, 미국은 민간사업자들이 전력 공급을 책임지고 있어, 직접 개인이 전기 공급에 대해서도 따로 신청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할 일이 태산인 것.
“음. 제가 장롱 면허라서 국제 면허증은 가지고 왔는데, 그걸로 되지 않을까요?”
학교가 너무 넓어, 아무래도 자동차가 필요할 것 같아 김태풍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피식 웃는 박형준.
“근데 그게 주마다 달라서, 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