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억대 연봉
“야. 근데 넌 갑자기 무슨 스트립바 타령이냐?”
“인마. 배진수. 넌 미국 가면, 그런데도 가봐야지. 순수한 문화 체험 몰라?”
그 말에 정색하며 배진수는 두 손을 젓는다.
“야. 뭔 문화 체험? 난 그런 거 몰라. 그런 것보다 태풍아! 넌 거기로 가면, 그쪽 회사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아?”
“지원?”
“뭐, 비행기 표, 숙박 등등.”
“아.”
배진수가 뭘 묻는지 이해한 김태풍은 간단히 대답한다.
“음. 더어크(Derck) 쪽이 좀 굉장히 큰 회사잖아? 그래서 비행기 티켓은 비즈니스클래스로 끊어줬고. 또… 음.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총급여로 대략 이십만 달러를 준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순간,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눈이 동그래지고 있었다.
크게 유명하지 않은 미국 중서부 주립대학교로 가게 되는 김태풍.
그런데 그한테 설마 그런 조건이 붙어 있는 줄은 그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뭐? 6개월에 이십만 달러?”
환율 기준으로 대략 1억6천만 원.
그 돈을 매달 나누어, 총 6개월 동안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억대 연봉을 학생이 받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 진짜냐? 김태풍?”
배진수가 놀라며 다시 묻자, 김태풍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그때, 동공이 마구마구 흔들리고 있는 최기호.
“하하. 너희들 너무 놀라지 마. 그만큼 날 부려 먹는 거니까. 그래도 뭐 생각해 보면, 지금은 우리가 여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좀 더 열심히 연구해서 이렇게 돈이라도 버는 게 좋지 않을까? 뭐, 성훈이 집이야 좀 잘 살잖아. 우리와 다르게.”
안성훈에게 여친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분이 축 처져 있던 최기호.
그는 김태풍의 그 말에 표정이 바로 바뀌며, 슬그머니 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김태풍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온 세상이 물에 젖는 듯 장맛비가 쉴 새 없이 내리는 1996년 7월 초순이 되었다.
김태풍은 투자 펀드에 들어갔던 자신의 자금을 만기일에 맞춰 회수했는데.
이때, 이것저것 수수료와 세금 등을 떼고 나니.
8억7천만 원의 투자금이, 어느덧 17억 원의 돈이 되어 수중에 돌아왔다.
‘음.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어쨌든 이익은 챙겼으니까 그럼 그 다음 투자로….’
돈이 돈을 만든다는 것을 점점 더 체득해 나가고 있는 김태풍.
그는 그 돈을 다른 데 쓰지 않고, 곧장 미국 주식투자에 집어넣기로 했다.
투자 종목은 역시 넷스케이프.
“…음. 뭐,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한 달 동안 계속 모니터링해 주시고, 제 매수호가에 거의 근접하면, 최대 +4달러 내에서 주문 체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그렇게 김태풍은 증권회사 직원에게 주식매수를 부탁했는데.
시장가 매수가 아니라, 주당 32달러라는 호가 주문을 일부러 던진 이유는 바로 현재 주가 차트상에서 보이고 있는 흐름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넷스케이프 주가가 지루한 조정 기간에 들어가면서, 일시 하락국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
그렇게 일련의 투자 지시를 마친 뒤.
1996년 7월 5일.
김태풍은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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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태풍아. 몸 잘 챙기고 조심해서 다녀와.”
“네. 엄마. 그리고 아버지, 그럼 저 잘 다녀오겠습니다.”
부모님들과 깊게 포옹한 뒤, 김태풍은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이번 여행에서 김태풍이 타게 된 비행기는 국내 모 항공사 소속의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샌스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그곳을 경유해서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도착할 예정이다.
직항이 없어 다소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김태풍은 대기했다가 시간에 맞춰,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이코노미클래스보다 훨씬 더 넓은 비즈니스클래스 좌석에 착석할 수 있었다.
어제는 비가 왔었다.
그런데 출국 당일인 오늘은 평온한 초여름 날씨.
비행기 창문으로 평화로운 바깥을 한번 쳐다본 뒤.
이제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있는 김태풍.
‘음. 역시 좌석이 넓고 좋아.’
과거, 일성그룹 연구원이었을 때, 미국 출장을 자주 다니곤 했던 김태풍.
그러나 그때마다 늘 이코노미클래스 좌석에 앉아야만 했다.
임원 직급이 아니고서는 비즈니스클래스를 할당받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늘 답답한 이코노미클래스를 타야 했지만.
이렇듯 회귀했더니, 첫 미국 여행부터 비즈니스클래스다.
‘뭐, 실적이 있으니까, 대우가 달라지긴 하네.’
김태풍은 피식 웃는다.
사실, 이번 기술이전 계약뿐만이 아니라, 네이처 주저자 논문을 벌써 2개나 갖고 있는 김태풍.
더어크(Derck) 쪽에서도 젊은 천재 연구자 김태풍을 각별하게 대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김태풍은 스르륵 눈을 감는다.
출국 전날까지 밤샘 문서 작업을 했던 김태풍.
그래서 피로가 갑자기 확 몰려드는 것이다.
그러고는 한동안 꿀맛 같은 잠에 빠져드는 김태풍.
중간에 한 번 일어나 기내식을 먹고, 또 잠에 빠진 그.
어느덧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 활주로에 착륙하자 비로소 눈을 떴다.
현지 시각으로 거의 아침이 다 된 시각.
‘휴! 드디어 미국이구나.’
비행기에서 내린 김태풍.
입국심사를 가볍게 마쳤고.
곧바로 짐을 찾은 뒤.
국내선으로 갈아타기 위한 연결 통로로 들어섰다.
그때, 자신이 끌고 있던 짐을 수하물 담당 항공사 직원에게 맡겼는데.
자칫 이 순간을 놓쳤다간, 수하물을 맡기기 위해 티켓팅 장소로 도로 나와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다행히 김태풍은 짐을 잘 맡긴 뒤, 연결 통로를 거쳐 국내선 게이트로 직진했다.
물론 그 전에 다시 한번 보안검색을 받은 김태풍.
그리고 무사히 탑승 게이트까지 도착한 김태풍.
그런데 이때, 비행기 좌석 확인 겸 티켓을 자세히 살피다가.
갑자기 그는 흠칫 놀라고 만다.
‘어? 이걸 왜 내가 이제야 발견한 거지? 좌석 번호가 안 찍혀 있네?’
잠시 멍해지던 김태풍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고 보니, 더어크(Derck)에서 잡아준 예약 스케줄을 가지고 김포국제공항에서 티켓팅을 했던 김태풍.
그런데 국제 전산망 연결 관계로, 국내 항공사 직원이 미국 국내선 티켓 좌석 번호를 찍어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김태풍은 게이트 앞 항공사 부스 쪽으로 뛰어갔고.
그곳에 있는 흑인 여자 직원에게 좌석 발급을 요구하자.
그 직원은 뭔가 열심히 검색하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한다.
“음! 미스커 킴? 이거 뭔가 오류가 있는 것 같은데? 당신 예약기록을 찾을 수가 없어요. 저희 전산망에 그런 이름 자체가 올라와 있지도 않고. 그런 상황에서는 제가 절대 좌석을 드릴 수 없어요. 음! 그럼 다음!”
“네? 뭐라고요? 잠시만요.”
황당한 김태풍.
이 대목에서 그런 뜬금없는 이야길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김태풍은 정색하며 다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고.
직원은 한 번 더 검색하더니 차갑게 손을 젓는다.
“아니, 없다는 데도 자꾸 왜 그래? 이 봐! 동양인(Asian) 친구! 그런 이름은 없다니까! 다음!”
“아뇨. 다시 한 번만 더 검색해보세요.”
김태풍이 거듭 요구하자, 돼지 같은 덩치의 흑인 여자는 갑자기 김태풍을 흘겨보며 콧방귀를 끼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까지 지으며, 아주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어투로 말을 한다.
“아니, 당신 대체 뭣 하는 수작이지? 내가 그걸 계속 확인해 줘야 하는 의무가 어디에 있어? 왜 계속 날 못살 게 굴어? 절대 못 한다고! 다신 안 해! 이상한 동양인(Asian)들 때문에 이따위 퍼킹(fucking) 검색을 왜 또 해야 하냐고? 오늘은 좌석이 꽉 찼어. 추가 구매도 안 되니까, 썩 꺼져!”
즉, 비행기 좌석이 만석이라는 그 말이 나오자.
그 순간, 김태풍은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실제로 주변에는 비행기 탑승을 하려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는데.
‘아. 그거구나? 오버부킹! 하필, 이 국내선 좌석은 모두 일반석뿐이니….’
바로 대략적인 상황을 깨달은 김태풍.
미국 항공사들의 관행, 오버부킹.
국내선 티켓 예약을 남발해서 비행기 좌석 수보다 더 많은 예약을 받는 해묵은 수법.
보통 때는 문제가 없지만, 탑승객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오버부킹 때문에 여러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
즉, 미국 일부 항공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예약 취소자들을 고려해서) 그렇게 비행기 예약을 남발한 뒤, 나중에 탑승객들이 몰려들면 선별적으로 좌석을 허용하거나 혹은 좌석이 없다고 생떼를 부리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경우를 당하지 않으려면, 미리 대처를 잘 하는 게 필요하다.
좌석이 확정된 티켓팅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그게 안 되었다면, 서둘러 항공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좌석 확정을 받는 게 가장 좋다.
그러나 일이 바빠, 그 일을 깜빡하고 있었던 김태풍.
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아마 이런 상황은 스케쥴 예약을 해 줬던 더어크(Derck) 쪽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
앞으로 토요일, 일요일로 이어지는 황금연휴 기간이 아닌가.
“음. 죄송한데 그래도 한 번만 더….”
우선은 김태풍은 다시 한번 요청했으나.
그러나 직원은 사정없다.
갑자기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또 목소리가 심할 정도로 커지고 있는 여자 직원.
“이봐! 당신! 계속 거기 서 있으면, 업무방해로 공항 경찰을 부를 거야! 지금 당장 새 티켓을 구매하든지, 아니면 좀 비켜주지? 내가 너 때문에 퍽킹 내 머리가 아파. 아, 에런! 괜찮아. 넌 간섭할 필요가 없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정말 돌겠어. 항상 노란 동양인(Asian)들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해.”
반말과 높임말이 따로 분류되지 않는 영어.
그런데 간간이 욕설마저 섞여 나오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
즉, 반말이나 다름없다.
아주 고압적으로 말하던 그 여자는 옆에 있는 동료 여직원이 이 일에 관심을 갖자, 바로 선을 그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때, 김태풍은 머리 뚜껑이 확 열릴 것만 같다.
뭐, 저런 개 같은 직원이 다 있나.
그러고 보니, 김태풍은 과거에도 이런 유사한 경우를 당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땐 뭣 모르고 당했으나,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분명 저들 항공사 예약 전산망에는 자신의 이름이 분명히 올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오버부킹을 했으니까, 괜히 면피하려고 저딴 식의 강짜를 부리는 것이다.
즉, 미국인이 아닌, 외국 여권을 들고 있는 만만한 외국인들.
그들한테 저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저 돼지같은 흑인 여자가 공항 경찰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할 수 없다.
“음.”
결국, 뒤로 물러난 김태풍.
그는 공중전화기로 더어크(Derck) 본사에 즉시 전화를 했고, 지금 당장 현지 변호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