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12화 (12/153)

28-출국 전

‘음. 아란이는 정말 착하긴 한데. 요즘은 더 귀엽기도 하고… 휴우! 하지만 진짜 모르겠다. 결국, 내가 문제니까.’

김태풍은 눈을 힘껏 감는다.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물론, 송아란의 입술은 확실히 매력적인데….

사실, 김태풍은 송아란, 최소연, 최하영과 같은, 그런 이쁜 여자친구랑 데이트도 하고 싶고, 또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럴 만한 심적 여유가 하나도 없다.

일 중독자들의 흔한 변명과도 같이.

김태풍은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특히, 다가오는 7월 초.

김태풍은 더어크(Derck)사와의 공동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김태풍이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상태.

실제로 일 복이 많은 사람들은 일을 신속하게 끝내도 또 일들이 막막 생기게 되는데.

김태풍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해야할 것이다.

‘음. 뭐, 미국 비자도 이미 받았고 병무청 허가도 받았지만, 결국 추가 샘플 합성이 문제야. 뭐 어쨌든 하나하나 빨리 차근차근 끝내자. 합성부터 진행하고, 레진을 새로 패킹해서 (불순물 제거에 사용할) 오픈 컬럼도 새로 세팅해야겠어.’

네이처 잡지를 보며 잠시 흥분했던 김태풍.

그는 얼른 마음을 다스리며 벌떡 일어났고.

실험 가운을 챙겨 입은 뒤, 곧바로 시약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시작되는 김태풍의 실험.

바로 그때,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송아란은 두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시약장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김태풍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그녀.

“근데 오빠. 혹시 sodium(Na, 나트륨은 독일식, 일본식 표현임) 잘라둔 거 있어요?”

“어? sodium? 그건 왜? 혹시 용매 정제하려고?”

“네.”

“아. 있어. 나한테 좀 있긴 한데, 언제 쓰려고?”

“오빠~ 땡큐~ 지금 주시면 바로 시작하려고요.”

김태풍을 바라보며 생글 웃는 송아란.

“지금 당장? 그럼 너 오늘 늦게 퇴근할 텐데?”

“뭐, 상관없어요.”

“그래? 그럼 좀만 기다려. 내가 갖다 줄게.”

그 사이, 얼른 움직여, 하얀 실험 가운을 입고, 또 긴 머리카락을 뒤로 꽁꽁 묶은 송아란.

실험 장갑까지 끼고 나타난 송아란은 김태풍이 조심스레 내미는 갈색 병을 받았다.

“이거 아주 조심해서 써야 하는 거 알지?”

“네. 형수(최형수, 박사과정 2년차) 오빠한테서 이미 배웠어요.”

“그래도 조심해서 써.”

“네.”

“더 필요하면 또 말하고. 괜히 혼자서 잘라서 쓸 생각 말고. 이건 좀 더 짬밥이 돼야, 혼자서 자를 수 있어. 그러니까 그 전까진 필요할 때마다 꼭 나한테 말해. 알겠지?”

김태풍은 그렇게 말하며, sodium를 그녀에게 넘긴 뒤, 그래도 약간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는지 먼발치에서 송아란을 계속 지켜본다.

그런데 다행히 그녀에게서 별다른 문제가 없자, 곧바로 그는 자신의 실험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음. 그래도 저 일 끝날 때쯤, 한 번 더 지켜봐야겠어. 꼭 세척할 때 문제가 생기니까.’

왜냐하면, 용매 정제가 끝난 뒤, 다 쓴 초자(라운드 플라스크 등)를 물에 넣고 씻을 때.

다 제거되지 못한 sodium이 초자 표면에 묻어 있으면, 곧바로 불덩이가 위로 치솟게 된다.

즉, 잔존한 sodium이 과량의 물과 접촉하는 순간, 엄청난 발열반응이 생기고, 그걸로 인해 순식간에 화염이 치솟는 것이다.

그래서 실험 초보자들은 이 과정에서 손과 얼굴에 화상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즉, sodium를 이용한 용매 정제 방법은 유기용매 속에 존재하고 있는 아주 극소량의 수분(여기서는 수분 자체가 불순물로 간주되는 것임), 다시 말해서 초미량의 수분(물)을 확실하게 제거하는 방법인데.

반면, 특정 용매에 내부 수분(물) 함량이 높을 땐, 이 sodium를 써서 용매 정제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용매에 sodium를 넣게 되면, 바로 물과 반응해서 폭발해 버릴 테니까 말이다.

*sodium(Na): 용매 속에 있는 초미량의 수분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 다소 위험한 sodium(Na)을 이용한 용매 정제법을 종종 쓰기도 함. 그러나 소금(NaCl) 상태일 때와 달리 단원소로 존재하고 있는 sodium(Na)은 일정량 이상의 물에 노출되면, 물과 반응하면서 엄청난 열을 발생하므로 폭발 위험성이 아주 큼. 그래서 sodium를 사용하기 전에 헥산(hexane) 용매 속에 sodium를 잘게 자르고(이건 실험숙련자가 주로 함, 초보자가 함부로 하다가는 폭발해 버림), sodium 보관 역시 이런 헥산 용매 속에 넣어 보관하는 경우가 많음. 이런 방식은 공기 중의 수분과 반응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임*

*추가 팁: sodium은 chloride와 붙어 있을 땐, 즉 소금(NaCl)일 때는 아주 안전하다. 그러나 chloride와 같은 상대 이온이 없을 땐, 즉 알칼리금속 상태로 혼자 존재할 수가 있으며, 이 상황에서는 아주 반응성이 높아 아주 위험한 상태가 됨.*

한편, 그 사이, 열정적으로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두 남녀의 6월 초여름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해가 떠오른 그 다음 날.

각 신문사마다 요란한 기사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일주일 전, 더어크(Derck)사와의 기술이전 사실이 주요 방송국들과 신문사들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그리고 이제 언론보도 엠바고가 깨진 네이처지 출판 사실마저 헤드라인 기사로 요란하게 장식되며, 일제히 세상에 발표된 것이다.

##

“야. 김태풍. 넌 이런 신문들을 보면, 대체 무슨 기분이 드냐?”

신문사별 다양한 신문들을 가슴 가득 안고서 나타난 배진수와 최기호.

자신을 챙겨주려는 그들의 모습에 막 출근한 김태풍은 고마워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하하. 고맙다. 그러지 말고, 우리 커피나 마시러 가자. 근데 성훈이는?”

“아~ 그 녀석? 아까 바로 퇴근했어. 오늘 중요한 저녁 약속이 있다던데.”

“대체 무슨 약속? 뭔 약속이길래 이렇게나 일찍 퇴근했다고?”

김태풍이 의아해하자, 그때 최기호가 불쑥 입을 연다.

“흠! 난 뭔 일인지 알아.”

“응?”

“대충 이야기하면, 깜짝 놀랄만한 소식.”

“뭔데?”

“크크. 뭐, 그건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해줄게.”

잠시 후, 1층으로 내려와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든 그들은 건물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시작된 이야기.

“야. 진짜 놀라지 마라.”

“무슨 일인데?”

“그 잘난 안성훈이, 그 자식 말이야.”

“인마. 뜸 들이지 말고 재깍 이야기나 해.”

“하하. 그 자식, 제 딴엔 항상 자유 영혼 이야길 하잖아.”

“그래서?”

“근데 그 자식한테, 하하하! 여친이 생겼어.”

“뭐??”

김태풍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평상시 안성훈은 늘 자신이 싱글인 것을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여친??”

“응. 그 자식 되게 외로웠나 봐.”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번 주말에 봤어.”

“주말?”

“뭐, 학교 밖 마트에 가려고. 자전거 타고 나가다가, 그때 봤어. 와~ 근데 몸매 완전 죽이더라. 얼굴은 진짜 주먹만 하고. 내가 쫓아가서 물어보니까, 네 눈치 슬슬 보면서 소개해주더라. 자기 여친이라고.”

“와! 그래서?”

“그 다음은 뻔하지 않냐?”

“??”

“이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저 자식, 이쁜 여친이랑 만나서 밤새 데이트하려고 내뺀 거지.”

그렇게 설명을 마친 최기호는 이내 시큰둥한 목소리로 한마디 말을 더 보탰다.

“근데 그 자식, 우라질 진짜 좋겠다. 나이가 들면 다들 짝이 생긴다는데. 젠장! 난 아무리 해도 여자들이 넘어오질 않아.”

탄식하는 최기호.

얼굴이 딸리고(?), 몸매가 딸리고(?), 말빨도 딸리는(?) 최기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야. 최기호. 그만 좀 한숨 내쉬고, 그 신문이나 줘봐. 좀 보자.”

김태풍이 말하자, 그제야 최기호와 배진수는 들고 있던 신문들을 그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신문들을 곧장 펼쳐보던 김태풍.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있다.

“흠. 근데 김태풍. 넌 대체 언제 미국 가냐?”

“아. 얼마 안 남았어. 어제 비행기 티켓을 받았는데, 출국 날짜가 7월 5일.”

“7월 5일?”

“응.”

“그럼 가는 데가 어디?”

“뭐, 아이비리그같이 유명한 대학은 아니고.”

“그럼?”

“그냥 작은 주립대학.”

“??”

“아. 더어크(Derck) 쪽과 긴밀하게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교수가 그 학교 소속이라고 하더라고.”

“그럼 유명한 사람이야?”

“그렇다고 하던데. 아. 맞다! 너희들도 논문에서 그 교수 이름을 봤을 거야. 데이비드 브룩하이머 교수. 현재 미국 화학회지, JACS(작스)의 부편집장을 맡고 계시는 분인데….”

데이비드 브룩하이머 교수.

세계적인 화학 학술지 JACS(작스)의 부편집장이자, 더어크(Derck)사의 신약 개발 고문을 맡고 있는, 국제적으로도 뛰어난 화학자.

미국 화학계에서 나름 파워가 굉장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캘리포니아 쪽 유명 대학들이나 미국 동부쪽 아이비리그 같은 곳에 가지 않고, 좀 생소한 대학교, 즉 유타주의 유타 대학교 화학과에 재직하고 있었다.

그가 그곳을 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가 바로 몰몬교 신도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유타주에 터전을 잡고 있는 몰몬교.

미국 본토에서 생성된 이 종교는 1830년대부터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과거 미국 정부의 거센 압력 때문에 결국 공식적으로는 일부다처제를 포기한 상태다.

그럼에도 일부 시골 몰몬교도들은 여전히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었고.

교리상 낙태가 허용되지 않아.

시골 몰몬교도들은 자녀 숫자가 무려 10명 혹은 20명을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몰몬의 사이비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고.

대신에 신도들의 인간성이 좋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졌는데.

이런 몰몬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유타주는 그 때문에 치안이 상당히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지역 중의 하나다.

“음? 유타대? 난 거기 처음 듣는데?”

“뭐, 이번 일이 학교 보고 가는 건 아니라서. 공동연구가 가장 핵심이니까. 뭐, 데이비드 브룩하이머 교수는 학문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고. 그 제자들 중에도 하버드, MIT, UCLA 등에 교수로 재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

김태풍은 자신이 방문하는 곳에 대해서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러자 최기호는 다시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야. 난 책에서 봤는데, 거긴 술집이 밤 10시가 되면, 거의 다 닫는다고 하던데? 놀 데가 하나도 없고, 제대로 된 스트립바 하나도 없고, LA 한인타운 같은 데도 없고, 클럽 같은 델 찾기가 아주 어렵다던데?”

그때 배진수가 킬킬 웃으며 맞받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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