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새로운 인연
<9> 부와 명예
“김태풍씨?”
“네.”
“차선호씨?”
“네.”
“이종호씨?”
“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호명.
그 호명이 끝나자, 단아한 정장 차림의 과기처 여직원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이 순서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훈장, 포장 수여에 이어서 유공 표창 수여가 끝나면, 학생 표창자들에 대한 표창 수여가 시작될 겁니다. 가장 먼저,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장관 표창 순으로 진행되니까 꼭 기억하셨다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바로 단상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단상에서도 이 순서를 그대로 유지하면 됩니다.”
각 잡힌 양복 차림을 하고 있는 김태풍. 그는 여러 학생 수상자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번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과학 유공자들에 대한 훈‧포장, 표창 수여식이 성대하게 열리게 된 것이다.
이번 포상식에서 수상을 하게 된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100명 남짓할 정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교수들과 기업인들 외에도 아주 젊은 사람들도 이번 수상을 하기 위해 종합청사 대회의실에 모인 상태다.
여기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아주 생기가 넘치는 학생 수상자들의 대열.
특히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된 대학원생들은 각 과학 분야를 다 합쳐도 고작 10명에 불과한 상태.
김태풍은 화학 재료 분야에서 유일하게 대통령 표창 수상자로 결정이 난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여성 사회자의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내외빈 여러분, 그리고 수상자 여러분. 그럼 이제부터 1996년도 과학기술 분야 유공자에 대한 정부 포상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또렷한 여성 사회자의 목소리는 꼭 아나운서의 목소리나 다름없다.
그 음성과 함께 드디어 시작되고 있는 과학 유공 정부 포상식.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절로 기품있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곧이어 차례로 호명이 되었고, 가장 먼저 훈‧포장 수상자에 대한 훈‧포장 수여식이 이어졌는데.
그렇게 차례로 포상들이 쭉 이어지다가.
마침내 학생 표창자들에 대한 수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수상자는 한국연구기술원의 김태풍씨.”
자신의 이름이 세 번째로 호명이 되자, 김태풍은 즉각 단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다른 호명들.
“한국대학교의 차선호씨.”
“연희대학교의 이종호씨.”
그렇게 대학원생 10명에 대한 호명이 차례로 끝났고.
잠시 후, 과기처 장관은 웃으며 각 수상자에 대한 표창을 진행했다.
“축하합니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아. 축하합니다. 앞으로 더 훌륭한 연구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듬직하군요. 꼭 세계적인 연구자가 되십시오.”
“네.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김태풍은 웃으며, 과기처 장관과 악수를 했다.
그렇게 진행이 된 끝에, 마침내 10명에 대한 포상이 끝나자.
과기처 장관은 수상자들의 중앙에 섰고.
그 순간,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팡! 팡! 팡! 팡! 팡!
쏟아지는 새하얀 빛들.
단상 아래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
각 학교 홍보팀 기자들. 그리고 언론사 카메라맨들까지.
각자 자세와 각도를 잡고서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를 받게 되자, 저절로 묘한 느낌이 드는 김태풍.
“다시 한번 모든 수상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주 낭랑하게 울리고 있는 여자 사회자의 목소리.
“그럼 다음 수상자들을 이제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이어지고 있는 수상자들에 대한 호명.
이때 김태풍 등은 차례로 단상에서 내려갔고.
그런데 그때 누군가 김태풍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김태풍! 축하하네!”
“아? 교수님?”
단상에서 내려와 자기 자리로 향하던 김태풍. 그는 자신에게 즉시 꽃다발을 건네는 박한식 교수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사실, 박한식 교수는 오늘 포상자 명단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김태풍을 축하해주려고 이 자리를 찾은 것이다.
아마 내년에 박한식 교수가 훈장 수여자로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그건 아직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참! 조금 있다가 말이네. 자네 축하도 할 겸, 또 소개해줄 사람이 있네. 좀 있다가 행사가 끝나면 곧장 행사장 밖으로 나와 주게. 자세한 이야기를 그때 하도록 하지.”
“네. 교수님.”
간단히 말한 박한식 교수는 물러섰고, 김태풍은 약간 의아했으나 우선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포상식 행사.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표창 수여는 모두 끝이 났고.
이때 몇몇 인사들이 단상으로 차례로 걸어 나와, 수상자들에 대한 축하 연설을 겸하기도 했다.
그런 뒤 또 몇 가지 형식적인 식순이 이어졌는데.
그걸 마지막으로 모든 포상식이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아! 김태풍! 여기네!”
포상식 행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복도로 걸어 나온 김태풍.
거기서 김태풍은 한옆 복도에서 누군가와 함께 서 있는 박한식 교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북적북적해지고 있는 인파를 뚫고서, 그는 곧장 박한식 교수에게 다가갔는데.
그렇게 김태풍이 나타나자, 박한식 교수는 곧 누군가에게 입을 열고 있다.
“하하. 바로 이 친구입니다. 김 의원님.”
김태풍을 가리키며 즉시 소개하고 있는 박한식 교수.
이때, 김태풍을 유심히 쳐다보던 중년 남자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고 있다.
“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김동걸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김태풍! 입니다.”
“하하. 오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면서요? 정말 축하해요.”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말을 주고받는 사이, 김태풍은 조심스레 상대를 관찰하고 있다.
사실, 김태풍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이미 그를 알아본 상태다.
왜냐하면, 그는 아까 포상식 때, 최초 축하 인사말을 했던 여러 인사들 중의 한 명인 김동걸 국회의원이었던 것.
다시 말해서, 박한식 교수는 지금 현직 국회의원을 소개한 것이다.
“하하. 김 의원님. 뭐, 다음 달 국회 개원을 준비하려면 많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과기처 최 국장님한테 부탁해서, 요 근처 작은 회의실 하나를 빌려놨습니다. 그쪽으로 가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지요.”
“네. 그러시죠. 박 교수님.”
잠깐 서로 간에 인사말을 더 주고받는 것을 보니, 그들은 김태풍이 나오기 직전에 여기서 만난 모양이었다.
그 대화를 끝낸 뒤, 박한식 교수는 앞장을 섰고.
그렇게 세 사람은 작은 회의실로 이동했다.
한편, 김동걸 의원의 보좌관 두 명도 그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작은 회의실.
“하하. 먼저, 김 의원님! 뭐, 저번에 유선으로 이야길 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하하!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정확히 열흘 전에 치러졌던 국회의원 선거.
그는 한때 잘 나가던 기업인이었는데, 이 선거에서 당당히 재선에 성공했던 것이다.
“하하하! 박 교수님. 계속 그리 축하해주시니까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못난 저를 많은 분들이 계속 이뻐해 주시니까, 뭐, 저로서는 더욱더 국가에 헌신해야겠지요. 하하하.”
그렇게 다시 안부 인사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박한식 교수는 오늘 약속을 잡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김 의원님. 뭐, 저번에 제가 여러 차례 이야길 드렸지만… 여기 보다시피 김태풍 이 친구는 확실히 국가적 보물이 될 수 있는 큰 인재입니다. 하하하!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날 일이 아니겠습니까? 뭐, 이런 인재들이 대한민국 과학 발전을 위해 더 헌신할 기회를 주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봅니다.”
“아. 박 교수님. 그 말씀인즉슨, 그… 벤처 사업 육성 관련 법. 그리고 국가 지원책에 대한 걸 이야기하시는 거지요?”
“네. 맞습니다. 김 의원님.”
“음…. 사실 저도 그 일로 고민이 참 많습니다. 벤처 관련 법 제정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긴 합니다. 뭐, 이번 국회가 조만간 개원하면 서둘러 법안 발의부터 해야 할 것 같고… 나중에 상정 절차를 거쳐, 가결까지 신속히 가야 하는데….”
그렇게 시작되고 있는 대화.
그 대화를 들으며 김태풍은 깜짝 놀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시대는 아직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발표되지도 않은 시기다.
아마 그 법은 내년 8월에 국회에서 가결되고.
또, 내년 10월이 되어야 시행될 운명이다.
그런데 박한식 교수는 새로 만들어질 법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고 있는 모습이다.
혹시 이건 일종의 로비인가.
“음. 뭐, 박 교수님께서 벤처 기업 창업 쪽에 관심이 많으신 건 저도 다 이해가 됩니다. 한데 뭐 그런 관련 법규들이 명쾌하지 않으니까 대학에서도 많이 힘들겠지요. 뭐, 미국과 다르게 우리나라에선 교수 창업이 아직 힘든 상태라….”
“그렇습니다. 김 의원님. 앞으로는 대학교수도 그렇고, 일반인들도 그렇고, 누구나 다 쉽게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뭐, 이젠 국가 차원에서 장려해야 합니다. 아무리 획기적인 과학기술이 나온다고 해도, 그걸 매번 해외에다 팔아먹어 버리면 순전히 국가적 손해가 되는 길입니다.”
“음…. 그렇다면 여기 있는 김태풍 군한테도 그런 법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하! 당연한 말씀을! 김 의원님. 이 친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젊은 인재가 커서 학계에 있든, 아니면 무슨 일을 하든, 그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다 보면, 꼭 언제든 현실성이 있는 기술들이 툭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뭐, 김 의원님도 아시다시피, 조만간 저희 쪽에서, 더어크(Derck)사와 큰 기술이전 협약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일에 이 친구도 크게 관여를 했습니다.”
“아. 그건 저번에 이야기하신 그거?”
“네. 맞습니다. 한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기술이전을 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그런 법안과 정책이 입안된다면, 더욱더 벤처 창업이 활발해질 거고, 국내 기술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뭐, 국가적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까지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겠죠.”
그러고 보면, 훗날 이런 벤처기업육성법이 제정된 뒤, 불과 4년 만에 벤처 기업 숫자는 무려 1만1,300개로 어마어마한 급증을 하게 된다.
“음. 박 교수님. 어떤 말씀이신지 저도 잘 알겠습니다. 하하. 뭐,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꼭 혁신적인 법안 도입과 행정 조치들이 필요합니다. 저도 그 부분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럼 이런 세부 사항들부터 좀 수정을 해서….”
그렇게 계속되는 이야기들.
그리고 이때, 김태풍은 이번 회의의 목적과 그 속내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신약 개발자로서의 박한식 교수.
그 역시 자연스레 벤처 기업 창업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런 생각을 자연스레 품게 되듯이 말이다.
하긴, 최근에 신약 벤처 기업 메드TX는 엄청난 기세를 보이며 성장하고 있다.
특히, 메드TX의 상장일은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
과연 이 메드TX의 주가가 얼마나 오를지, 지금 초미의 관심들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신약 벤처 붐을 언론을 통해서 보았을 박한식 교수.
그러니까 박한식 교수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젊은 연구자 김태풍, 그를 이 자리에서 부각시켜, 김동걸 의원에게 어쩌면 감성 로비를 하는 셈이었다.
“하하! 잘 알겠습니다. 박 교수님. 뭐,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좋으신 말씀들, 많이 들었습니다. 저한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뿐입니다. 하하. 그리고 김태풍 군! 혹시 또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우리 한번 따로 시간을 내서 꼭 봅시다. 참. 아직 제 명함을 안 받았죠?”
얼른 명함을 꺼내, 김태풍에게 건네어 주는 김동걸 의원.
그리고 다시금 김태풍을 유심히 쳐다보던 김동걸 의원은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하하. 그럼 살펴가십시오. 박 교수님.”
“네. 또 뵙지요. 김 의원님.”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눴고, 잠시 후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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