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8화 (8/153)

대통령 표창

‘벌써 심상치 않아.’

메드TX에서 개발 중인 신약 후보 물질.

조만간 스위스 다국적 기업과 기술이전 계약이 체결될 거라는 언론 보도가 갑자기 터지면서.

메드TX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지금 활활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김태풍이 과거 언론 보도들을 통해서 보았던 메드TX의 눈부신 언론 데뷔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흐름이기도 하다.

특히, 메드TX가 보유하고 있는 신약 후보 파이프라인은 과거보다 더 보강된 상태다.

다름이 아니라, 김태풍이 제공한 새로운 당뇨병 치료제 물질 때문이었다.

이 물질은 당당히 회사 파이프라인에 올라가 있었고.

관련 동물실험 결과들이 잇달아 언론에 발표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메드TX의 저력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장외 시장에도 반영되고 있다.

물론, 아직 상장하지 않은 상태라.

메드TX의 정확한 주가를 측정하기 힘들지만.

현재 장외에서 거래되고 있는 메드TX의 주가는 순식간에 2만 원대를 돌파해 버린 것이다.

‘주식은 이럴 때 제맛이지. 하하. 뭐, 장외 기준으로 하면, 벌써 16억 원이나 된단 말이야.’

김태풍이 크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보유한 스톡옵션의 가치가 이미 폭발적이기 때문이다.

행사가 2,500원에 8만 주. 이 행사에 필요한 자신의 자금은 고작 2억 원.

즉, 2억 원이 현재 기준으로 보면, 16억 원의 가치가 된 것이다.

다가오는 1997년 3월 7일에 행사 가능한 스톡옵션.

이 스톡옵션은 갈수록 금덩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메드TX에 집중투자했던 여러 벤처캐피탈(VC)들은 현재 더 적극적으로 메드TX의 IPO(기업공개)를 돕고 있다.

이런 전문적인 VC들의 개입이야말로 IPO 추진을 더 원활하게 하는 강력한 추진제가 될 수 있다.

그 바람에 메드TX의 주식상장이 4월 중으로 이루어질 거라는 언론 보도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

이것은 김태풍의 과거보다 몇 개월이나 더 빠르게 진행되는 일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서 사장님. 그럼 국내 임상시험 진행 결정을 곧 언론에 발표하실 거라고요? 아. 네. 네. 그럼 IND 승인신청도…… 네. 네……. 그럼 하반기를 목표로…….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뭐, 저도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IND(Investigational New Drug) 신청: 시험약을 사람에게 투여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 실험 규격에 따라 의약품의 안정성과 유효성 시험을 동물 대상으로 진행한 뒤, 그 결과를 서류화하여 정부 기관에 제출한다. 그 뒤, 엄격한 평가를 거친 뒤, IND 승인이 되면, 향후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김태풍.

김태풍은 밝게 웃고 있다.

메드TX 서정철 사장과의 통화였다.

그리고 김태풍으로서도 아주 만족스러운 통화.

곧이어 김태풍은 침대에서 일어났고,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러고는 슬쩍 벽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막 지나가고 있다.

‘휴.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 출근하려면 바로 준비해야겠어.’

그런데 갑자기 묘한 느낌이 감도는 김태풍.

슬쩍 손을 뻗어 벽 쪽 커튼을 옆으로 살짝 걷어보자.

기숙사 창문 너머로 새하얗게 변한 창밖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

아침 퇴근길에 보았던 그 하얀 눈들.

그 눈들이 사방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아직도 일부 눈송이들은 하염없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음. 보기엔 좋은데, 자전거를 또 못 타겠네. 으~ 춥겠다.’

따뜻한 기숙사 방과 달리 바깥은 몹시 추워 보이는 모습.

잠시 후,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친 김태풍은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까지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터벅터벅 걸어, 학생회관에 도착한 김태풍.

그는 분식 코너에서 김치볶음밥으로 배를 채운 뒤.

곧장 학과 건물로 향했다.

하얀 눈송이를 맞으면서.

또한, 사박사박 소리가 나는 땅을 걷다 보니 그 나름의 운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걸어서 마침내 도착한 실험실.

“태풍이 오빠!”

김태풍이 랩에 들어서자마자, 밝게 외치며 김태풍의 앞을 가로 막고 서는 한 여학생.

놀랍게도 그녀는 한국대 화학과 출신 송아란이다.

하얀 실험 가운을 입은 채, 눈꼬리가 쓱 올라가며 귀엽게 웃고 있는 그녀.

그 순간.

김태풍은 움찔하며 놀랐다가.

이내 살짝 웃으며 대꾸한다.

“아. 실험은 잘 되고 있어?”

“아뇨. 그게…… 아직은 잘 안 돼요. 근데 오빠. 저녁은 드셨어요?”

“어. 이미 먹고 왔어.”

“치! 같이 먹자니까요.”

“미안.”

슬그머니 송아란을 피해, 자신의 자리로 찾아가는 김태풍.

그리고 이때 반대편 실험 후드 쪽으로 보이고 있는 또 다른 이질적인 모습.

정신없이 실험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여학생의 모습이 김태풍의 눈에 들어오고 있다.

한국대 화학과 출신 정민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정민지는 최형수(박사과정 1년 차) 선배 옆에서 실험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아. 아직도 좀 적응이 잘 안 돼.’

김태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기 자리에 앉고 있다.

아쉽게도 불합격 처리되어 입학이 거절된 최하영. 그런 최하영과 달리, 2년 전 광주 학회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송아란과 정민지는 지난주부터 이 랩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네이처지 게재, 듀폰사로의 기술이전, 더어크(Derck)사와의 기술이전 협상 등등.

여러 좋은 소식들로 마음이 유순해진 박한식 교수.

그가 모처럼 여학생들을 랩 학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박한식 교수가 랩에 여자 대학원생들을 허용한 것은 랩이 생긴 이래 흔치 않은 일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김태풍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기도 했다. 즉, 현실이 바뀐 것이다.

“야. 김태풍. 너 다음 주 졸업식 끝나고, 동기 모임 때, 네가 밥 사기로 했다며? 맞냐?”

김태풍이 출근하길 기다린 듯, 곧바로 김태풍한테 다가오는 동기 안성훈.

김태풍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안성훈은 잠깐 밖에 나가자고 손짓한다.

그리고 잠시 후, 1층 휴게실에 도착한 두 사람.

따뜻한 커피를 들고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수북하게 쌓인 눈들을 밟으며, 건물 뒤쪽으로 돌아갔다.

“으으~ 눈은 그쳤는데, 여전히 춥네.”

온몸으로 전해지는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며 약간 인상을 쓰고 있는 두 사람.

그러다가 안성훈이 먼저 입을 연다.

“근데 너…… 진짜냐? 조만간 미국 간다며?”

갑작스러운 안성훈의 말.

몹시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안성훈은 지금 묻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김태풍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야. 넌 어디서 그 이야길 들었어?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인마.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내가 마당발 아니냐?”

안성훈은 자신이 모르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실은, 아까 비서 누나한테서 들었어.”

“비서 누나?”

“응. 교수님이 그 누나한테 서류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던데.”

“아.”

“너 그럼 언제 가는 거냐?”

“뭐, 좀 있다가.”

“좀 있다가 언제?”

“뭐, 당장은 아니고. 아마 2학기 때.”

“2학기?”

“어. 일종의 파견근무 형식. 조만간 더어크(Derck)사와 기술이전 계약이 체결되면…… 더어크(Derck)사가 지정한 미국 대학으로 파견 나가는 거야. 일종의 공동연구. 그 대학에서 학점 같은 걸 이수하면 되니까, 박사 졸업하는 데 지장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

“야. 김태풍. 또 축하한다. 너는 뭔 놈의 일복이 그렇게 많냐?”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당장 안 간다니까.”

“하하. 고맙다. 은근히 나 생각해 줘서.”

“인마. 고맙긴? 야! 근데 나 도저히 못 견디겠다. 왜 이렇게 춥냐? 으윽~ 빨리 건물로 들어가자!”

안성훈은 호들갑을 떨었고.

이내 두 사람은 뛰어서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며칠 뒤, 석사과정을 마치게 된 김태풍은 당당한 모습으로 졸업식장에 입장하게 되었는데.

이날 김태풍은 졸업생 대표로 공로상을 받으며, 화려한 석사졸업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날 김태풍은 부모님들과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고, 동기들과도 쉴 새 없이 사진 촬영을 했다.

그런데 졸업식이 끝나고, 바로 그다음 날.

낮 시간동안 정신없이 자고 있던 김태풍.

그는 갑작스럽게도 박한식 교수의 긴급 호출을 받게 되었다.

작년에 강신혜 박사와 더불어 공동 제1저자 형식으로 네이처지에 투고를 했고.

또한, 중간에 수정 작업을 한번 거쳤던, 두 번째 네이처지 논문 원고.

그 논문 원고에 대한 최종심사 결과가 마침내 박한식 교수에게 날아왔다는 것이다.

*   *   *

“이걸 보게.”

김태풍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인쇄된 심사평가서를 김태풍에게 내밀고 있는 박한식 교수.

심장이 콩닥콩닥 뛰던 김태풍은 억지로 숨을 참으며 심사평가서를 읽고 있다. 저절로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교수님…….”

“나도 이런 경우는…… 평생에 처음이네.”

“교수님. 저도…….”

순간, 김태풍은 박한식 교수의 말을 그대로 따라할 뻔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다.

회귀하기 전에 해당하는 인생까지 합친다면, 김태풍 역시 박한식 교수처럼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김태풍은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말을 달리하고 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태풍의 지금 목소리.

몹시 떨리고 있었다.

“음. 강신혜 박사는 지금 출장이네. 이 소식을 바로 못 전해줘서 내가 좀 안타깝네. 좀 있다가, 자네가 음성 메시지라도 넣어주게.”

“네! 교수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지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는 그는 다시 한번 심사평가서를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려가고 있다.

[Dear Prof. Park.

I am pleased to confirm that your paper “Solubilized fatty acid-shielded TNP-470 derivatives highly inhibited tumor angiogenesis” has been accepted for publication in Nature.

The proofs will be mailed to you in due course by Nature Publishing Group. We appreciate your…….]

이전과 비슷해, 익숙한 문구들.

그러나 특히 저 ‘accepted’라는 영어 단어!

[accepted!

……has been accepted for publication in Nature!]

김태풍의 입꼬리는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

……그렇다!

첫 번째 논문에 이어 두 번째 논문마저 패스한 것이다.

네이처지 논문 출판허가(accept)가 날아온 것.

도대체 이런 행운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결국, 입꼬리의 거센 율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태풍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자.

안 그런 척하면서도 입 언저리가 계속 실룩대던 박한식 교수.

“으하하핫핫! 이거 도저히 못 참겠군. 이제 자네도 그만 참아. 그래. 그냥 실컷 웃으라고!”

이번만큼은 좀 근사하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박한식 교수는 결국 체면을 던져버리고.

이번에도 요란하게 소리를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자네도 느끼겠지만, 사실 두 번째가 더 기쁜 거야! 한 번은 그렇다고 쳐도, 벌써 두 번째야. 한 번은 운이라고 해도, 두 번째는 무조건 실력이지!”

“교수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니, 모든 게 다 자네 덕분인데, 내가 고마워. 하하하!”

박한식 교수는 웃으면서 계속 말을 한다. 그의 눈매는 꼭 비둘기 날개처럼 휘어져 있다.

“우리 회식은…… 아무래도 내일 하는 게 좋겠어. 강신혜 박사가 출장 마치고 내일 돌아온다니까, 다 같이 해야지. 하하하!”

물론 첫 네이처 논문 게재 확정 때와는 다르게, 방방 뛰며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실웃음이 계속 흘러나왔고, 그 웃음은 도무지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특히, 김태풍은 성공이 다시 한번 겹치자, 그 감개무량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앞선 첫 번째 논문은 작년 연말에 인쇄되어 세상에 뿌려졌는데.

반면 이 논문은 앞으로 몇 달 뒤 출판 인쇄될 예정이 아닌가.

그래서 김태풍은 이 논문을 실질적으로 박사학위 실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다.

사실, 이 실적만 가지고도, 김태풍의 박사학위 취득은 이미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을 정도로, 김태풍의 실적은 눈부시기만 하다.

이 정도의 화려한 실적이라면, 지금 당장 교수 직종으로 갈아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김태풍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

“아마 이 네이처 논문이 조만간 공개되면 말이야. 여러 제약회사들의 컨택이 빗발치게 될지 몰라.”

박한식 교수는 웃으며 그렇게 운을 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

“뭐, 다만, 지방산(fatty acid)을 화학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물질합성 과정이 다소 복잡해진 단점이 있긴 하네. 그래도 동물실험 결과들은 눈에 확 띌 정도로 확실히 뛰어나. 내가 여러 케이스들을 계속 찾아봤네만, 이 정도로 암(cancer) 신생 혈관 형성을 확실하게 차단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네.”

*암 조직의 신생 혈관 형성 기전: 암 조직은 비대하게 커지려는 습성이 있는데, 이때 신선한 양분 흡수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암 조직은 양분 수급을 원활하게 하려고 신생 혈관들을 마구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때 특정 생리 인자들이 신생 혈관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이런 인자들을 차단하게 되면, 신생 혈관 형성을 막을 뿐만이 아니라 암 성장을 억제하는 식의 암 치료가 가능하게 된다.

박한식 교수는 그렇게 후한 평가도 덧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김태풍이 완료한 이 논문 연구는 단지 네이처 논문게재 용도로써 진행한 연구이다.

그런데 박한식 교수가 그런 후한 평가를 하자, 절로 호기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김태풍은 슬쩍 반대 의견을 던져보았다.

“음. 교수님. 뭐, 우리 결과가 좋긴 하지만, 사실 신생 혈관 형성을 억제하는 항암 기전은 동물실험에선 꽤 좋은 효과가 있어도…… 뭐, 실제 임상에 적용했을 때, 효력적인 면에서 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김태풍이 그렇게 말하게 된 이유는, 아무리 훌륭한 약물이라도 실제 임상에서 뛰어난 항암 효과를 갖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2000년대에 표적치료제로 세상에 나온 아바스틴(베바시주맙). 이 약물은 암을 타깃하는 신생 혈관 생성 억제제이다.

그러나 이 아바스틴은 여러 임상시험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단독 요법보다는 기존 항암제와의 병용 요법을 통해서 항암 효능을 일부 증진시킬 수 있었다.

특히, 도세탁셀(docetaxel) 혹은 탁산(taxane) 계열 등의 기존 항암제와의 병용 요법을 통해서 항암 효능 상승을 유도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암 치료 효율을 비약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음. 그래. 뭐, 자네 말대로 암 치료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 화학 요법, 면역 요법, 방사선 요법, 등등. 하나 같이 다 힘들고, 문제점들도 아주 많아. 일부 약물에 안성맞춤인 소규모 환자들은 운 좋게 암 치료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그런 약물에 맞지 않은) 대다수 환자들은 결국 항암 치료에 실패하게 되지.”

박한식 교수는 현행 약물치료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앞으로 20여 년이 지나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뭐, 수많은 항암제들이 이미 시중에 나와 있긴 하지. 그런데 그 어떤 게 그 사람한테 맞는지, 의사들도 정확히 예측하는 게 힘들어. 그렇다고 독약 같은 항암제를 종류별로 환자들한테 다 써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그런 면에서 보면, 약물치료는 큰 딜레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그런 임상 현장의 요구들이 나날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레 암 유전자 분석법 외에도 맞춤형 항암제 관련 빅 데이터 활용법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즉,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통계 분석을 실시하고.

그 결과, 환자마다 자신한테 맞는 항암제를 합리적으로 도출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기술까지 접목이 되면, 그 효율성이 더 증가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으로 정밀한 통계 방식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환자마다 암의 생리학적인 특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간암, 폐암, 췌장암, 위암, 대장암 등등, 각 장기마다 존재하고 있는 암세포의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다가.

일부 암세포들은 다양한 형태의 돌연변이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런 암들.

그런 암들을 하나하나 치료하는 것.

정말 지독하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음. 뭐, 그런 식으로 상황이 무척 어렵다고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중요한 사실만큼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네.”

박한식 교수는 계속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특히 그런 어려운 문제라면, 그 해법도 기존과는 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되네. 즉, 천재가 갑자기 튀어나와 수학 문제를 풀 듯,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젠 수많은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풀어내는 게 아마 더 좋은 방법이 될 거라고 생각되네. 특히, 암 문제만큼은 그런 피땀 없이는 절대 풀리지 않을 거라고 예상되네. 그래서 수많은 노력들이 있어야 하고, 또 수많은 시도들이 있어야 하네. 그 과정에서 쌓인 경험들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을 거네.”

박한식 교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 가지 사례를 더 제시했다.

“뭐, 자네도 알다시피,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법을 발견하기 전에 먼 옛날부터 전해져 왔던 민간 처방법들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갈 거네.”

박한식 교수의 언급에 김태풍은 두 눈을 반짝인다.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법을 발견하기 전.

그러고 보면, 그의 접종 방식과 비슷한 사례들이 옛날부터 있어 왔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천연두(마마)에 걸렸다가 병이 나은 사람들의 옷을 빌려 와, 천연두 예방 차원에서 자신이 직접 그 옷을 입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고름을 살짝 실에 묻힌 뒤, 자기 몸에 작은 상처를 내고 바르는 방법들은 청나라 황실에서도 직접 쓴 적이 있다.

훗날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와 비슷한 우두(소가 걸리는 천연두의 일종)의 고름을 나뭇조각에 묻힌 뒤, 그걸 사람 상처에 발라 일종의 면역 접종을 했고.

그 효과가 아주 탁월해서, 천연두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방법적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음. 그렇다면 이 기술 역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데.’

결국, 김태풍은 박한식 교수가 이야기하는 점진적인 과학적 발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논문의 컨셉 역시 기술이전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마침내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박한식 교수의 방에서 나온 김태풍.

박한식 교수의 조언 덕분인지.

김태풍은 여러모로 기분이 한껏 상승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김태풍은 자신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동기들, 선배들, 후배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실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연다.

“Accept. 음. 뭐, 이번에도 운 좋게…….”

그런데 김태풍의 그 짧은 말이 끝나자마자.

“또냐? 또?”

“또 네이처?”

순간,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놀라움.

갑자기 랩이 아주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사실, 세계적인 관점에서도.

네이처 주저자 논문 2개를 낼 수 있는 과학자는 정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한우 숯불갈비 집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회식 자리.

박한식 교수와 랩 학생들은 거의 폭풍을 몰고 가듯 미친 듯이 술과 고기를 먹어댔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 노래방.

학생들과 순서를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는 박한식 교수.

자신의 차례가 오면, 박한식 교수는 목이 터지라 트로트 곡을 불러댔고.

한편으로는 춤까지 덩실덩실 추고 있었다.

“……아아~ 그리운~ 나의~ 형~제~여~!”

“우와~ 교수님! 멋집니다!!”

박한식 교수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는 학생들.

“하하하! 내 노래 솜씨가 갈수록 느는 것 같아.”

“하하. 최곱니다! 교수님!”

“하하하! 자! 그럼 이번엔 자네들 차례야.”

“네! 교수님!”

“아. 한데 김태풍. 태풍이는 어디 갔나? 김태풍! 김태풍!!”

“아. 교수님. 전 여기 있습니다.”

“어? 자네? 대체 어디 있었나? 갑자기 안 보이던데?”

“아뇨. 계속 저기 있었는데…….”

“아? 그래? 흠흠. 암튼, 아직까지 노래를 안 부른 사람이 있던데, 그게 자네 맞지? 난 아직 안 취했네. 기억한다니까.”

“아. 네. 교수님.”

“그럼 어서 빨리 하나 불러! 어서!”

안 취했다고 하지만 이미 꽤 술에 취한 박한식 교수는 극성을 떨며, 자신이 들고 있던 마이크를 김태풍에게 넘겨준다.

“근데 보자. 하하. 요즘 애들이 X세대라고 했지? 그럼 저 김태풍도 X세대인가?”

마이크를 넘기자마자 크게 비틀거리던 박한식 교수는 강민수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자리에 앉았고, 이때 랩짱 강민수는 계속 박한식 교수를 챙겨준다.

며칠 전 졸업식 때, 박사과정 5년 차 김철중과 6년 차 박정식이 동시에 박사학위를 받고 랩에서 나가자, 자연스레 새로운 랩짱이 된 강민수.

그는 얼른 대답부터 했다.

“네. 교수님. 70년대생들이 X세대가 맞습니다.”

“그럼 자넨?”

“전 아닙니다. 68년생이라서.”

“하하. 그럼 태풍이는 X세대가 맞다는 건가?”

“네. 교수님. 그 또래 애들부터가 맞습니다.”

“하하. 뭐, 그럼 그 X세대가 부르는 노래를 한번 들어볼까?”

지난 회식 때, 그때도 노래방에 갔을 때.

이 대화와 정말 똑같은 말을 했었던 박한식 교수.

다시 말해서 박한식 교수는 지금 표정이 멀쩡해 보여도, 거의 필름이 끊긴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난 회식 때도 김태풍은 이런 박한식 교수 때문에 무척 난처했었다.

왜냐하면, 실험도 잘하고, 머리도 비상한 김태풍이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지독할 정도로 노래를 못 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태풍은 이런 노래방에 오게 되면, 늘 뒤쪽에 앉아 있었고.

노래방 타임이 끝나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곤 했는데.

그러나 이럴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아야만 한다.

“야. 김태풍이 노래한다.”

“뭐? 크크크. 진짜?”

“미치겠다. 크크. 설마 저 자식 이번에도 또?”

“인마. 김태풍 18번(애창곡) 노래는 항상 그거잖아.”

“<너에게로 또다시> 그거?”

“야. 그걸 또 부른다고? 또? 하하하.”

“나 저번에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교수님만 없었어도…….”

“와~ 진짜~ 변진섭 노래가 그리 망가지는 거 처음 봤어. 크크크.”

웃으며 수군거리고 있는 선배들.

이때 김태풍은 인상을 팍 쓰다가, 슬쩍 최기호 쪽을 쳐다보고 있다.

멋지게 발라드만 부르는 녀석 안성훈. 또한, 버럭버럭 고함지르듯 노래를 부르는 배진수.

이런 두 녀석들을 제외한다면, 김태풍에게 노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최기호뿐이다.

이런 김태풍의 애절한 눈빛을 바로 읽은 듯.

최기호는 씩 웃더니 슬그머니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교수님. 근데 기호랑 같이 불러도 될까요?”

김태풍은 박한식 교수에게 양해를 구했는데.

점점 더 눈이 풀려가던 박한식 교수는 갑자기 목소리를 확 높이고 있다.

“불러! 불러! 아무거나 불러! 빨리 불러!”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러고는 김태풍은 최기호에게 외친다.

“기호야. 그럼 그거.”

미리 서로 준비를 한 듯, 번호를 바로 누르고 있는 최기호.

최기호가 번호를 누를 때마다 화면에 보이는 곡들이 바뀌다가.

어느 순간 노래방 기기 화면에 쓱 등장하는 곡.

“어?”

누군가 놀라워했다.

듀스의 <나를 돌아봐>.

……?

그리고 당황해하는 사람들.

“뭐야? 김태풍 18번 바꿨어?”

“듀스?”

“설마 춤도 추게?”

곧 석사과정 입학예정인 송아란, 정민지 등도 놀라며, 눈이 동그래지고 있었다.

곧바로 시작된 노래.

그런데 놀랍게도 최기호가 대단하다.

스테이지를 장악하며 춤을 추고 있는 최기호.

작은 체구임에도 몸이 무척 유연했다.

녀석은 그 좁은 공간을 누비며 아주 멋지게 듀스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반면 김태풍.

그는 흡사 고장난 문어 다리 같은 모습이다.

어기적어기적 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김태풍.

‘박치’는 대체로 ‘몸치’.

절대 춤을 잘 출 수가 없는 김태풍.

그는 그렇게 흐느적거리다가.

눈이 동그래져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송아란 등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마이크를 잡는다.

사실, 80년대 랩 음악들은 한국 방송에서 방송 불가 판정들을 종종 받곤 했는데.

그 이유가 음정 불안.

일반적인 랩 박자 특성을 몰라, 당시 위원들은 무식함을 숨긴 채 당당히 심의 부적격 판정을 때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당시의 랩은 빠른 것도 아니다.

그 때문인지 김태풍은 이 노래 가사에 맞춰, 랩 형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박자가 얼추 맞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듣는 사람들의 귀에는 무언가 몹시 이상하고.

또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도 듀스다운 경쾌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태풍은 나름 박자를 잘 맞춰 부르고 있었고.

한 번씩 최기호가 힘찬 발성을 하며, 김태풍을 돕다 보니.

결과적으로 곡이 끝날 때까지, 김태풍은 제법 멋지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휴! 드디어 끝났어.’

그제야 속으로 크게 안도해 하던 김태풍.

그런데 바로 그때…….

“……하하하! 이것도 멋진데? 이게 바로 X세대 노래인가? 하하하! 김태풍! 자넨 어쩜 그렇게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나? 하하! 한 곡 더 불러봐!”

술 취한 박한식 교수가 김태풍의 춤 실력, 노래 실력까지 칭찬하며 나서자.

그 말을 들은 다른 학생들은 다들 놀라며, 게거품을 물며 뒤로 넘어지고 있다.

이때 머리를 긁적이던 김태풍은 얼른 입을 연다.

“아. 그게…… 아, 맞다. 교수님! 이번엔 교수님 차례가 아닙니까? 저 교수님 트로트 노래, 아주 좋아합니다!”

김태풍이 재빨리 마이크를 건네자.

이때 박한식 교수의 입꼬리가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그는 마이크를 받아들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하. 내 노래가 좋다고? 하하. 그럼 내가 한 곡 더 하겠네. 어디 송대관이 노래 한번 찾아봐.”

학생들이 재빨리 노래 검색을 하고 번호를 누르자.

이내 경쾌한 트로트 음악 소리가 장내로 퍼져나가고 있다.

“야! 다들 일어나자!”

박사과정 선배들이 외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모두들 박한식 교수의 곁에 서서, 느린 어깨춤을 추며 그의 노래에 호응해 주었다.

그리고 이때, 누군가 탬블린을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데.

그 바람에 흥이 더 돋아났고.

이제 누구나 할 것 없이 환하게 웃으며, 이 상황을 한껏 즐기고 있다.

이런 모습들에 김태풍은 씩 웃다가, 한 번씩 박한식 교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김태풍이 과거 회사에 다닐 때도 이런 자리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마다 김태풍은 단 한 번도 마이크를 잡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회사 동기들이나 팀원들과 노래방을 가게 될 때면, 그냥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며, 애써 양해를 구하면 되는 일이었고.

회사 상급자들과 노래방을 갈 때면, 구태여 노래를 부르지 않더라도 무방한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그 옛날의 기억.

아마 본사 사장단이 연구원을 방문했을 무렵일 것이다.

당시, 신약 개발의 주역인 김태풍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김태풍은 아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하하하! 그럼 저희부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뭐, 시원하게,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이 노래부터 날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요란하게 터지는 김혜연의 히트 트로트 곡,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기술연구원 내에서 상무급 혹은 이사대우급 임원들.

즉, 하부 연구소 소장님들은.

상급자인 사장님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아주 신나게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으험~ 하던 그 사람들의 변모.

특히, 더 열심히 춤을 추고, 또 더 열심히 애교를 팍팍 날리던 어떤 소장님.

그는 얼마 뒤, 그룹 사장급에 해당되는 연구원 원장 자리까지 꿰찼게 되었는데.

역시 재롱을 좀 떨어줘야, 회사원은 출세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때 그 어떤 누구도 김태풍에게 노래 부르라고 권하지 않았다. 그런 좋은 기회를 김태풍에게 넘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우리 실험실은 다들 정말 노래를 잘 불러. 하하하! 이거 속이 다 시원해지네. 하하하!”

“그럼 교수님 이제 택시를 부를까요?”

“이봐.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있나? 우리 3차 가야지. 강민수! 빨리 좀 알아봐! 요 근처 포장마차!”

“아? 네! 교수님!”

이날 박한식 교수는 3차 포장마차까지 뛰고서, 완전히 술이 떡이 된 상태로 택시를 타고서 귀가했다.

그리고 박한식 교수를 보낸 뒤, 드디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휴! 내일 숙취가 장난 아니겠는데?”

“야. 다들 내일 점심때, 같이 해장하러 가자.”

“네. 선배님.”

“우와. 근데 저거 눈 아니에요? 눈이 또 오네?”

사실, 정확하게는 눈이 내린다는 표현을 하기가 좀 애매한 작은 눈송이들.

그 눈송이들이 조금씩 휘날리고 있는 밤.

그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은 조금씩 묘해진다.

“음. 김태풍. 다시 한번 축하한다.”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야. 이제 다들 빨리 들어가자. 가서 쉬어야지.”

학생들은 이제 지친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의 회식이 끝난 뒤,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는데.

마침내 1996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편, 학교 내에서 스타 교수가 된 박한식 교수.

그는 새 학기를 맞이하여, 이제 학기 초 화학과 교수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   *   *

“하하. 다들 방학 잘 보냈습니까?”

학과장 김철기 교수가 먼저 입을 열자.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삼십여 명의 학과 교수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씩 말을 던진다.

“뭐, 번번이 느끼지만, 방학이 정말 짧습니다. 겨울 방학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개학이라니. 허허.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아. 강 교수님. 미국 출장 잘 다녀오셨습니까? 동부 쪽에 폭설 때문에 좀 심각했다던데?”

“역시 겨울엔 어디 나다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참! 윤 교수님도 요즘 많이 요즘 바쁘시죠?”

“뭐, 과제 기획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번질나게 서울을 오가고 있지만, 뭐 공무원들 눈치 보는 게 가장 큰 일이죠.”

“하하. 최 교수님. 학회 일은 잘되어 갑니까? 이번에 부회장님이 되셨다면서요?”

“에이, 뭐! 학회 부회장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별 거 없습니다.”

“그런데 교수님들. 뭐니 뭐니 해도, 이번 기간을 가장 보람차게 보내신 분은 바로 저 박한식 교수님이 아닙니까?”

어느 순간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레 박한식 교수에게로 쏠리고 있다.

여유롭게 앉아 있던 박한식 교수.

그는 동료 교수들의 눈길이 자신한테 쏠리자,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고 있다.

이때, 학과장 김철기 교수는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학과에 다시 경사가 터졌네요! 하하! 그럼 회의 시작 전에 어디 박 교수님 말씀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박 교수님! 곧 축하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40대 후반의 나이인 학과장 김철기 교수.

그는 박한식 교수의 직속 후배다.

그러나 공식적인 교수 회의 자리라서, 박한식 교수는 김철기 교수를 쳐다보며 높임말로 대답한다.

“뭐, 조만간 제가 시간을 한번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식사 자리는 좀 천천히 하도록 하지요. 이번에 그쪽에서 강력한 엠바고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 엠바고!”

“네. 논문출판 때까지 언론 보도나 다른 행동들을 자제하라고 하더군. 뭐, 우선은 좀 조용히 지내다가, 나중에 논문출판 되면 그때 학과 교수님들 외에도 타 학과 교수님까지 포함해서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쵸. 엠바고는 지켜야죠.”

김철기 교수는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자 이때, 교수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잠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 네이처 논문이 보통 일은 아니지.”

“근데 박 교수는 대체 무슨 빽으로 그게 가능하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야.”

“김 교수. 혹시 무슨 연구 했는지 아나?”

“뭐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 안 친해요.”

“흠. 은퇴까지 8년밖에 안 남은 사람이 뭔 영화를 저렇게 다 누리는지…….”

“암튼 학과 차원에서 축하해줄 일이 아닙니까?”

“음. 그렇긴 하네만.”

겉으로는 다들 박한식 교수의 네이처지 논문출판을 축하하는 형태들이다.

그러나 묵묵히 가만히 있는 박한식 교수는 잘 알고 있다.

저들 중 절반에 해당되는 교수들은 앞으로 자신을 더 시샘하게 될 것을.

그러나 박한식 교수는 그런 데 별 상관이 없다.

자존심 강하고 자기 주장이 센 교수들.

그들 전체와 다 친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김철기 교수, 이상진 교수, 한윤섭 교수, 그래도 이들 세 교수들은 박한식 교수의 이번 네이처지 논문게재를 크게 환영하고 있는 모습들이 아닌가.

‘음. 뭐, 주는 게 있으니까, 또 받는 것도 있는 거지.’

자신을 향한 저 세 교수들의 부드러운 눈길.

저들이 저럴 수밖에 없는 건, 저들은 박한식 교수가 주도하고 있는 대형 연구과제에 묶여 있는 상태.

정부의 G7 프로젝트 내에서 특정 신약 개발 과제의 총괄연구책임자인 박한식 교수.

그 연구과제 내에, 저들은 세부연구책임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같은 팀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박한식 교수의 연구 성과가 뛰어날수록, 팀 전체의 연구 실적이 더욱 빛나게 되는 거고, 또한 자연스레 후속연구 기획 외에도 후한 연구비 배분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하. 그럼 교수님들! 잡설은 이 정도로만 하고, 이제 학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는 잡담을 허용하지 않고, 학과장 김철기 교수가 그렇게 외치자, 좌우 교수들은 조용히 입을 닫는다.

“뭐, 근데 오늘 회의 안건들이 좀 많습니다. 이거 뭐,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항상 골치가 아픕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뭐 잘되지 않겠습니까?”

그때부터 김철기 학과장은 학과 현안 설명을 시작했다.

“그럼 간단히 오늘 회의 안건부터 쭉 나열하겠습니다. 학부 지도 교수 선정 문제, 행정 업무 분담 문제, 학부 실험 재료비 분할 문제, 학부 실험 조교 선정, 연구 조교 선정, 연구 기자재 우선 구매 목록 정리, 그리고 대학원 쪽도 여러 현안들이 있습니다. 음! 뭐, 이런 것들이야 작년 수준으로 맞추면 되니까, 특별히 문제가 없을 텐데……. 아! 참! 오늘 안건 하나가 더 있네요. 이건 오늘 아침에 갑자기 교무처에서 날아온 공문인데…….”

그러면서 김철기 학과장은 공문 하나를 손에 든다.

“이걸 보려면 회의자료 뒤쪽을 보시면 됩니다. 별첨해 둔 게 바로 그 공문입니다. 그럼 먼저 그것부터 한번 보시지요.”

그러고는 잠시 기다려주던 김철기 학과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제 생각에 이건 학과 차원의 명예가 될 수 있고, 학생들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번 회의를 통해서 좀 결정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아! 김 교수님! 전 도무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게 뭡니까?”

사실 공문에 주요 내용들이 다 적혀 있는데도 꼭 한 번씩 태클을 거는 인간들이 있다.

그 바람에 김철기 학과장은 할 수 없다는 듯 공문을 가리키며 교수들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보시다시피, 이건 학생 추천을 부탁하는 공문입니다. 다가오는 과학의 날에……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장관 표창 등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대상자는 교수, 학생, 연구자. 이렇게 세분화되어 있는데, 학교 본부 차원에서 교수 추천 결정은 하겠다고 하고, 다만 학생 추천에 대해선 학과별 공문 제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다들 관심을 가지고서, 다시금 공문을 쳐다봤다.

“음. 그러면 학생 추천을 좀 많이 해서, 수상 가능성을 높이면 안 됩니까?”

누군가 다시 묻자, 김철기 학과장은 고개를 젓는다.

“여기 공문에도 적시되어 있지만, 학교 본부 차원에서 학부 학생 3명, 대학원생 3명, 이렇게 총 6명을 추천할 거라고 합니다.”

“네? 총 6명요?”

“네. 그래서 학과 추천을 하더라도 본부에서 탈락되는 경우가 생긴답니다. 즉, 학교 본부 차원에서 다시 심사를 한다는 겁니다.”

“음. 추천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군요.”

“네. 그렇습니다. 특히 타 학과 출신 학생들과도 경쟁해야 하니까요. 뭐, 학부 학생들이야 학점 기준, 외부 수상 실적 기준으로 하면 되니까, 그건 제가 학과장으로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들 동의하시지요?”

“아. 뭐, 그거야 뭐. 그건 알아서 하시면 되겠군요.”

다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철기 학과장은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대학원생 추천 건은 교수님들의 의견이 꼭 필요합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떤 학생을 추천해야 할지 그게 참 애매하긴 하죠.”

그 말에 잠시 서로 눈치를 보며, 생각이 깊어지는 교수들.

“사실, 이 안건은 제가 제일 마지막에 논의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공문 설명을 이미 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차라리 이것부터 매듭짓고, 다음 이야길 하는 건 어떻습니까?”

김철기 학과장이 그렇게 말하자, 이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교수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가장 먼저 의사 발언을 했다.

“흠! 뭐, 그렇다면 제가 먼저 의견을 내겠습니다. 김 교수님! 김 교수님은 학과장이시니까 더 잘 알겠지만, 그런 수상은 무조건 박사과정 학생으로 한정해야 합니다. 교수님들, 다들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랩에서 오랫동안 고생한 학생, 그런 학생한테 표창장을 주는 게 가장 맞습니다.”

“네! 저 역시 정 교수님 말씀에 적극 동의합니다! 많이 추천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석사보다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네!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몰고 가던 몇몇 교수들은 다시 입을 연다.

“음. 근데 저희 랩 자랑은 아니지만, 저희 랩에 있는 박사과정 4년 차 한동우. 이 친구는 지금 SCI 논문을 벌써 20개나 썼습니다. 하하하! 저도 깜짝깜짝 놀라는데, 이런 똑똑한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 한동우? 제가 봐도 꽤 똑똑하던데.”

“음. 하지만 정 교수님. 그 논문들 중에 좋은 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기껏 2페이지, 3페이지짜리 소논문이라고 하던데?”

“아니, 이 봐! 최 교수! 당신, 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논문 내는 게 다 어렵지, 2페이지짜리 논문이라고, 논문 내는 게 어디 쉬운가? 어디서 말을 그리 함부로 해?”

“음! 정 교수님, 그 말이 아니라…… 흠흠.”

“아. 교수님들! 제발 좀, 진정 좀 하세요!”

“아니, 같은 말을 해도 곱게 하든가!”

“흠! 정 교수님! 이제 좀 그만하시고 제 말도 좀 들어보세요. 교수님들! 저도 의견 내겠습니다. 괜찮죠? 네. 그럼 말씀드리죠. 뭐, 저희 방에도 좋은 학생이 한 명 있습니다. 박사과정 3년 차 최규석이라고 하는데, 그 녀석은 최근에 미국 화학회지 작스(JACS)에 논문출판도 했습니다. 뭐, 이 정도 실력이면, 대통령 표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있습니다! 저희 랩 박사과정 학생도 재작년에 독일 화학회지 앙게반테 케미에 논문을 냈는데…….”

작스(JACS), 앙게반테 케미 등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지닌 저널들이 교수들의 입에서 계속 언급되자 분위기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지금 교수들은 제자 자랑에 정신이 없다.

이때, 말없이 들으며, 간간이 메모를 하던 김철기 학과장.

그는 잠시 뒤, 어느 정도 의견 청취가 끝나자, 입을 연다.

“음. 교수님들!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학과에서 추천할 수 있는 학생 숫자가 학부 1명, 대학원생 1명, 이렇게 딱 1명씩이라는 겁니다. 결국, 학교 본부에서는 학과에서 걸러낸 사람만 추천하라는 겁니다.”

그 말에 약간 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러나 그 묘한 분위기를 깨고, 50대 후반의 정진태 교수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럼 논문 숫자대로 합시다! 작스(JACS), 앙게반테 케미,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널에 겨우 논문 한 편 낸 걸 가지고서, 뭔 연구를 했다고 합니까? 저는 논문 20개를 낸 한동우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이상의 실적을 가진 학생은 절대 없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슬그머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은 박한식 교수.

그는 곧이어 차분하게 좌우를 살핀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이제 제 의견을 내겠습니다.”

이때, 다른 교수들은 박한식 교수를 주목한다.

어쨌든 박한식 교수는 최근 학계에서 가장 눈부시게 떠오르고 있는 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가 가진 발언의 강도도 상당히 커질 수밖에 없다.

“뭐, 저는 교수님들의 의견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러나 일부분에 대해선 제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렇게 선을 그으며, 박한식 교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저는 좀 더 냉정하게 생각을 해 봤고, 그리고 아주 죄송스러운 제안이지만, 흠! 저희 랩에 있는 김태풍 군을 이번 추천대상으로 저는 제안합니다.”

“뭐! 김태풍? 김태풍이라면 그 학생? 이 봐! 박 교수! 그 친구 석사과정이잖아?”

누군가 반말 비슷하게 말을 하자, 박한식 교수도 역시 반말 비슷하게 말을 한다.

“누가 석사과정이라고 그래요? 김태풍은 이번에 박사과정에 진학했어. 그 친구는 이제 박사과정이지.”

자기보다도 나이가 어린 박한식 교수가 그렇게 대꾸하자, 흠칫 놀라고 있는 50대 후반의 어느 교수.

그러나 박한식 교수는 보통 센 사람이 아니다.

두 눈에 힘이 확 들어가자, 이내 그의 존재감으로 장내가 압도되는 모습이다.

“흠! 혹시 오해할까 싶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김태풍 군은 이제 박사과정 1년 차입니다. 그래서 박사과정 학생 요건에도 맞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김태풍 군은 네이처 논문 2건의 주저자입니다. 작년에 2백만 달러 기술이전을 한 공로도 있고, 졸업식 때 총장님으로부터 공로상도 받았습니다. 이게 과연 나을까요? 아니면 impact factor(IF) 1점대의 논문 20개가 나을까요? 교수님들께서 냉정히 평가해주십시오.”

*Impact factor(IF): 저널의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 중의 하나로써 IF가 높을수록 대체로 우수한 학술저널로 이야기됨. 현재 네이처지의 IF는 28점대에 해당됨. 그러나 IF 1점대의 논문 20개를 낸다고 해서, IF 20점에 해당되는 저널 논문과 같다고는 절대 볼 수가 없음. 즉, IF 20점대에 해당하는 저널에 논문 1편을 게재하는 것은, 평생 이루기 힘들 수도 있어 더 크게 인정을 받는 것임.

역시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한다고 하던가.

막판에 팍 치고 올라서고 있는 박한식 교수.

그동안 한동우를 강하게 주장하던 정진태 교수의 안색은 갑자기 납덩이처럼 굳어지고 있다.

사실, 은근히 박한식 교수와 그의 천재 석사과정 학생을 배제하고 싶었던 일부 교수들.

그래서 박사과정 학생으로만 추천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그런데 실상 그들은 자기 일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보니, 정작 중요한 사실, 즉, 김태풍이 이번에 박사과정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결국, 더는 논의할 거리도 없어져 버렸다.

이때, 김철기 학과장은 웃으며 말을 한다.

“하하. 뭐, 제 생각에도 박한식 교수님의 말씀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교수님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철기 학과장의 물음에 일부 교수들은 인상을 팍 쓰며 머리를 숙이고 있다.

작스(JACS), 앙게반테 케미 등등의 논문에 대해선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수들도, 네이처 논문에 대해선 도저히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의 불만도 누구의 반발도 불식하게 만드는 완벽한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네이처 논문은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음! 좋습니다. 그럼…… 우리 학과는 최종적으로 김태풍 군을 추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김태풍은 무사히 학과 추천을 받게 되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기숙사로 걸려온 학교 기획처 직원의 갑작스러운 전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네? 네?? 뭐라고요? 제가 대통령 표창 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요? 네??”

낮시간 동안 한참 자고 있던 김태풍.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기획처 직원의 목소리에.

김태풍은 깜짝 놀라며 그렇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 천재』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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