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7화 (7/153)

진학 결정

“김태풍. 넌 배낭들만 모아서 넣어줄래? 배진수! 야! 넌 뭐하냐? 빨리 저 박스들 트렁크에 좀 실어! 최기호, 너도 진수를 좀 도와줘!”

기숙사 앞.

안성훈이 렌트한 9인승 차량.

다들 정신없이 짐들을 싣고 있다.

김태풍, 안성훈, 배진수, 최기호.

그리고 랩 선배들인 조현상, 조현중.

한편, 타 랩 동기들인 김민국, 최성근.

이렇게 총 8명의 남자.

함께 1박 2일 MT를 가게 된 것이다.

작년 MT 멤버에서 변한 사람은 김민국과 최성근. 여학생 동기들이었던 한선영, 김혜정을 대신해서 그들이 이번 MT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국, 또 안면도냐?”

“혹시 모르니까, 처음 가는 데 가는 것보다, 차라리 가본데 가는 게 더 나아. 괜히 잘못 갔다가, 아까운 시간 허비할 수도 있다니까.”

“알았어. 그럼 암튼 이번엔 똑바로 가자.”

“당연하지.”

“근데 펜션은 괜찮아?”

“펜션? 뭐, 나쁘진 않겠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정에 어디 좋은 펜션에 갈 수가 있냐? 특히, 주말이라서 웬만한 곳은 예약이 꽉 찼어. 뭐, 진수가 제법 괜찮은 곳이라고 해서, 거기 예약을 해 놨는데, 가보면 알겠지.”

“뭐? 진수가?”

“응. 왜?”

“걔는 그런 거 잘 못하잖아?”

“아냐. 불안해할 거 없다니까. 야! 배진수! 그 펜션 말이야. 거기 괜찮다고 했지?”

묵직한 라면 박스 하나를 들고서 끙끙거리다가, 간신히 트렁크에 싣던 배진수.

안성훈이 부르자, 안성훈 쪽으로 다가온다.

“왜? 무슨 일인데?”

“기호가 물어봐서 그런데, 거기 펜션 괜찮지?”

“아~ 거기? 뭐, 괜찮을 텐데.”

“대답이 왜 그래? 너 혹시 거기 안 가 봤어?”

“당연히 안 가봤지.”

“퀄리티는 확신한다며?”

“야. 잔소리하지 마. 괜찮다니까. 그런 델 어디 꼭 가봐야 아냐?”

그 대답에 약간 불안해지는 안성훈.

다급히 다시 묻는다.

“근데 넌 어떻게 거길 알고서 나한테 알려준 거냐? 여름 성수기에 펜션 구하기가 별 따기나 다름없을 텐데?”

배진수는 자신의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씩 웃는다.

“다 방법이야 있지. 작년에 우리가 갔던 민박집의 할머니, 그 할머니가 추천한 데야. 그 할머니 친척이 근처에서 작은 펜션을 한다고 하더라고. 그 할머니가 다음엔 거기 가라고 추천했고, 그게 기억이 나서 전화해서 다시 물어보고, 그쪽으로 주선하게 된 거야.”

안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묻는다.

“그럼 작년 MT 때 너희들이 머물었던 그 민박집?”

“그래. 그 할머니가 센스가 완전히 넘친다니까. 너 혹시 1,000원짜리 백반 안 먹어봤지?”

“1,000원짜리 백반?”

“얼마나 맛있는데! 야! 김태풍! 성훈이한테 그 이야기해주자! 그때 진짜 맛있었지? 할머니표, 1,000원짜리 백반!”

반 팔, 반바지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있던 김태풍.

그는 트렁크를 쿵! 소리를 내며 닫은 뒤, 그쪽으로 다가왔다.

배진수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주자.

김태풍도 씩 웃는다.

“맞아. 정말 꿀맛이더라. 고작 천 원에 그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었어.”

김태풍마저 그렇게 찬사를 하자, 안성훈의 호기심은 더 커지고 있다.

“대체 메뉴가 뭔데?”

김태풍은 잠깐 기억을 되짚은 뒤, 대답했다.

“아마 고봉밥 한 그릇, 그리고 잘 익은 김치, 배추 쌈, 또 계란후라이, 그리고 간장, 된장.”

“그리고 또?”

“음. 아마 그게 전부일 텐데.”

“에게? 그게 끝이라고?”

“근데 진짜 맛있더라.”

결국, 안성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만다.

“너흰 진짜 밥 버러지냐? 그게 뭐가 맛있다고? 난 또 뭐라고! 아마 그때, 다들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었겠지? 어휴! 이런 밥 버러지들! 야! 우리 그만 이야기하고, 바로 출발하자.”

“그래. 그러자! 괜히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근데 현상이 형은 어디 갔지?”

두리번거리던 안성훈은 곧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인다.

“현상이 형! 빨리 여기 조수석으로 와서 앉아요! 곧 출발합니다! 현중이 형! 형도 빨리 와요!”

한쪽 구석.

기숙사 주차장, 한쪽 나무 아래.

눈이 벌겋게 충혈된 모습을 하고서 쭈그려 앉아 있는 조현상. 그의 등에 작은 가방 하나가 딱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조현중이 역시 쭈그려 앉아 있다.

사실, 김태풍도 그렇지만.

야간 실험을 하고 난 뒤, 미처 잠 잘 겨를도 없이 여기로 나온 상태라, 조현중 역시 눈이 다소 충혈되어 있는 것이다.

“형! 뭐 해요? 빨리 오세요!”

안성훈이 다시금 외치며 손짓하자.

그제야 조현상은 일어나, 조수석으로 걸어왔고.

그리고 조수석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금방 눈을 감고 있다.

“그럼 다 탔지?”

어느덧 운전석에 앉은 안성훈.

그는 뒤돌아보며 인원 체크를 한다.

바로 뒷좌석에 김태풍, 배진수, 최기호가 앉아 있고.

또 그 뒷좌석에는 조현중, 김민국, 최성근이 앉아 있다.

“오케이~ 모두 다 탔네. 그럼 출발할게.”

힘차게 외치는 안성훈.

그는 가속페달을 밟으며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의 동시에 눈을 감는 또 다른 두 사람.

조현중과 김태풍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

갑자기 몸이 흔들리는 듯한 거센 충격.

갑자기 차량이 덜컹거리는 바람에 흠칫 놀라며 눈을 뜨고 만 김태풍.

몇 번 눈을 찡그리던 김태풍은 다시 눈을 바로 떴다.

그리고 이때,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곧바로 고개를 돌려보던 김태풍.

그 순간, 시원한 바다 풍경이 자신의 눈앞으로 쫘악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며, 저절로 눈이 한없이 커지고 있는 김태풍.

답답한 실험실이 아니라, 저 넓은 바다를 보게 되자.

저절로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역시 바다가 좋긴 좋아.’

그 뒤, 도로를 좀 더 달린 끝에, 어느덧 좁은 비포장길로 들어섰고.

그런 과정을 거친 뒤, 비로소 작년에 왔었던 그 해수욕장 인근, 조그만 펜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 도착했다! 다들 일어나! 빨리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고!!”

운전석의 안성훈이 고함을 지르자, 비로소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을 뜨는 녀석들.

그리고 다들 안성훈의 노고에 고마워한다.

“야. 수고 많았어.”

“안성훈, 고맙다. 네 덕분에 잘 잤어.”

“짜식! 운전 한번 잘하네.”

“수고했다! 인마!”

“넌 확실히 베스트 드라이버야! 하하.”

“어! 근데 말인데…… 우리 제대로 온 거 맞아? 저거 우리 펜션 맞아?”

차량에서 내린 이들.

그런데 조금 전 활기찼던 기분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이 하룻밤 머물 펜션이 뭐 으리으리한 곳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아기자기한 멋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솔직히 말한다면, 눈앞의 펜션은 도저히 펜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냥 시골집이었다.

“음. 성훈아. 여기가 진짜 펜션 맞아?”

다소 허름해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가옥.

길쭉한 마루 너머로 큼직한 방문 두 개가 보이는데, 방 두 칸짜리 집이 분명하다.

그리고 끄트머리 쪽에 조그맣게 샛길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것 같다.

이건 아무리 봐도 펜션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저 개량된 시골집.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이때 얼굴이 하얗게 변하던 배진수가 서둘러 입을 연다.

“야!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우리가 왜 회비를 작게 냈는지 다들 아직 모르지? 여긴 8만 원짜리야. 8만 원! 이 정도 레벨이면, 괜찮지 않아?”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다들 두 눈에 힘이 막 들어갔다가.

8만 원이라는 그 말에 그 강렬했던 눈빛들이 스르륵 풀어지고 있었다.

배진수의 말대로 이곳이 겨우 8만 원짜리 펜션이었다면, 따지고 보면 이 정도 레벨의 풍경은 결코 나쁘지 않다.

하룻밤 숙박을 위해 있어야 할 시설들은 다 있는 모습들.

다만, 펜션 가격이 좀 많이 싸서 이상했으나 그럼에도 배진수를 철석같이 믿었던 안성훈.

안성훈은 머리를 뻑뻑 긁다가, 그래도 수습을 해야 해서,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함을 지른다.

“야. 그냥 우리 좋게 생각하자. 여기서 재밌게 잘 놀면 되잖아? 뭐, 마당도 넓고, 아주 좋네. 저기 평상도 두 개나 있어. 수박 잘라 먹고, 밤새 술 마시게 딱 좋아 보이네.”

이때, 김태풍도 안성훈을 돕겠다는 듯 맞장구를 친다.

“나도 괜찮다고 생각해. 여기서 잘 놀면 되잖아.”

“그래. 태풍이 말이 맞아.”

흡사 시골로 농활 하러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데.

그러나 배진수, 안성훈, 김태풍까지 그렇게 이야기하자.

할 수 없이 다들 표정들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그래. 뭐 어쩌겠냐? 우리 짐부터 빨리 옮기자.”

누군가 외쳤고, 이제 다들 부산하게 움직인다.

한편, 안성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때마침, 건넛집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50대 중후반의 인상 좋게 생긴 아줌마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쪽으로 뛰어갔다.

“저기 혹시?”

“아. 거기가 우리 작은 집을 예약한 총각인가?”

작은 집? 저게 펜션이 아니라, 그냥 작은 집?

암튼, 다행히 주인아주머니였다.

“네. 저희가 예약했습니다.”

“호호~ 여긴 구석진 곳이라 잘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용케 잘 찾아 왔네. 근데 다들 대학생들 같은데, 맞아?”

“네. 그렇죠 뭐.”

대학원생이 뭔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는 안성훈.

“그럼 주의사항만 짧게 이야기해줄 테니까 잘 들어. 그것 말고는 마음껏 놀아도 돼. 내가 귀가 좀 어두워서 잘 안 들려. 그러니까 밤에 마음껏 놀라고.”

그러고 보니까 이 주인아주머니는 정말 청력에 문제가 있는 듯, 안성훈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간단히 주의사항을 설명했고.

그 외, 부엌 위치도 알려주었다.

세탁 혹은 샤워가 가능한 작은 목조 건물의 용도도 알려주었다.

“근데 총각. 우리 이모님한테서 여길 소개를 받았다던데?”

“아. 네. 그렇습니다. 야! 김태풍! 잠깐 여기 좀 와 봐.”

안성훈이 김태풍을 부르자, 얼른 다가오는 김태풍.

“태풍아. 이 분이 그 할머니, 조카 되시는 분 같은데?”

그 말에 김태풍은 얼른 인사를 했고.

작년에 할머니 댁에서 민박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연다.

“아이고야! 이게 바로 인연이 아닌가! 그걸 또 잊지 않고, 또 여길 찾아오고. 호호호~ 총각. 내가 나중에 이모님을 한번 데려올게.”

“아, 네. 감사합니다.”

“근데 그럼 올 사람은 이제 다 온 거야?”

“아뇨. 좀 더 와야 합니다.”

아직 한국대 화학과 여학생들이 오지 않았다.

그 여학생들은 따로 렌트카를 타고서 여길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저 집으로 와. 혹시 된장, 고추장 필요해?”

“아, 아닙니다. 마트에서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걸로 체크인 같은 것을 마친 안성훈과 김태풍.

두 사람은 돌아와,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곳곳을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봤고, 부엌 상태도 점검했다.

“그럼 이쪽 방은 우리가 쓰고, 저쪽 방은 여자들한테 주자. 그리고 여기 평상을 메인으로 해서 나중에 디너 파티를 하자. 괜찮지?”

“아. 괜찮네. 근데, 성훈아.”

“왜?”

“저 형들 좀 봐. 그새를 또 못 참고, 또 저러고 있네. 좀 신기하지 않아?”

김태풍은 눈짓으로 조현상, 조현중을 가리키고 있다.

조현상과 조현중.

어느 틈에 한쪽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은 두 사람은 지금 땅바닥 개미들을 정신없이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계속 수군거리고 있다.

“……개미는 진짜 똑똑하다니까. 몸무게 전체의 6%가 뇌야. 사람은 겨우 2%에 불과한데, 그래서 곤충 중에서…….”

“형. 저 녀석 갑자기 딴 데로 가는데? 혹시 페로몬이 다른 데 뿌려졌나?”

“뭐지? 좀 두고 볼까? 근데, 사실 쟤네들 아주 똑똑한 애들이야.”

“형. 저거 봐요. 대열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요. 대체 이유가 뭘까요?”

“음. 혹시 우리를 의식하나?”

그러고는 계속 수군수군.

저대로 놔뒀다간 완전히 개미들한테 혼까지 빼앗길 것 같아, 김태풍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현상이 형! 현중이 형! 이쪽으로 좀 오실래요? 그릇 씻는 거 좀 도와주세요! 현상이 형! 현중이 형!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돌리고 있는 두 사람.

얼른 일어나, 그들은 김태풍 쪽으로 다가온다.

“그릇?”

“네. 조금 전에 부엌에 있는 그릇들과 냄비들을 다 빼서, 저기 샤워실로 옮겨 놨는데, 몽땅 다시 한번 씻어야 해요.”

“어. 알았어. 우리가 도와줄게. 현중아. 가자.”

그러고는 두 사람은 샤워실로 쓰이는 아주 작은 목조 건물로 들어갔다.

그쪽에선 그릇, 냄비, 수저 등을 씻느라, 곧 물소리들이 요란해졌다.

한편, 김태풍과 안성훈은 가져온 짐들을 다시금 확인한 뒤, 여기저기 먹을 것들을 꺼내 곳곳에 배치하고.

대충 눈으로 보면 깨끗하긴 해도, 혹시 몰라서 방, 마루, 평상 등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쓸고 닦았다.

그렇게 각자 일을 나눠 끝낸 뒤, 어느 정도 준비를 끝내자.

하나둘 평상으로 모였고.

모두 엉덩이를 대며 평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잠시 쉬면서 기다리는데.

드디어 저 멀리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대의 큼직한 차량이 이곳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선다.

“우와. 왔다! 왔어!”

조용히 외치며 눈이 동그래져 쳐다보는 남자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정차한 차량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마침내 긴 머리카락의 여학생들이 차례로 걸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와!”

자신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최기호과 배진수.

그들의 두 눈은 큼지막하게 커지고 있었다.

*   *   *

“언니. 근데 수영복이 왜 그렇게 야해?”

“야. 왜 그래? 비키니도 아닌데, 뭘?”

“내 수영복보단 좀. 힝~.”

“넌 빨리 좀 입어.”

“알았어.”

“언니, 근데 그 아이라이너 어디서 산 거야?”

“아. 이거? 저번에 백화점에서 산 건데……. 너도 할래?”

“근데 물놀이하다가 번지지 않을까?”

“난 물에 안 들어가려고.”

“그럼 나도 할까?”

“알아서 해.”

잠시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여학생들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반색한다.

반바지에 가벼운 셔츠 차림을 한 여학생들도 있고.

핫팬츠 스타일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래쉬가드 스타일의 상의를 입은 여학생들도 있다.

그녀들 중에서 가장 야한 차림은 단연 최하영일 것이다.

제법 탄탄한 하얀 뱃살. 즉, 배꼽이 살짝 드러나게 입은 그녀의 모습은 단연 압도적인데.

여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짧은 핫팬츠를 또한 입고 있었다.

“음. 그럼 다 탄 거 맞지?”

“어. 8명. 모두 다 탔어.”

운전석의 안성훈.

그는 고개를 돌려, 인원 체크를 눈으로 빨리했다.

이제 차량 두 대로 나눠서 움직일 예정이다.

펜션 위치가 해변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어.

그래서 해수욕장으로 가려면, 결국 차량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아직 서먹서먹한 상태라.

그들은 남자, 여자별로 나누어 각자의 차량에 탄 상태이고.

잠시 후, 두 대의 차량은 차례로 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곧바로 차량에서 내린 그들.

그래도 그때부터는 이제 한데 어울려, 백사장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간다.

“오빠. 이제 뭐 하죠?”

여학생들의 대표 같은 송아란이 그렇게 묻자, 옆에서 걷던 안성훈은 곧바로 대답한다.

아마 남자들끼리만 왔다면, 거칠게 백사장을 뛰어다니다가 곧장 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가 어울린 탓에, 서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음. 먼저 피구부터 할래? 태풍이가 공 가져왔어.”

“피구? 음. 뭐, 그거 괜찮겠다.”

그리고 잠시 후, 다들 샌들을 벗고서 한가운데로 모였고.

곧바로 편을 나눈 뒤 피구를 시작했다.

“야! 여기! 여기! 여기로 던져!”

“야! 뭐하냐? 안 피하고?”

“형! 뭐해요? 공을 그렇게 던져요?”

“현중이 형, 또 아웃이다! 하하하!”

“언니! 여기! 여기!”

그런데 이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한 어색함 때문인지.

거의 몸이 나무처럼 뻣뻣하고 굳어가고 있던 조현중과 조현상.

결국, 그들은 번번이 아웃되기 일쑤다.

반면, 최기호는 처음엔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다가, 조금씩 안색이 돌아왔고, 이내 다소 짓궂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갑자기 손목에 힘이 팍팍 들어가며, 전력을 다해 공을 던지고 있는 최기호.

물론 그가 공을 던져 맞추려는 대상은 다른 편 남자들이다.

“야! 최기호! 힘 좀 빼.”

“진짜 왜 그렇게 세게 던져? 금방 민지가 맞을 뻔했잖아.”

“야! 최기호! 민지가 무섭다잖아?”

“아. 미안. 하하. 죄송합니다. 야. 받아.”

어쨌든 그렇게 서로 어울리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서먹함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표정들이 한층 밝아지고 있다.

“휴. 이제 그만하고, 우리 잠깐 쉬었다가, 물놀이나 하자.”

그렇게 단체 피구가 어느덧 기분 좋게 끝이 났다.

그렇게 잠깐 쉬는 시간이 되자.

그런데 이들 무리 속에서, 금방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이들의 모습이 세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었던 것.

사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수줍음과 흡사 몸이 나무가 된 것 같은 딱딱함에 정말 어쩔 줄 몰라 하던 몇몇 사람들.

그들이 슬그머니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대열의 선봉장은 조현상.

그를 뒤따르고 있는 이들은 조현중과 배진수.

반면 최기호는 의외로 여학생들 무리에 잘 들어가, 계속 뭔가를 잘 떠들어대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 함께 잘 섞여 있는 안성훈은 그저 잘 생긴 오빠다운 모습으로, 즉 그런 존재감만으로도 여학생들의 시선을 계속 끌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이번 MT의 용병과도 같은 김민국과 최성근. 그들은 이미 각개격파를 시작하고 있는 모습들.

두 사람은 각자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아, 계속 이야기를 건네며 작업을 시작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애매한 위치인 김태풍은?

……정말 애매한 상황이다 보니, 김태풍은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조현상을 따라가기로 결정한다.

최기호가 대화를 독점하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 상태라, 자신이 그쪽에 있는 것이 좀 그랬고.

안성훈은 그저 귀공자 특유의 자신만만함으로 무장한 채, 이런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재빨리 조현상 쪽으로 뛰어가는 김태풍.

“형! 같이 가요.”

그 결과, 조현상, 조현중, 배진수, 김태풍.

이들 네 사람은 나란히 움직이게 되었다.

“형. 근데 어디 가요?”

“아…… 그냥…….”

그렇게 대충 대답하고는 조현상은 자신의 소심 솔로들을 이끌며, 저 멀리 백사장 끝쪽, 바다 바위 쪽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리에 섞여 앉아 있던 몇몇 여학생들.

그녀들은 슬쩍 두 눈을 반짝이며,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저기 좀 봐.”

“……?”

“태풍이 오빠. 저기로 가는데?”

“근데 저기 뭐가 있나 봐.”

“음. 우리 한번 따라 가볼까?”

“그럴까?”

사실, 너무 민망해서, 여학생들과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조현상.

그래서 여학생들한테서 더 멀어지려고, 지금 조용히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인데.

그런 조현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여학생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송아란과 최하영.

그녀들이 곧장 움직이자.

곧바로 일어나, 그녀들을 뒤따르고 있는 또 다른 여학생.

한국대 화학과 3학년 최소연이다.

이렇게 세 사람이 나란히 움직이자, 바로 그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안성훈과 최기호.

‘어? 갑자기 어딜?’

즉시 고개를 돌리며, 그쪽을 한번 쳐다보고 있는 안성훈과 최기호.

최기호는 지금 한창 말을 하던 중이라서, 즉시 고개를 돌렸지만.

반면, 안성훈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들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특히, 안성훈의 시선은 최하영과 최소연 쪽을 계속 오가는 중이다.

‘음. 근데 소연이가 왜 저길 가지?’

안성훈의 미간은 점점 더 좁혀지고 있다.

이번 MT에서 처음 보게 된 여학생, 최소연.

그런데 안성훈의 눈에 확 튈 정도로 그녀의 이목구비는 아주 조각 같았고, 특히 웃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인 여학생이었다.

특히,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

긴 생머리를 가진 청순하고 가녀린 여학생.

그런 조건에 꼭 부합하는 여학생이 있다면, 바로 저 최소연이 아닐까.

반면 똑같이 긴 생머리를 하고 있는 최하영은 좀 도도한 기품이 있는데.

오늘 그녀의 핫팬츠 의상과 드러난 배꼽 때문에 다소 섹시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어, 확실히 최소연과는 대비되고 있다.

‘음. 근데 아란이가…… 랭킹 3위 정도는 되는데. 뭐야? 이게 갑자기?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럼 1등에서부터 3등까지 다 절로 가 버린 거잖아.’

머릿속으로 여학생들의 랭킹까지 꼼꼼히 따지고 있었던 마당발 안성훈.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그.

그런데 지금 상황은 무척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어, 고개를 바로 하다가.

문득 안성훈은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옆에서 계속 떠들어 대고 있는 최기호.

그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성훈은 이내 표정이 일그러지고 만다.

‘으윽~! 그래. 다 이유가 있었어. 저 최기호, 저 자식 때문이야. 뭔 여자들 앞에서 아직까지 화학 구조식을 이야기하냐? 순 우라질 미친놈!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닌데. 그냥 태풍이 따라갈걸.’

뒤늦게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는 안성훈.

그런데 이 마당에 자신이 바로 일어서면, 아마 상황이 좀 묘해질 것이다.

앞서 움직인 세 여자들의 꽁무니를 뒤쫓아가는 듯한 모습.

그런 모습이 연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도한 강남 귀공자 안성훈.

그의 자존심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끄응. 내가 미쳤지. 머리. 머리. 머리. 이 머리를 바로 굴리는 건데! 아우우! 최기호! 넌 이제 좀 주둥이 좀 닥치고, 조용히 좀 해라.’

그렇게 속으로 외치다가, 결국 안성훈은 푹 한숨을 내쉬고 만다.

“어? 형.”

“……?”

“형. 큰일 났어.”

“어?”

“따라오는데?”

“응?”

“우릴 따라와.”

“어??”

“저기 봐.”

놀란 조현중이 계속 쫑알거리자, 의아해하며 뒤돌아보던 조현상.

이내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만다.

늘씬한 세 여자.

그녀들이 이쪽으로 계속 걸어오고 있다.

그때, 김태풍도 뒤돌아봤다.

최하영, 송아란, 최소연.

그녀들이다.

그런데 왜 자신들을 뒤따라올까?

김태풍은 단순히 의아했지만.

반면, 조현상, 조현중, 배진수.

그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다.

특히 제일 이쁜 세 여학생들.

너무 예뻐서.

옆에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고.

숨이 턱턱 막히는데.

그런 애들이 자신들을 뒤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숙맥!

진정한 모태솔로!

조현상, 조현중, 배진수!

갑자기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키도 작은 세 사람이 어찌나 빨리 걷는지.

김태풍은 깜짝 놀라며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형! 같이 가요.”

다시금 따라붙은 김태풍.

그리고 그사이, 그들은 결국 백사장 한쪽 끝, 다소 경사진 바다 바위들을 밟고서, 바위 끄트머리까지 가게 되었다.

바위들이 상당히 미끄러워서,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할 거로 생각하던 조현상.

그래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쳐다보다가, 다시금 눈이 동그래지고 만다.

세 여학생.

몸이 어찌나 가벼운지, 용케 잘도 따라오고 있다.

어느새 바위들 사이를 누비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녀들.

이때, 조현상은 결국 비장한 눈빛을 하며, 먼바다 파도 쪽을 쳐다보고 있다.

설마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조현상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가는 가운데.

갑자기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는 여학생들.

“아. 좀 도와주세요. 여긴 너무 미끄러운데.”

파래가 잔뜩 끼어 있어, 여간 미끄러워 보이지 않은 바위들.

그 앞에 서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귀여운 여학생들.

조현상, 조현중, 배진수는 그녀들의 갑작스러운 도움 요청에 깜짝 놀라, 그대로 바위가 되어 버렸다.

김태풍은 그들의 그런 석화 반응에 흠칫 놀랐다가.

할 수 없이 자신이라도 그녀들에게 다가간다.

“손잡아요.”

애써 웃으며, 김태풍이 손을 내밀자, 가장 먼저 손을 잡는 송아란.

“오빠. 고마워.”

그리고 최하영.

“고마워. 오빠.”

마지막으로 생글 웃으며, 김태풍의 손을 잡는 최소연.

“고맙습니다.”

이때, 손끝으로 와 닿는 부드러운 손 감촉들에 김태풍은 머쓱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들은 이미 바위가 되어 버린 조현상, 조현중, 배진수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고, 앞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일제히 고함을 지른다.

“와! 여기 너무 경치 좋다! 와아!”

“와! 좋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앗! 소리를 지르며, 미끄러질 뻔한 최소연.

깜짝 놀란 김태풍.

그는 황급히 그녀의 팔목을 잡아준다.

그리고 그 바람에 미끄러지는 것을 모면한 최소연.

큼직해진 눈으로 김태풍을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고 있다.

“큰일 날 뻔했는데, 고맙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괜찮아요?”

“네.”

“음.”

“근데 오빠.”

“네?”

“이름이 김태풍 맞죠?”

“아. 네.”

“오빠. 말 편안하게 하세요.”

“하하. 그래도 될까요?”

“네.”

“뉴스에 나온 거 저도 봤어요.”

“아?”

그리고 바로 그때, 최소연의 옆에 있던 송아란.

그녀는 작년부터 김태풍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작은 여우같은 최소연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다.

암튼, 그렇게 그곳에서 함께 주변 경치를 즐긴 뒤.

김태풍은 자신이 이들 무리의 대장이라도 된 듯.

이들을 이끌고 백사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시간 정도.

즐겁게 수영도 하고.

또 발랄하게 웃으며, 즐겁게 놀다가.

모두들 수건으로 몸을 닦고는,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새벽 5시까지.

다 함께 정신없이 술을 마셨고.

또한, 다 같이 떠들어대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도 다음 날 아침 늦게, 펜션에서 출발해서.

오후 3시쯤이 되어서야, 김태풍 등은 무사히 학교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몹시 지친 상태로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던 김태풍.

그는 그때 두 개의 음성 메시지들을 연달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송아란한테서 온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소연한테서 온 것이다.

*   *   *

“태풍아. 너 혹시 소연이랑 사귈 거냐?”

안면도 MT에서 돌아온 지, 어느덧 막 사흘이 지났을까.

안성훈은 무척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김태풍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야. 내가 어제 최소연한테 음성 보냈어. 그리고 아까 음성 메시지가 날아왔는데…….”

“음성 메시지?”

“너 진짜 모른 척할래?”

“성훈아.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래서 내가 지금 너한테 그거 묻고 있잖아.”

“뭘?”

정말 어리둥절한 김태풍.

몸을 완전히 틀어, 그를 유심히 쳐다보게 되는 김태풍.

그러나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결국, 김태풍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야. 진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지 말고 잠깐 내려가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지금 좀 졸리기도 하고.”

김태풍의 간단한 커피 제안.

안성훈은 말없이 따라온다.

그리고 잠시 뒤, 1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들었고.

남들은 잘 오지 않는,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한적한 공터 같은 그곳.

이미 밤 8시가 막 지나고 있는 터라.

사방은 꽤 어둡다.

단지 희미한 가로등 불 하나가 주변을 간신히 밝히고 있는데.

그곳에는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 그래. 음.”

타 랩 출신 몇몇 선배들을 즉시 알아본 김태풍과 안성훈.

그들은 재빨리 인사를 했고.

선배들은 대충 눈으로 아는 척만 하고는, 하얀 담배 연기를 계속 허공에 뿜어대고 있다.

두 사람은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고,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훈아, 아까 그 말 다시 해 봐. 난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잠시 김태풍을 흘겨보던 안성훈.

“인마. 모른 척하지 말고 좀 솔직하게 말해. 너 소연이랑 사귈 거냐?”

“내가 어떻게? 뭘 어떻게 사귄다고?”

이번에도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김태풍.

“최소연이 너한테 음성 메시지 넣었잖아?”

“아! 그거?”

그런데 안성훈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MT를 다녀온 날에 받았던 최소연의 음성 메시지.

“근데 그거랑 사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인마. 내가 모를 줄 아냐? 내가 어제 최소연한테 잘 있냐고 음성 메시지 넣었어. 그랬더니 걔가 뭐라는 줄 알아?”

“……?”

“너한테 음성 메시지도 보냈고 호출도 했대. 근데 왜 답장이 없냐고 그러더라. 나더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까지 하더라. 김태풍! 너 진짜 이래도 모른 척 할 거냐?”

“아. 정말 그랬어? 걔가? 하하.”

김태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다가,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야. 오해하지 마. 음성은 받긴 했어. 그냥 잘 도착했냐고 묻는 게 고작인데?”

“……?”

“뭐, 나도 답장을 해줄까 해서, 몇 번 음성녹음을 해 봤는데. 에잇! 그게 좀 이상하긴 하더라. 그래서 음성 취소를 몇 번 하다가, 결국 포기했어. 그 뒤로 따로 호출받은 건 없고.”

“너 진짜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하냐?”

“맹세할 수 있어?”

“당연하지. 맹세할 수 있어.”

김태풍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결국 한숨을 푹 내쉬는 안성훈.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를 뻑뻑 긁는다.

“아휴! 미친다. 이게 갑자기 확 답답해지네. 고작 그거였어? 그리고 넌 대체 그게 뭐냐? 아휴우. 갑자기 내가 바보다.”

그런데 저 안성훈은 갑자기 왜 자학을 하고 있지?

그러다가 눈을 치켜뜨는 안성훈.

“근데, 김태풍. 너 진짜 여자 마음 몰라?”

“……?”

“이 멍충아. 내가 웬만하면 이러지 않는데, 지금 네 말을 들어보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좀 아닌 것 같다. 야! 너 좀 너무 심하다.”

“왜?”

“인마! 그건 여자의 관심 표시잖아? 그걸 씹어?”

갑자기 돌변하고 있는 안성훈.

최소연과 사귈 거냐고 몰아붙이더니.

이제는 왜 답장을 안 했냐고 따지고 있는 안성훈.

그 바람에 김태풍은 당혹스럽다.

“씹다니? 아직 별로 친한 것도 아닌데…….”

“남녀가 친해지면, 그럼 친구냐? 아니면 애인이냐?”

“어?”

“넌 그렇게 되기 전, 썸씽(something)! 썸씽 단계도 몰라?”

“썸씽?”

“호감! 탐색! 몰라?”

안성훈은 혀를 차다가, 목이 타는지 들고 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있다.

“야! 진짜 내가 바보다! 바보! 너한테 밀린 것 같아, 아까 화딱지가 좀 났거든. 뭐 수컷의 본능? 몰라. 암튼 내가 순 병신이다. 에휴!”

안성훈의 그 말에 김태풍은 오해가 풀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은 좀 묘해진다.

“암튼 김태풍! 너 인마, 잘 생각해 보고 나한테 말해. 최소연이 진짜 마음에 들면, 내가 너 같은 순진한 놈한테는 깨끗하게 포기할게. 그리고 어떻게 데이트할지 그런 것도 다 알려줄 테니까, 빨리 마음부터 정해. 괜히 시간 질질 끌다가, 이도 저도 아닌 꼴 당하지 말고.”

“음.”

“야. 근데 그만 가자. 으엑~ 왜 이렇게 여긴 냄새가 심하냐? 여기 담배 냄새 너무 지독하다.”

더는 대화할 거리가 없어진 안성훈은 인상을 쓰며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하긴 바람을 타고서 담배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좀 심하긴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실험실로 올라온 김태풍.

김태풍은 턱을 괴고서 잠시 생각을 한다.

종이 위에 ‘최하영’ ‘최소연’의 이름을 예쁜 글자체로 한번 써 보던 김태풍.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쓱쓱 줄을 그어 그 이름들을 지워버린다.

‘음. 그래. 역시 아직은 무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텐 할 일들이 너무 많아.’

그러고 보면, 정말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각종 실험들.

그리고 단계별로 진행해야 할 다양한 투자 계획들까지.

이런 일들을 수행할 주체는 바로 자신이다.

그래서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거기다 자신은 지금 야간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자신이 여자친구를 사귄다?

“하하.”

괜히 한번 웃으며, 자신의 볼을 툭툭 치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 보면, 김태풍의 관점에서, 저 최소연의 음성메시지가 과연 관심 표시인지도 확실치 않다.

단순 호감을 표시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친한 남사친이 되려고 던진 메시지인지.

늘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을 하다 보면, 꼭 이럴 때 김태풍은 감성적인 부분이 좀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결국, 김태풍은 그런 이성에 대한 모험보다는 눈앞 현실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뭐, 걔 본심이 다를 수도 있잖아.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런 괜한 데, 중요한 시간들 뺏기지 말고, 중요한 일들부터 처리하자.’

작년에도 김태풍은 송아란의 호출을 여러 번 묵살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김태풍은 조용히 그럴 생각.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묘하다.

미끄러질 뻔하던 최소연의 팔을 꽉 잡았을 때.

큼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최소연.

그녀의 얼굴이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도 참 밝고 듣기 좋긴 한데.

‘몰라. 난 지금 무척 바빠.’

더는 생각하기를 거부한, 우리의 까칠남(?) 김태풍. 그는 다시금 펜을 잡고는 연구 노트를 쓰고 있다.

꼼꼼히 실험 계획을 짜고 있었고.

논문 레퍼런스들을 몇 번이고 챙겨서 읽어보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는 그는 잠시 눈을 감고서 명상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 그가 진행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

앞으로 수행할 연구들을 머릿속에 미리 떠올려 보고, 혹시 모를 화학반응의 위험요소들을 체크하는 방식이다.

이런 이미지 트레이닝은 운동선수들이 주로 하는 것이지만.

위험한 화학 물질을 다루고 있는 연구자들한테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특히 김태풍은 항상 머릿속으로 모든 위험 사항들을 다 떠올리며 또 상상한 뒤, 실제 실험을 수행하곤 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어떤 연구자들보다도 risk management(위험 관리) 능력만큼은 확실히 뛰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음.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우선, 이 논문들만 마저 읽고, 곧바로 실험을 시작해야겠어.’

그리고 그사이 시간은 다시 물 흐르듯 흘러갔고.

어느덧 미국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한 박한식 교수.

“야. 김태풍. 출근했어? 교수님 긴급 호출!”

김태풍이 랩에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달려온 배진수.

김태풍은 자기 자리 컴퓨터만 켜고는.

곧장 박한식 교수의 방으로 직행했다.

그사이, 눈빛이 점점 요란해지고 있는 김태풍. 궁금함이 저절로 커졌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와 미국 더어크(Derck)사 임원과의 만남. 대체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아. 교수님.”

“하하. 어서 오게. 거기 앉아.”

그리고 드디어 그의 미국 출장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교수님. 그럼 더어크(Derck)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하하. 가기 전에 걱정을 좀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네.”

“아? 그래요? 그럼 confidential(기밀) 부분 쪽은 더 신경 안 써도 되는 겁니까?”

“그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존 헨드릭 이사는 시야가 아주 넓은 사람이더군. 하하하!”

유쾌하게 웃으며, 시작부터 더어크(Derck) 임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김태풍은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곧 이어지는 박한식 교수의 설명…….

“……내가 가져간, 세포 기전 쪽 데이터와 동물 데이터들을 보고는 방방 뛰고 난리더군. 뭐, 새로운 기전의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 이게 보통 일인가? 기전 자체만으로도 혹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거야. 그 바람에 다음 미팅 날짜도 잡혔네. 하하하!”

“아. 그럼 교수님. 또 미국 출장을 가시는 겁니까?”

“뭐, 원래 그쪽에서 한국 방문을 해주면 더 좋겠지만, 아직은 스타팅 단계에 불과해. 기술을 팔고 싶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지. 뭐, 듀폰사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고. 그래도 그 회의 자리에서 NDA, 즉 기밀유지 협약(non-disclosure agreement)을 맺고 왔네.”

그러면서 박한식 교수는 서류 하나를 슬쩍 보여준다.

“아! 교수님. 이거 괜찮은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음. 그렇지만, 이 NDA가 꼭 강력한 억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럼 앞으로 어느 정도 선까지 협력하실 생각입니까?”

“하하. 뭐, 자네 말대로 NDA가 꼭 만능은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NDA 없이 다음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첫 숟가락을 밥상에 올린 격이나 다름없지.”

보통, NDA를 맺었다고 해도, 비밀유지 계약이 간혹 깨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때 손해배상 소송을 즉각 제기할 수 있는데.

그러나 문제는 법적 소송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데다가.

대단한 법무팀을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뭐, 우선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어. 샘플부터 조만간 보내야 할 것 같네. 뭐, 그쪽에서 기초 효능 실험을 직접 해 보고 싶어 하니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추가 특허출원들을 좀 더 진행해야 할 것 같네. 내 생각엔 특허 서너 개를 더 걸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특허출원 숫자가 많아지면, 특허 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특허 권리가 더 촘촘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허출원을 더 하려면, 결국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한식 교수는 김태풍에게 향후 일정에 대해서 좀 더 세세하게 설명을 했고.

그런 뒤에 이번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즉, 향후 기술이전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슬그머니 끄집어냈다.

“뭐, 이건 존 헨드릭 이사가 취중에 갑자기 뱉어낸 말이라, 비공식적인 오퍼라고 말하기도 좀 그래. 그래도 이쪽 업계 전문가인 그 사람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 뭐, 그 사람 말이, 우리 데이터 신뢰성만 확보된다면, 향후 기술이전 액수가 거의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거라고 하더군.”

그 말을 하면서 입꼬리가 쓰윽 올라가고 있는 박한식 교수. 그의 눈매 역시 지금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다.

“교수님. 그럼 대체 어느 정도 선까지 언급된 겁니까?”

“하하! 자네! 놀라지 말게나. 최근 더어크(Derck)사에서 다른 라이선스를 산 적이 있다고 해. 뭐, 타깃 질환은 우리와 달라도, 그런 전적이 있으니까 대충 견적 정도는 나올 수 있지.”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저렇듯 뜸을 들이며, 또 저렇듯 웃음을 참기 힘들어하는 걸까?

그리고 마침내 이어지는 그의 말.

“1억 달러야! 하하하! 1억 달러! 대충 그 정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하하하!”

그리고 그 순간, 김태풍은 입이 약간 벌어진다.

1억 달러라고?

현재 달러 환율을 고려한다면, 대략 760억 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현 합성 물질이 비마약성 진통제 쪽이다 보니, 학교 수준에서 계약할 수 있는 거의 최대치에 가까운 기술이전료가 언급된 것이다.

“근데 내 생각은 달라. 하하하.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이 1억 달러를 언급했으니까, 우리 물건은 그 이상의 가치란 말이야. 내 목표는 2억 달러!! 확실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더 유쾌하게 웃고 있는 박한식 교수.

그리고 그의 딜(deal) 감각에 김태풍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상대가 무의식적으로 1억 달러를 언급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쪽에선 그 이상을 목표로 갖고서, 딜을 하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음. 그 정도 수준이면, 확실히 기술을 넘기는 게 낫겠어.’

신약의 파워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김태풍.

그러면서도 신약의 저주 또한 김태풍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과거, 그가 일성그룹 수석연구원이었을 때, 자신이 합성한 신약 물질을 다국적 기업에 팔려고 추진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일성그룹 경영진들은 마지막 순간에 반대했고.

결국, 신약 개발은 쫄딱 망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 기술이전을 했더라면.

김태풍은 적어도 아파트 한두 채 값을 보너스로 받았을 것이다.

“그럼 교수님! 선급기술료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 김태풍은 2억 달러에 계속 감격해 있지 않고,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선급기술료를 언급하고 있다.

보통 1억~2억 달러 기술이전 계약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그 돈이 일시금으로 주어지는 건 아니다.

선급기술료를 제외하고는.

임상 단계별로, 다시 말해서 각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기술료가 지급되는 방식이다.

나중에 그 로얄티들을 모두 합산한다면, 전체 계약 기술료가 확정되는 셈이다.

“자넨 뭘 좀 아는군. 1억 달러, 2억 달러 식의 전체 기술이전료도 중요하지만, 우리한테 즉각 수익이 될 수 있는 선급기술료가 아주 중요하지. 뭐, 그걸 많이 받아내려면, 결국 신약 물질에 대한 포텐셜을 더 크게 인정받아야 하겠지.”

그러고는 박한식 교수의 눈가에는 웃음이 더욱 진해지고 있다.

이제 겨우 석사과정 2년 차에 불과한 김태풍.

그런데 이 친구는 아무리 봐도 너무 똑똑하지 않은가.

2억 달러라는 말에 눈이 홀라당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문제부터 그는 정확하게 따지고 있다.

이럴 땐, 상대가 학생이 아니라, 연구 파트너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아마도 듀폰과의 기술계약 경험을 이미 해 봤기 때문일까.

확실히 경험은 사람을 더욱 지혜롭게 만든다.

“뭐, 자네도 알다시피,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네. 신약 개발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임상 1상, 2상, 3상……. 갈수록 할 일들이 태산일 거네. 뭐, 듣기론 대략적인 통계치로 (신약 하나를 승인받으려면) 대략 1조 원이 들어간다고 하더군.”

실제로 전 세계를 겨냥한 신약을 출시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미국 임상시험과 유럽 임상시험을 거쳐 가는 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임상시험 절차의 엄격함 때문에 미국 임상시험, 유럽 임상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임상 비용 역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산고를 반드시 거쳐야만, 위대한 블록버스터 약물은 실험실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질 거네. 그쪽에서 요구하는 부분들도 갈수록 많아질 거고. 뭐, 보통 사람들은, 신약 그래서 뭐? 고작 합성한 거? 뭐 이제 성공했네? 이러고 말겠지만, 그게 절대 전부가 아니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실험을 더 해야 하고, 또 부작용 측면 때문에 화학구조를 몇 번이고 더 바꿔야 할지 아무도 몰라.”

박한식 교수의 말을 들으며, 김태풍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과거, 미국 FDA 임상시험 허가 서류를 준비할 때도 김태풍은 거의 실신할 뻔했다.

얼마나 많은 서류를 준비해야 했고, 또 얼마나 많이 검증해야 했던가.

수많은 전문가가 자신을 도와주긴 했지만.

실무자로서 김태풍은 정말 고된 일을 겪어야 했다.

잠시 후, 김태풍은 아주 밝은 표정을 하고서 박한식 교수의 방에서 나오고 있다.

비록 비공식적인 예상치에 불과하지만.

대략 2억 달러 가치로 추산되고 있는 기술 가치.

여기서 즐거운 점은, 김태풍의 지분이 대략 10%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 즉, 핵심 아이디어를 낸 박한식 교수의 지분은 대략 45%.

나머지는 학교 몫으로 학교가 가져가게 되는데.

그래서 2억 달러, 현재 환율 가치로 대략 1,500억 원에 해당하는 이 돈의 총 10%라면, 대략 150억 원의 돈이 김태풍의 몫으로 떨어지게 된다.

만약 이 신약이 정말 성공한다면, 단 한 번의 도전만으로 김태풍의 인생이 확 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김태풍에겐 이게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메드TX가 발행한 스톡옵션의 행사일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고.

미국주식투자 역시 황금빛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가능성이 그의 두 손에 놓여 있다보니.

김태풍은 좀 더 운신하기가 편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음. 생각보다 일들이 갈수록 흥미진진해. 하하. 이런 판국에 실험실을 나가는 것도 좀 그렇고……. 차라리 여기서 박사학위를 하는 게…….’

로얄티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신약 개발. 그리고 이 과정에 참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취득할 수 있는 박사학위.

아직 진학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던 김태풍.

그러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는 기분이다.

*   *   *

“야. 김태풍!”

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 화요일.

밤늦은 시각인데도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던 최기호.

최기호는 한참 실험하고 있던 김태풍의 옆으로 다가와, 투덜거리듯 말을 시작하고 있다.

“야아. 나 진짜 미치겠다. 요즘 왜 그러는지 몰라. 하던 실험마다 다 꽝 나고 있어. 미치겠다. 이거.”

자신의 키에 맞지 않게 좀 큼직한 실험 가운을 입고 있는 최기호.

그는 오만상을 쓰며 김태풍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근데 태풍아. 너 그거 언제 끝나냐?”

“아? 이거? 거의 다 끝났어. 야. 잠깐만.”

마지막 반응기 세팅까지 마치고, 후드에서 조심스레 손을 빼 내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는 최기호를 쳐다본다.

“근데 또 실험이 꽝 났다고?”

“크으~ 계속 그래. 석사졸업 논문도 곧 써야 하는데, 나 큰일 났다.”

“음. 그럼 내가 좀 도와줄까?”

“으으으. 좀 그래 줄래?”

“야. 알았어. 지금 당장 이야기하자. 나 지금 시간 괜찮은데.”

그러나 최기호는 바로 고개를 젓는다.

“지금 말고. 그거 끝났으면, 옆 방으로 가자.”

“어? 옆 방? 왜?”

“진석이 형이 오라는데. 야식 같이 먹자고.”

“뭐? 야식??”

김태풍은 어깨를 약간 움츠린다.

약간 싫은 표정.

하지만 모처럼 밤늦게까지 실험하고 있는 최기호.

최기호는 지금 이 순간 아주 출출할 것이다.

그런 최기호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래. 가자. 가.”

김태풍은 피식 웃고는, 끼고 있던 실험 장갑들을 조심스레 벗고 있다.

그러고는 손을 꼼꼼하게 씻는 김태풍.

곧이어 두 사람은 나란히 옆 실험실, 한윤섭 교수님 랩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그곳에는 사람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와! 보쌈 아냐?”

절로 탄성을 지르고 있는 최기호.

정말 군침을 만들어내게 하는 야식 풍경.

그게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대’자 크기의 보쌈 고기.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포기김치.

새우젓갈, 쌈장, 상추, 쟁반 막국수 등도 눈에 띈다.

“야. 어서 와! 어서!”

이번 야식의 호스트는, 옆 방 한윤섭 교수님 랩, 박사과정 김진석, 박윤희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김태풍, 최기호, 조현상, 조현중. 이들 네 사람.

김태풍과 최기호는 즉시 인사를 한 뒤, 야식 대열에 끼었다.

“근데 공석(장공석)이 그 자식! 일찍 퇴근한 거 맞지?”

“네. 공석이 형, 이미 퇴근했어요.”

“진짜 다행이다. 하하~ 오늘은 좀 천천히 먹을 수 있겠어. 내가 닭 다리 하나 뜯고 있는 동안, 그 녀석은 야식판을 초토화시켜 버려.”

역시 야식킬러 장공석다운 모습.

“야. 다들 먹자. 윤희야. 너도 먹어.”

김진석과 박윤희는 랩 선후배 사이지만, 일종의 실험실 커플이다.

김진석이 박윤희를 그렇게 챙겨주자.

단발머리 여자 선배 박윤희는 피식 웃고는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냠냠냠. 야. 근데 태풍아. 냠냠~ 넌 박사과정 원서는 냈냐?”

“네?”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그런데 김태풍의 대답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자.

실눈을 하고서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는 김진석.

“어?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네?”

“인마. 너 지금 ‘네?’라고 대답할 일이 아닌데?”

김진석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지고 있다.

“우리 방 애들은 저번 주에 다 냈어. 원수접수 마감이 곧 아냐? 내가 듣기론 이번 주 수요일까지라고 하던데?”

“아. 그게…….”

“뭐야 이거? 최기호, 너는?”

이때, 최기호 역시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그러자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진석.

“니네 방, 대체 뭐냐?”

“……?”

“인마! 그러다가 군대 끌려가! 야! 조현상! 넌 대체 뭐 하고 있어?”

조용히 상추쌈 위에 보쌈 고기를 올리고 있던 조현상.

갑자기 불똥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그는 슬쩍 고개를 든다.

그리고 슬쩍 웃으며 입을 여는 조현상.

“……형. 그거……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인마. 그게 무슨 말이야?”

“쟤…… 신의 아들(군면제자).”

“어?”

“태풍이는…… 돈.”

“돈??”

김진석은 바로 이해를 못 해 되물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조현상.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 맞다! 맞아!”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있는 김진석.

“그거? 기술이전료?”

뭐,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김태풍의 기술이전료.

김진석은 탄성을 지르더니, 이내 자신의 머리를 탁탁 친다.

“아. 쪽팔려! 내가 번데기들 앞에서 주름잡고 있었네! 야! 윤희아! 오빠 대갈빡 좀 한 대 때려줄래. 정신 좀 차리게.”

“왜 그래? 오빠.”

박윤희는 눈을 흘기며 조용히 말했고, 김진석은 깔깔 웃으며 다시 입을 연다.

“그럼 말이야. 둘 다 박사과정 할 생각은 없냐?”

질문이 조금 바뀐 상태.

이때, 김태풍과 최기호는 서로를 한번 쳐다본 뒤, 차례로 입을 연다.

“음. 저는 좀 고민 중이었는데…….”

“그래서?”

“뭐, 아무리 생각해도 딴 방법들이 없는 것 같아서…… 내일 원서 접수하려고요.”

“야. 최기호! 너 그거 잘 생각했다. 그럼 태풍이 너는?”

이때, 살짝 미소를 보이고 있던 김태풍은 간단히 대답한다.

“네. 저도 기호처럼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오? 이 녀석들! 혹시 막판까지 쪼고 있었냐? 암튼 그럼 둘 다 박사과정 들어오는 거네?”

그렇게 두 사람이 다 박사과정 진학을 하겠다고 하자, 환하게 웃고 있는 김진석. 그리고 그때부터 박사학위 선배들의 진로에 대해서, 설교처럼 쫙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한편, 이 순간.

김태풍은 잠시 자신만의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고 있다.

‘그래. 뭐 이걸로 확실히 정리하자. 신약 개발 건도 있으니까, 앞으로 딱 2년 6개월. 그래. 무조건 이 기간 안에 박사학위를 받자.’

그렇듯 김태풍은 마침내 진학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다사다난했던 1995년은 따뜻한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6년!

메드TX의 주가가 무섭게 치솟기 시작하는, 1996년 2월을 김태풍은 어느덧 눈앞에 두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