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약
그리고 어느덧 1995년 7월 하순.
[I am pleased to confirm that your paper has been accepted for publication in Nature.]
이 영문 문장의 감흥은 아직도 김태풍의 마음을 설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김태풍의 두 번째 논문도 드디어 네이처지에 투고되었다.
즉, 강신혜 박사와 더불어 김태풍의 이름이 나란히 공동 제1저자로 명기가 된 논문 원고(manuscript).
이 논문 원고에 대해서 향후 어떤 심사 결과가 나올지, 절로 가슴이 두근거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논문 원고의 원래 투고 계획은 7월 중순이다.
그러나 네이처지 논문게재 확정 사실이 학교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박한식 교수는 동료 교수들 외에도 보직 교수들에게도 불려 다니며.
쉴 새 없이 술을 마셨고.
그 바람에 마음이 붕 뜬 탓에 투고 일정이 다소 늦어진 것이다.
“근데…… 정말 잘 되겠지?”
투고가 끝나자, 강신혜 박사는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다.
좀처럼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은 지, 수시로 김태풍의 자리로 와서 계속 수다를 떨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논문이 만약 채택이 된다면, 강신혜 박사는 한국에서 교수가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게 된다.
여자 과학자라는 편견 때문에, 스탠퍼드대 박사학위 출신자라는 이력을 가졌음에도, 한국 대학교수가 되는 게 무척 힘든 상태인 강신혜 박사.
그러나 네이처지 논문 출판이라는 이력은 그런 편견마저도 완벽하게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아까 교수님이 포닥실에 오셔서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뭐, 이번에도 역시 큰 기대를 걸 만하다고 하셨어.”
“네. 근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있지. 호호~ 다른 게 아니라, 호킨스 교수님한테 그 원고를 미리 보내봤대. 그 논문 원고를 본 호킨스 교수님께서 큰 찬사를 보내셨다고 하더라고. 호호호.”
그 이야기를 하면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강신혜 박사.
그녀는 지금 기대감이 무척 크다.
하긴, 네이처지에 논문을 투고한 과학자들은 누구나 다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서, 한동안 잠을 설치고 말 것이다.
반면, 김태풍은 첫 논문게재를 확정지은 터라.
그나마 부담감이 좀 덜한 편이다.
“하하. 박사님. 잘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믿어. 꼭 잘되어야 하고.”
그렇듯 활기차게 이야기하던 강신혜 박사.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표정을 약간 바꾸고 있다.
슬쩍 자신의 안경테도 만지던 그녀.
그리고 좀 더 진지한 표정을 하면서 다시 입을 연다.
“근데 너…… 음…… 박사과정 진학할 거 맞지?”
“네?”
“듣기로는 원서 접수 기간이 곧 있을 거라고 하던데?”
“아.”
“특별한 일 없는 거 확실히 맞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박사님?”
“음. 교수님이 왜 그러시는지 몰라도, 좀 걱정을 하시더라고. 그렇지만 넌 군 문제도 있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아? 석사 마치고 취업할 건 아니지?”
그러고 보니 어느덧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원서를 넣어야 할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실, 이 학교는 입학 원서 제출 날짜가 다른 학교들보다 좀 빠르다.
물론, 박사과정 입학은 석사과정보다 좀 더 쉽게 입학 허가가 떨어지게 되는데.
반면, 동시에 입시가 치러지게 되는 석사과정은 그 경쟁률 자체가 아주 높은 편이고, 그래서 입시 경쟁 역시 아주 치열한 게 사실이다.
전국 대학 각 학과 수석 혹은 차석들. 이런 이들이 대거 석사과정 입시에 지원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학 경쟁률이 더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사과정 입시만큼은 석사과정을 이미 거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실질 경쟁률이 그리 높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잠시 후, 강신혜 박사가 돌아간 뒤, 김태풍은 이내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박사과정 진학 결정을 해야 하는 것.
아마 과거였다면, 별다른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곧바로 박사과정을 선택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
자신의 사고와 역량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고.
김태풍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강렬해졌다.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쉽게 박사과정을 포기하는 것 역시 나름 큰 아쉬움이 남게 된다.
바로 네이처 논문 게재!
당장 박사과정을 포기하게 된다면, 아마 강신혜 박사와의 공동 논문 이후, 다신 그 맛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흡사 그 맛은 가히 천상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여기에 큰 장단점이 있다.
그런 논문 게재의 달콤함에 취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은 학자의 길로,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음. 네이처 때문에, 교수 직종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러고 보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이젠 슬그머니 떠오르게 되는 새로운 진로.
만약 자신이 대학교수가 된다면?
그건 아마 색다른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다 바쳐 교육자로서.
또한,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아마 때로는 무척 무료할 수도 있을 거고.
때로는 무척 활기찰 수도 있을 거며.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키워나가는 큰 보람을 톡톡히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태풍의 마음 한구석에 강하게 남아 있는 또 다른 열망.
그런 열망만큼은 교수 직종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음. 신약. 그리고 회사. 그리고 성공.’
김태풍은 턱을 괴고서 계속 생각을 거듭하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쳐다본다.
어느덧 저녁 6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시각.
“야. 김태풍. 우리 저녁 먹고 올게. 실험실 잘 지켜.”
마치 시각을 알리는 괘종소리처럼, 늘 똑같은 어조로 이맘때 들려오는 목소리.
동기들은 이제야 저녁을 먹으러 나가나 보다.
이미 저녁을 먹고 랩에 출근한 김태풍.
그는 씩 웃고는 검정 볼펜을 손에 꼭 잡는다.
이미 실험실은 더없이 조용해지고 있다.
‘그래. 이렇게 얻은 기회인데, 그런 평탄한 삶을 사는 건 절대 나랑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종이 위에 글자들을 적어나가던 김태풍.
곧이어 탁! 소리를 내며, 볼펜을 내려놓는다.
‘그래. 난 아직 젊단 말이야. 이제 겨우 24살.’
아마 박사학위 기간을 앞당겨, 3년 만에 학위과정을 마무리한다면.
27살에 박사학위 디펜스(defense)를 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28살 초반에 박사학위자가 된다.
혹시 그걸 좀 더 많이 앞당길 방법은 없을까.
문제는 결국 코스웍이다.
이 코스웍은 결국 박사과정 졸업에 필요한 이수학점을 충분히 채우는 것인데.
매 학기 들을 수 있는 학점 수가 학칙에 따라 제한이 있다 보니, 현실적으로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대신에 2년 6개월 만에 학위를 받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실제로 김태풍의 선배 중에 그런 경우가 과거에 있었다.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런 일화.
김태풍은 그 이야기를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흠. 자네, 졸업할 때가 이제 됐나?”
“네. 교수님. 저도 이제 졸업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연차도 꽤 되었고.”
“흠. 그래? 그렇다면 박사 논문이랑 디펜스를 한번 준비해 봐.”
“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흑흑흑.”
연세가 많아, 학문 외의 다른 쪽에선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던 어느 노교수.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랩 대학원생들의 숫자도 너무 많다 보니.
어떤 때는 누가 누군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학생을 박사과정 5년 차로, 그 노교수는 갑자기 착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겨우 박사과정 3년 차, 즉 5학기째를 다니고 있던 어느 박사과정 학생.
이후, 그는 박사학위 논문작성을 신속하게 마무리했고.
박사학위 디펜스(심사)까지 무사히 치러냈다.
그렇게 박사학위 디펜스가 끝나자.
이때, 박사학위 심사위원들은 뒤늦게 탄성을 지르며 이렇게 말들을 했다고 한다.
“와! 그럼 이 친구는 2년 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따는 거군요? 하하. 최 교수님. 정말 대단한 제자를 뒀습니다. 하하하!”
“근데 이 친구가 발표한 논문은 고작 2편인데. 뭐 이렇게 일찍 졸업시키려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그렇게 외부 심사위원들까지 떠들어대자, 뒤늦게 깜짝 놀란 노교수.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시대 보통 교수들은 학생들의 실력을 믿지 못해 박사학위 졸업을 많이 늦추는 게 사실인데.
그러나 노교수의 헷갈림과 건망증 때문에, 그 학생은 무려 5학기(2년 6개월)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박사학위 디펜스가 끝나는 그 날까지.
그 학생은 지도 교수님이 이 사실을 혹여 알까 봐 아주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무사히 졸업하는 데 성공했고.
놀랍게도 그건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음. 그래. 2년 반이면, 그리 긴 편도 아니고…….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다른 식으로도 병역 문제를 마칠 수가 있는데…….’
물론 대한민국 남자답게 즉시 군대를 가는 옵션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태풍은 군 복무 시간들이 다소 아깝기만 하다.
특히, 군 복무가 아닌 다른 식으로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들이 제도적으로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그런 제도를 자신이 억지로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태풍이 생각하는 대안은 바로 신약 개발 벤처 메드TX.
과거 그 회사의 스톡옵션을 받으면서, ‘비상근 고문’ 직책을 형식적으로 받았던 김태풍.
그런 김태풍에게 서정철 사장은 회사가 갖고 있는 병특 전문연구요원 TO도 주겠다고 과거에 제의한 바가 있다.
그 루트를 김태풍이 타게 된다면, 좀 더 빠르게 김태풍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땐 박사학위 취득과는 멀어지게 된다.
‘흠. 근데 박사학위가 꼭 나한테 필요한 걸까?’
이런 생각들은 사실 회귀 직후부터 계속해 왔고.
지금도 계속해 오고 있는 오래된 고민거리다.
문제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신약 개발 일이란 게, 박사학위자한테 유리한 점이 꽤 많다는 것이다.
‘그래. 좀 더 생각을 해 보자. 아직 시간들이 좀 더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이 점점 길어지는 사이, 어느덧 땡볕 무더위가 강렬한 8월 초순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야. 김태풍. 근데 넌 날마다 야간조 생활을 하려면, 좀 답답하지 않냐?”
“뭐, 답답해도 이제 좀 적응이 됐어.”
“근데 밤에 무섭지도 않냐?”
“하하. 전혀 안 무서워. 현상이 형이랑 현중이 형도 있고. 랩에 불이 다 켜져 있는데 뭐가 무서워?”
“음. 그럼 나도 야간조나 한번 해 볼까?”
“인마! 안성훈! 그건 잘 생각해라. 야간조 생활이 그냥 몸을 망치는 길이야.”
“왜?”
“그냥 나 좀 보라니까. 슬슬 살들이 붙고 있어.”
“아.”
“요즘 공석이 형이 실험에 미쳐, 새벽 3시까지 실험하고 있잖아? 그 바람에 야식 같이 먹어주느라, 난 죽겠다. 크윽~!”
“그래. 너 살 좀 찐 것 같다.”
“그게 최대 단점이야. 이 나이에 돼지가 되면, 큰일인데.”
“하하! 잘 관리 좀 해. 운동도 좀 하고. 하하. 야! 근데 그건 그렇고…… 우리 올여름에도 작년처럼 MT 한번 가지 않을래?”
“뭐? MT?”
갑자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안성훈.
그리고 그의 말에 김태풍은 곧장 지난여름 MT를 떠올리며, 쓴 미소를 짓고 만다.
“설마 이번에도 저번처럼? 야! 그러다가 이번에도 또 어긋나서 서로 바보 되게?”
“그땐 진짜 최악의 경우였고, 이번엔 절대 그럴 수 없지!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되게 웃겼다. 하하하!”
뒤늦게 안성훈도 신나게 웃는다.
그러고 보면, 작년 여름, 2학기 개학을 일주일 앞두고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1박 2일 번개 MT를 다녀왔다.
목적지는 안면도.
그때 두 팀으로 나눠서, 택시를 타고 안면도까지 갔는데.
조현상이 중간에 사고를 치는 바람에.
두 팀은 그날 밤 서로 만나지 못했다.
결국, 2팀으로 쪼개져 따로 놀아야 했던 한 여름밤의 추억.
그때 MT를 갔던 멤버들이 바로 김태풍, 안성훈, 배진수, 최기호…….
이들 외에도 조현중, 조현상.
그리고 타 랩 동기들인 한선영, 김혜정 등이었다.
“근데 이번에는 그때랑 좀 다르게 해 보려고.”
“어떻게?”
안성훈이 눈빛을 반짝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이번 MT는 무조건 동기들만 데려가고. 또 미팅을 겸해서 하려고.”
“뭐? 미팅?”
“그래! 크크. 당연히 1박 2일이고, 미팅을 겸하는 자리. 너도 그렇지만, 내 동기들이 다들 솔로잖아. 다들 사는 게 힘들어 보이고. 그래서 내가 특별히 신경 한번 쓰기로 했어.”
서울과고 출신에 잘생긴 안성훈.
그는 이번 MT에 마당발이 되겠다고 스스로 자원한 것이다.
“너, 아란이 알지?”
“어?”
“송아란.”
“아.”
작년 학회 때 만났던 한국대 화학과 여학생 송아란.
작년에 3학년이었던 그녀는 이제 학부 4학년일 것이다.
“걔가 우리 학교 석사과정에 곧 지원할 거라던데?”
“뭐?”
순간, 깜짝 놀라는 김태풍.
“그리고 최하영, 정민지도 알지?”
“아! 알지.”
그녀들 역시 한국대 화학과 학부생들.
작년, 광주 학회 때 안성훈의 소개로 인사를 하게 되었고.
이후, 학회 때마다 여러 번 만나다 보니, 그녀들을 대하는 게 좀 더 편안해진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특히 최하영은 김태풍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학생.
그러나 모태솔로인 김태풍에겐 무척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최하영에겐 남자 친구가 이미 있었다.
그렇게 최하영은 물 건너 가버렸지만.
또 다른 여학생인 송아란은 한때 김태풍에게 묘한 흑심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김태풍은 자기 이상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송아란의 삐삐 공세를 여러 차례 묵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안성훈은 그런 여학생들을 언급하고 있다.
“놀라지 마. 하하. 최하영과 정민지도 우리 학교에 지원할 거래.”
“진짜? 근데 왜? 한국대에서 학위 하지 않고, 왜 여기까지 내려오려고?”
“같은 학교에서 계속 공부를 하려면 좀 지긋지긋하잖아.”
“음. 그래도.”
“어쨌든 그 애들은 우리 학과 후배가 될 가능성이 아주 커졌어. 그래서 우리한테 좀 더 잘 보이고 싶나 봐. 하하. 그래서 자기 동기들하고 후배들까지 챙겨서, 1박 2일 MT에 우릴 따라오겠다네. 크크. 그러니까 그 자리는 미팅 아닌 미팅 자리가 되는 셈이지.”
“아.”
이제야 안성훈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는 김태풍.
“그럼 몇 대 몇으로?”
“8:8.”
“인원이 좀 많은데?”
“그 정도는 돼야 MT가 아니겠어?”
“뭐.”
“그래서 최대한 빨리, 함께 갈 사람들을 물색해 봐야 돼. 물론 현상이 형, 현중이 형은 절대 안 데리고 가려고.”
그러나 이때 김태풍은 바로 고개를 젓는다.
“야! 그러지 말고 웬만하면 그 형들 데려가자. 넌 모르지? 그 형들이 밤마다 무슨…… 아, 아니다. 하하! 이건 그냥 내 부탁으로 해서, 두 사람 꼭 데려가자. 꼭 부탁한다.”
두 사람을 어떡하든 챙겨주려고 하는 김태풍.
그러나 안성훈은 인상을 팍 찡그린다.
“나도 뭐 그 형들이 아주 편하긴 한데, 그래도 그건 좀 더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더군다나 진수랑 기호 의견도 물어봐야 하고.”
“아니. 내가 진수와 기호한테는 꼭 양해를 구할게.”
“어? 진짜?”
“그래. 그래서 네 의견은 어때?”
“음.”
결국, 긴 한숨을 내쉬고 마는 안성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안성훈은 손을 젓는다.
“야! 알았다! 인마! 진수와 기호가 동의한다면, 나도 동의하마. 뭐, 네이처 제1 저자님이 원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냐?”
결국, 웃으며, 동의를 해주는 안성훈.
이번에도 김태풍 덕분에 조현상, 조현중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김태풍은 야간조의 의리만큼 꼭 지킬 생각인 모양이다.
‘그래. 현상이 형, 현중이 형. 이 두 사람. 평생 미팅 같은 걸 처음 해 보게 될 텐데. 절대 빼놓고 갈 순 없지.’
성품 좋은 두 사람을 이번에도 김태풍은 잘 챙겨주고 있다.
* * *
한편, 지난 1994년, 대한민국의 여름은 지독하게 무더워 최고 온도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비록 올여름은 덥긴 했지만, 작년 폭염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각 방송사 9시 뉴스에서는 대한민국의 무더위보다는 미국 시카고 현지에서 벌어진 폭염 사태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었다.
-……설마 여름 무더위가 이처럼 살인적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 시카고 기상 예보 책임관 폴 캐스필드 씨는 이번 폭염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시민들에게 야외 활동 자제와 수분 섭취를 권고하며…….
그러고 보면, 지난 7월 중순, 미국 시카고의 수은주가 섭씨 41℃까지 치솟아 버렸다. 그리고 그 여파로 무려 700여 명에 이르는 폭염 사망자가 발생한 것.
이런 뉴스 보도들이 한참 이어지는 것을 가만히 시청하던 최기호.
그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안성훈에게 불쑥 입을 연다.
“날씨가 더워서 사람이 죽다니, 이거 진짜 엄청나네. 저긴 진짜 심각하게 덥나 보다. 야. 저걸 보면, 우리도 꼭 여름 피서를 가야겠어.”
“최기호. 그러니까 내가 여름 MT를 이야기한 거잖아.”
“그럼 그 준비는 잘 돼 가고 있냐?”
길쭉한 소파에 완전히 누운 채, 두 팔로 팔베개를 하고 있던 안성훈.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작은 키에 큼직한 얼굴. 그리고 유난히 두꺼운 안경알을 끼고 있는 최기호.
저런 최기호는 배진수와 체격이 무척 닮았지만, 입술이 더 얇고 길어, 평소 썩소(썩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거기다가 그의 눈빛도 더 시크하다.
“MT 날짜도 얼추 정했어. 다음 주 토요일, 일요일. 그 날짜, 괜찮지?”
“어? 다음 주? 토요일은 교수님이 계시잖아?”
“야. 괜찮아. 그날 아침에 교수님이 미국 출장 가신다잖아. 뭐, 우리한텐 아주 잘 됐지.”
“우아! 그거 절묘하네. 그럼 그때 현상이 형, 현중이 형도 데려갈 거지?”
“뭐, 태풍이가 난리잖아. 그리고 너도 동의했다며?”
“흠. 뭐, 부탁하는데 안 들어줄 수도 없고. 설마 별문제 없겠지?”
“그건 태풍이가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태풍이가 알아서 하겠지 뭐.”
안성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고.
잠시 후 최기호는 다시 입을 연다.
“근데 최하영이가 그렇게 이쁘다며?”
“어?”
“정말 걔가 그렇게 이뻐?”
“야. 넌 그걸 어떻게 알았냐?”
피식 웃는 최기호.
“아까 태풍이랑 자판기 커피 마시다가, 태풍이한테서 들었어.”
“하하. 그래. 하영이가 한 외모 하지.”
“근데 태풍이는 최하영 이야기만 계속하던데?”
“야! 최기호. 넌 혹시 그때 눈치 못 챘어?”
“뭐?”
“인마! 넌 딱 봐도 몰라? 눈치도 없냐?”
“뭔 눈치?”
“내가 학회 때 태풍이랑 한국대 여학생들을 몇 번 봤잖아. 근데 태풍이가 걔를 쳐다보는 눈빛이 좀 다르더라고.”
“뭐? 그럼 관심이 있다는 거잖아?”
“그러면 뭐에 써먹냐? 인마! 최하영이한텐 남친이 있다고.”
“뭐?”
“하하. 그러니까 솔로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니까.”
“이유?”
“남친 있는 여자한테 왜 눈독을 들이냐고!”
“야. 너 진짜 좀 너무한다?”
“뭘?”
“그런 걸 어떻게 아냐? 그런 게 딱 보이냐?”
“인마! 그런 걸 눈치채야, 나 같은 프리 러브의 세계로 들어온다니까.”
“이게! 진짜 죽으라고! 네가 무슨 프리 러브냐? 너 요즘 삐삐 오는 게 몇 개나 되냐? 내가 다 알아. 인마!”
“음.”
석사과정 말년 차가 되다 보니, 요즘 실험을 정신없이 하고 있는 안성훈. 그 결과, 여사친들과의 관계가 많이 소원해진 상태다.
그런 자신의 요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최기호. 그런 최기호를 잠시 흘겨보다가, 이내 씩 웃으며 말을 한다.
“암튼 너도 잘 준비해 봐. 혹시 모르잖아? MT 갔다 와서, 너한테 여친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흠. 근데 내가 그게 가능할까? 에이! 몰라!”
이내 발버둥을 치는 최기호.
그러고 보면, 이런 여름 무더위는 참으로 묘하다.
한겨울에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
꼭 여름 무더위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는데.
그러나 이런 땡볕 더위를 몸으로 마주하게 되면.
결국, 냉수와 냉과류,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한편, 바깥 날씨는 여전히 무더운 가운데, 어느덧 8월 중순이 되었고.
박한식 교수는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미국 출장을 앞두고, 김태풍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어서 오게. 거기 앉게.”
김태풍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 박한식 교수는 활짝 웃으며 김태풍을 반겼고.
곧 표정을 진지하게 하더니, 연구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바로 시작하고 있었다.
“음. 이번 출장 때문에 자네를 급히 불렀네. 자네가 합성한 이 신약 후보 물질들 말이네.”
“네. 교수님.”
“이번 미국 출장 때, 미국 대학들을 좀 돌아다니면서 세미나 강연을 좀 하겠지만…… 뭐 중간에 더어크(Derck)사의 존 헨드릭 이사와 만나, 기술 미팅 역시 갖기로 했네.”
“네?”
미국 더어크(Derck)사의 존 헨드릭 이사?
김태풍의 눈이 약간 커진다.
미국 더어크(Derck)사는 다국적 제약기업으로 전세계 매출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한 곳이다.
그런 거대 기업의 임원과 미팅이라.
박한식 교수는 좀 더 신중하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아마 우리 연구 데이터를 보게 된다면, 헨드릭 이사도 크게 놀랄 거야. 다만, 그 감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나도 확실치가 않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신약후보 물질은, 박한식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서 연초에 김태풍이 합성에 성공했던 물질이다.
이 신약 후보 물질의 화학구조 분석, 물성 분석, 세포실험 등의 연구는 지난 몇 개월간 김태풍이 주도했고.
반면, 동물실험 부분은 또 다른 포닥인 장태일 박사가 전담해주어, 연구가 빠르게 궤도에 오른 게 사실이었다.
“뭐, confidential(기밀)하게 우리 실험 정보를 전달할 테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나로선 좀 우려하는 부분들이 좀 있네.”
“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특허권을 설정해두긴 했네. 하지만, 그렇게 큰 회사라면, 비슷한 포맷의 물질합성 정도는 금방 해내지 않겠나? 그냥 우리 특허권을 가볍게 무력화시키면서 말이야.”
“아. 그건…… 음. 무력화라…… 아! 아닙니다! 교수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어떻게?”
“이미 총 30종의 유사 물질합성도 완료했습니다. 그 물질의 화학구조 전부가 특허 출원서의 실시예에 들어갔습니다.”
“뭐, 그렇긴 하지.”
“특허 청구항들도 아주 세심하게 설정했고. 특히, 실시예로 기술된 것들이 제법 방대합니다.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결과적으로 특허 권리 범위 역시 꽤 포괄적입니다.”
“뭐, 공을 들여 그렇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 돼.”
“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뭐, 현재로서는 더어크(Derck)가 얍삽한 짓을 안 했으면 좋겠네. 아마 자네는 잘 모를 테지만, 학계에서 이런 소문들이 파다해.”
잠시 김태풍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을 잇는 박한식 교수.
“저번에 졸업한 최상준 박사 말이야.”
……최상준?
“그 녀석 가문인 저 한성화학. 거기가 요즘 좀 문제야. 대학에서 나온 신약 기술들을 가로채는 데, 요즘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쯧쯧! 대기업들의 기술 도둑질은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니야.”
음. 요즘에 그런 일이 있었나?
김태풍은 정색했다.
그리고 재빨리 머리를 굴린 뒤, 입을 연다.
“교수님.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뭐, 자네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있나?”
“그냥 제 생각입니다.”
“말해 보게.”
“제 생각엔, 더어크(Derck)사만 방문할 게 아니라, 다른 미국 제약회사들도 같이 방문하시는 건 어떨까요?”
“다른 회사들도 같이 방문하라?”
“네.”
“음……. 하지만 그건 현재로선 무리지. 그렇게 빨리 스케쥴을 잡긴 힘들어.”
“이번 출장에 꼭 포함할 필요는 없습니다.”
“뭐?”
“다른 회사와도 미팅이 주선되어 있다는, 그런 언급 정도만 띄우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여지를 알게 된다면, 괜한 짓을 섣불리 하지 못할 겁니다.”
“음. 그 말은 일리가 있군. 좋네. 그 부분은 고려해 보겠네. 그런데 뭐, 이런 것들을 꼭 보면 말이야. 결국, 이 바닥도 다 인맥이란 말이야.”
인맥?
“내가 저 더어크(Derck) 쪽에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그래서 좀 불안한 거지. 서로 친한 상태였다면, 내가 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나. 그래도 존 헨드릭 이사가 평판이 나쁘지 않다고 하니까, 우선은 한 번 만나보고, 상황을 봐야겠네.”
“근데 교수님. 그럼 이번 미팅에서 기술이전까지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게 바로 우리 최종 목적이 아닌가? 그러나 단박에 되긴 힘들 거야. 뭐, 나중이라도 일이 잘 풀리게 된다면, 아마 듀폰에 기술이전한 거보다, 족히 몇십 배는 더 받을 수 있을 거야.”
지금 박한식 교수는 큰 기대를 하고 있다. 반면, 김태풍은 그런 기대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다.
자신이 합성한 신약 물질이 대체 어느 정도까지 가치가 있을지, 김태풍은 무척 궁금한 것이다.
사실, 김태풍이 회귀하기 전, 그때는 이 물질 연구를 김태풍의 후배가 도맡아 했는데.
안타깝게도 물질합성에는 실패했다.
이런 류의 연구는 정말 손을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근데 이건 정말 새로운 기작이라서, 임상에서 대체 약효가 어느 정도까지 나올지, 그걸 도무지 예상하기가 힘들단 말이야.’
새로운 형태의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 이게 바로 박한식 교수와 김태풍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일이었다.
보통 비마약성 진통제는 아세트아미노펜(일명 타이레놀, 음주 후 복용하면, 간 손상 부작용이 있음) 계열과 NSAID(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 계열로 나누게 된다.
특히, 간 독성 부작용을 가진 아세트아미노펜의 대항마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NSAID 계열의 진통제.
이 NSAID 계열의 진통제들은 대체로 COX-1 혹은 COX-2 효소를 저해하는 기작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다시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COX-1 효소는 진통 효과와 관련된 거 외에도 위점막 보호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만약 COX-1를 저해하는 진통제를 쓰게 된다면, 자연스레 위점막 보호 효과가 떨어져, 위궤양 등의 위장 질환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반면, COX-2 효소를 저해하는 진통제 쪽은 심혈관계 부작용이 심각하다.
그러다 보니, COX-1 혹은 COX-2를 애매하게 저해하는(즉, 비선택적) 진통제들이 시장에 많이 나와 있고.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아스피린,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록소프로펜, 덱시부프로펜, 케토프로펜 등이 해당이 된다.
그러나 이런 진통제 역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부작용들을 동반하고 있어서(그래서 보통 아스피린을 먹으면, 위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통제 개발은 제약 시장에서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 핫이슈이기도 하다.
‘만약 이 새로운 기작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추가 병용 요법도 가능해진단 말이야.’
보통, 진통제를 복용할 때, 비슷한 종류의 두 가지 이상의 진통제 약물 복용은 거의 금기시된다.
일례로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에 속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약물을 만약 동시에 복용하게 된다면, 간 손상이 더욱 심각해지고.
NSAID 계열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약물들도 동시에 복용하게 된다면, 위장 출혈 위험이 아주 커지게 된다.
그런데 구태여 이런 병용 요법을 학계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약물이 동시에 인체에 들어갔을 때, 두 약물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한 특별한 시너지 효과가 간혹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약효 상승이라는 추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병용 요법은 훗날 제약 시장에서 다양한 복합제제(두 가지 이상의 약물들이 함유된 정제) 치료제 개발로 불타오르게 된다.
그러나 현재 전임상(동물실험)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김태풍의 현재 연구결과로는 아직 병용 요법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현 단계의 동물시험에서, 이 신약물질의 새로운 기전 가능성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게 사실이었다.
“이 데이터들을 한번 보게. 며칠 전에 장태일 박사한테서 받은 건데, 장 박사가 일을 참 꼼꼼하게 했어. rat(쥐) 혈액을 가지고 분석한 건데, 여기 보면, 3-compartment 모델로 약동학(pharmacokinetics) 분석을 아주 잘해냈네. 현재 나온 Cmax 값이나 tmax 값이 기존 진통제와 비교해서도 나쁘지 않아. 거기다가 추가로 기초 약리 효능 분석들도 아주 잘해냈어.”
다만, 이곳에서 얻은 동물 시험 결과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성공 가능성을 담보하는지, 박한식 교수도 김태풍도 확신할 수가 없다.
진통제 분야의 전문가 혹은 임상경험 전문가들이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박한식 교수의 방을 나오고 있는 김태풍.
그런데 김태풍의 표정이 뭔가 묘하다.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 과거와는 확실히 차이가 날 정도로…….’
그러고 보면, 김태풍의 주변에 이런저런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좀 더 일 자체가 다이내믹해진 것이다.
듀폰, 하버드대. 그리고 이제 다국적 제약기업 더어크(Derck)까지.
어쩌면 조만간 더어크(Derck)와도 관계가 생길지도 모른다.
‘음. 교수님이 더어크(Derck) 쪽 이사를 만나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근데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볼 게 더 많아질 것 같은데?’
묘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김태풍.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사르르 피어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