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4화 (4/153)

파종의 시기

계좌에 찍힌 현금 8억 4천만 원.

아마 내년 종합소득세 신고 때, 세금이 더 나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때까지 여유가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어느덧 1995년 6월 중순.

김태풍은 작년부터 강신혜 박사와 진행하고 있던 공동연구, 즉 TNP-470 물질의 변형체 연구를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순수 TNP-470 약물과 대비해서 무려 10배 이상이나 뛰어난 암 주변 혈관 생성 억제 능력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 강신혜 박사는 다각도의 분석시험을 실시했고, 특히 스탠퍼드대 화학과, 분석 화학 분야의 박사학위 출신자답게 아주 꼼꼼한 분석 연구들을 수행해주어, 김태풍을 무척 만족시켰다.

“그럼 강 박사님. 이제 이 데이터들을 교수님한테 보고하도록 하죠.”

“그래. 이제 그럴 때가 됐어.”

“그럼 언제쯤 할까요?”

“아. 사실, 그 때문에 낮에 교수님을 잠깐 뵙거든.”

“그래요? 그래서요?”

“잠깐 이야기를 했더니, 교수님은 지금 당장 데이터들을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하하. 아마 무척 궁금해하실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 8시쯤, 그때 교수님 방으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씀드렸어.”

“8시요? 그렇게 빨리요?”

“너무 빨라?”

“아. 아뇨, 그냥 나쁘진 않네요.”

“그럼 나는 저녁 먹고 올 테니까, 그때 봐서 같이 가보자.”

“네. 그러시죠. 박사님.”

야간조 생활 중이라 김태풍은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다.

강신혜 박사는 저녁을 독신자 기숙사 아파트에서 먹은 뒤, 곧 랩으로 복귀하겠다고 한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러고 보면, 아직 싱글인 강신혜 박사.

뛰어난 지적 능력에 외모도 나쁘지 않은 30대 초반의 그녀.

그러나 이 시대 기준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저 그녀는 단순 노처녀인 것이다.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게 되면, 결혼을 못 하게 된다는 속설.

그런 속설 때문에 과거 그녀는 스탠퍼드대 유학을 가기 전에 아주 심각할 정도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학문이 좋아, 과감히 미국 유학 생활을 선택했고.

이후 금의환향하듯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는, 아니, 한국 과학계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인식이 절대 좋지가 못했다.

‘뭐, 할 수 없지. 유교적 문화가 아주 심각한 사회니까. 그 유교적 문화 때문에 과학 역시 단순 용접 기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으니까.’

이미 철 지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흔히 알만한 사람들은 다 들어봤다는 그런 일화.

버스를 타고 가던 두 친구.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자,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친구가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며 묻는다.

“이봐. 학생은 어째 그렇게 교육을 잘 받았을까? 그래, 학교는 어디에 다녀?”

“네. 할머니. 저는 X남대 다닙니다.”

“오~ 진짜 좋은 학교를 다니네. 그럼 너는 어디에 다녀?”

“네. 저는 한국연구기술원에 다닙니다.”

“어? 기술? 기술이라…… 쯧쯧쯧! 이거 어떡하나? 착한 녀석이 공부를 많이 못 했나 보네? 그래도 기술이라도 배워서 돈이라도 잘 벌어야지. 열심히 해.”

물론 연세 많은 할머니가 뭘 알까 싶냐 만은, 안타깝게도 이맘때 이런 사회적 인식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충분히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게 큰 문제일 것이다.

특히, 유교적 문화가 너무 강렬한 탓에, 유교 학문의 대학자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으면서도.

세종대왕 때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을 단순 천민 취급하고 있는, 그런 인식들이 은연중에 민간에 많이 남아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니 뛰어난 천재 과학자 혹은 유명한 과학자들은 좀 더 나은 대우를 해주고, 좀 더 많은 보장을 해주고 있는 해외로 이탈을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신분보장, 고액연봉보장, 복지보장 등의 이유로, 미국 대학교수 혹은 미국 연구소 등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이 꽤 많은 게 사실이었다.

물론 학자는 돈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명예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올곧은 선비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현대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

그럼에도 아직도 망령같은 조선 시대 유학적 관념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과거 서양은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 군사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고.

반면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최고 능력을 지닌 교수들에게는 수억 원, 수십억 원의 연봉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대학들이 미국, 유럽 대학들과도 같이 늘어나야 하고.

스포츠 선수한테만 수십억 원의 연봉을 보장할 게 아니라.

뛰어난 과학자들한테도 그런 연봉을 보장할 수 있는 기업적 토대도 반드시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음. 뭐, 그러니까 그 일본지사장이 나한테 고액 연봉 이야기를 계속 운운하는 거겠지. 흠. 그치만 더는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은 하나하나 일을 신속히 마무리 짓는 게 더 중요해.’

그리고 잠시 후, 강신혜 박사가 랩으로 돌아왔고.

어느덧 8시가 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박한식 교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음. 그러니까 이 TNP-470을 화학적으로 변형시켰다고?”

“네. 교수님. 여기 데이터를 보시면…….”

그때부터 시작된 아주 길고 긴 대화.

박한식 교수의 질문이 있을 때마다.

김태풍과 강신혜 박사는 번갈아 가며 설명을 이어나갔고.

때로는 박한식 교수는 날카로워진 눈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며, 별의별 질문들을 쉴 새 없이 투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주 노련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박한식 교수의 의문들을 꼼꼼하게 풀어주었고.

그런 긴 노력 덕분에 박한식 교수의 얼굴에는 어느덧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하.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한데 김태풍 자네는 말이야.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을 텐데, 언제 여기까지 손을 뻗쳤나?”

어느덧 실험 데이터 설명이 마무리되자.

이제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박한식 교수.

“아. 그게…… 교수님. 뭐 이쪽 분야도 괜찮은 아이디어가 될 것 같아서…… 단순 연구를 진행하게 됐지만,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강신혜 박사님의 도움이 아주 컸던 게 사실입니다.”

“하하. 강 박사가? 그래! 강 박사는 포닥이라서, 특히 이런 식으로 일을 해야 돼.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게 연구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 그러고 보니까, 자네들은 내 입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다들 알아서 일을 잘 하고 있었군그래. 뭐,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일을 내팽개치고, 딴 일만 하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고. 뭐, 이번 일은 백퍼센트 환영일세. 그래서 말인데, 그럼 누가 이 논문을 작성할 텐가?”

드디어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때, 김태풍과 강신혜 박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열고 있는 강신혜 박사.

“음. 교수님. 이 아이디어는 결국 태풍이한테서 나온 거니까, 제 생각엔 태풍이가 제1저자가 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2저자도 만족합니다.”

그러나 박한식 교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아이디어가 김태풍한테서 나왔다고 해도, 이 실험 과정을 꼼꼼히 살펴보니까, 강 박사의 역할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어. 이런 많은 데이터들을 뽑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강 박사의 역할이 아주 컸다는 거야. 그렇지 않나? 김태풍?”

“네? 아, 네. 교수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생각엔 자네 두 사람을 한 번에 묶어서, 나란히 공동 제1저자로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에 흠칫 놀라고 있는 강신혜 박사.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과학계는 협업의 빈도가 늘어나면서 공동 제1저자 형태로 저자들이 표기되는 논문들이 갈수록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현 시대에서는 그런 경우가 흔치 않았다.

하지만 개별 사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한 판단 능력이 있는 박한식 교수.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해서 바로 공동 제1저자라는 묘수를 떠올린 것이다.

흔히 공동 제1저자라는 것은, 제1저자, 즉 주저자로 명기될 사람들의 연구 공헌율이 동등한 선상에 있을 경우, 즉 누구 한 명을 제1저자로 명기하기가 힘들 때, 두 사람 이상을 공동 제1저자로 명기하게 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가 제1저자의 명예를 같이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교수님.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결코 이의 사항이 없습니다.”

김태풍이 그렇게 흔쾌히 동의하자, 박한식 교수는 씩 웃는다.

“근데 말이야. 그쪽 저널 편집자들이 그런 일을 인정해줄지 모르겠어. 음.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내가 호킨스 교수를 통해 압력을 한번 가해볼 생각이네.”

그 말에 김태풍과 강신혜 박사도 씩 웃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인맥의 힘일까.

“그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논문작업을 진행해 봐. 앞으로 완성까지 한 달이면 충분하겠지?”

이때, 김태풍과 강신혜 박사는 다시금 서로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때, 강신혜 박사가 이번에도 대표로 입을 연다.

“그럼 교수님. 한 달에 작성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교정하는데 1~2주 정도 잡으면, 적어도 7월 중순에는 투고할 수 있겠군. 자! 이번 일은 다들 수고가 많았어! 하지만 마무리까지 잘 해 보자고. 알겠지?”

“네! 교수님!”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박한식 교수의 방을 나온 두 사람.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근데 박사님. 교수님은 모든 게 다 좋으신데…… 절대 교신저자 자리만큼은 절대 내려놓지 않으시네요?”

묘한 생각이 들어, 슬쩍 김태풍이 묻자.

이때, 강신혜 박사는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그건 네가 교신저자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런 거야.”

“네?”

“교신저자는 그 연구에 들어가는 연구비를 책임지고 있어. 그리고 연구 전체를 관리, 감독하는 역할이야.”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뭐, 거기에다가 아이디어를 내거나 실험지도까지 더해진다면, 더 확실해지겠지. 그런데 이번 논문에서 교수님은 아이디어 부분과 실험지도 부분 기여도가 좀 부족하긴 했어.”

잠깐 고개를 끄덕이는 김태풍.

그러나 강신혜 박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우리 랩 박사과정 학생들도 그렇고, 석사과정 학생들도 그렇지만, 박 교수님이 정확하게 이거이거 실험해라 이런 식으로 지시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잖아?”

“네. 보통 그렇긴 하죠.”

“보통 사람들의 식견으로는, 지도교수라면 반드시 실험지도를 철저히 해야 하고, 교육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네.”

“물론 그런 학교들 역시 많이 있어. 하지만 이 학교에서는 그런 류의 지도를 하게 되면, 학생들이 결코 성장하지 못해. 그냥 학생들이 교수님 입만 쳐다보게 되잖아. 교수님이 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하게 되는, 독립성과 창의성이 상실되는 그런 상황. 뭐, 호킨스 교수님 랩도 그렇지만, 박한식 교수님 역시 뛰어난 교육적 자질을 갖추고 계셔. 그게 바로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학문적 길을 찾아가도록, 두 분 모두 현명하게 그 길을 유도하고 계시는 거야.”

“네?”

“가장 먼저, 학생들의 실험 데이터가 나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주시잖아. 그러면서도 랩미팅 때, 데이터를 난도질하고, 또 학생들을 학문적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잖아. 그게 왜 그런 줄 알아?”

“네?”

“훌륭한 교수는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뭘 모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해 주는 거야.”

“음.”

“그래야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는 거야. 그 과정에서 독립적, 창의적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거고. 참고로, 우리가 하고있는 학문 분야는 명확한 답이 없어. 해답지가 있는 보통의 수학 문제와 다르잖아. 너도 알다시피, 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답은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가야 하는 거잖아.”

“네. 박사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김태풍은 연구자로서 지난 생을 살았지만, 교육자로서의 삶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박한식 교수의 교육 철학.

그런데 강신혜 박사의 말을 듣고 보니, 대략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박한식 교수는 미친 사람 같이 데이터들의 허점을 찾아내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찾아내려고.

거의 2시간 남짓 데이터들을 사정없이 해부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성격상 꼼꼼한 면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 교육을 하려고 시도했던 게 분명했다.

물론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럼 박사님. 이제 논문작성을 시작해 보죠.”

“그래. 그럼 우선 내가 서론(Introduction) 초안을 한번 작성해 볼 테니까, 너는 그동안 데이터들을 세련되게 정리하고, 또 컨셉 그림도 그리고, 또 실험방법 부분도 정리해줄래?”

“네. 그럴게요.”

웃으며 두 사람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복도에서 헤어졌다.

강신혜 박사는 곧장 포닥실로, 김태풍은 도로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은 김태풍.

그는 슬쩍 턱을 괴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가.

곧이어 빈 종이에다가 이것저것 적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적는 것은 자신의 실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투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음. 그러니까 지금 해외 투자를 하려면, 현행 투자 한도 때문에 그게 문제란 건데. 하지만 내년이 되면 그 투자 한도가 자유화(물론 개인은 5억 원 이상 해외주식투자가 되면, 국세청 통보가 됨)가 돼서, 해외 투자가 더 쉬워질 텐데. 하지만 지금 당장이 문제란 말이야. 뭐, 결국 방법은 전문 투자사를 통한 간접 투자.’

그리고 그 순간 김태풍은 벤처캐피탈(VC)에서 일하고 있는 강길남을 떠올리고 있다.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VC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해외 투자 일도 한다고 했다.

‘그럼 그쪽을 통해서 미국 투자, 즉 넷스케이프 주식 쪽을 노려보자.’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면서, 김태풍의 입가에는 슬그머니 야릇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다.

1994년, 마크 앤드리슨에 의해 창업된 넷스케이프.

이 넷스케이프는 1995년 8월, 상장이 된다.

당시, 주가 28달러에서 시작해서, 당일 오후가 되자마자 75달러로 급등하게 되는 넷스케이프.

이날 장이 마감했을 때, 넷스케이프의 총 기업 가치가 무려 5배나 높아진 30억 달러에 육박하게 된다.

이 넷스케이프의 돌풍은 점점 더 부상하고 있는 미국 IT 닷컴 버블의 서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긴 넷스케이프가 한때 대단했으니까.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나오기 전까지 시장 점유율이 근 90%에 달했을 정도니까.’

아마도 자신이 상장 즉시 투자를 진행한다면, 아마 10배 혹은 20배 정도의 이익을 기대할 수가 있다.

대략 8억 원의 10배라면, 80억 원이나 된다.

그래서 김태풍의 두 눈은 더없이 반짝이고 있다.

*   *   *

1995년 6월 하순.

김태풍은 고속버스를 타고서 수원에 도착했고, 하룻밤을 집에서 머문 뒤, 다음 날 11시쯤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강길남을 만났다.

어느덧 29살이 된 강길남은 김태풍의 선배다.

작년 가을에 만난 뒤, 근 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

그래도 같은 실험실 출신임에도.

강길남은 김태풍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있다.

그의 묘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갑자기 무슨 일로 보자고 했죠?”

커피 주문을 마친 뒤, 바로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전화상으로는 긴 이야기와 상담을 할 수가 없어, 김태풍은 비로소 자신의 미국 투자 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강길남은 그런 김태풍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한 번씩 묘해진 눈으로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다.

“음. 사실 저번 기술이전 기사를 저도 신문에서 봤는데, 그럼 그때 받은 로얄티를 미국증시에 투자하겠다, 그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웃는 강길남.

“보통 사람들은 그런 큰돈이 생기면, 은행에 잘 묻어두고서 이자만 잘 챙기는데, 미국 주식투자라…… 뭔가 다르긴 좀 다르군요?”

“네. 제가 그쪽에 좀 관심이 있습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지금 현행법상 개인이 수억 원대의 미국증권투자를 하는 건 불가능해요.”

“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 만나려고 했던 거고?”

“네.”

“하긴, 꼭 법대로 할 필요는 없죠.”

그 말에 이번에는 김태풍이 웃는다.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요?”

“뭐, 편법을 여러 개 만들 수는 있어요. 저희가 투자금 형태로 자금을 받아서, 펀드형식으로 미국증권투자를 해 볼 수도 있으니까……. 거기다가 저희 회사는 홍콩에 따로 지사가 있어서, 자금 흐름만 잘 맞춘다면, 그런 투자쯤은 좀 더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럼에도 이건 간접 투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은 이해하죠?”

“네. 뭐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수수료가 좀 많이 떼이게 될 텐데, 그건 괜찮을까요?”

그러면서 강길남은 원금보장이 불가능하다는 조건 외에도 수수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수수료율은 크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증권거래를 할 때, 반드시 증권회사 중개가 필요한 터라, 이때도 수수료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음. 그럼 약정 기간은 어느 정도 생각하죠?”

“네. 1년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1년이라…… 뭐, 그건 나쁘지 않네요. 그 정도라면, 제가 회사에 이야기를 한번 던져볼 만하고…… 뭐, 좋습니다. 그럼 자세한 사항에 대해선…… 제가 따로 정리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선배님.”

그렇게 미국 넷스케이프 주식투자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때, 강길남은 두 눈을 다시금 반짝이며, 슬그머니 입을 연다.

“그런데 이번 기사들이 아주 크게 터졌는데, 정말 앞으로 벤처 창업을 할 생각인가요?”

작년 가을에 만났을 때, 김태풍은 자신의 포부에 대해 슬쩍 귀띔한 바가 있다.

즉, 김태풍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벤처 창업.

과거와 같은 삶을 살기 싫은 김태풍은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고.

그게 바로 창업을 한 뒤, 자신만의 회사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태풍의 과거 삶은 오로지 일성그룹 수석연구원, 그 단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오로지 일성그룹을 위해 그는 미친 듯이 일을 했고, 또 연구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단지 유효기간이 있는 회사 부속품에 불과했다.

사직권고를 받기 전까지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지만, 결국 잘리고 나서야 그는 그 현실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 내 회사가 있어야 한다. 내 회사가.’

그래서 김태풍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벤처 창업.

“음. 뭐, 아직은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그 부분들을 생각해 볼 생각입니다.”

“네. 그렇긴 하겠죠. 아직 군대 문제도 있을 테고.”

“네.”

“어쨌든 이번 언론 보도 같은 이력들을 차근차근 모아가다 보면…… 훗날 벤처 창업할 때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말씀해주신 그거.”

“네?”

“아, 벤처 창업과 투자유치 할 때, 창업주의 개인 이력과 명성이 중요하다! 이런 말씀들, 저한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궁금해지는 게, 투자유치가 꼭 필요할까요?”

“아…… 투자유치요? 하하. 뭐, 잘 아시겠지만, 자기 자본만 충분하다면, 순수창업을 해도 되겠죠. 그런 게 아니라면, 투자유치는 필수적이고.”

“그래서 다시 궁금해지는 게, 만약 제 자본으로만 창업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김태풍의 물음에 강길남은 이내 씩 웃는다.

각진 얼굴에 다소 안색이 창백한 강길남.

그럼에도 한 번씩 반짝이고 있는 그의 두 눈에는 묘한 광채가 도드라지곤 한다.

한때 박한식 교수의 애제자이자, 박한식 교수 실험실 내에서 천재 학생으로 불렸던 강길남.

그는 과거, 최상준, 박정식과의 트러블 때문에, 박사과정 중간에 자퇴를 하고서 실험실을 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지적 능력은 여전해 보였다.

“음. 먼저 그 전에…… 아마 이 이야기는 잘 알겠지만, 제가 그때 최상준, 박정식하고 안 좋게 엮이는 바람에, 실험실에서 쫓겨나는 험한 꼴을 당했죠.”

투자유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들을 꺼내고 있는 강길남.

그러나 김태풍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흠. 제가 요즘에도 느끼는 거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 같아요. 언제든 변심을 하는 게 사람이고, 특히 자기 욕심에만 취해 중요한 순간들이 오면, 자기 잇속만 챙기고 남들을 무시하는 그런 경우들…… 안타깝게도 사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상황에서 백치같이 허둥거렸다가, 결국 그런 허무한 일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런데 지금 강길남이 언급하는 일은, 과거 강길남과 관련된 실험실 데이터 조작 사건이다.

올 2월, 박사학위를 받고서 대학원을 졸업했던 최상준.

이 최상준은 대기업 한성화학 최진태 사장의 아들이자, 한성그룹 로얄패밀리 일원이기도 하다.

이런 최상준의 곁에 붙어, 자기 잇속만을 챙기고 있었던 박정식(현재 박사과정 6년 차, 현재 랩짱).

박정식은 자신의 출셋길로 여기고 있던 최상준을 위한답시고, 눈에 가시와도 같았던 강길남에게 해코지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들이 정말 있었는지는 아직도 객관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심증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때, 사건의 개요는 간단히 이런 것이다.

당시, 박사과정 1년 차였던 강길남은 아주 뛰어난 연구결과들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시기한 최상준을 위해, 박정식은 강길남의 샘플에 남몰래 손을 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길남의 샘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그게 바로 데이터 조작 사건으로 터진 것.

강길남은 자신의 상황을 억울해했지만.

재현성 테스트를 맡은 박정식은 이 합성 과정이 결코 재현성이 없다며 박한식 교수에게 보고를 했고.

결국, 강길남은 누명을 벗을 길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화학천재 강길남의 물질합성 방법이 무척 고난이도 방법인 탓에, 그런 문제점들을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 더 일을 끌고 갈 수도 있었지만, 전 기분이 나빠서 거길 박차고 나왔어요.”

“음.”

“그 덕분에 배운 점들이 제법 많죠. 물론 안 좋은 점들이 더 많긴 해요. 더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으니까…….”

씁쓸하게 말한 뒤, 강길남은 계속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서, 그 투자 이야기를 다시 하죠. 정말 어쩔 수 없는 게…… 세상에는 그렇듯 별의별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벤처 창업도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게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음.”

“툭 까놓고 말하자면, 보통 신약 개발은 그 개발 과정에 시간이 너무 걸려요. 아무리 자기 회사 기술이 좋다고 해도, 뭐 전임상 단계에서 효과가 좋다, 이제 임상 1상에 들어간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뭐 그런 말들이야 다 좋기야 하겠죠. 하지만, 회사 지분을 혼자서 쥐고 있으면, 과연 임상 3상이 끝날 때까지 그 많은 고난들을 혼자서 버텨낼 수가 있을까요?”

“그 말씀은?”

“흐름이란 게 있고, 분위기라는 게 있어요. 아시다시피 주식 가치는 인간의 감성적인 부분이 큰 몫을 해요. 도저히 주가가 10만 원대가 될 수 없는 것들도 시장에 나오게 되면, 10만 원대를 훌쩍 넘기는 것들도 있고……. 회사 재무 상태가 좋아, 아무리 봐도 주가가 최소 몇만 원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도 못한 것들도 많이 있고.”

“음. 그럼 그런 분위기 메이킹 때문이라도, 투자유치가 꼭 필요하다는 겁니까?”

“네. 지분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곳을 같이 바라보면서 같이 떠들어대면, 소문이 더 무성해지고 더 커지게 되죠. 아시다시피, 신약은 성공할 확률이 아주 낮아요. 자기 연구결과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죠. 최악의 경우,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그날로 자기 재산을 몽땅 날리는 건데, 그런 상황에서 몰빵 투자를 할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김태풍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일성그룹에서 자기가 직접 주도했던 신약 개발 역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성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실패했다.

“그런 무모한 일을 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주식투자 때 주로 사용하는 포트폴리오 전략처럼 위험성을 분산하는 게 좋을까요? 뭐, 다른 업종과 달리, 이쪽 신약 개발 쪽은 정말 ‘모’ 아니면 ‘도’ 라서, 정말 큰 고심을 하는 게 필요하죠.”

“음.”

“일례로 제가 앞서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인체라는 것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네?”

“뭐,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건데…… 이미 아시겠지만, 현 단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조차도 인간의 생물학적 반응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실제로 그런 완벽한 연구결과는 아직 없는 상태이고.”

“네. 아직 인체 반응은 좀 미묘하죠.”

“그래서 그 신약이 운 좋게 수십만 명한테 놀라운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른 1%한테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긴다면, 결국 그 신약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도저히 그걸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그 순간, 김태풍은 약간 감탄하는 표정으로 강길남을 쳐다보고 있다.

강길남의 지적 수준은 확실히 높다.

신약 사업의 맹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또 투자방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혜안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김태풍이 만약 미래 지식에 해당되는, 즉 기존 성공 사례들을 활용한다면, 신약 사업의 성공 확률은 거의 100%에 수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김태풍은 단순 카피 작업을 하고 싶지가 않다.

어쩌면 김태풍은 연구자로서의 사명감이 있는 것이고.

또한, 남다른 의지가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아이디어들을 반드시 버무려낼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신약을 꼭 만들고 싶다.

그래서 강길남의 저 지적들이 좀 더 현실감 있게 그의 귀에는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뭐, 어쨌든 시간은 아직 많이 있으니까, 많이 고민해보세요.”

그렇게 긴 대화를 마치고, 김태풍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그리고 그사이 시간은 다시 유유히 흘러갔고.

어느덧 7월 중순이 되었을 때.

갑자기 박한식 교수의 긴급 호출을 김태풍은 받게 되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수정해서 재투고했던 네이처 논문 원고에 대한 최종 심사 결과가 마침내 도착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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